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3화
해가 점점 떠올라 시험장 안의 한기를 몰아내자 한참 긴장하던 학생들에게도 드디어 몸을 녹일 기회가 생겼다. 그들은 시험지에 눌러 쓴 필체가 혹시라도 어색해 보일까 계속해서 손을 비벼 댔다. 이번 시험인 서예도 평가 일부분이었기에 시험이 진행된 지 꽤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대부분의 학생은 여전히 머릿속으로 구상만 할 뿐 섣불리 손을 움직이지 않았다. 여기 있는 학생들 대부분은 일찍이 시험에서 쓴잔을 마셔 본 경험이 있는 사람들인 것 같았다.
미소를 머금고 시험장을 둘러보던 범한은 학생들이 생각하는 데 혹시라도 방해가 될까 봐 가능한 한 작은 소리도 내지 않으려고 애썼다. 조금 이상하긴 하지만 학생들은 파제(팔고문(八股文)을 지을 때 첫 단락에서 한두 구절로 제목의 뜻을 밝히는 것)를 할 때, 시험관이 자기 옆을 지나가거나 자신의 시험지를 보는 것을 가장 두려워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자기 옆에 서서 구경하는 것이 다른 누구도 아닌 범한이라는 사실을 알고는 오히려 자신감이 솟아났다.
엄격해 보이는 다른 시험관들과는 달리 범한은 은은한 미소를 짓고 있었기 때문에, 어쩌다 고개를 들어 범한을 본 학생은 그의 여유로운 미소가 자신을 격려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충분했다.
범한이 시험장 곳곳을 둘러보고 각문으로 돌아오자 목철이 이미 차를 준비해 놓고 있었다. 그가 의자에 앉자마자 다가와 나지막이 말했다.
“답답하시죠? 여기서 좀 쉬시죠. 각문은 바깥세상과 소통을 할 수 있어서 별로 힘들지 않습니다.”
범한이 씩 웃어 보였다. 만약에 대청으로 돌아가 곽 상서와 같이 앉아 있었다면 상대방이 자신을 별로 좋아하지 않다는 걸 알기에 정말 불편했을 것이다. 범한은 차를 마시다가 수상쩍은 느낌이 들었다. 황태자 쪽에서 준 명단에는 여섯 명뿐이었는데 하종우의 이름이 없었다. 그가 경도에 온 이후 하종위가 대학사의 제자로 동궁의 측근으로 알고 있었는데, 그렇게 본다면 이번 춘시에 참가를 하는 게 맞는 일이었다.
그는 잠시 이 일을 접어 두고 작은 문틈으로 시험장 가장 깊숙한 곳으로 눈을 돌렸다. 그날 밤 술김에 이태백의 시를 몇 수 읊은 것뿐인데 지금 여기서 시험 감독을 하고 있는 자신의 모습이 황당하기도 하고 무척이나 엉뚱해서 역시 인생은 참으로 불공평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직도 붓을 들고 열심히 쓰느라 여념이 없는 학생들이 이번 회시가 조정과 황실의 개입으로 일찍부터 미리 정해 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알면 과연 어떤 생각을 할까?
시간이 아주 느리게 흘러가는 것 같더니 어느덧 해가 각문 의자에 앉아서 깜박 잠든 범한의 머리 위로 떠올랐다. 해당 관아에서 사람을 보내 점심을 가져다주었다. 아직 시험이 진행 중이었기 때문에 식기도 자세히 검사한 결과 이상이 발견되지 않아서 이 중 6인분을 중청으로 옮겼다.
범한도 중청으로 가서 몇몇 대인들과 함께 식사하면서 오전에 있었던 이야기를 들었다. 동남쪽 시험장에서 부정행위를 하던 학생이 적발되었는데 시험관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지금까지 부정행위를 하는 학생들은 많이 봐왔는데, 이렇게 대범하게 하는 학생은 처음 봤네. 파제 답안지를 버젓이 책상 아래에 두고 베끼는 게 아닌가. 아마 사방에 칸막이가 있어서 들키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 것 같은데 우리가 바본가? 그걸 못 잡아내게.”
