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2화
2월 9일, 회시 날이 밝았다. 경국의 모든 지식인이 10년 동안 힘들게 공부한 것을 최대한 모두 제왕가에 팔아야 한다. 제왕가가 산다는 것은 정말 사고파는 의미는 아니었지만 어쨌든 이번 시험을 잘 보아야 벼슬에 올라 나라의 녹을 먹을 수 있게 되는 거였다.
긴소매를 입은 응시생들은 헤엄쳐 다니는 물고기처럼 조금은 떨리고 상기된 모습으로 예부에 마련된 시험장으로 향했다. 좁은 어망에 용기 있게 몸을 던져 파고드는 물고기처럼 보였다.
범한은 어제저녁에 회시의 총재 곽 상서와 시험관들과 만나 다음 날 진행될 각자의 업무에 대한 점검을 마쳤다. 다소 긴장되긴 했지만 잘 마쳤다.
문 옆에 오래된 팔걸이의자 하나가 놓여 있었고, 그 옆으로는 관아에서 보낸 하인과 감찰원에서 직접 파견한 관원이 서 있었다. 범한은 조용히 팔걸이의자에 앉아서 자기 앞을 지나가는 응시생들을 차가운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 앞을 지나가는 응시생들은 노소를 불문하고 모두 그에게 예를 갖춰 인사했다. 범한을 아는 사람은 그의 명성에, 범한을 모르는 사람은 그의 자리에 존경을 표했다. 입구에서는 범한 옆을 지키고 있던 관원들이 응시생들이 금지 물품을 시험장에 가지고 들어오지 못하도록 몸수색을 시작했다.
범한은 차를 마시다가 시골 마을 머슴처럼 생긴 학생이 이불과 요강, 음식 할 것 없이 잔뜩 메고 온 것을 보고 고개를 저었다. 몸수색을 다 마친 학생이 시험장으로 들오려고 하자 갑자기 눈을 부릅뜨고 소리를 질렀다.
“거기, 잠깐만.”
범한의 한마디에 시험장 밖이 순식간에 고요해졌다. 잔뜩 겁에 질린 응시생들의 시선이 모두 범한을 향했다. 이 학생에게 어떤 문제가 있는지 다들 궁금한 눈치였다. 범한은 낡은 짐 보따리를 메고 있는 학생의 눈을 보았다.
“조사 다 받았나?”
예부 관리와 감찰원 관원이 동시에 대답했다.
“예. 이미 다 확인해 봤는데 아무 이상 없었습니다.”
그 학생은 고개를 들고 가슴을 편 채로 침착하게 범한을 바라봤다. 당황하는 기색이 전혀 없었다. 그러자 범한은 잔뜩 눈살을 찌푸리며 다시 물었다.
“그래? 옷을 벗고 검사를 한 건가?”
“그러하옵니다, 대인.”
옆에 있던 관리는 입구로 점점 몰려드는 사람이 많아지자 덩달아 초조해졌다. 이제 반 시진 후면 황궁에서 어령이 내려질 텐데, 그 전에 모든 학생이 시험장 안으로 들어가려면 이 속도로는 어림도 없었다.
그때 범한은 자리에서 일어나 여전히 차분한 표정을 하고 있는 그 학생에게 다가가 눈을 한번 마주치고는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자네 옷에 문제가 있는 것 같은데.”
범한의 목소리가 너무 작아서 그 학생에게만 들렸다. 2월 초, 아직은 추운 날씨인데도 그의 이마에 땀방울이 맺혔다. 성은 양, 이름은 만리인 그는 시재로 명성이 자자한 범한이 어떻게 자신의 비밀을 알아냈는지 알 수 없었지만 그 눈빛에 꼼짝도 할 수 없었다.
그런데 갑자기 범한이 웃으면서 말했다.
“일단 들어가게. 이 일이 밝혀지면 자네가 그동안 고생한 건 모두 헛수고가 아닌가. 하지만 이것만은 기억해 두게. 시험이 치러지는 이틀간 혹여라도 이 옷을 사용하는 게 눈에 띈다면 그때는 그냥 넘어가지 않을 걸세.”
양만리는 희비가 교차하여 울먹거렸다.
“감사합니다, 대인.”
혹시라도 독수리의 날카로운 눈매를 가진 거중랑이 마음을 돌릴까 싶어 얼른 짐을 메고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시험장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그리고 앞으로 이틀 동안 절대로 옷을 뜯어 보지 않겠다고 다짐을 했다.
그 뒤로 범한은 부정행위용 종이를 몰래 숨겨 들어가는 학생들에게 경고했다. 범한 곁에 있던 관리들은 범한의 눈썰미와 판단에 감동하기도 했지만 시험 시간이 점점 가까워지자 밀려드는 초조함은 어쩔 수 없었다.
