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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여년-146화 (146/1,108)

146화

“곽 상서도 한낱 대신에 불과한데 어찌 감히 이 나라의 대전을 함부로 주무를 수 있겠어. 그 위에 더 큰 세력을 가진 사람이 있는 게 분명해. 그 사람이 지명한 학생이 더 많을지도 몰라. 겨우 소금 장수 아들 네 명을 솎아 낸 게 뭐 그리 큰 도움이 되겠어?”

두 사람은 후계상의 말이 그럴듯하다는 생각에 낯빛이 또다시 어두워졌다. 그리고 한참 후 갑자기 양만리가 탁자를 치더니 웃으면서 말했다.

“어찌 됐든 속은 시원하잖아. 작년에 경도를 떠들썩하게 한 사건은 장 공주를 신양으로 돌려보낸 일인데, 올해는 그 무시무시한 명단이군그래. 조정의 상서를 내치다니 정말 대단해.”

성가림의 얼굴에 근심이 드리워졌다.

“내일 삼갑 결과가 나오면 다시 얘기하세.”

후계상과 양만리는 그의 성격을 잘 알고 있었기에 역시나 이번 회시에도 기대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미소만 지어 보이고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얼른 가서 사천립을 깨워서 이 소식을 전해 줘야겠어!”

양만리가 웃으면서 말했다.

“천립한테 먹을 것 좀 사 오라고 전해 주게.”

* * *

“훌륭해. 아주 훌륭해.”

범한은 기분이 좋은지 왕계년이 가져온 종이를 톡톡 튕겨 냈다. 그의 옆에 앉아 있던 완아는 어쩐지 걱정스러웠다.

“회시의 부정행위를 폭로한 사람이 당신이라는 걸 황태자가 아는데 걱정되지도 않아요?”

그렇지 않아도 오늘 아버지께 심한 꾸중을 들은 범한은 외출 금지까지 당해 집 안에만 머물러야 했다. 범한 자신도 이번 일이 황당하긴 했다. 만약 사전에 감찰원으로부터 소식을 들은 것이 아니고 황제가 올해 회시를 본보기로 삼을 것을 알았다면 범한 역시도 감히 ‘공범 증인’이 되어 온 조정 대신들과 적이 되지 않았을 것이다.

사실 그 명단이 기밀이라고 할 수도 없는 것이 범한의 손에도 몇 장이 있었고 회시 시험관들도 가지고 있었다. 그러니 대체 누가 결백할 수 있었을까. 정정당당해야 할 시험장에 부정행위가 난무하니 이것만 봐도 경국의 관료 사회가 이미 얼마나 썩었는지 안 봐도 뻔한 일이었다. 그렇기에 이번 감찰원 조사는 모두에게 뜻밖의 일일 수밖에 없는 반면,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일이었기에 가장 먼저 범한을 의심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아내의 말에 범한은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당신의 오라버니인 황태자의 배짱이 대단한 데 비해 수단이 좀 허술했죠. 조정 대신들 역시 간덩이가 부었다니까요. 이번에 있었던 부정행위가 세상 사람들이 다 알 정도로 큰일인지라 내가 불지 않았더라도 황제께서 조사하셨을 일이에요. 설마 숨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으려고요?”

완아는 이불에서 나와 가만히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여보, 앞으로 이렇게 위험한 일은 하지 마세요. 세상에 바람을 이길 벽은 없어요. 혹시라도 사람들이 이번 일에 당신이 관련된 걸 알면 어쩌려고 그래요?”

“어쩐긴요, 어쩔 수 없죠.”

범한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장난을 치며 웃었다.