이번 회시의 총재 예부 상서 곽유지가 인상을 찌푸렸다.
“그 책은 어떻게 가지고 들어온 거지?”
범한은 자신의 실수란 걸 알고 있었기에 웃으면서 대답했다.
“앞서 몸수색을 할 때 시간이 오래 소요되어 감찰원 관원이 혹여나 시험 시간이 지연될까 우려하더군요. 그래서 소인이 서둘러 한다는 것이 그만 실수를 범하고 말았습니다.”
범한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면서도 감찰원 관원에게도 일부 책임을 떠넘겼다.
곽유지는 범한을 한번 쳐다보고 작게 신음을 흘릴 뿐 크게 꾸짖지 않았다. 지금까지 수없이 과거 시험을 치러 오면서도 역대 왕조에서도 이 작은 일을 근절하지 못했는데 범한이라고 별수 있었을까.
“범한 대인은 회시는 처음이라 경험이 부족할 것이니, 옆에서 너희가 잘 도와주거라.”
범한이 웃으면서 주변에 있는 대인들에게 공손을 표했다. 특히 자신의 직속 상관인 태학정에게 말을 건넸다.
“학정 대인, 소인 아직 미숙한 점이 많으니 잘 부탁드립니다.”
태학정은 그날 황제에게 지목받은 대학사 서무였다. 그는 장묵한의 문하생이긴 하지만 스스로 경국인의 영광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범한으로 인해 장묵한이 피를 토한 일을 크게 개의치 않았다.
“봉정 대인, 대인께서 미숙하다 하시면 경국 어느 누가 성숙을 논하겠습니까?”
다른 시험관들도 웃으면서 몇 마디 거드는 척 범한을 비웃었다.
“엄연한 경국의 재자(才子)가 학식이 없다니요. 그럼 얼른 시험장에 들어가서 붓을 잡으셔야지요. 배고프다고 여기서 이러고 있을 시간이 어디 있겠습니까.”
이 말에 곽유지도 웃음을 참지 못했다. 자신의 재능과 학문이 어떤지 범한도 전혀 확신이 없었으나 경도 관료 사회든 더 크게 경국 전체든 범한에 대한 신뢰도는 확고했다.
* * *
시험장 안 학생들은 여전히 긴장한 상태로 문제 풀기에 바빴다. 날도 어느새 저물어 가고 있었다. 범한은 시험장을 몇 바퀴 둘러보았다. 그러다 여러 사람의 시험지를 보다가 정말 재능이 있어 보이는 학생을 발견하면 저도 모르게 발길을 멈추고 유심히 지켜보았다.
그는 담주에 있을 때 이 세계의 경전을 통독한 적은 있었지만 과거 시험을 보고 벼슬길에 오를 생각은 해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이런 글을 쓰게 된다면 다른 사람들보다는 나름 자신이 있었다. 좀 더 과장해서 말하자면 독서광인 데다가 좋은 안목도 가지고 있었다.
그는 몰래 몇 사람의 이름을 적어 놓고 각문 쪽으로 가서 일부러 하품하는 척했다. 그러고 나서 옆을 힐끗 보니 목철은 반쯤 누운 채로 금방이라도 잠들 것 같았다. 범한은 웃음이 터져 나왔다. 목철은 참 좋은 사람이었다. 물론 일하는 능력도 갖추고 있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진평평도 그를 감찰원 1처의 일부 권력을 쥐여 주지도 않았을 것이다. 다만 사람됨이 좀 부족해 보였다. 이제 막 아첨하는 걸 배우기 시작했는지 범한만 봤다 하면 더없이 공손하게 구는 터라 범한은 그가 무척이나 불편하게 느껴졌다.
