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8화
이 술자리의 대화 주제는 이미 관료 사회에서 과거 시험 장소로 옮겨 갔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지난해 별명으로 세상을 놀라게 했던 범한 대인의 이야기가 나올 수밖에 없었다.
범한은 일부러 술잔을 들어 입을 가볍게 대며 혹시라도 이 사람이 자신에 대해 나쁜 얘기라도 하면 바로 손에 든 술을 뿌려서 우울한 기운을 좀 달랠 생각이었다. 그런데 사천립이 벌떡 일어나더니 예쁘장한 얼굴로 느글거리는 말을 하며 구슬프게 눈물을 흘렸다.
“내가 몇 개월 동안 《반한재 시집》을 몇 개월째 읽다 보니 앞으로 다른 사람의 시집을 어찌 볼 수 있겠는가? 그리고 나조차도 어찌 글을 써야 할지 모르겠다네. 비록 그중에 다소 이상한 시도 몇 편 있었지만 범한 대인 앞에서 소인이 무슨 말을 할 수 있겠소? 슬프구나. 아주 슬퍼.”
범한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하지만 후계상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시는 우리가 말하는 글쓰기와 다른 영역이지 그게 나라를 다스리는 데 무슨 도움이 되겠어?”
말을 마치고는 한참 동안 냉대하던 범한에게 도움을 청했다.
“범 공자의 생각은 어떠실지 모르겠습니다만.”
그는 범한의 두 눈을 바라보더니 갑자기 외마디 소리를 질렀다.
“바로 당신이었군요!”
‘설마 날 알아본 건 아니겠지?’
범한은 또 한 번 깜짝 놀랐다. 시험장 불빛이 그리 밝지 않았기 때문에 양만리처럼 별생각 없는 사람이 아니고서는 시험관을 똑바로 쳐다볼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후계상이 바로 말을 이었다.
“예전에 술을 사러 갔다가 범 공자와 살짝 스쳐 지나간 적이 있었는데…….”
그 순간 범한도 양손에 술병을 들고 지나가던 유생이 떠올랐다.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후계상은 이 사소한 일로 범한이 더욱 친근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바로 범한에게 상냥하게 말을 걸고 범한에게 가지고 있던 부정적인 생각을 멈췄다. 옆에 있던 사천립조차 종잡을 수가 없었다.
“범 공자와 그 범건 대인이 같은 집안 출신이시니, 반한재에 대한 견해가 어떠신지 궁금하네요.”
“그저 선인들이 한 말을 모아 놓은 것뿐인걸요.”
범한이 아무리 뻔뻔하다고 해도 다른 사람 앞에서 자신을 칭찬하는 것은 낯 뜨거운 일이었다. 그런데 사천립이 이 말에 벌컥 화를 내더니 젓가락을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정말 뜻밖이었다.
“범 공자도 그 사람들과 같은 거요? 소인은 본래 장묵한의 인품을 높이 샀는데 그런 어리석은 영감탱이일 줄이야 생각도 못 했소. 범 공자가 시를 적게 읽었다면 이런 터무니없고 우스운 말은 할 필요가 없겠군요.”
범한은 얼떨떨했다. 그제야 자신이 경국 내 과거 시험을 준비하는 유생들 사이에게 이미 확고하게 자리를 잡았고 나름 영향력을 끼치고 있다는 생각에 조금은 수줍어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가만히 있었다.
그가 입을 다물고 있자 사천립이 술기운에 힘입어 한마디 던졌다.
“아니, 성이 같은데 왜 이렇게 차이가 큰 거야?”
* * *
바로 그때, 드디어 양만리가 성가림의 도움으로 깨어났다. 눈을 뜨자마자 예쁘장한 범한의 얼굴이 들어오자 소스라치게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범한에게 예를 갖췄다.
“범한 대…… 대인, 어떻게 여기에? 언제 오셨습니까?”
“범한 대인? 누가 범한 대인이야?”
술자리에 있던 나머지 세 사람은 도무지 영문을 알 수 없었다. 더구나 양만리가 이토록 긴장하는 이유도 알 수 없었다.
양만리가 쓴웃음을 지어 보였다.
“이분이 전에 내가 얘기했던 그분이야. 시험장 입구에서 유생들을 검사하던 범한 대인…… 사형, 반한재를 엄청 좋아하시잖아요? 어서 인사드리지 않고 뭐 하고 있어요!”
사천립은 그제야 방금 자신이 비판했던 그 시집의 지은이가 바로 범한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는 놀란 나머지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 범한에게 절을 해야 하나 말아야 하는 우물쭈물하는 모습이 어색하기 짝이 없었다. 차분함을 유지하고 있던 후계상과 성가림 두 사람도 입이 떡 벌어져 범한이 무슨 말을 할지 멍하니 보고만 있었다.
