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4화
“황태자 외에는 한 분은 황궁의 귀인이고, 한 분은 재상에 추밀원의 원로까지. 저희 감찰원과 군부의 사이가 줄곧 좋았는데 이런 사소한 일로 사이를 깨뜨릴 수는 없는 거 아닙니까.”
“흥.”
진평평이 콧방귀를 뀌었다.
“그 세 사람 모두를 쫓되 끝까지 쫓아서는 안 되네. 그렇게 되면 온 조정이 흔들려 폐하조차도 막을 수 없는 상황으로 치닫고 말 거야. 이 사람들은 폐하께서 시험장의 부정행위로 자신들을 철저하게 다스릴 수 없다는 걸 알고 이리도 대담하게 행동한 것이니 말이야.”
그러더니 갑자기 웃기 시작했다. 그의 웃음에서 한기가 느껴졌다.
“하지만 세상에 저들보다 배짱이 더 큰 사람이 있다는 건 몰랐던 거지. 한 번에 이렇게 많은 사람이 팔려 나갈 줄이야.”
언약해사 미간을 찌푸렸다.
“범 제사의 이번 행동을 매우 경솔했군요. 많은 사람의 원망을 듣게 생겼으니 말입니다. 어떻게 수습할까요?”
“지금 이 늙은이에게 넘겨준 거군.”
진평평은 화가 난 건지 실성을 한 건지 알 수 없는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어쨌든 기분이 썩 좋아 보이지 않았다.
“범한은 내가 자신을 치열한 전장에 내보내지 않을 거란 걸 알고 있었건 거야. 그래서 내게 명단을 보낸 거고. 이제 다른 사람의 손에 끌려다니고 싶지 않다는 메시지를 보내고 싶었던 거야.”
언약해는 깜짝 놀라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백작가의 큰아들과 진 원장은 대체 무슨 관계지? 어떻게 감히 이런 행동을 할 수 있을까?’
진 원장의 표정을 보니 정말 그의 방법대로 할 생각이었다.
냉정을 되찾은 진평평이 갑자기 큰 소리로 웃기 시작했다. 웃음소리가 귀청이 떨어져 나갈 듯 날카로워서 듣기 거북했다.
“재미있군. 역시 재미있어.”
언약해가 궁금해하며 물었다.
“범 제사가 이렇게 해서 얻는 게 무엇인가요?”
“이 세상에 가끔 이런 괴짜들이 있긴 하지. 자기의 이익을 위해서 이러는 게 아니야.”
진평평은 무슨 생각을 했는지 그의 얼굴에 보기 드문 존경심이 나타났다. 심지어 그가 황제를 언급할 때에도 보지 못한 표정이었다.
“이번 부정행위 건은 어느 선까지 정리하면 될까요?”
진평평은 살짝 고개를 들고는 담담하게 말했다.
“폐하께서는 곽씨 가문이 너무 오랫동안 예부를 맡고 있다고 생각하고 계시네.”
“잘 알겠습니다.”
“1처에는 지금 사람이 없어. 목철은 그치 똑똑하지 않으니 이번 일은 자네가 알아서 하게나.”
“예, 알겠습니다.”
* * *
회시는 이미 세 번째 순서에 접어들었다. 범한은 최근 며칠간 피곤해서 그런지 눈곱이 부쩍 많이 끼는 것 같았다. 그래서 따뜻한 물수건으로 눈가를 닦아 내고 자리에서 일어나 기지개를 켰다. 그러곤 책상에 엎드려 자는 학생들을 살피며 시험관인 자기도 이렇게 피곤한데 몇 시진 동안 꼼짝도 하지 않고 시험을 보는 학생들이 가엽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은 회시 마지막 날로 범한도 이곳에서 지낸 지 수일이 지났다. 집에서 항상 몸에 좋은 음식을 보내 줬지만 이미 심신이 모두 지쳐 한계에 다다르고 있었다. 그는 하품을 하고는 양만리 곁으로 갔다. 며칠째 지켜본 결과 양만리는 옷 속에 숨겨 온 것은 아예 꺼내 보지도 않고 범한과의 약속을 성실하게 이행하고 있었다. 범한은 몹시 흐뭇했다.
