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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여년-145화 (145/1,108)

145화

범한은 썩은 내가 하늘을 찌르는 시험장을 떠났다. 입구에는 백작가의 마차가 일찍부터 범한을 기다리고 있었다. 마차에 올라탄 후 등자경이 건네준 수건으로 얼굴을 대충 닦아 냈다. 역시나 몹시도 지쳐 보였다.

“내 의견에 대해 아버님께서는 다른 말씀 없으신가?”

“없습니다.”

등자경은 다친 다리를 옮기며 대답했다.

“그런데 백작 대인께서 그리 반기는 눈치는 아니셨습니다. 재상 대인께 미리 알려 드렸어야 한다고 생각하시는 거죠. 게다가 이번 일에 적지 않게 연루되어 계셔 혹시라도 무슨 일이 생기면 백작 대인과 재상 대인도 도련님을 보호하기 힘들어질까 걱정하시는 것 같습니다.”

범한은 그저 웃기만 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의 뒤에는 감찰원이 버티고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진평평이 왕계년을 통해 황제께서 올해 관리들을 재정비하려 한다는 의중을 전했으니, 그는 그저 겸사겸사 일했을 뿐이다. 진평평은 겉으로 범한이 일을 저질렀다고 꾸짖긴 하지만 내심 움직일 구실이 생겨서 은근히 기뻐했다.

범한은 단지 감찰원에 이유를 제공한 것뿐이고 감찰원에서는 이 이유를 가지고 황제에게 알려 황제가 결단을 내리도록 했다. 황태자와 영 재인 쪽에는 따로 조치해 두었다. 앞서 호명할 때 동궁이나 태황자 측에서 부탁한 사람 중 재능이 있는 학생들은 뽑아서 이름을 살짝 숨겨 두었다. 이를테면 그들과도 등지지 않겠다는 의미였다.

범한은 회시 결과가 나왔을 때 모든 사람이 자신이 조정의 어느 한쪽에 편향되지 않은 때 묻지 않은 문인이라고 생각하길 바랐다. 그저 고리타분한 집념대로 ‘고결’하고 미친 결정을 내렸다고 말이다.

* * *

며칠 후 경도는 다시 잠잠해졌다. 범한이 일을 벌였으니 감찰원에서도 은근슬쩍 숨겨 둔 힘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적어도 회시의 상위권 명단이 나오기 전까지는 깜짝 놀랄 만한 소식 같은 건 떠돌지 않았다. 최종적으로 진사 세 명을 정할 때는 범한이 몰래 끼워 넣은 사람들은 떨어지지 않았고 태학과 예부에 있는 진평평의 밀정들이 아무도 모르게 범한을 돕고 있었다.

곽유지 같은 고위 관리들은 몇 년 전만 해도 회시에서 부정행위 하는 게 수월했던 데다가, 뒤에는 동궁처럼 든든한 보호자가 있어 크게 신경 쓰지 않았기 때문에 훗날 이런 문제가 생길 줄은 아무도 몰랐다.

* * *

2월 22일, 길 양옆으로 봄소식을 알리는 꽃이 피어나고 나뭇가지 위로 작은 새들이 짝을 이뤄 즐겁게 지저귀고 있었다. 태학과 멀지 않은 경도 서쪽의 한 객잔 아래층에서는 마음을 졸이며 회시 결과를 기다리고 있는 학생들이 모여 있었다. 그들의 관심은 오로지 회시 결과에 맞춰 있어 다른 걸 신경 쓸 겨를도 없었는지 탁자에는 그 흔한 술과 안주도 없었다.

“에이, 이번에도 아닌가 보군.”

산동로에서 온 학생이 씁쓸한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역시 이번에도 틀린 게야.”

“가림 형님, 왜 그런 말을 하세요.”

그 옆에 앉아 있던 얼굴이 까무잡잡한 학생은 다름 아닌 회시 때 범한과 눈이 마주쳤던 양만리다.

