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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여년-135화 (135/1,108)

135화

산속 생활은 세월을 잊게 만들어 주었다. 그래도 범한은 자발적으로 새벽에는 무공 수련을 하고 저녁에는 시간을 내 오죽에게 암행의 기본기를 배웠다. 이 밖에 대부분 시간은 아내 임완아와 누이동생 범약약과 함께 마음 편히 지내거나, 여인들끼리 모여서 시, 그림, 노래, 마작을 겨루는 걸 바라보며 지냈다. 그러자 하루하루가 정말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갔다.

섭령아와 유가 군주가 잠깐 들러 며칠 묶기도 했다. 그러자 그들만의 작은 시 모임도 열렸다. 유가 군주는 범한이 혼례를 올린 것 때문에 받았던 충격에서 벗어난 것으로 보였다. 한데 열두 살짜리라고는 믿기지 않게 촉촉한 두 눈을 반짝이며 범한에게 시를 지어 들려 달라고 조르기도 했다. 그러면 범한은 말려들지 않고 산으로 호랑이를 잡으러 갈 거라는 핑계를 대고 자리를 피했다.

연말이 다가올 무렵이었다. 가문 학당의 수업에서 겨우 벗어난 범사철은 거들먹거리며 마차에 올라타더니 창산으로 향했다. 창산에 도착한 범사철은 한 달가량 보지 못한 형수를 이끌고 흥겹게 마작을 하기 시작했다. 범사철 입장에서는 도박판에서 임완아란 인재를 만나게 된 건, 절대 고수인 검객이 자신만 상대할 수 있는 또 다른 고수를 찾아낸 것과도 같았다. 다시 말해 범사철은 ‘이 세상에서 나 자신을 이해해 줄 수 있는 자 또 누가 있겠는가!’ 그런 심정으로 임완아를 대하고 있었다.

장원에는 범한과 그의 형제들이 모두 모여 있었다. 그러자 범한은 자신의 형제들뿐만 아니라 자기 처의 형제도 잊지 않고 챙겼다. 범한은 이미 상처가 다 나은 등자경을 시켜 임완아의 큰 오라버니 임대보를 장원으로 데려오도록 했다. 또한 데려오는 동안에는 왕계년과 그의 일행에게 암암리에 호위를 명해 아무런 문제가 일어나지 않도록 했다.

이날 점심 식사를 끝낸 후 범한은 종에게 마차를 준비시켰다. 그리고 임완아와 단둘이서 산 아래 10리 떨어진 곳까지 나가 임대보를 맞이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마차 대열이 보였다. 마차가 멈추자 등자경이 서둘러 범한 내외에게 문안 인사부터 올렸다. 임완아는 그가 범한의 첫 번째 수하임을 알고 있던 터라 그에게 온화하게 화답해 주었다. 하지만 그 짧은 순간에도 임완아의 마음은 벌써 마차 안으로 가 있었다.

“꼬마 범한!”

더 이상 설명이 필요가 없을 정도였다. 그 호칭을 듣는 순간 대보가 마차에서 내렸다는 걸 알아차릴 수 있었으니까 말이다. 범한이 씁쓸하게 잠시 소리 내어 웃더니 이내 주먹 하나를 다른 손으로 감싸 쥐고 인사부터 올렸다. 그런 후 다가가 몇 달 보지 못한 사이 몸이 더 불어난 손위 처남을 맞이했다. 임대보는 주변 산세와 경치를 보고 조금 이상했는지 입을 크게 벌리고 바보처럼 웃었다.

“경도에는 눈이 훨씬 조금 내렸는데.”

창산에는 눈이 크게 내려 길가에도 눈이 많이 쌓여 있었다. 오라버니의 머리 위에 내려앉은 눈을 보자 안타까운 마음에 임완아는 다가가 눈을 떨어 주었다. 그리고 자신이 준비한 여우 털로 만든 외투를 몸 위에 걸쳐 주며 원망하듯 말했다.

“아버님도 너무하시지. 창산이 추운 건 잘 알고 계셨을 텐데 옷을 여러 겹 입혀 보내야 한다는 건 모르셨나 보네.”

그러자 범한이 살며시 웃었다. 하지만 속으로는 재상 대인은 남자고 또 지금 재상가에는 여인이 몇 없으니 아무리 대보를 아낀다 한들 알뜰하게 챙겨 줄 수는 없었을 거라 생각했다. 범한은 이내 고개를 돌려 등자경에게 물었다.

“오는 길에 무슨 일 없었죠?”

“네, 없었습니다.”

등자경이 침착하게 대답을 이어 갔다.