“대인, 각문은 열 수 없습니다.”
거중랑 범한이 각문 근처 외진 곳으로 향하자 감찰원 관원이 난감해하며 가로막았다.
“음식이 오가는 것 외에는 이 문을 열 수 없습니다.”
“나도 잘 알고 있네.”
범한이 웃으면서 말했다.
“그저 산책이나 해볼까 해서 그런 거네. 재미난 거라도 있을까 해서 말일세.”
지금 대전에서 나라의 인재를 선발하는 춘시가 진행되고 있었다. 그런데 거중랑이나 돼서 시험장에서 재미난 게 없나 찾아본다는 말은 참으로 엉뚱하고 체통에 맞지 않는 말이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감찰원 관원은 싱긋 웃어 보였다.
“감찰원 안에는 재미난 것들이 많으니 앞으로 자주 오시지요.”
범한은 평정을 되찾은 후 평범한 관원의 얼굴을 보고 입을 열었다.
“내가 찾아야 하는 사람이 바로 자네인가?”
“네, 그렇습니다. 말씀하시지요.”
그 관원은 고개를 숙였다.
범한은 그의 두 눈을 보고 관직은 그리 높지 않으나 분명 진평평이 심어 둔 심복이라는 걸 알자, 절로 미소가 번졌다.
“진 대인께서 구체적인 시간을 말씀하셨나?”
“춘시가 끝난 후 사흘 안입니다.”
관원이 작은 소리로 대답했다.
“알겠네. 내 자네의 도움이 좀 필요한데 이 사람들에 대해 좀 알고 싶어서 말이야.”
범한은 앞서 자신이 적어 둔 사람들의 이름을 관원에게 말해 주었다. 그리고 한 가지 덧붙였다.
“집안에 대한 건 필요 없네. 그저 사람 됨됨이가 어떤지 알아봐 주게.”
“예. 대인께서는 요패를 보여 주시지요.”
범한은 허리춤에서 이미 몇 번이고 자신을 도와준 감찰원 제사 요패를 꺼내 관원에게 한번 보여 주고는 물었다.
“기억할 수 있겠나?”
관원이 부드럽게 대답했다.
“예, 그렇습니다. 그런데 이번 일도 진평평 어른께 보고해야 합니다.”
“알겠네.”
범한이 온화하게 웃었다.
“시험지를 봉하기 전까지 알아봐 줬으면 좋겠네.”
“예. 그리하겠습니다.”
“내가 자네 이름을 알아야 하나?”
“아니옵니다. 소인 그저 감찰원의 하급 관리일 뿐입니다. 대인께서 제 이름을 기억하실 필요는 없읍니다.”
* * *
황태자는 앞으로 십수 년 후를 생각하여 조정에 자신의 사람을 심어 둘 생각이었다. 이는 태황자도 마찬가지였다. 장인과 추밀원 쪽은 전형적인 간신의 길을 택했다. 범한은 장인이 자신의 입장을 조금이라도 생각하지 않은 것 같아 절로 쓴웃음이 났다.
그 또한 이것이 관료 사회의 정상적인 모습이며 머지않아 자신에게도 이런 날이 올 것이란 걸 알았다.
범한은 훗날 시간이 흘러 온전한 성인이 되고 나면 조정에 자신의 사람을 심기 위해 게임판 같은 관료 사회에 뛰어들어야 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당장은 그럴 필요가 없었다. 지금은 감찰원과 협력하여 이번 춘시를 잘 마무리 짓는 일이 급선무였다. 괜한 일로 자신을 귀찮게 할 필요는 없었다.
