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7화
“짐은 그대들과 생각이 다르오.”
순식간에 조용해진 대전에 황제의 담담한 목소리만 울려 퍼졌다.
“무릇 옥도 다듬지 않으면 그릇이 되지 않는다고 했소. 그대들도 잘 알다시피 범한은 문관이기는 하나 외양간 거리에서 자객과 맞서 싸울 만한 용기를 가진 자요. 이렇게 훌륭한 인재가 어찌 태상사, 태학원 관아에서만 지낼 수 있단 말이오?”
이 말을 듣고서야 대신들은 황제가 아주 뜻밖에도 다른 생각을 갖고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다만 왜 굳이 범한을 북제로 보내려고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황제는 대신들을 빤히 쳐다봤다.
“경험이 부족하면 그만큼 연습을 하면 될 일이오. 범한의 지금까지 행실을 살펴보면 이번 일은 그에게 맡겨도 무방하다고 생각되오.”
황제가 이미 결정한 사안이라 어느 누구도 되돌릴 수 없는 일이었다.
신하들은 감히 말을 꺼낼 엄두를 내지 못했고 임약보와 범건의 얼굴에는 어느새 근심이 드리워졌다. 부모로서 이런 반응은 당연한 것이기에 두 사람은 일부러 표정을 숨기려 하지 않았다. 만약 억지로라도 매우 기쁜 척했다면 황제와 신하들 모두 금방 알아차렸을 것이다.
“범건.”
황제가 호부 시랑 범건을 보며 얼굴을 찡그렸다.
“예, 폐하.”
범건은 자신의 이름이 불리자 살짝 긴장하긴 했지만 재빨리 황제 앞으로 나갔다.
황제가 나지막이 물었다.
“그대의 아들에게 이번 일을 맡기고자 하는데 그대의 생각은 어떠한가?”
범건은 잠시 침묵했다가 이내 웃으면서 대답했다.
“신이 감히 무슨 말씀을 올리겠습니까.”
“할 말이 있으나 하지 않겠다는 건가, 아니면 없다는 말인가?”
“말씀드릴 수 없다는 뜻입니다.”
“그럼 말해 보거라. 짐의 생각은 어떠한가?”
대전 밖에는 눈보라가 휘몰아치고 있었지만 안은 봄처럼 따뜻했다. 하지만 황제와 범건의 대화로 대전 안에 금방이라도 눈보라가 몰아칠 것 같았다. 범건과 친분이 있는 대신들은 사남 백작이 여느 때와 달리 황제 앞에서 왜 저렇게 무리수를 두는지 몰라서 초조했다.
잠시 후, 범건의 목소리가 대전에 조용히 울렸다.
“신 범건, 아들과 떨어져 지낸 지 16년이 되었습니다. 이제 겨우 만난 지 몇 개월인데 또다시 떨어져 지내야 한다니 참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범건의 ‘참기 어렵다’는 말이 대전에 메아리치다가 누구의 귀로 흘러 들어갔는지 모르게 흩어졌다.
황제는 상대가 자신에게 하는 말인 줄 알고 빙긋이 웃었다. 어릴 적부터 함께 자란 친구이긴 하지만 자신이 범한을 북제로 보내려는 진정한 의도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자신을 가장 잘 이해하는 사람은 진평평뿐인 듯했다.
“그리 오랜 기간은 아니네. 봄에 갔다가 가을이 되면 돌아올 걸세. 그것도 못 참는다는 말인가?”
황제는 범건이 다른 말을 꺼내지 않자 미소를 지으며 바로 명령을 내렸다.
“호부 상서가 늙고 병약하여 이미 요양을 떠난 지 오래이니 그간의 노고를 치하한다. 이에 호부 좌시랑 범건이 그 직위를 이어받아 상서직을 받들도록 하라.”
조정 대신들은 크게 반대하지 않았다. 일찍부터 범건은 호부에서 절대적인 권력을 행사하긴 했지만 정식으로 직위를 부여받은 것은 아니었다. 이에 시커먼 속내를 가진 몇몇 대신들은 범 시랑이 자신의 처 유씨를 정실로 맞이했기 때문에 황제가 그를 호부의 수장으로 임명한 것이라며, 이럴 줄 알았으면 진작 범 시랑이 유씨 부인을 정실로 맞이했어야 한다는 둥 수군거림이 끊이지 않았다.
