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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여년-140화 (140/1,108)

140화

“저하, 이 꽃배는 아주 조용한 게 꽃과는 어울리지 않는 듯하옵니다.”

2 황자가 싱긋 웃더니 고개를 들어 그를 쳐다봤다.

“조용한 게 좋지.”

갑자기 이런 대화가 지루하고 힘들게 느껴진 범한은 그나마 친분이 있는 정왕 세자에게 도움의 눈빛을 보내려 했다. 때마침 정왕 세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언제까지 두 분이서 이런 대화를 주고받으실 건가요?”

이홍성이 웃으면서 말문을 열었다.

2 황자가 웃더니 범한에게 다시 말을 걸었다.

“우리 황족들이 다 재미없는 사람들이라곤 생각하지 말게나. 그래, 자네가 완아와 결혼하여 이제 한 식구가 되었으니 앞으로 자주 왕래하도록 하지.”

이홍성은 범한이 대답하기 전에 얼른 몇 마디 거들었다.

“우리가 왕가이긴 하지만 저하는 2 황자이시지 않습니까. 왔다 갔다 하시다가 자칫하면 위험에 처하실 수도 있습니다.”

두 사람은 정왕 세자가 몇 달 전 2 황자의 연회에 초대되어 가던 범한이 외양간 거리에서 북제 자객의 공격을 받은 사건을 얘기하는 것임을 잘 알고 있었다. 세 사람은 서로를 쳐다보다가 이유 없이 웃음을 터뜨렸다.

웃음소리가 잦아들면서 그 사건도 자연스럽게 끝을 맺었다. 범한이 씁쓸한 듯 입을 열었다.

“저하께서 준비하신 연회가 홍문연(중국 진나라 말기에 항우와 유방이 함양(咸陽) 쟁탈을 둘러싸고 홍문에서 회동한 일. 손님을 모해할 목적으로 마련한 연회)도 아닌데 식사 한 끼를 위해 이렇게 큰 위험을 무릅써야 한다니 참으로 무섭습니다.”

2 황자와 이홍성은 ‘홍문연’이라는 말에 어리둥절해했다. 그런 말을 들어 본 적은 없었지만 자신의 신분을 생각해 차마 모르는 척할 수 없었다. 2 황자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저하라고 부르지 말고 완아처럼 둘째 형님이라고 부르시게나.”

범한은 얼굴에 드러나진 않았지만 내심 살짝 귀찮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관계가 너무 가까워지면 문제가 생길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가 무엇을 걱정하는지 짐작이라도 한 듯 2 황자가 양손을 자신의 무릎 앞에 늘어뜨리고 여전히 반쯤 쭈그리고 앉은 채로 웃으며 말했다.

“모든 일에 너무 조심스러울 필요는 없다네. 완아가 황궁에서 많은 사랑을 받은 아이라는 건 자네도 잘 알 거야. 그냥 형님 하나가 더 생겼다고 생각하면 되네. 난 여전히 한림원에 틀어박혀서 책이나 만들고 있지 않은가. 3 황자와 더 친해져도 좋을 걸세. 친척이 많으면 좋지 복잡할 게 뭐 있나?”

범한은 웃고는 있었지만 속으로 황가 사람들 모두 골칫거리의 근원이라는 생각에는 변함없었다.

“제가 복이 많은 사람인가 봅니다. 하지만 저하라고 칭하지 않는 것은 큰 결례라고 생각되옵니다.”

2 황자가 쓴웃음을 지어 보였다.

“집에 가서 완아에게 물어보시게나, 그 애가 날 뭐라고 부르는지.”

* * *

서로 인사를 나누고 나니 연회석이 마련되었다. 탁자 위에는 신선한 제철 음식과 진귀한 요리들로 가득했다. 범한은 매우 신이 났다. 그는 이미 모든 방안을 생각해 두고 있었기에 마음이 한결 가벼웠다. 세 사람은 경도 인물들의 과거사에 대해 편하게 이야기를 나누며 즐거운 한때를 보냈다.