천주 출신에 항상 바닷가로 벌이를 나섰던 그는 부유한 집안 덕에 반평생을 서당에서 보낸 재자 선비들과는 많이 달랐다. 하지만 그는 너무나도 여유로워 보였다. 그는 탁자 위에 놓인 식초에 절인 땅콩을 우적우적 씹어 먹으면서 아리송하게 말했다.

“그래도 가림 형님은 산동로에서 유명한 분이 아니오. 며칠 전 형님이 쓴 책론을 보고 모두가 칭찬 일색이지 않았습니까. 저야말로 그쪽으로는 영 소질도 없고 글솜씨도 부족하여 합격할 가망이 없는 것 같습니다.”

산동로에서 온 성가림은 이번이 벌써 세 번째 참가하는 회시였다. 그가 쓴웃음을 지으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설마 아직도 이게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모르는 건 아니겠지? 합격시킬 사람은 정해져 있어. 조정에서 몇 명 부탁하고 황실에서 몇 명 뽑고 또 태학에서 몇 명 데려가고 나면 끝이라고. 우리처럼 외지에서 온 사람들은 고향에서 이름 좀 날렸다고 해도 여기서는 아무것도 아니지. 조정에서 그나마 뛰어나다는 몇 사람을 병풍으로 세워 관리들의 입을 막으려고 한들 우리한테까지 차례가 오진 않을 거야.”

탁자 앞에 깡마른 사람이 한 명 앉아 있었다. 딱 봐도 부유해 보이지 않았고 술도 많이 취한 것 같았다. 가슴에 맺힌 응어리가 풀리지 않았는지 아주 냉소적인 말투로 대담하게 말을 시작했다.

“가림 형님 말이 다 맞습니다. 이번 회시를 보고 나니 다음번은 보지 않는 게 좋을 듯하네. 괜히 은전만 갖다 버리는 꼴이니 말이요. 개뿔, 회시는 무슨! 그저 조정 관리들이 자기 말을 잘 들은 개를 고르는 거지.”

성가림의 낯빛이 어두워지더니 살짝 놀란 마음에 몇 마디 충고해 주었다.

“계상 아우, 목소리 좀 낮추게. 감찰원에서 나온 밀정이 듣기라도 하면 자네와 내 앞길은 말할 것도 없고 딸린 식구들 목숨도 어찌 될지 모른다네.”

계상이라는 사람은 성은 후이며 권력의 길로 가길 좋아하지 않는 괴짜였다. 지금까지 줄곧 경도에서 하종위만큼 이름이 난 인물이었지만 거침없는 말투와 성격 때문에 여태 외롭게 지내 오고 있었다. 친구의 걱정스러운 충고에 계상은 크게 웃었다.

“감찰원이 두려운 존재이긴 하나 어찌 자네와 나 같은 보잘것없는 사람들한테까지 신경을 쓰겠나? 또 그들이 그렇게 대단하다면 시험장에 판치는 비리를 가만두고 보겠는가?”

양만리가 고개를 저었다.

“감찰원에 대한 평판이 좋진 않지만 관리를 단속하는 데 있어서는 확실하다네.”

후계상이 손을 내저었다.

“관리 중에 결백한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혹시라도 감찰원에 기대를 걸고 있다면 호랑이한테 가죽을 달라는 것과 뭐가 다르겠나?”

그러자 양만리가 반박하고 나섰다.

“관리도 지식인 가운데서 선발된 사람들인데 어찌 다 나쁜 놈이라고 하겠는가. 내가 보기에…….”

갑자기 그는 경도에서 청렴함으로 유명한 인물을 선뜻 꼽을 수 없어서 잠시 말을 더듬었다. 한참 후 그의 머릿속에 무엇인가 번뜩 스치고 지나갔다.

“태학 봉정 범한 대인, 그분은 정말 좋은 관리라네.”