물론 조정 대신들은 황제가 범건에게 하사한 직위가 범한을 북제로 보내는 것에 대한 일종의 보상이라고 생각했다.
범건은 이 일을 더 이상 돌이킬 가망이 없다는 것을 알았기에 평온한 얼굴로 나아가 머리를 조아리며 황제에게 감사 인사를 올렸다. 황제는 다시 임약보에게 발길을 돌려 웃으면서 말했다.
“재상 대인, 따님이 시집간 지 얼마 되지 않아서 범한을 북제로 내보내려 하는데, 무슨 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신지요?”
재상 임약보는 쓴웃음을 지으며 앞으로 나와 예를 갖춰 인사를 했다. 경국의 황제와 신하들 사이가 서로 스스럼없이 좋아 보이긴 했지만 실제로는 황제의 위엄이 있어 아무리 측근이라도 감히 선을 넘을 수 없었다. 그는 앞서 범건의 반응이 살짝 이해되지 않았는데 막상 황제가 자신을 지목하여 물어보니 두말할 것도 없이 자연스럽게 침착하게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범한도 이제 단련이 필요한 때인 듯하옵니다.”
조회 후 황제는 기분이 좀 나아진 듯 가마에 올라 후궁으로 돌아갔다. 대신들은 높은 궁의 담장을 따라 난 길로 나서며 호부 상서 자리에 오른 범건에게 잇달아 축하 인사를 전했다. 이제 앞으로 경국의 모든 재물을 관리할 정당한 명분이 생긴 것이다.
예부 상서 곽유지가 빈정거렸다.
“범건 대인, 앞으로 저희 대신들의 봉급이 모두 대인 손에 달렸습니다. 너무 인색하게 굴지 않으시리라 믿습니다.”
범건이 허허거리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곽 대인, 농담도 잘하십니다.”
곽보곤이 몇 차례 범한에게 혼쭐나긴 했지만 조정에서 두 사람의 사이에 반감이 있진 않았다.
밖으로 나가던 임약보가 헛기침을 하자 앞서가던 신하들이 재상에게 예를 갖춰 인사를 했다. 그러고는 분명히 사돈과 따로 할 얘기가 있을 거라는 생각에 황급히 자리를 떠났다.
“범건 대인, 폐하께서 왜 굳이 범한을 북제로 보내시려고 하는 걸까요?”
이미 사돈 관계를 맺은 두 사람 사이에 겉치레는 불필요했다. 범건이 쓴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혹시 범한을 진짜로 훈련시킬 생각이신 건지…….”
그는 말을 그렇게 하면서도 속으로는 그 빌어먹을 절름발이가 틀림없이 뒤에서 무슨 수작을 부리고 있다고 생각했다. 잠시 돌이켜 생각해 보니 범한이 경도를 떠나면 황태자와 2 황자의 포섭에서도 벗어나게 될 것이고, 황자가 군사를 이끌고 경도로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는 것도 좋은 선택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임약보도 범건과 같은 생각을 하긴 했지만 황제가 자신의 사위에 대해 너무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아 무척이나 염려스러웠다. 설마 정말 신아 때문은 아니겠지?
재상 대인은 고개를 흔들더니 웃었다.
“대보가 요즘 계속 산에 있으니 범건 대인께 너무 많은 폐를 끼치는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별말씀을요. 모두 한 가족이지 않습니까. 이제 한 달 정도 지나 완연한 봄이 돼서 범한이 경도를 떠나고 나면 완아를 재상 댁으로 자주 찾아뵙게 하겠습니다.”
“예. 요즘은 대보도 그 댁에 가 있으니 집 안이 조용합니다. 범건 대인께서도 시간이 나시면 저희 집에 한번 들러 주시지요.”
범건이 미소를 지어 보였다.
“재상께서 말씀하시는데 제가 어찌 따르지 않겠습니까.”
* * *
인적이 드문 외진 곳. 두 대의 마차 그리고 십수 년간 범한의 뒤에 있던 늙지도 않는 음모자, 두 사람은 여전히 각자의 마차에 숨어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제가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그를 감찰원과의 관계에 끌어들이고 싶지 않단 말입니다.”