역시 2 황자는 숙 귀비의 영향을 받아서인지 문학에 대한 조예가 깊었다. 범한과 함께 시를 읊는 모습이 꽤나 잘 어울렸다. 옆에 있던 이홍성은 여인들 사이에서 떠도는 소문을 떠들어 댔다. 얘기를 하다 보니 역시 사남 백작 범건의 당대 찬란했던 전적을 빼놓을 수 없었다.

남자들 이야기로 화제가 넘어가자 2 황자는 범한에게 말을 걸기가 불편했지만 분위기가 자연스럽게 흘러가서 다행이었다. 범한은 혹시 실수라도 할세라 담주 이야기와 오면서 보고 들은 것만 이야기했다.

이번 연회로 2 황자와 범한은 서로 얻은 게 있는지 미소 띤 얼굴로 작별 인사를 나눴다.

2 황자는 별로 가고 싶지 않은지 계속 의자에 앉아 있었다. 그는 미동도 하지 않다가 범한과 이홍성의 모습이 사라지자 그제야 한숨을 내쉬었다.

“저하께서 보시기에 범한이라는 자는 어떤 것 같습니까?”

제자가 공손히 물었다. 그러자 2 황자가 웃으면서 대답했다.

“내 매제는 너무 조심스럽단 말이지. 수십 년간 경국인의 뼛속 깊이 스며든 교만함이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어. 솔직히 황궁 연회 날, 술에 잔뜩 취했던 사람이 오늘 내가 만난 사람인지 믿을 수가 없을 정도야.”

이 말을 마친 후 그는 습관적으로 고개를 숙이고 한쪽 손을 뻗어 포도를 만지작거렸다. 그 모습을 본 제자들은 2 황자가 국가의 중대한 일을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방해하지 않기 위해 얼른 조용히 문밖으로 나왔다.

시간이 한참 흘렀다. 2 황자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사실 그는 국가의 중대사를 고민하고 있었던 게 아니라 범한이 말한 ‘홍문연’을 곱씹고 있었다. 그는 어릴 때부터 어머니를 따라 경전을 읽긴 했지만 ‘홍문연’이라는 전고는 들어 본 적이 없었다.

“매제가 역시 학식이 높군. 돌아가서 책을 봐야 할 것 같군.”

2 황자가 입에 물고 있던 포도를 깨물자 달콤함이 퍼졌다.

말에 올라탄 범한은 궁둥이가 배기는 게 조금 불편하긴 했지만 2 황자를 생각하니 미소가 피어올랐다. 어딘지 모를 익숙한 느낌이 떠나지 않았다. 첫 만남에서 서로 깊은 얘기를 나눈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니 황실 금고도 거론할 필요가 없었다. 그래서인지 만남 자체만으로도 충분했다.

범한은 길가에 뻗은 버들잎을 뽑으며 옆에 있는 이홍성에게 물었다.

“오늘 2 황자가 나를 만나고 싶어 했던 거군요.”

이홍성이 웃으면서 대답했다.

“그가 자넬 얼마나 좋아한다고. 공교롭게도 신 군주와 결혼했으니 이참에 매제를 만난다는 명분으로 자네 얼굴이라도 한번 보고 싶었던 거지. 한 시대를 풍미하는 시선이 대체 어떤 사람인지 궁금해하셨네.”

범한은 설마 고작 그런 연유로 자신을 보자고 했을까 싶어 어이없어 연신 쓴웃음을 지었다. 한참 생각한 후에 가벼운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데 왜 2 황자가 이렇게 낯이 익은 거지?”

이홍성과 그는 이미 알고 지낸 지 수개월이 지났기 때문에 이미 속은 강직하나 겉으로는 온화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가끔씩 미치광이 같은 모습이 나오는 것 외에는 오히려 침착한 모습을 유지하려고 애쓰는 사이였다. 그런데 지금 살짝 정신이 나간 것 같아서 답답해하며 입을 열었다.

“두 사람이 만난 적은 없을 거야.”