범한은 이미 유생들 사이에서 극찬받는 인물이었다. 재상의 딸과 결혼한 후에 17세의 나이로 태학 5품 봉정에 올랐기에 여러모로 학문을 하는 사람들에게 선망의 대상이었다. 그의 시집인 반한재도 이미 널리 유행하여 구름 위를 떠도는 붉은 빛의 이미지는 이미 범한의 이름 두 자와 하나가 되었다.
범한은 멋쩍은지 웃으면서 말했다.
“내가 죽은 사람도 아니고 살아 있는 사람을 보고 왜 그렇게 놀라요?”
후계상이 얼른 정신을 차리고 범한에게 인사를 올렸다.
“공자가 범한 대인이셨군요. 앞서 결례를 범했습니다.”
사천립도 두 눈이 번쩍 뜨여 몸을 90도로 꺾어 인사를 올렸다.
“기대도 안 했는데 오늘 양 형 덕분에 이렇게 범한 대인을 뵙니다. 정말 영광입니다.”
범한이 고개를 저으며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이미 회시도 끝난 데다가 나 역시 하루 종일 관아에 죽치고 있고 싶지 않아서 그냥 나와 봤는데, 여기 양만리가 있다기에 한번 보러 온 거요. 이리도 운이 좋을지 몰랐는데, 술자리에서 벌어진 고론을 듣고 있으니 내 헛걸음을 한 게 아니라 풍성한 수확을 거둬 가네요.”
자리에 있던 네 사람은 부끄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당대 최고의 재자 앞에서 자신들이 끊임없이 탁상공론을 늘어놓은 걸 돌이켜 보니 참으로 황당하기도 했다. 항상 자신감에 차 있던 후계상도 쓴웃음을 지었다.
“다 만리 때문이 아닌가, 저렇게 계속 취해 있었으니 말일세.”
그때 말이 조금 어눌한 성가림이 마침내 더듬더듬 자기소개를 했다.
“범한 대인, 소생 성은 성, 이름은 가림이라고 합니다.”
당대 최고의 유명인과 관계를 맺을 수 있다는 생각에 산동로의 재자 성가림은 긴장이 됐는지 말을 더듬었다.
사람들은 얼떨떨해하다가 바로 그의 말에 틀린 부분을 알아차리고 박장대소했다. 얼굴이 빨개진 성가림 역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지만 그나마 웃음 덕분에 사람들의 놀란 마음이 진정을 되찾았다.
양만리는 범한이 자신을 보러 왔다는 말에 당황스럽긴 했지만 과분한 관심에 몸 둘 바를 몰랐다.
“혹시라도 무슨 분부를 내리실 게 있으신지요?”
다행히도 여기 있는 사람 모두 분별력도 있고 자신이 소중하다고 여기는 것을 내려놓을 수 없는, 어떻게 보면 이기적인 면도 있었기에 허투루 떠들어 대지 않을 것 같았다. 그리고 객잔에 있는 유생들은 여전히 술을 즐기고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하루가 멀다 하고 범한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지만 실제로 범한이 그 객잔 안에 와 있다는 사실은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
원래 범한은 양만리를 보러 온 것뿐이라 이런 상황을 마주하게 될 줄은 생각도 못 했다. 당연히 깊은 얘기는 나누지 못할 것 같아서 그냥 웃으면서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나와 양 형도 ‘옷깃’으로 생긴 인연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사천립을 향해 말했다.
“우리는 우산으로 맺어진 인연이고요.”
그리고 또다시 후계상을 향해 말했다.
“후 형과도 몸이 스친 인연이네요. 그래서 여러분께 드릴 말씀이 하나 있습니다.”
범한이 운을 띄우자 이번 회시의 거중랑이었던 그의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올지 몰랐기에 그가 언급하지 않은 성가림도 잔뜩 긴장해서 범한을 바라봤다. 후계상도 침착하게 범한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아주 중요한 이야기임이 틀림없었다.
범한은 잠시 뜸을 들이다가 적절한 단어를 고민한 뒤 입을 열었다.
“3월 초하루에 전시가 있을 터이니 여기 몇 분들은 준비해 두시죠.”
생각지도 못한 범한의 말에 모두 놀라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이 말은 그냥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얘기하는 것처럼 보일지 모르겠지만 그 안에 숨은 속뜻은 놀랍기 그지없었다. 조정의 유명인 범한 대인은 재상과 사남 백작이 총애하는 인물이다. 만약에 삼갑 명단에 오른 사람을 미리 알 수 있다고 한다면 그건 바로 범한뿐이었다. 그런 사람이 전시를 준비하라고 했으니 그 말인즉슨 모두 합격이라는 말이었다.
범한은 자기 입술에 손가락을 갖다 댄 채 조용히 하라는 신호를 보냈다.
“확정은 아닐 수도 있다네. 그냥 준비는 해두시게.”
후계상은 약간 실망한 듯 말했다.
“곽 상서가 투옥되었으니 명단에도 변동이 생길 수 있는 것 아니오?”
범한이 조용히 대답했다.
“성 형과 사 형은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후와 양만리 자네는 확실하네.”