“산으로 들어오는 입구에서 겨울을 나러 들어오는 다른 마차가 샛길을 빼앗는 일은 있었습니다. 하지만 우리 쪽이 재상가 마차인 것을 보고는 길을 양보해 주었습니다.”

경도의 지체 높은 분들은 겨울에는 설경을 구경하러, 여름에는 피서를 즐기러 창산에 오는 걸 좋아했다. 그래서 산으로 들어오는 입구에는 병사가 지키고 있었다. 이에 범한은 등자경에게 일어났던 일은 별거 아니라고 생각하고 마음에 두지 않았다. 그리고 인사차 두어 마디 한 후 곧장 산으로 올라갈 채비를 했다.

그런데 뒤쪽에서 갑자기 급히 달려오는 말발굽 소리가 들려오더니 잠시 후 마차 한 대가 범한이 있는 곳으로 기세등등하게 올라왔다. 한데 범한이 있던 곳이 하필 길이 갈라지는 길목이어서 순간 여러 대의 마차게 모이게 되자 그 마차는 더 이상 움직일 수 없었다.

“바로 저들입니다.”

등자경이 조금 난처하다는 듯 말을 이어 갔다.

“도련님, 도련님이 화내실까 봐 말씀 안 드린 게 있습니다.”

그 마차 안에 있는 종들은 길목이 막혀 있자 욕부터 내뱉었다. 범한은 눈을 가늘게 뜨고 바라보다가 그 마차가 예부 상서 곽유지의 것이란 알게 되자 저도 모르게 살짝 웃고 말았다. 하지만 이 순간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범한 쪽에서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그사이 저쪽에서는 이쪽 마차가 누구네 것인지 정확히 본 상태였다. 아까 산 아래에서 먼저 길을 차지했던 재상가 마차였다. 재상가 마차여서 싸움을 걸 수 없다는 걸 알게 되자 예부 상서가의 종들은 순식간에 화를 누그러뜨렸다.

“아무리 재상가의 마차라지만 이렇게 길을 막아 놓고 못 가게 하면 안 되지! 우리가 길을 양보해 줬으면 서둘러 지나가 줘야 하지 않나?”

예부 상서가의 마차 안에서 익숙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그리고 이내 화려하게 차려입은 공자가 마차에서 내려 등자경 일행을 향해 손가락질하며 훈계하기 시작했다.

“얼른 비키지 못할까! 임약보 재상께서는 아직 경도에 계신데 너희는 창산에서 대체 무얼 하고 있는 게냐!”

“곽보곤 형님?”

범한이 너무나 반가워하며 소리가 나는 쪽을 향해 두 손을 모아 가슴에 올리고 인사했다.

곽보곤은 자신을 유난히 친근하게 부르는 소리가 들리자 아는 사람과 마주쳤다는 생각에 활짝 웃는 얼굴을 하고 몸을 돌렸다. 그런데 이럴 수가! 검은 주먹 놈이라니! 곽보곤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싹 사라지고 난처한 기색이 역력히 드러났다. ‘누구라고? 범한이 왜…….’라고 생각하는 그의 눈에는 긴장 말고도 두려움도 역력히 드러나 있었다.

시 모임에서, 경도 관아에서, 기년전에서 곽보곤은 범한에게 큰 잘못을 저질렀었다. 그런데 그럴 때마다 상대방은 경도에서 더 유명해졌다. 다시 말해 자신이 범한을 못살게 굴면 범한은 그때마다 오히려 명성이 훌쩍 올라갔다. 게다가 범한은 이미 그 여인과 혼인을 했고 또 혼례를 올릴 때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는 곽보곤도 잘 알고 있던 터였다. 이에 곽보곤은 재수 옴 붙었다는 생각에 다시는 범한을 만나지 않기만을 바라고 있었다. 그런데 오늘 이렇게 마주치다니.

범한은 곽보곤의 모습에 속으로 혀를 차며 탄식했다. 그리고 속으로 ‘곽보곤이야말로 운 나쁘기로는 사람도 신도 다 애석해하겠는데. 왜 또 나와 마주쳐 가지고!’라고 생각했다.

범한은 예부 상서가의 마차가 10여 마리 토끼처럼 산 아래로 질주해 내려가는 걸 보며 손목을 문질렀다. 그때 임완아가 다가와 작은 소리로 말했다.

“아무 이유도 없이 사람을 산 아래로 쫓아내면 어떡해요! 겨우 황궁 편찬이기는 해도 황태자 오라버니의 측근이에요. 그러니 언젠가는 정무에 참여하게 되겠죠. 게다가 창산이 우리 가문만의 것도 아닌데 다른 사람들이 이 사실을 알게 되면 우리가 횡포를 부렸다고 할 거예요.”

