149화
“나도 알고 있네. 매번 시험 때마다 감독관과 유생이 서로 결탁하는 건 일종의 관례니 말일세. 단지 후 형도 알고 있듯이 난 범한 대인의 재능을 존경해 왔네. 시험장에서도 내가 몰래 답안을 숨겨 간 일로 대인의 인품까지 존경하게 되었지. 그래서 범한 대인이 다른 조정 관리들과 좀 달랐으면 하는 것뿐이네.”
“그럴 거야. 하지만 그렇게 완벽한 사람은 없다네.”
성가림이 책망하듯 말했다.
“범한 대인은 시에 일가견이 있긴 하지만 그 또한 조정 관리 신분에 높은 집 자제이지 않은가. 그런 분이 직접 이곳에 오시긴 쉽지 않았을 거야. 자네는 범한 대인이 신선 생활을 하는 선인이 되길 바라는 건가? 설사 선인이라 하더라도 이런 힘든 세상에서는 유능한 관리가 되는 게 훨씬 나은 일 아닌가?”
사천립이 맞장구를 쳤다.
“평소에 말도 없는 자네가 오늘은 맞는 말만 하는구려.”
그는 양만리에게 고개를 돌려 몇 마디 덧붙였다.
“숭배하는 마음으로만 본다면 자네는 날 못 따라올 거야. 난 한 번도 반한재를 손에서 떼본 적이 없어 그 안에 있는 시 백 수를 모두 다 외울 정도라고. 그런데 오늘 범한 대인을 봐도 난 전혀 실망스럽지 않다네. 왜냐고? 시라는 건 마음의 소리거든. 이분은 확실히 우리와 비슷한 소탈한 사람이야. 조정에 있는 썩어 빠진 관리들과는 차원이 다르다고.”
그는 웃으면서 계속 말을 이었다.
“아까 내가 통닭구이를 들고 올 때 골목에 우산을 쓴 사람이 별로 없었거든. 근데 내가 원래 장난치는 걸 좋아하지 않나. 그래서 예쁘장하니 젊은 사람이 우산을 쓰고 가기에 얼른 뛰어 들어갔지. 그렇게 몇 마디 나눠 봤는데 생각이 기발하고 대단하더군. 그리고 알지도 못하는 사람이 함부로 우산 안으로 뛰어 들어오는데 어느 권세 있는 양반이 그냥 내버려 두겠는가. 근데 그분은 그저 웃기만 하고 어색한 기색도 없이 나와 같이 걸어왔다네. 나중에 그분이 범한 대인인지 알고 나서 솔직히 깜짝 놀란 건 사실이네. 범한 대인은 역시 날 실망시키지 않으셨네.”
그런 일이 있었다는 걸 알게 된 나머지 사람들은 조금 전 범한이 사천립과 우산으로 맺어진 인연이라고 한 말이 무슨 소리인지 알게 되었다. 어느새 입가에 웃음이 번졌다.
양만리는 난감한지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그냥…… 환상이 깨지는 느낌이랄까? 범한 대인은 한가하게 시만 쓰고 조정의 일 따위에는 전혀 관심 없고 외면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거든.”
후계상이 동의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런 사람은 안락해 보이긴 하지만 실제로는 나라와 백성에게 무익할 뿐이지. 범한 대인이 정말 그런 사람이라면 오히려 내가 그분을 무시했을 거야.”
“그건 아니지. 그건 아니야.”
양만리가 한숨을 내쉬었다.
후계상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번졌다.
“자네들이 하는 농담은 하나도 안 무섭네. 지식인이 무엇으로 나라에 보답하겠나. 조정에 들어가 관리가 되고 국정의 심오함을 이해하는 게 어렵겠지. 그래, 우리 같은 이방인이 그걸 어찌 이해할 수 있겠나? 그러니 범한 대인이 오늘 여기까지 오신 건 사실 따지고 보면 그분이 우리가 필요해서가 아니라 우리에게 그분이 필요한 거지.”
그는 잠시 뜸을 들인 후 다시 말을 이었다.
“내가 좀 강직한 면이 있지만 그래도 들어갈 때와 빠질 때가 언제인지도 모르는 융통성 없는 사람은 아니라네. 우리에게 기회가 주어졌으니 당연히 잡아야지. 그리고 우리가 조정에서 누군가의 줄에 서야 한다면 범한 대인이 가장 적합한 인물이고말고. 조정에 가게 되면 우리와 의견 충돌이 거의 없을 테니 말이야.”