후계상과 양만리는 크게 기뻐하며 벌떡 일어나 범한에게 예를 표했다. 앞으로 이 젊은 스승이 자신들을 이끌어 줄 사람이란 것을 알았다. 평탄한 앞날을 꿈꾸지 않는다면 몰라도 밝은 미래를 위해서라도 필요한 일이었다.
성가림과 사천립은 실망스럽긴 했지만 범한 대인이 잘 기억하지 못할 수도 있었기에 내일이면 좋은 결과가 나올 거라는 생각으로 스스로를 위로했다.
객잔 안은 이미 이야기를 나눌 만한 장소가 아니었기에 양만리는 범한을 자신의 방으로 모시고 공손하게 차를 대접했다.
“범한 대인, 아무리 생각해도 소인은 가진 것도 없고 집안도 변변치 않은데, 어떻게 대인의 눈에 들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왜 대인께서 위험을 무릅쓰고 여기까지 오셔서 전시에 관한 소식을 전해 주셨는지 헤아릴 길이 없습니다.”
가진 것 없고 집안도 변변치 않다는 말은 가난한 유생들의 현실을 여실히 보여 주는 말이었다. 범한이 웃으면서 고개를 가로저었다.
“모두가 알다시피 요즘 과거 시험장에서 생긴 일 때문에 아직 삼갑의 명단이 나오진 않았지만 어느 정도 정해지긴 했소. 내가 오늘 여기 온 이유는 자네가 자포자기해서 책을 멀리하고 학문에 힘쓰지 않아 전시에서 창피를 당하지 않을까 걱정해서요. 그렇게 되면 내 체면도 말이 아니게 되거든. 그날 시험장 밖에서 내가 자네를 시험장에 들여보내는 걸 본 사람이 많거든. 솔직히 말하면 내가 자네를 찾아온 건 위험한 일이 맞지만 그래도 상관없네.”
며칠간 시험 감독관 모두가 불안함을 떨치지 못하는 상황에서 범한이 오히려 상관없다고 하니 유생들은 하나같이 의아해했다.
상황이 이렇게까지 되자, 함께 있던 이 똑똑한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범한의 뜻을 헤아리고 서로 눈빛을 주고받은 후 후계상은 먼저 물러갔다.
“감사드립니다.”
양만리가 다시 인사를 하고 사천립과 성가림 두 사람도 계속 앉아 있지 않고 범한에게 인사를 올렸다.
범한은 자신보다 나이 많은 사람들이 자시에게 예를 갖추는 모습을 보니 왠지 모르게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난 재상도 아니고 곽 상서도 아니오. 돈도 있죠. 앞으로도 더 많아질 테고. 그러니 안심하시오. 나에게는 여러분의 재능과 인성만 중요하니 말이요. 전시 이후에 조정에 들어가게 되면 충심으로 정사를 행하고 경국의 이익만 생각해 주면 되오. 나는 내가 사람을 잘못 보지 않았다고 확신합니다.”
그의 말은 부드러웠지만 그 이면에는 깊은 뜻이 들어 있었다.
범한은 객잔에서 나와 마차에 올랐다. 그리고 미간을 잔뜩 찡그린 채 등자경을 바라봤다.
“난 왜 아직도 이런 일이 자연스럽게 안 되는 걸까?”
둘 사이에서 감초 역할을 하는 왕계년이 나타나 마차에 올랐다.
“대인은 뼛속까지 지식인이지 대인은 아니니까요.”
범한이 동복 객잔을 떠난 후 방 안에 있던 네 사람은 서로 빤히 얼굴만 쳐다보고 있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늘에서 생각지도 못한 커다란 떡이 떨어질 줄이야.
“어떻게 하면 좋겠나?”
양만리가 침대에 멍하니 앉아 있었다. 성가림과 사천립이 그에게 축하 인사를 전했다.
“앞으로 양 형은 재상과 호부 상서를 등에 업은 거나 마찬가지니 벼슬길이 아주 순조롭겠어요.”
양만리의 천진난만한 얼굴에 순간 수심이 드리워졌다.
“나는 지금까지 범한 대인의 재학을 몹시 좋아했는데 이번 회시도 대인께서 융통성을 발휘해 준 덕분이네. 나중에 시험지를 채점할 때도 적지 않은 힘을 쓰셨겠지. 다만 나는 범한 대인이 오늘 오시지 않았다면 더 좋았을 거라고 생각하네.”
성가림과 사천립 두 사람은 말문이 막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하지만 양만리가 범한에게 부담스러운 은혜를 받았다고 생각한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네 사람 중 대장 격인 후계상이 미소를 지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범한 대인이 설사 은혜로 인심을 살 생각이었다면 친히 여길 오지도 않았겠지. 양만리, 자네는 쓸데없는 걱정이 너무 많아. 난 이미 결정했네. 오늘 이후로 조정에 들어가면 반드시 범한 대인과 함께 열심히 일할 걸세.”
사천립은 지금까지 고상한 척 허풍을 떨던 후계상이 갑자기 왜 저렇게 변한 건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양만리가 고개를 가로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