범한이 관직에 오른 후 관리다운 일을 하는 게 처음이어서인지 입가에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그는 시험장에 들어오는 학생 하나하나를 자세히 살핀 까닭에 시험장 입구에 버리고 간 신발과 모자, 종이 뭉치에 숨겨 온 붓이 수북이 쌓여 있었다.
시험장 밖에서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던 학생들은 소문으로 들었던 범한에게 시선의 여유로움은 온데간데없고 살기 가득한 거중랑의 모습만 남아 있자, 몸 안에 숨기고 있던 금지 물품들을 얼른 꺼내 시험장 뒤편 하수도에 버리고 오기 바빴다.
오늘 감찰원의 책임 관리는 범한과 아는 사이로 지금은 잠깐 1처를 대신 맡고 있는 목철이었다. 그는 부하의 보고를 받으며 걸어오다가 범한을 보고는 두말없이 큰절을 올리더니 매우 난처한 듯 입을 열었다.
“대인,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서둘러 진행해야 할 것 같습니다.”
옆에 있던 예부 하급 관리는 감찰원 관원인 목철이 범한에게 깍듯하게 대하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감찰원 사람이 한낱 문관에게 왜 이렇게 정중하게 대할까 생각해 보니 역시나 범한이 가진 배경을 무시할 수 없었다. 이 나라의 재상과 상서 그리고 군주까지. 그래서인지 말을 아끼고 범한의 대답만을 조용히 기다리고 있었다.
역시 시각을 확인한 범한도 시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그제야 재미있어하던 게임을 멈추었다. 그리고 시험장 입구에 있는 수백 명의 학생에게 맑고 우렁찬 소리로 말했다.
“자, 지금부터 회시 시간에 늦지 않기 위해 옷을 벗지 않은 채로 수색하도록 하겠습니다.”
학생들은 너무 기뻤다.
범한은 주위를 둘러보며 웃었다.
“몰래 숨겨 온 물건을 자진하여 여기 있는 대나무 바구니 안에 넣는 자에게는 죄를 묻지 않겠다. 하나 내 눈에 띈다면 사람을 시켜 옷을 다 벗겨서 황궁 앞에 던져 두어, 너희의 점잖은 모습이 어떤 것인지 온 세상이 다 알게 하겠다.”
깜짝 놀란 학생들은 그제야 범한의 미소 뒤에 골수를 파고드는 살기가 숨어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자 감히 모험을 시도하려는 학생 없이 순서대로 줄을 서서 안으로 들어갔다.
학생들의 행렬에 갑자기 속도가 붙자 얼마 지나지 않아 시험장 입구는 어느새 조용해졌다. 냄새나는 신발과 종잇조각들만 잔뜩 남아 있어 처량해 보였다. 예부 하급 관리는 얼른 사람을 시켜 깨끗이 청소하게 하고 황궁에서 내려오는 시험 시작 명령을 받들기 위해 향안을 배치하고 폭죽을 터트리느라 한동안 정신이 없었다.
모두가 바쁘게 움직이면서도 역시 범한 대인은 경국의 다른 관리들과 크게 다르다는 생각을 했다. 만약 이런 부정행위에 대해 크게 개의치 않고 오늘처럼 조사를 하고도 학생들을 시험장으로 그냥 들여보냈더라면 어떻게 됐을까. 또 이 일을 다른 사람이 맡게 됐다면 어사대에서 한바탕 소란이 벌어질까 두려워했을 것이다. 하지만 범한이 이렇게 할 수 있었던 건 당연히 어사대도 두렵지 않다는 의미였다.
범한이 팔걸이의자에 앉아 바삐 움직이는 사람들을 보고 있는데 옆에 있던 목철이 말을 걸었다.
“범한 대인, 고생이 많으십니다. 잠시 후 시험 시작을 알리는 포성이 울리면 원에 돌아가셔서 좀 쉬시지요. 남은 일은 제가 처리하도록 하겠습니다.”
범한이 웃으며 그를 쳐다본 후 말했다.
“쉬다니요, 이따가 시험장도 좀 둘러봐야죠.”
“대인께서 처음 하셔서 잘 모르시나 봅니다. 사실 시험장에 들어가면 크게 신경 쓸 일은 없습니다.”
목철은 어린 도련님이 회시의 규칙을 잘 모른다고 생각해서 피식 웃었다.
범한이 고개를 휙 돌리더니 낮은 소리로 말했다.
“이번에 북제에 가는데 대인도 가십니까?”
그의 갑작스러운 질문에 아무런 준비도 되어 있지 않았던 목철은 잠시 얼떨떨해며 무의식적으로 나오는 대로 대답했다.
“감찰원에서 아직 조정 중인 것으로 압니다만, 제4처에서 진행 중인 일이라 저도 손을 쓸 수가 없습니다.”