그들 모두가 한목소리로 말했다.
“어째서?”
나머지 사람들은 후계상의 확고한 태도가 왠지 모르게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또다시 강조하고 나서자 더 의심스러웠다.
후계상은 탁자에서 찻잔을 들고 옆에 범한이 마시다 남기고 간 찻잔을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한참 후에 다시 입을 열었다.
“비 오는 날 골목길을 걷던 조정의 유명 인사가 자신의 우산에서 떨어지는 빗물이 자칫 노점상 냄비에 떨어질까 봐 우산을 바깥쪽으로 기울이고 가느라 자신의 옷을 흠뻑 적셨네. 이리도 세심하고 인정 넘치는 사람은 간신도 악신도 아니라 그야말로 성인군자일 수밖에 없지 않나.”
그의 입가에 미소가 사라질 줄 몰랐다.
“열일곱 살밖에 안 된 청년이 아무리 뛰어나다 하더라도 그런 것까지 치밀하게 숨길 수 없지 않겠나. 그래서 나는 범한 대인이 아주 된 사람이라고 확신하네. 내 결정은 그래서 이리도 간단한 걸세. 난 빗속에서 이미 결정을 했다네.”
방 안은 침묵으로 휩싸였다. 그 후로 한참 있다가 탄식 소리가 들려왔다.
* * *
둘째 날, 시험장 왼쪽 붉은 담벼락에 드디어 유생들이 손꼽아 기다리던 고지가 붙었다. 경국 회시의 과정은 그리 복잡한 편은 아니었다. 향시를 본 후 회시를 보고, 회시를 본 후 삼갑에 선발되면 등수가 정해지지 않은 상태에서 획수 순서대로 황방에 이름이 올랐다.
삼갑에 선발된 인원은 해마다 달랐다. 경국 3년에 은과(恩科, 나라에 경사가 있을 때 실시하던 과거)가 열린 적이 있어서 그 후로 2년간 선발된 인원은 아주 적은 수에 불과했다. 올해 황방에 오른 인원수는 총 108명에 불과했다. 그래서 태학 출신 유생이든 각 지방에서 올라온 유생이든 모두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시험장 서쪽으로 다리가 하나 있었다. 누구든 황방을 보려면 반드시 이 다리를 건너야 했다. 하지만 이미 자신의 이름을 확인하려 몰려든 사람들로 둘러싸여 도저히 건너갈 엄두를 내지 못할 정도였다.
다리 저편으로는 범한의 언지로 한결 마음이 가벼워진 후계상과 양만리가 천천히 걸어오고 있었다. 다리 위에는 어제 내린 비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었고 벽돌 사이사이에 낀 이끼도 유난히 촉촉해 보였다. 네 사람이 함께 걸어오다 갑자기 성가림이 미끄러지는 바람에 한바탕 웃음이 터졌다. 성가림도 피식 웃어넘겼다. 그와 사천립도 양만리와 후계상처럼 천천히 걷고 있었지만 마음속에서 피어오르는 긴장감은 숨길 수 없었다.
붉은 담벼락 앞에 도착한 네 사람은 겨우 사람들 틈을 비집고 들어가 각자의 이름을 찾기 시작했다. 얼마다 보고 있었을까, 사천립의 환호성이 울려 퍼졌다.
“후 형, 후 형! 합격이요, 합격이야!”
나머지 세 사람이 사천립의 소리를 듣고 서둘러 그의 곁으로 갔다. 역시나 위에서 세 번째 줄에 후계상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이를 보고 흥분을 감추지 못한 양만리가 후계상의 어깨를 두드렸다.
후계상도 살짝 미소를 지으며 내심 으스대고 싶었지만 이 일이 얼마나 큰일인가. 1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얼마나 힘들게 견뎌 왔는지 은근히 기대하던 부모님과 주변 유생들의 시선이 바람에 흩날리듯 스쳐 지나갔다.
황방에 올라온 ‘후계상’ 이름 세 글자가 햇빛에 찬란하게 빛나는 것처럼 귀하고 밝은 미래가 앞으로 펼쳐질 일만 남았다.