범한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2 황자의 용모가 수려한 건 사실이지만 ‘임 누이’는 아니었고 자신도 ‘용양’(전국시대 사람으로, 중국 정사에서 처음 기록된 동성애자)이 아닌데, 왜 이렇게 자꾸 생각이 나는지 범한 자신도 알 수 없어서 실실 웃음이 나왔다.

이홍성은 범한이 웃는 걸 쳐다보고 있으니 얼떨떨해져서 한참을 멍하니 있다가 중얼거렸다.

“자네가 왜 2 황자가 낯이 익다고 하는지 알 것 같다.”

범한의 눈이 휘둥그레져서 물었다.

“왜?”

이홍성은 습관적으로 구역질하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가끔씩 두 사람 다 여인네처럼 수줍게 웃는 걸 좋아하거든.”

범한이 멍하니 있다가 표정 변화 없이 입가에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이렇게?”

이홍성은 범한의 말끔한 얼굴에 순간 몸이 부르르 떨었다.

“두 사람이 기질도 서로 비슷해. 확실히 사내보다는 여인네 같단 말이야.”

“쓸데없는 소리.”

범한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지만 퍼뜩 무슨 생각이 떠올랐다.

‘어쩌면…… 정말 2 황자랑 나랑 닮은 구석이 있는 건가.’

범한 자신도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했다고 느꼈는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리고 정왕 세자를 향해 또 한 번 살인 미소를 보낸 후 채찍을 휘둘러 말 머리를 경도로 돌렸다.

강을 따라 말을 타고 내달리니 봄바람 불어와 강가의 파릇파릇한 버들가지가 범한의 얼굴을 간질였다. 범한은 일일이 피해 가기 귀찮았는지 패도의 기를 얼굴에 끌어모아 아주 뻔뻔한 얼굴로 버들가지를 모두 날려 버렸다.

어느새 정왕 세자와 호위병들과 격차가 벌어졌다. 말도 지쳤는지 속도가 점점 줄어들었다. 범한은 말 위에 탄 채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돌려 자기가 온 길을 바라보았다. 저 멀리 물 위로 보이는 꽃배 하나가 덮개를 쓴 채 강가에 세워져 있었다. 손님을 가득 태운 화려한 기생집 배와 비교하니 한없이 처량해 보였다.

보아하니 사릉의 꽃배로 당대 경도에서 제일 잘나가는 여인들이 있던 가장 유명한 곳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예전의 모습을 전혀 찾아 볼 수 없었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범한은 갑자기 감찰원 감옥에서 힘겨운 나날을 보내고 있는 사리리가 떠올랐다. 춘시가 끝난 후 경국 조정은 사리리를 북제로 넘길 예정이었다. 그 일을 맡게 될 사람이 공교롭게도 범한이라니 그는 그녀를 다시 만나게 되면 어떤 모습일지 알 수가 없었다.

그 당시 독약과 언어, 심리 공세를 통해 간신히 그녀 입에서 자신을 살해하려 한 자객의 배우가 오백안이라는 사실을 얻어 낸 후, 그녀를 풀어 주겠다는 맹세 아닌 맹세를 했었다. 그 후 범한이 일부러 약속을 지키지 않은 건 아니지만 어쩌다 보니 일이 이렇게 돼 버리고 말았다.

그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더니 조금 전 이홍성처럼 부드러운 미소가 피어났다. 이쯤 되니 범한도 스스로도 인정하는 것 같았다.

저 멀리서 말발굽 소리가 들려왔다. 정왕 세자도 호위병과 떨어져 혼자 범한을 따라 왔다. 강가에 나란히 선 두 사람은 가만히 평온한 강물을 바라보다가 이따금 과거의 영화로움을 잃은 그곳에 눈길을 주었다.

잠시 후 이홍성이 나지막이 물었다.

“네가 곽보곤을 때린 그날 밤 바로 저기서 함께 술을 마셨었지.”

범한이 웃으면서 대답했다.