더욱 뜻밖이었던 것은 양만리는 상당한 재능과 학식을 갖췄다. 게다가 소론에서 보여 준 견해는 그럴듯해 보이진 않았지만 꾸밈없는 모습이 범한의 성정과 잘 맞아떨어졌다. 무명의 감찰원 관원의 보고에 따르면 양만리의 집안은 가난하고 어려서부터 천주(泉州)에서 공부를 했으며 향시 성적도 꽤 괜찮았다. 하지만 범한은 그가 옷 속에 숨겨 온 물건에 대해 지적한 적이 있었기 때문에 더욱더 주의를 기울여야 했다.
그때 양만리는 마지막 시험까지 다 마친 상태로 잔뜩 피곤한 얼굴로 혹시나 빼 먹은 내용이 없는지 꼼꼼히 살펴보고 있었다. 그는 곁눈질로 범한이 또 자기 곁으로 다가오는 것을 보고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시험이 진행되는 동안 시험관은 학생들과 이야기를 나눌 수 없었지만 며칠간 고민하느라 이미 정신이 얼떨떨해진 양만리는 용기를 내어 자신의 옷자락을 쥐고는 불쌍한 표정으로 범한을 한번 쳐다봤다. 그의 표정만 봐도 그가 젊은 시험관에게 당초 시험장 밖에서 어떻게 자신이 몰래 숨겨 온 사실을 알았는지 묻고 있는 것 같았다.
범한은 도저히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이 정도 재능인데 굳이 그런 방법이 필요한가.’
범한은 그와 말을 할 수 없는 상황이었기에 오른손 집게손가락으로 양만리의 이불을 살짝 건드렸다.
영문을 모르는 양만리는 뒤에 있는 이불 보따리만 보았다. 그리고 며칠 동안 씻지도 않았는데 여전히 귀티를 내는 비단옷을 다시 보고 나니 자신의 엉큼한 수법이 어떻게 드러난 것인지 이해가 갔다. 비단옷을 잘 차려입을 형편인데 누가 굳이 축 처진 이불 보따리를 시험장에 메고 들어올까.
그가 멋쩍게 웃어 보이자 범한도 씩 웃고는 마음속으로 결단을 내렸는지 뒷짐을 지고 시험장을 서성거렸다.
* * *
밤이 되자 학생들도 점점 시험장을 떠나기 시작했다. 며칠간 계속된 강행군으로 심한 피로가 몰려왔다. 그칠 줄 모르는 하품에 온몸이 시큰거리고 정신도 반쯤 나가 있었다. 붓놀림이 느려서 아직도 마무리를 못 한 학생들은 책상 앞에 앉아서 애먼 붓만 깨물고 있었고 등잔 밑에서 옷을 입은 채로 잠든 학생도 있었다. 하지만 아직 시간이 남아 있어서 시험관들도 딱히 뭐라고 할 수는 없었다.
이때 갑자기 경도에 깔린 어둠을 깨우려는 듯 맑은 징 소리가 들려왔다.
“시간이 다 되었으니 모두 붓을 놓으십시오.”
그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예부 소속 관리들이 시험장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아직도 붓을 놓지 않고 잡고 있는 학생은 시험장 밖으로 쫓겨났다. 머리가 희끗희끗한 적어도 40대 정도 돼 보이는 학생은 시험 문제를 다 풀지 못해서 차마 자리를 떠날 수 없었다. 그는 울먹이며 버티고 버티다가 결국 감찰원 관리들에 의해 밖으로 끌려나갔다.
한 참 후에 모든 사람이 그의 울음소리를 들을 정도로 귀신 울음소리를 내며 시험장 밖에서 한바탕 소란을 피웠다.