* * *
네 사람은 흩어지지 않고 이번에는 오른쪽부터 훑어 나가기 시작했다. 또 얼마 지나지 않아 양만리의 이름을 발견했다. 그제야 비로소 어제 범한이 한 얘기가 믿어졌다. 양만리는 자신의 이름을 보고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이내 눈시울이 붉어지더니 말까지 더듬었다.
“진짜 붙었네. 정말 합격이야!”
그는 갑자기 괴성을 지르더니 인파를 비집고 나가더니 다리 쪽을 향해 달렸다. 그러곤 다리 밑으로 흐르는 물에 대고 큰 소리를 질러 댔다.
남은 세 사람은 양만리가 왜 흥분했는지 알고 있는 듯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양만리는 여덟 살에 어머니를 여의고 어린 시절 천주에서 혼자 자랐다. 비록 주변으로부터 무시를 당하긴 했지만 아버지께서 배고픔과 추위를 참아 내며 책을 사주신 덕분에 힘겹게 향시에 합격해서 결국 이곳까지 오게 된 것이었다.
하지만 경도에 온 그는 재능도 재능이지만 토론할 때 자신의 논리가 다른 사람보다 훨씬 구체적이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아무것도 없는 시골에서, 게다가 집에서 배운 게 다인 학문으로 책론을 써내면 항상 딱딱하고 흥미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수준에 그쳤기에 경도 출신의 유생들을 따라잡을 수 없었다.
그렇기에 막역한 사이인 후계상과 사천립조차도 그가 합격할 거란 생각을 하지 못했고 양만리 자신도 아무런 기대도 없었다. 그래서 마지막 남은 은전 한 냥으로 유생들 사이에서 가장 유행하는 모의 답안지를 사서 사천립의 글에 끼워 들어오는 도박을 했던 것이다.
그런데 시험장에 들어가기도 전에 거중랑 범한에게 들킬 줄 누가 알았을까. 당시 양만리는 10년 동안 한 고생이 수포로 되는 줄 알고 상심하여 죽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런데 오히려 범한 대인이 자신에게 두 번째 기회를 줄 거라고는 정말 상상도 못 했다.
시험을 마치고 나오면서도 그는 감히 옷 안에 손을 넣지 못했다. 당연히 책론에도 그럴듯한 말을 풀어내지 못했기에 합격은커녕 모든 걸 잊고자 계속해서 술을 마셨던 것이다. 그리고 어쩌다 알게 된 곽 상서가 불미스러운 일로 감옥에 갇혔다는 이야기에 환한 미소를 지었다. 그때까지도 범한 대인이 친히 객잔에 찾아와서 삼갑에 들 거라는 얘기를 해줄 줄 감히 상상이나 했을까.
슬픔 뒤에 오는 기쁨과, 절망 뒤에 따르는 희망의 두 감정의 충격은 오후 내내 가시지 않았다. 양만리는 다리를 건넌 후 붉은 담벼락 앞에 서서 어제 범한 대인의 방문이 꿈은 아닌지 계속해서 되새기고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합격은 불가능했는데 그런데 정말 합격이라니.
양만리는 출렁이는 강물에 비친 일그러진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며 조금씩 안정을 되찾았다. 며칠 만에 자신의 인생이 이렇게 바뀔 수 있는지 생각해 보니 이 모든 것이 다 젊은 범한 대인 덕분이었다.
양만리의 돌발 행동에 관심을 갖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심지어 강 건너편을 지나던 백성들조차도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매해 회시가 끝나고 황방이 붙을 때마다 볼 수 있는 광경이기에 무엇 하나 새로울 게 없었다. 시험장 붉은 담벼락 근처에는 항상 이성을 잃어버린 사람들이 많이 나타나곤 했다.
이때 다리 너머로 황방을 바라보던 유생들의 얼굴에 이상한 기운이 감돌았다. 몇몇은 극도로 흥분한 상태로 여기저리 뛰어다니고 몇몇은 실의에 빠져 축 처져 있었다. 합격한 이들은 하늘을 향해 환호했고 떨어진 이들은 고개를 푹 숙인 모습이 정말 각양각색이었다.