그러자 옆에 있던 두 사람은 양만리가 옷 속에 숨긴 것을 범한에게 틀긴 일이 떠올라 웃음을 터뜨렸다.

“자네가 시험을 끝까지 볼 수 있게 해줬다고 좋은 관리라니, 좋은 관리 되기 참 쉽군그래.”

술기운이 오른 세 사람은 껄껄 웃더니 조정 안에서 벌어지는 폐단에 대해 비판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앞서 말한 대로 감찰원이 제구실을 해준다면 시험장의 풍조가 좋아질 거라는 기대도 함께 했다.

바로 그때, 갑자기 객잔 밖이 소란스러워지자 세 사람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시험장에서 부정행위가 발생하여 예부 상서 곽유지가 면직되고 투옥되었다.”

맑은 봄날에 천둥소리가 하늘에 울려 퍼지더니 객잔 안팎의 학생들 머리 위로 봄비가 시원하게 쏟아졌다.

빗방울이 객잔 주변에 내리기 시작하더니 벼락까지 내리쳤다. 하지만 학생들은 여전히 객잔 밖에서 멍한 표정으로 비를 맞으며 서 있었다. 객잔이 있는 골목은 회시를 보기 위해 외지에서 온 학생들이 몰리는 곳이라 항상 시끌벅적했다. 그런데 갑자기 나타난 학생의 말 한마디로 순식간에 모두 침묵 속으로 빠져들고 말았다.

한참 후에 정신을 차린 학생들은 방금 곽유지에 대한 소식을 전한 학생 주변으로 몰려들어 한바탕 소란을 피웠다. 그러곤 대체 어떻게 된 영문인지 제각기 떠들어 댔다. 후계상과 양만리 세 사람의 얼굴에도 흥분한 기색이 역력했지만 억지로 흥분을 감추고 구석으로 자리를 옮겨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묻는 사람은 여럿인데 대답하는 사람은 하나다 보니 한참 후에야 사건의 자초지종을 알 수 있었다. 알고 보니 어젯밤 감찰원 1처에서 백여 명이나 되는 밀정을 동원하여 모두 다섯 조로 나눠 경도 남쪽에 있는 곽유지 저택으로 향했다. 그런데 다른 저택으로 향한 4조에게 강남에서 온 학생 네 명이 잡히고 만 것이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다 보니 밤새 소문이 나지 않다가 오늘 조회 때 황제가 친히 감찰원에게 이번 회시에 발생한 부정행위에 대해 샅샅이 조사하라는 명령을 내려 조정이 발칵 뒤집히고 말았다. 그제야 대신들은 예부 상서 곽유지가 조회에 들지 않은 걸 알게 되었다.

이 혼란한 상황에서 재상 대인과 호부 상서만이 침착한 태도를 유지하고 있었고 조회에는 들지 않았지만 감찰원의 진평평 또한 크게 동요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이번 감찰원의 행동이 매우 빨랐을 뿐 아니라 정확하기까지 했다. 특히 강남 출신의 학생들을 체포할 때 현장에서 몇몇 관리들과 주고받은 서신들도 찾아냈고 곽유지의 저택에서 상당한 액수의 은전을 몰수했다. 초동 수사에서 밝혀진 대로 체포된 네 명 중 세 명이 소금 장수 집안으로 이번에 경도에 들어올 때 상당량의 은전을 가지고 들어와서 여러 경로를 통해 곽 상서 집안으로 흘려 보냈다.

그리하여 곽유지는 감찰원 감옥에 투옥되었고 네 명의 학생들도 갈 곳을 잃은 처량한 신세로 전락하고 말았다. 감찰원 4처에서는 어젯밤을 시작으로 강남 지역에 관리를 파견하여 일제 단속을 벌이기 시작했다. 명분상 보면 이들이 예부 상서 곽유지를 매수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대부분의 은전은 동궁으로 들어갔기 때문에 따지고 보면 이 사건의 배경에는 결국 황태자가 있었다.