방금 호부 상서가 된 범건의 목소리는 기쁜 내색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을 만큼 냉담했다.
맞은편 마차에 있던 진평평이 낮은 소리로 말했다.
“범한을 북제로 보내는 건 나와 감찰원과는 아무런 상관 없다네.”
범건은 마차 옆으로 난 가림막을 열어젖히고 차갑게 말했다.
“상관이 없다고요? 당신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내가 모를 거란 생각은 마시오. 소은이 지금 당신 손에 있으니 죽이고 싶으면 그냥 죽이시지요. 뭐 하러 그 명성에 도전하라고 하겠습니까? 소은은 어떤 사람인가요? 정확히 말씀해 주시지요. 그가 북제에서 돌아온 후에도 그를 죽이려는 거라면 이에 따르는 위험 부담이 얼마나 큰지 분명히 아셔야 할 겁니다.”
“그건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당신의 손에도 폐하의 힘이 일부 실려 있으니 감찰원 안에도 당신 사람이 있는 셈이죠.”
진평평은 여전히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 웃음 속에 은밀한 분위기가 숨겨져 있었다.
“우리 두 사람이 사적으로 만나는 걸 아시면 폐하께서도 썩 기뻐하진 않으실 겁니다. 소은은 죽이든 말든 상관없습니다. 이미 20년 동안 그의 골수까지 쥐어 짜낸 거나 다름없으니 더 이상 남은 건 아무것도 없습니다. 게다가 북제의 젊은 황제도 우리 황자들처럼 큰 포부를 가진 건 아니기 때문에 감히 북위의 밀정 수장을 사용하느냐 마냐는 또 다른 말이죠. 이번에 범한이 북제 사신으로 나가는 것은 전적으로 폐하의 뜻이었어요. 이참에 범건 대인도 생각해 보시죠. 아드님이 경도에 남아서 하루가 멀다 하고 황태자와 2 황자에게 이리저리 끌려다니면 앞으로 더 큰 문제가 생길지도 모르는 일 아닙니까.”
그 순간 범건은 조용해졌다. 그는 이것이 얼마나 중차대한 문제인지 눈치챘다. 범한이 황실의 상속 다툼에 절대 끼어들지 못하게 하겠다는 의미였다. 그는 젖혔던 가림막을 내리고 눈을 감은 채 의자에 기대앉았다. 자신이 10여 년간 보살펴 온 아이와 무시무시한 감찰원 사이에 무슨 일이 생길지 여전히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짐작한 진평평이 차갑게 말했다.
“이미 폐하께서 윤허하신 일이니 안심하시죠.”
아무도 범건의 입가에 냉소가 번지는 것을 보지 못했다. 그는 담담하게 대답했다.
“언빙운이 잡혀갔을 때 감찰원에서 어떻게 하셨죠?”
“당연히 다른 사람이 이어받았죠.”
“평범한 사람을 내몰지 마세요!”
진평평이 웃으면서 맞받아쳤다.
“힘을 더 내셔야겠습니다. 지난번 동이성에서 사람을 보내 장 공주의 궁녀를 찔러 죽인 사건을 가지고 섭중이 줄곧 감찰원에서 한 게 아니냐는 의심을 품어 왔는데, 지금까지도 소문이 돌고 있어 저도 그리 편하지만은 않습니다.”
범건은 순간 움찔했다.
* * *
창산에는 이미 눈이 수북이 쌓였고 저 멀리 온천에서는 뿌연 연기가 피어올랐다. 이리저리 움직이던 두루미는 어디로 갔는지 모습을 찾아볼 수 없었다. 범한은 아버지와 왕계년이 보낸 편지를 꼼꼼히 읽고 나서 손으로 열심히 가루로 만들어 창밖에 내버렸다.
창밖으로 보이는 설경은 무척이나 아름다웠다. 대보와 범사철은 눈사람을 만드느라 쉴 새 없이 떠들고 있었다. 이렇게 보면 범사철도 영락없는 어린아이였다. 더 이상 장부만 들여다보는 고리타분한 장사꾼처럼 보이지 않았다.