이 광경을 한마디로 표현하기가 어려웠다. 무엇보다 낙방한 이들은 그야말로 처참했다. 담벼락 옆에 있는 커다란 홰나무를 끌어안고 얼굴을 비벼 대느라 피가 날 정도였다. 옆사람이 아무리 잡아당겨도 손을 떼지 않았다.
경국은 과거 시험을 통해 벼슬길에 오를 수 있었다. 귀족가 자제가 아닌 이상 은과를 볼 수 없었기에 일반 백성들에게 회시는 그야말로 자신의 인생을 변화시킬 유일한 방법이었다. 그렇기에 이런 압박과 동기는 평소 유순하고 침착한 유생들을 광기 어린 미치광이로 만들기 충분했다. 강가에서 머리를 조아리며 하늘에다 감사의 절을 올리는 유생에 비하면 양만리는 두어 번 소리를 지른 게 다이니 평범하기 그지없는 반응이었다.
물론 후계상과 다른 사람들의 침착함이 더욱 돋보이긴 했다.
양만리가 이성을 되찾고 여전히 기쁨이 가시지 않은 채 붉은 담벼락으로 돌아왔을 때, 나머지 세 사람은 이미 황방을 자세히 살펴본 뒤였다. 예상과 달리 사천립의 이름을 찾아볼 수 없어 살짝 실망한 상태였다. 한편 맨 마지막 줄에 있는 성가림의 이름을 발견하고 모두가 기뻐했다.
성가림은 옆에서 실의에 차 있는 사천립을 위해 애써 흥분된 감정을 숨기려 노력했지만 어떻게 해도 위로가 안 될 것이란 걸 잘 알고 있었다.
“올해는 그냥 잊어버리고 내년을 기약해 보세.”
상투적인 위로의 말이었지만 이런 상황에서 이 말보다 더 적합한 말을 찾기는 힘들었다. 사천립을 씁쓸해하며 주변에 낙방한 유생들을 쓱 둘러보고는 마음을 다잡고 웃으면서 말했다.
“올해 우리 네 명 중 세 명이 합격했으니 이 또한 기쁜 일이 아니오. 그래도 작년 회시에 비하면 올해는 나름 공평했다고 할 수 있으니 나도 내년에 다시 보면 되지 않겠소.”
옆에서 고개를 끄덕이던 후계상이 사천립의 어깨를 도닥여 줬다. 그는 네 사람 중 사천립이 가장 털털한 편이긴 하지만 이번 일은 충격이 작지 않을 거란 걸 알고 있었기에 얼른 화제를 돌렸다.
“범한 대인이 어찌하실지 모르겠군. 이렇게 많은 사람이 붙을 줄이야. 황방도 작년이랑은 많이 다르고 진짜 재능과 학문적 지식을 가진 유생들은 늘어났고 어리석고 집안만 좋은 사람들은 확실히 줄어들었어.”
“이번에 감찰원에서 시험장 부정행위를 철저하게 감독한 덕분이지.”
그들 중 몇 명은 한적한 곳을 찾아 이미 강 건너편으로 넘어간 뒤였다. 그들은 혹시라도 누가 들어 범한에게 해가 될까 봐 목소리를 최대한 낮췄다.
역시 후계상이 먼저 입을 열었다.
“이번에 걸린 관리들은 적은 수는 아니지만 강남 출신 관리를 제외하고는 나머지 사람들은 노출되지 않았네. 이걸 보면 감찰원이 움직이기 전에 범한 대인이 먼저 손을 쓴 거라고 볼 수 있지.”
그는 고개를 흔들더니 깊은 탄식을 흘렸다. 역시 젊은 범한 대인이 등에 업고 있는 가문의 권력 정도 되니 조정에서 이런 일을 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이번 황방을 보니 그래도 공평하게 정리된 듯하여 자신이 범한을 제대로 봤다는 생각이 들었다.
많은 사람이 경국의 정세에 대한 잡담을 늘어놓았다. 며칠간 관직을 잃은 관리들이 적지 않아 모두가 불안에 떨고 있는데 유일하게 범한은 자신감에 차 있었다. 한참 침묵을 지키던 사천립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
“이번 부정행위와 관련된 얘기가 드러나면 범한 대인도 쉽게 벗어날 순 없을 거야.”
나머지 세 사람이 깜짝 놀란 나머지 중얼거렸다.
“만약 정말 그렇게 된다면 범한 대인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대단한 사람인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