물론 이런 세부적인 내용까지 학생들이 알 리 없었기에 모든 비난은 곽 상서를 향했고 불쌍한 곽유지의 노쇠한 모친까지 걸고넘어졌다.

이번 회시의 부정행위를 철저히 조사하겠다는 황제의 결심은 확고해 보였다. 이번 사건을 계기로 예부 말고도 적어도 10여 명이나 되는 관리들이 직무가 정지된 채 조사를 기다리고 있었다. 강호에 떠도는 소문에 의하면 이번 조사가 이처럼 빨리 정확하게 이루어진 데에는 감시자 명단의 역할이 컸다. 그 명단에는 이번 회시에서 학생들과 내통한 관리들의 이름이 적혀 있었고 감찰원에서 바로 착수한 터라 성과가 좋았다.

깜짝 놀란 후계상은 탁자로 돌아가며 술을 들이켰다. 이 사실이 아직도 믿기지 않은 눈치였다.

“세상에, 정말 생각지도 못했는데 이런 일도 다 있네.”

“뭘 생각지도 못했다는 거야?”

양만리와 성가림 두 사람도 아직 멍한 상태로 무의식적으로 물었다.그러자 후계상은 하하 웃더니 탁자를 탁 치며 말했다.

“감찰원이 이렇게 정확하고 치밀하게 움직일 줄 몰랐다는 말이야. 조정 관리들의 살생부를 손에 넣은 것이나 마찬가지지 않나.”

그는 술병을 들어 앞에 앉은 두 사람의 잔을 가득 채운 후 흥분된 표정으로 말했다.

“자, 한잔하세. 감찰원을 위하여, 건배!”

“건배!”

두 사람도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잔을 들어 건배를 외쳤다.

객잔에 있던 젊은 학생 모두가 흥분하여 열심히 술을 마셔 댔다. 회시의 부정행위는 이미 인이 박일 대로 박혀 있는 상태인 데다 예부 상서 하나만 잡는다고 해서 이 상황이 완전히 바뀌지 않는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천 리 길도 한 걸음부터라고 하지 않았나. 황제가 이 문제를 인지하였으니 앞으로 잘 해결될 거라 믿는 수밖에 없었다.

이런 젊고 패기 넘치는, 단순하기 이를 데 없는 지식인들은 모두 경국의 미래가 더 나아질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 * *

한참 뒤 술기운이 어느 정도 오른 양만리가 눈을 게슴츠레 뜨고 바보처럼 웃었다.

“정말 통쾌하다. 설사 이번에 합격하지 못한다고 해도 천지개벽할 일이 벌어졌으니 그걸로 만족하네.”

성가림은 술을 많이 마시지 않아 그나마 정신이 멀쩡했다. 그는 벼슬에 오르고 싶은 마음이 있는지 살짝 머뭇거리며 말했다.

“이번 회시에서 부정행위가 적발되었으니 차라리 시험을 다시 보면 안 되나?”

“그건 불가능해.”

벌써 술 몇 주전자를 마신 후계상의 불콰한 얼굴이 차분해지더니 눈동자가 말똥말똥해졌다.

“이건 황제의 경고에 불과해. 이전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지. 12년 전, 경국이 막 세워졌을 때 사건이 있었어. 그해 열네 명의 예부 관리가 참수당했지만 회시 결과는 그대로 발표됐지. 물론 관리들과 결탁한 학생들이 제명당하는 바람에 그 뒤에 있던 사람들은 합격하게 되었고.”

“그럼 이번에도 그런 기회가 생길 수도 있잖아?”

양만리는 순진한 성격대로 어수룩하게 웃으며 물었다.

“삼갑(三甲, 과거 시험의, 최종 시험인 전시에서 제3급으로 합격한 사람들)은 인원이 정해져 있지만 혹시라도 제명된 사람이 있으면 우리한테도 기회가 생길지 모르지.”

후계상이 비웃음을 감추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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