“이번 일의 관건은 바로 황실이에요. 과거 시험이란 게 뭐예요? 황제가 자신을 위해 일할 인재를 뽑는 일종의 수단이잖아요. 전대의 한 황제는 과거 시험장에 들어와서 천하의 영웅들이 자기 손에 들어왔다며 크게 웃었다고 하잖아요. 황제께서는 조정 관리들이 과거의 정원과 재산을 맞바꾸는 것을 용인하시지만 정원으로 부당한 이득을 취하는 것은 용인하지 않으시죠. 게다가 황태자와 황자가 모두 이 일에 연루되어 있으니 황제께서도 자문해 봐야 할 거예요. 두 아들이 대체 무슨 꿍꿍이인지 말이에요.”

완아는 잘 이해하지 못했지만 궁금하긴 했다.

“당연히 앞으로 조정의 권력을 잡으려고 하는 거 아니겠어요?”

범한이 웃으면서 말을 이었다.

“그럼 황제께서 물어보셔야죠. 그 권력을 잡아서 무얼 하려고 하는지요. 황자는 군대를 통솔하고 있는데 조정의 권력을 잡아서 뭘 어쩌려는지 말이죠.”

완아가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그럼 황태자는요? 뭐, 황태자이니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서라고 하면 어느 정도 말은 되죠. 그리고 점차 조정을 지배하려고 들겠죠. 예전에 동궁에서 태부에게 가르침을 받은 적이 있는데, 왕은 가만히 있는다고 되는 것이 아니니 동궁에서는 앞으로 쓸 관리를 준비하여야 한다고 했어요. 그게 진정 적자의 도리라고 말이에요.”

범한이 고개를 저으며 살짝 비웃는 말투로 대답했다.

“태부의 말씀도, 도리도 어느 정도 일리는 있어요. 하지만 문제는 지금 황제께서 건재하신데 동궁에서 나서 인재를 발탁하고 등용한다면 황제께서는 당연히 의문을 가지실 수밖에 없죠. 황태자가 이렇게까지 서두르는 이유가 뭔지 궁금하지 않겠어요?”

이번 사건의 자초지종을 알게 된 완아는 범한의 말을 계속 듣고 있었다.

“그래서 황제께서 관리들의 부정행위는 그냥 넘겨도 자신의 아들은 결코 그냥 넘어갈 수 없는 거예요. 한번 의심하기 시작하면 끊임없이 생겨나는 문제들을 제어할 방법이 없기 때문에 이참에 자연스럽게 뿌리를 뽑으시려는 거죠.”

임완아는 범한의 품에 머리를 기댔다.

“사실 말로 하면 이렇게 간단한 일인데, 나도 알려면 알 수 있는 일은 왜 황태자 오라버니는 모르시는 걸까요?”

“모르는 게 아니라 황태자 스스로도 이제 불안해졌다는 얘기겠죠.”

범한은 올해 초 황제께서 세 황자들에게 하사품을 내린 일이 생각났다. 분명 그 안에는 깊은 뜻이 담겨 있었을 텐데 범한도 도통 깨닫지 못했다. 생각해 보니 황태자든 황자든 하나같이 불안함을 느꼈기 때문에 이번 회시에서 그런 일을 벌인 게 아니었을까.

임완아가 한숨을 내쉬었다.

“나도 당신이 왕의 칭호를 하사받아 영토를 받는 건 바라지도 않아요. 그저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는 후작 어르신으로만 살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이런 일은 하나같이 다 성가신 일이잖아요.”

“부유한 한량이라, 나도 바라는 바요.”

범한이 웃으면서 대답했다. 그러다 갑자기 《홍루몽》의 가보옥의 별명이 떠올랐다.

“눈에 거슬리는 일만 있어도 늘 미움을 사기 바쁘니, 내가 아버님의 이름으로 산다고 해도 아무도 좋아하지 않을 거요.”

그가 아버지까지 들먹이자 임완아는 피식 웃음을 터뜨리더니 갑자기 질문을 던졌다.

“아버님 쪽은 아무 문제가 없잖아요.”

“걱정 말아요. 아버님은 그날 밤 바로 재상 댁으로 가셨어요.”