범한은 미소가 절로 피어났다. 하늘에서 내리는 이 큰 눈 때문에 경도의 담박서국에서 장부를 가지고 이곳까지는 오는 길은 힘들긴 하지만 일곱째 섭 대행수가 여전히 잘해 주고 있어서 걱정이 없었다. 요즘 들어 서점 사업이 점점 잘되고 있어서 경도의 몇몇 지점은 《반한재 시집》 덕에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아 가는 상황이었고 근처 몇 개 지점도 수금을 시작했다.
어젯밤 범사철은 장부를 하나하나 조사하다가 은전 2만 3천 냥이 들어온 것을 보고 눈이 벌겋게 달아올라 범한에게 단숨에 달려가 《석두기》 후반의 10회 원고를 내놓으라며 닦달했다. 범한은 흔쾌히 대답을 해 주지 못했다. 《석두기》를 쓰는 일로 인해 얼마나 많은 일을 초래할지, 혹시라도 《석두기》를 범한이 쓴 것이라고 알기라도 한다면 이 집안에 무슨 풍파가 일어날지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다.
장 공주도 회신을 했지만 조정에서 그녀의 세력은 여전히 막강했다. 관건은 그녀와 한목소리를 내는 것이 과연 황태자인지 아니면 아직 만나 보지 못한 2 황자인지 알 수 없었다.
범한은 발길이 닿는 대로 서재를 나서며 한겨울 창산의 신선한 공기를 들이마시더니 기지개를 폈켰다. 어디선가 들리는 마작 소리를 따라가 보니 아내와 몇몇 여인들을 쉽게 찾을 수 있었다. 희고 부드러운 손으로 푸른 마작을 이리저리 굴리는 걸 보고 있자니 왠지 모르게 감동이 밀려왔다.
그는 옆에 있던 여동생이 설광에 의지해 2 황자가 보낸 《전조 시집》을 열심히 보고 있는 것을 보니 또 한 번 감동이 밀려왔다.
돼지가 살찌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처럼 역시 너무 유명해지는 것도 그리 좋은 일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범한은 애써 웃음을 지었다. 그날 밤 연회 후 황태자와 2 황자는 겉으론 자신과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처럼 행동했다. 하지만 신 소경과 정왕 세자 이홍성은 백작가에 수시로 드나들었는데, 자신이 창산으로 거처를 옮긴 후였지만 상대방이 보낸 선물을 거절할 수 없었다.
새해가 되고 30일쯤 되었을까, 창산에 있던 범한이 경도를 아주 잠깐씩 왔다 갈 때마다 어떻게 냄새를 맡았는지 한걸음에 달려와 창산에 같이 가자고 끈질기게 졸라댔다. 범한이 승낙하고 말 처지는 아니었기에 결국 마지못해 유가군주를 데리고 올라왔었다.
범한이 방으로 들어가서 멍하니 서 있는 것을 눈치챈 사람은 다름 아닌 유가 군주였다. 그녀가 해맑게 말했다.
“범한 오라버니, 마작 하실래요?”
범한은 ‘오라버니’라는 말에 대보 형님이 생각나서 얼른 손사래를 치며 웃었다.
“계속하시죠. 저는 산책이나 하고 오겠습니다.”
그가 일부러 마다하는 것을 알고 유가 군주가 입을 삐죽거리면서도 혹여나 기분 나쁜 표정이 드러날까 조심하는 모습을 보니 귀엽기도 하고 안타깝기도 했다. 그때 옆에 있던 임완아가 한마디를 툭 내뱉었다.
“여보, 그러지 말고 와서 한번 하세요.”
“괜찮아요.”
범한은 급하게 손사래를 치며 얼른 방을 빠져나왔다. 너무 서둘렀는지 자기도 모르게 발밑에 있던 부드러운 물체를 밟고 말았다. 순간 얼어붙은 범한이 아래를 내려다보니 상자 하나가 놓여 있었다. 상자 안에는 수북이 쌓인 건초에 천 조각이 덮여 있었고 그 위에 통통하게 살이 오른 새끼 고양이 세 마리가 잠을 자고 있었다. 눈을 가늘게 뜬 채 검은 코끝을 찡그리고 있는 모습이 너무 귀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