목철은 범한이 시를 쓰는 재주는 탁월하나 시 쓰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고 장사에 관심이 많다는 것이 생각났다. 그러자 나름 무슨 좋은 생각이 떠올랐는지 웃으면서 입을 열었다.
“혹시 북제에서 무슨 물건이라도 들여오실 생각인지요? 그런 거라면 제가 얼마든지 도와드릴 수 있습니다.”
범한이 웃었다.
“아닙니다. 그냥 한번 물어본 겁니다.”
그러자 목철이 호기심 가득한 목소리로 물었다.
“범한 대인, 오늘 기분이 좋아 보이십니다.”
범한의 입가가 살짝 올라가고 속을 알 수 없는 눈빛을 드리우더니 무슨 생각을 그리하는지 한참 후에야 입을 열었다.
“사실, 독서는 시험을 볼 필요가 없는 인생의 즐거움 그 자체라고 생각하면서 살았습니다. 경도에 온 후 가장 두려웠던 게 바로 회시였지요. 근데 일 년 만에 제가 거중랑이 되어 있을 거라곤 생각도 못 했습니다. 책도 마음껏 읽을 수 있는 데다가 시험을 보지 않아도 되고요. 훨씬 편안하게 저 사람들이 열심히 시험을 보는 것을 지켜보고 있자니 이게 바로 인생의 가장 큰 즐거움인 듯합니다.”
성지가 내려오자 춘포가 울리고 향안이 철거됐다. 시험장 문이 닫히면서 경국에서 일 년에 한 번 열리는 회시가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범한은 묵직한 나무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자 갑자기 전생의 대학 입학시험이 생각났다. 시험을 보지 못한 게 너무 안타까웠다. 그런데 지금 이 세상에서도 회시에 참가할 수 없다니 나름 편하긴 했지만 그래도 마음 한편에 아쉬움은 남아 있었다.
“대인께 인사드립니다.”
대청에 들어서자 아직은 차가운 바람이 문밖에서 불어닥쳤다. 범한이 정중앙에 앉아 있는 예부 상서 곽유지에게 인사를 올렸다.
“시험장 문은 이제 닫혔습니다. 대인의 지시 없이는 다시 열리지 않을 겁니다. 또한 시험지가 도착하여 시험 문제를 풀기 시작했습니다. 필요한 음식과 물은 시험장 내에 마련해 두었으며, 이 일은 감찰원 목철 대인과 예부 관원들이 함께 담당하고 있으니 아무 문제 없을 것입니다.”
곽유지는 5품 관원의 수려한 외모를 보고 뭐가 못마땅한지 다른 사람이 알아차리지 못하게 인상을 쓰고는 이내 웃어 보였다.
“수고 많았소.”
그리고 옆에 있던 시험관들에게 분부를 내렸다.
“관례대로 한 시진이 지나면 시험장을 한번 살펴보고 오시게나.”
올해 시험관은 태학정과 동문각의 대학사로 모두 황제가 직접 지명한 자들이었다. 그들은 곽 상서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곽유지가 몸을 돌리더니 범한에게 말했다.
“범한 대인, 시험장 질서를 맡고 있으니 여기 두 분과 협조하여 불시로 순찰하고 쪽문 쪽의 동정도 살펴 주게나.”
예부 상서는 한숨을 내쉬고는 하늘을 향해 포권을 올렸다.
“춘시는 이 나라를 위해 좋은 인재를 고르는 일이니 무엇 하나 허투루 해서는 안 되네. 그러니 여러분들도 정성을 다해 주길 바라오.”
곽 상서의 말에 모든 관원이 각자의 자리로 돌아갔다. 엄숙하고 긴장된 분위기가 시험장 곳곳에 퍼져 숨소리 하나 들리지 않았다. 황제가 이미 수차례 북벌을 한 상태였기 때문에 이제는 치국의 중심이 문치로 옮겨졌다는 것은 모두가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일 년에 한 번씩 보는 시험을 매우 중요했다. 심지어 몇 년 전에는 몰래 시험장에 들어가 사찰을 한 적도 있었기에 누구도 감히 소홀히 할 수 없었다.
회시를 보는 학생들도 마찬가지로 일생일대의 중요한 전환점이었다. 시험에 합격한다면 말 그대로 용문을 밟게 되는 것이고 그러지 못하다면 침울하게 고향으로 돌아가 내년에 있을 향시를 준비해야 했다. 청춘을 얼마나 더 쏟아부어야 할지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게 누구든 한번 떨어지면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경도를 맴돌다가 오히려 바닥까지 미끄러지거나 아예 종적을 감추는 사람들도 많았다.
나라의 대사이기도 했지만 학생들에게는 생사의 장이었다.
범한은 돌계단에 서서 눈을 감고 시험장 사방에서 들려오는 바스락 소리를 듣고 있다가 황태자가 전해 준 종이가 떠오르자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