범한은 맨 처음 시작했던 말을 되짚으며 감탄했다.

“그래서 아까 내가 감찰원이 이 일을 아주 잘 처리했다고 감탄한 거예요. 이번에 걸린 관리만 해도 곽 상서 외에도 동궁과 추밀원 사람들도 있잖아요. 장인 쪽에도 후시랑이 잘려 나가긴 했지만 결과적으로 봤을 땐 근본적인 손해는 없었어요. 이 정도는 수십 년 동안 관료 사회에 틀어박혀 있던 노련한 사람이 아니라면 결코 이렇게 깔끔하게 처리할 수 없는 일이지요.”

“그게 그렇게 어려워요?”

범한이 그녀의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대답했다.

“아주 어렵죠. 왜, 죄는 미워해도 사람을 미워하면 안 된다고 하잖아요. 그러면 황제께서 처리하기 힘들어지거든요.”

말을 마치자 그의 얼굴에 근심이 서렸다.

“왜 그래요?”

신중하고 조심스러운 완아가 범한의 어깨를 꼭 끌어안았다. 범한은 고개를 저어 보였지만 내심 걱정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이번에 부정행위를 파헤친 일을 천하가 알게 되어서 도저히 숨길 수 없으니, 만발의 준비를 해둬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감찰원이 이렇게까지 날 보호하고 있을 줄 생각도 못 했어요. 당신 말이 맞긴 하지만 이 세상에는 시멘트로 만든 벽은 없으니 언젠가는 동궁에서 나와 감찰원의 관계를 알게 되겠죠. 게다가 이 나라에는 제정신이 아닌 사람들이 많으니까요. 특히 그 절름발이가 걱정스럽긴 하네요.”

“진평평이요?”

임완아는 범한이 누구 얘기를 하는지 단번에 알아차렸다. 하지만 그녀는 범한이 회시의 부정행위를 밝힌 것 외에도 무시무시한 기관인 감찰원과 무슨 관계가 있는지 알 수 없어서 의심이 점점 커지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방금 그가 말한 ‘시멘트’라는 말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내가 걱정인 건 처음부터 진평평이 이 일을 숨기려 했으면 어쩌나 하는 거예요.”

“그 사람이라면 가능하죠.”

모든 여인은 자신의 남편이 정의감 넘치는 영웅이길 바란다. 임완아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녀는 이번 일로 범한이 걱정스럽긴 했지만 내심 만족과 자부심이 느껴졌다. 그때 진평평이 범한을 세상 사람들 앞에 내세우려 한다는 걸 듣고 순간적으로 위험을 감지하고는 그녀 또한 가만히 있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내일 당장 입궁해서 황태후마마를 만나 봐야겠어요.”

범한이 박장대소하며 그녀를 위로했다.

“진평평이 나를 핑계 삼는다고 해도 나쁜 의도는 아닐 거요.”

임완아는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범한은 이번이 좋은 기회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날 밤 연회 후로 경국 백성들에게 자신의 명성을 널리 알리고 든든하게 다지기 위해서는 이번 부정행위를 폭로한 것이야말로 기막힌 신의 한 수였다.

비개 스승님이 일찍이 말한 대로 어머니와 친밀한 사이였던 진평평. 그가 범한이 황실 금고의 관리를 맡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고 기필코 감사원을 관리하게 한 이상, 흔히들 알고 있는 진평평이라면 춘시의 부정행위를 빌미로 본인이 사람들 앞에 나서는 것도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문제는 득과 실의 비율이 얼마나 되느냐. 이에 대해 범한도 여전히 확신할 수는 없었다.

침대에서 일어나 창밖에 내리는 비를 쳐다보고 있자니 이미 정오가 다 된 시간이었다. 반나절이 지나도록 아내와 같이 뒹굴거리고 있다 보니 즐겁긴 했지만 살짝 묻어나는 피곤함은 숨길 수 없었다. 범한이 부정행위를 폭로한 이유는 정말 재능 있는 학생들이 불쌍하기도 했고, 또 황자들이 자신을 밧줄처럼 이리저리 당겨 대는 것도 참을 수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이유는 마지막으로 진평평을 시험해 보고 싶었다.