범한은 한숨을 내쉬었다. 시험을 마친 학생들을 향한 동정심은 조금도 없었다. 이 세계든 저 세계든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또 무엇을 잘 하는지는 언제나 스스로의 노력에 달려 있을 뿐이다. 그가 냉정하고 차가운 사람이라서가 아니라 학생들의 회시가 끝났으니 이제 감독관인 그의 역할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회시가 끝난 그날 밤 바로 시험지를 봉인해야 했다. 이것은 범한의 임무이긴 했지만 회시의 총재와 시험관 모두 자리를 떠날 수 없었다. 범한이 호명 초록을 작성하는 작업을 마쳐야 시험지를 봉인하고 사인을 할 수 있었다.
촛불이 환하게 밝혀졌다. 예부 밖에서는 수십 명의 나이 든 관리들이 시험지를 나눠서 정리하고 있었다. 그리고 다른 작은 방에는 범한이 관자놀이를 문지르며 예부 관리 둘이서 호명 작업하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모든 시험지는 호명 전에 모두 범한이 먼저 확인 작업을 해야 했기에 잠시도 쉴 새 없이 시험지의 이름을 확인한 후 네 장의 종이에 적힌 이름과 맞춰 보았다. 한참 후에 보니 그는 이미 시험지 열 장을 이미 골라내서 다른 사람의 눈에 띄지 않게 자신의 오른편에 놓아두었다.
그의 옆에 있던 예부 관원들은 고개를 숙이고 서로 눈을 마주쳤다. 그들도 범한이 빼둔 시험지가 황실과 조정의 거물이 개입했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범한은 하던 일을 마무리 짓고 두 사람에게 손을 흔들어 호명을 시작하라고 했다. 그러자 그들은 서둘러 시험지 위에 적힌 학생의 이름과 고향을 종이로 덮기 시작했다.
옆에서 지켜보던 범한은 경국 관리들이 어떻게 이런 일들을 해내는지 알게 되었다. 자신이 골라낸 시험지에 붙인 종이가 일반 다른 학생들 시험지에 붙인 종이보다 살짝 짧았다.
예부 관리들이 자신이 고른 시험지에 호명을 할 때 자못 진지하게 짧은 종이를 붙이는 것을 보고 있으려니 범한은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그리고 만약 곽유지가 이 시험지 모두가 조정의 누군가로부터의 부탁이 아니라 그중 몇 개는 범한이 마음에 드는 사람, 예를 들어 양만리 같은 사람도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범한은 이미 자신의 계략을 감찰원 원장의 손에 넘긴 상태였던 터라 곽 상서가 피를 토할 기회가 사라질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호명에 붙인 종이 길이의 차이가 육안으로 구분하기 힘들 정도라서 무심코 보면 전혀 이상할 게 없었다. 하지만 혹시라도 베껴 쓰던 관원이 흑심이라도 품고 있었다면 충분히 분별해 낼 수는 있었다. 범한은 짧은 종이로 봉해진 양만리의 시험지를 보니 괜히 기분이 좋아져서 웃음이 절로 났다.
“골라냈다곤 하지만 시험지 답안을 베껴 쓸 때 어떻게 표시해 두는 거요?”
옆에 있던 관원이 난감한 듯 웃어 보였다. 이번에 신참으로 온 거중랑은 경도에서 알아주는 유명인이긴 하나 회시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아직 모른다는 생각에 이참에 잘 보이고 싶은 마음에 대답했다.
“범한 대인, 초록을 할 때 몇몇 글자에 공들여 써놓으면 채점하시는 대인들이 자연스럽게 알게 되시는 거죠.”
비로소 모든 것을 깨달은 범한은 감탄을 금치 못했다.
“그럼 채점을 하는 대인이 시험지가 누구의 것인지는 몰라도 합격을 시켜야 하는 사람이라는 건 확실히 알게 되는 거군요.”
“그렇습니다, 대인.”
예부 관원은 아주 공손하게 대답하긴 했지만 천하를 들었다 놓았다 한다는 사람이 관료 사회에서 내려오는 이런 법도도 모르고 있다는 게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걸 알고 나니 범한도 이들이 참으로 어리석다는 생각이 들었다. 경국 관리들이 지나치게 오만하게 굴어서 이런 허술한 관행이 지금까지 이어져 내려온 터. 지금 범한 또한 ‘관례’대로 진짜 지식인을 선발하려고 역이용할 수 있었던 것이다.