“그러네. 우리가 그날 저기서 하룻밤을 보냈었군.”

“뭐라고?”

이홍성이 범한을 흘끔 쳐다보고는 말을 이었다.

“지금 뭇 여인들 생각에 빠진 건 아니지? 지금 자네 신분은 나랑은 또 다르다고. 감옥에 있는 사리리는커녕 저기 있는 여인네들도 아니 될 말일세. 만약 나처럼 밤마다 술에 취해 여색을 즐긴다면 바로 다음 날 황궁에서 병사들을 보내 혼쭐을 내줄 테니 말이야.”

범한이 씁쓸해했다.

“무슨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그저 저 배를 보고 잠시 감상에 빠진 것뿐이야.”

“오백안은 자네 장인의 사람이 아니라네.”

이홍성은 범한이 뒷이야기를 모르는 줄 알고 작은 소리로 언질을 준 것이다.

“나도 이미 알고 있어, 그자가 장 공주 사람이라는 건. 다만 장 공주가 지금 경도에 없는 이상 이 문제에 대해 생각하지 않기로 했지.”

“장 공주와 황후가 끈끈한 사이고 태후의 총애를 받고 있다는 사실을 절대 잊어선 안 돼. 게다가 최근 몇 년 사이 황태자도 그녀를 믿고 따르게 됐다는 것도 말이야.”

이홍성은 조용히 범한을 바라보았다. 이 몇 마디 말로 뭔가 표현하고 싶은 눈치였다.

범한이 웃으면서 대답했다.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그냥 하지. 2 황자와 나는 초면이니 무슨 말을 해도 불편한 게 당연하지 않겠어? 마침 호위병들도 없으니 그냥 편하게 말하지 그래?”

두 마리 말이 천천히 앞으로 걸어가다가 가끔씩 애정 표현이라도 하는지 서로 머리를 문지르곤 했다. 이홍성이 버들가지를 걷으며 나지막이 말을 꺼냈다.

“네가 북제에서 돌아오면 황실 금고를 관리하게 될 거야. 그럼 동궁이든 2 황자든 모두 널 필요로 하겠지. 이 정도는 물론 너도 알고 있을 거야.”

범한은 아무 대꾸도 하지 않고 상대방의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 있었다.

“지금 동궁이 너에게 호의적인 건 장 공주가 경도를 떠났기 때문이야. 장 공주가 널 왜 그렇게 싫어하는지 이유는 모르겠지만 네가 아무리 대단한 일을 하더라도 장 공주 말 한마디면 동궁의 태도는 언제든지 바뀔 수 있다는 걸 명심해. 그러니 절대 그들을 믿어선 안 돼.”

이홍성은 시종일관 진지한 태도를 보였다.

“우리 두 집안이 서로 사돈 관계인 데다 자네와 나 또한 친구 사이니까 얘기하는 걸세. 공적이든 사적이든 네가 방향을 잡아야 한다면 나는 저쪽으로 잡아 주길 바랄 뿐이네.”

그가 강 건너편 산을 가리켰다. 그 산 뒤편으로 수풀이 갈라져 ‘이(二)’ 자처럼 보였다.

“참으로 기막힌 우연이군.”

범한은 그의 손이 가리키는 곳을 보고 있다가 고개를 내저었다.

“원래 줄을 서는 것처럼 어리석은 일은 없다네. 홍성, 자네도 너무 일찍 자리를 잡지 말길 바라네.”

“우연이 아닐세. 저기가 바로 이호아자의 별저라네. 어째 부친과 똑같은 말을 하는군. 하지만 이 세상은 할 일이 아주 많다네.”

이홍성이 웃으면서 대답하자 범한은 동의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오늘 2 황자를 만나고 나니 묘한 기분이 들더군. 이런 유정강 같은 사람이 왜 정왕처럼 왕의 본분을 다하지 못하는 걸까?”

그러자 이홍성의 눈매가 차갑게 변하더니 봄바람처럼 부드러운 미소가 그의 얼굴에서 싹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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