이제 곧 북제로 떠나게 되니 그 전에 무시무시한 권력자인 감찰원의 늙은이가 대체 어떤 태도로 나올지 명확히 할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진평평 뒤에 숨어 있는 황제의 반응도 알아보고 싶었다.

태도는 관계뿐 아니라 모든 것을 결정하며, 심지어 역사를 투영하고 한 사람의 인생을 결정짓는다. 범한은 눈을 가늘게 뜬 채 어머니의 숨결이 느껴지는 유리창 밖 먹구름을 바라보았다. 경국의 모든 것이 숨 가쁘게 돌아가는 걸 보니 자신도 진실에 다다른 것 같았다.

* * *

백작가 밖 축축한 거리에 아무런 표식 없는 마차 한 대가 서 있었다. 그때 갑자기 사람 그림자가 나뭇잎처럼 날리다가 땅에 떨어지려는 순간, 순식간에 사람들이 마차에 올라탔다.

“가자.”

범한이 자리에 막 앉자마자 출발 신호를 보냈다. 마부 자리에 앉은 등자경이 고개를 돌려 범한을 바라보며 쓴웃음을 지어 보였다.

“도련님, 지금 이 시기에 도련님이 외출하신 걸 백작 어른께서 아시기라도 하면 제가 혼쭐이 납니다.”

“그러니까 어서 가자꾸나! 아버님께 걸리면 나라도 가만두지 않으실 거야. 다들 날 잡으려고 한바탕 난리를 칠 거라고.”

이때야말로 경도 인심이 흉흉한 때로, 예부 상서 곽유지가 감옥에 갇힌 지 한 시진 만에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다. 그리고 이번 회시와 관련된 관리들은 혹시라도 감찰원에서 쳐들어오지 않을까 안절부절못하며 집에서 꼼짝도 하지 않고 있었다.

사건의 전말을 알고 있는 사남 백작과 신 군주는 이 사건의 중심인물인 범한을 그냥 내버려 두지 않았기에 이런 식으로 몰래 빠져나올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너 같은 심복이 있었으니 다행이지 안 그랬으면 문밖에 나가지도 못했겠군.”

옆에 가만히 앉아 있던 왕계년이 그나마 웃는 얼굴에서 우거지상으로 변했다.

“대인, 소인은 대인의 심복이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범한이 하하 웃었다.

“왕계년, 그대가 만담에 재주가 있는지 몰랐소.”

채찍 소리에 검은색 마차가 천천히 달리기 시작했다. 바퀴가 물웅덩이를 지나면서 사방으로 튄 물에 나뭇잎에 묻은 흙들이 씻겨 내려가자 더 푸릇푸릇하게 보였다. 마차 뒤편에는 각양각색의 우비를 입은 감찰원 밀정 몇 명이 따라붙었다. 그들은 모두 왕계년의 부하들로 범한의 안전을 전담하고 있었다.

“조정 관리들이 보복이라도 하면 어쩝니까? 여기 있는 사람들로는 부족합니다.”

왕계년은 범한이 무슨 일을 했는지 알고 있었기에 몹시 걱정스러웠다.

범한의 웃음 띤 얼굴에 살짝 한기가 돌았다.

“우리가 가려는 곳은 외양간 거리가 아니야. 나는 그 미친 할망구 말고 경도에서 누가 날 죽이려 하는지 보고 싶은 것뿐이야.”

“어디로 가시는데요?”

범한이 왕계년을 보자 왕계년이 작은 소리로 대답했다.

“공교롭게도 대인께서 지목한 그 학생들이 모두 같은 객잔에서 지내고 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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