장 공주를 궁 밖으로 내보내는 데 성공한 범한은 아주 안정적으로 모든 일을 처리했다. 이번에 동궁 측에서 취한 수법이 지나치지 않았다면 그냥 참았을지도 모른다. 게다가 그는 자신의 계획이 별로 모험적이지 않다고 생각했다. 겉으로 보이는 힘에 앞서 그의 뒤에는 어둠 속에 가려진 대종사와 막강한 힘을 자랑하는 감찰원이 버티고 있었다. 이건 대부분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힘이었다. 범한은 황실의 가장 근본적인 이익을 건드리지 않는 한, 실제적으로 서로 견제가 가능한 관료 사회에서 자신도 가능성이 있다고 믿었다.
환생해서 새로운 생이 주어진 마당에 계속 뒤로 물러나기만 한다면 어머니께서 남기신 많은 도움의 손길들이 다 헛된 일이 되지 않을까. 황자와 고위 관리들도 할 수 있는 일을 자신이라고 못 할 것은 또 무언가? 당연히 할 수 있을뿐더러 더 완벽하게 해낼 자신이 있었다.
“난 뼛속부터 나쁜 놈이야.”
범한은 시험장에서 고생하는 학생들을 보며 얼굴에 미소를 띠었다.
‘다른 사람은 되는데 왜 나는 안 된다는 거지? 내가 아주 제대로 보여 주겠어. 다른 사람은 얼씬도 하지 못하게 하겠어.’
“난장판이군!”
진평평의 한마디에 책상 옆에 있던 몇 명의 감찰원 수장들이 눈치를 살폈다. 진평평은 무릎을 덮고 있던 담요를 끌어당기고 기침을 두어 번 했다. 새하얀 머리가 헝클어져 아름다움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황궁에서 일어나는 일은 절대 관여하지 않는다. 이게 바로 감찰원의 법도다. 우리는 황제 폐하의 명령 외에는 그 어떤 것도 따르지 않는다.”
4처 수장 언약해가 쓴웃음을 지었다.
“다만 조금 안타까운 것은 과거 이런 부정행위를 조사한 적은 있습니다. 하지만 거의 알 만한 높은 집안에서 일어나는 데다가 저희 쪽에서도 투입할 수 있는 인원이 부족하여 실마리를 찾아내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하나 이번에는 입수한 명단을 토대로 진상을 밝혀 사건의 배후에 있는 관원들을 찾아내는 건 어렵지 않았으나, 동궁이 연루되어 있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감찰원 내부에서 황제 폐하에 대한 충성심을 얘기하는 것 외에 이토록 대담하고 신랄한 목소리가 흘러나오다니, 밀정 수장들은 다른 사람을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진평평이 바퀴 달린 의자를 밀어 창가로 가까이 가자 그의 흰머리와 검은 가림막이 명확하게 대조를 이뤘다. 그가 차갑게 말했다.
“제사 대인은 참으로 운이 좋군요. 어젯밤 폐하께서 이번 시험의 부정행위를 철저히 조사하라 하셨는데, 이렇게 빨리 선물을 보내 주시다니요.”
언약해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제사 대인이라는 사람이 누구일지 몹시 궁금했다. 무엇보다 어떻게 명단을 입수했는지 알고 싶었다.
“진작 찾았어야 했는데.”
“음.”
진평평이 손을 흔들자 부하들은 각 부에 배치하여 수일 후 있을 특단의 조치를 위한 준비를 하도록 했다. 남아 있던 언약해는 한참을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
“제사의 신분을 알고 있는 사람이 많아서 이번 일을 비밀로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폐하께서 황태자의 체면을 지켜 주기 원하셔서 동궁 쪽 사람은 움직이지 않기로 했습니다.”
“그럼 재상은?”
언약해는 그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제사의 신분이 짐작이 가고 나니 당황스러워 말이 나오지 않았다.
진평평이 눈을 가늘게 뜨고 그를 바라봤다.
“제사가 누군인지 알았으니 당연히 그의 장인도 건드려서는 안 돼.”
“사실 이들 모두 건드려서는 안 되죠.”
언약해의 얼굴에 또다시 씁쓸한 기운이 감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