물론 기득권을 가진 관료 기관이 이 사실을 알면서 묵인해 올 수 있었던 것은 이 일은 정적(政敵)이든 아니든 이미 암묵적으로 묵인되어 왔다. 때문에 정말 정신 나간 사람이 아니라면 아무도 선뜻 문제 삼으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란 걸 범한도 잘 알고 있었다.
사실 동궁과 몇몇 원로들, 심지어 재상 대인까지도 다양한 수법으로 이 일을 도모하려고 하였으나, 결국 약속이나 한 것처럼 모두 범한을 찾아왔다. 그 이유는 역시 거중랑이 합격자 선발에 가장 중요한 호명을 주관하고 있었기 때문이고, 또 다른 이유는 임 재상을 제외한 다른 사람들은 범한이 어떻게 나올지 알아보기 위함이었다.
범한의 입장은 아주 간단명료했다.
‘흥, 어림없는 소리 말라고!’
밤새 분주했던 그날 밤, 그동안 열심히 회시를 준비해 온 수많은 학생의 인생에 마침내 회시의 종지부가 찍혔다. 모든 관원은 졸린 눈을 비비며 본청에 모여 이번 회시의 주관자 예부 상서 곽유지의 훈화를 듣고 있었다.
그는 이번 회시를 통해 나라에 이익이 되는 인재를 얻는다는 둥 전혀 새로울 것 없는 거짓말을 설파했다. 그러고 난 뒤 피곤한지 바로 손을 내저어 본청에 모여 있던 관리들을 물렸다. 그리고 범한에게 상냥한 투로 말했다.
“범한 대인도 며칠간 고생하셨소.”
“아니옵니다.”
범한은 억지로 정신을 차리며 웃어 보였다.
“대인께서 이리도 고생하시는데, 일개 거중랑인 소인이 무슨 고생을 했다 하겠습니까.”
곽유지가 미소를 지었다.
“모두 고생 많으셨소.”
사실 당시 본처에 있던 고위 관원들은 이번 회시의 결과에 대해 모두 알고 있었다. 그중에서 이득을 본 사람은 곽유지와 두 명의 시험관뿐만 아니라 범한도 미처 몰랐는데 며칠 전 그가 받아야 할 은전을 백작가로 보낸 사람도 그중의 하나였다. 그가 보낸 금액은 담박서국의 반년 수입보다 훨씬 큰돈이었다.
며칠간 연달아 회시를 치르고 나니 시험장 여기저기에서 썩은 내가 진동했다. 범한은 돌계단에 올라 코를 만지작거리고는 캄캄한 시험장을 쳐다보며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어 보였다. 이 세계에 온 지 이미 여러 해가 지났지만 자신이 살아야 한다는 생각뿐, 어떻게 살아야 할지는 몰랐다. 하지만 이번에 마음을 먹고 나니 원래 좋은 사람이 된다는 것이 꽤 괜찮은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물론, 좋은 사람이라고 해서 누구한테나 잘 대해 주어 미움을 사지 않는다는 그런 케케묵은 의미는 아니었다.
3부 관원은 이미 시험지를 모아 황궁 문하성 태감의 명령에 따라 대내시위와 감찰원 밀정의 보호하에 경도의 하얀 밤을 지나 태학으로 떠났다. 이제 수일 내로 호명된 시험지가 검사를 마치게 되면 대략적인 순위가 매겨지고 그 후 다시 황제가 친히 주지하는 최종 시험인 어람전시(御览殿试, 과거 제도 중 최고의 시험으로 황궁의 대전에서 거행하며 황제가 친히 주재함)를 통해 최종적으로 이번 회시의 장원과 방안(옛날 과거 시험에서 2등으로 진사에 급제한 사람), 탐화(황제가 직접 주재하는 전시에서 3등으로 진사에 급제한 사람)가 선발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