“쫓아내지 않았어요.”

범한은 서둘러 아내의 말을 바로잡아 주었다. 그런데 범한의 맑고 아름다운 얼굴 위에 조금 이상한 미소가 떠올랐다.

“나는 그냥 밤중에 차나 마시러 찾아가겠다고 했어요. 그랬더니 저렇게 내빼지 않습니까.”

임완아는 범한이 온화하게 말하자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이런! 경도에서 상공이 싸움꾼 검은 주먹인 건 다 아는 사실이에요. 한밤중에 찾아간다고 했으니 곽보곤이 이상하게 여기고 당연히 도망갈 수밖에요. 상공보다 명성도 떨어지고 주먹도 약하잖아요. 그러니 도망가는 거 말고 다른 수가 있겠어요?”

등자경이 또 서신을 들고 왔다. 서신에 범건의 걱정이 은근히 드러나 있는 것을 보니 범한이 조금 우려하고 있던 일이 조정에서 일어난 듯했다. 하지만 서신의 내용만 가지고 판단해 보면 이번 일은 장 공주 쪽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어 보였다. 범한은 이맛살을 찌푸리며 ‘대체 어떤 일이길래.’라고 생각했다. 범한은 왕계년으로부터 정보가 오기만을 기다렸다. 그리고 왕계년이 적어 온 내용과 아버지의 서한 두 장을 서로 대조해 본 후에야 어떤 일이 일어난 건지 분명히 알 수 있었다.

“경상(經商)에서 처리하던 정무를 지금은 감찰원에서 처리하고 있다니. 그런데 이런 방식이 얼마나 더 지속될까?”

범한은 한밤중에 내리는 눈을 바라보며 쓴웃음을 짓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범한은 북제에 가는 임무가 결국에는 자신에게 떨어졌고 자신은 ‘접대 부사’라는 감투를 쓰게 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그는 자신에게 이러한 일이 일어난 건 두 가지 이유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우선 지난번 연회 석상에서 술을 마시고 저지른 짓 때문에 너무 튀는 사람이 되어서였다. 그래서 창산으로 들어와 숨어 지냈음에도 그 여파를 잠재울 수 없었다.

다음으로는 직접적으로 만난 적 없는 진평평이 원장이, 그러니까 어머니의 옛날 전우가 자신에게 감찰원을 맡기겠다는 의사를 매우 명확히 표시한 것 때문이었다. 이 점은 비개로부터 증명된 사실이기도 했다.

그런데 만약 감찰원을 범한 자신이 이어받는다면 재상이 하는 일보다 더 힘든 일을 떠맡게 되는 것이었다. 그런데 겨우 집안 배경과 자신의 별 볼 일 없는 명성만 가지고는 천여 명에 달하는 감찰원의 음험한 밀정들에게 두려움을 심어 줄 수 있을 리 만무했다.

게다가 감찰원은 6처에 속한 일반적인 관청이나 기관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능력 없는 사람이 맡는다면 잠시 그 자리에 있을 수는 있어도 제대로 통제할 수는 없는 곳이었다. 그리고 감찰원은 황제 폐하가 가장 믿고 의지하는 특무 기관이라 가장 필요한 건 바로 안정이었다.

그래서 이 모든 상황을 고려해 진평평 원장이 북제로 가는 임무를 범한에게 넘긴 것이었다. 만약 언빙운을 성공적으로 구출해 오면 범한은 단번에 1처 수장 언약해의 호감을 사게 돼 언빙운 공자가 경도로 돌아온 후에는 즉시 감찰원 원장직을 이어받아도 되는 것이다. 더군다나 비개와 진평평이 암암리에 작업해 놓은 터라 범한은 감찰원 8처 수장 중 절반 정도에게 지지를 받을 수 있도록 되어 있었다.

한데 문제는 아버지 범건이었다. 아버지는 아들이 안전하게 황실 금고를 이어받아 편안히 부자나 되기를 바라고 있었다.

둘 중 대체 누구를 선택해야 하는 건지. 사실 범한은 자신에게 주어진 발언권이 크지 않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관건은 황제 폐하의 선택이기 때문이다. 황제 폐하를 떠올리니 이맛살이 더욱 강하게 일그러졌다. 만약 자신이 지금 조금씩 감찰원을 이어받고 있는 중이라면 이는 어떤 두려운 예상을 증명하는 것밖에 되지 않아서였다.

외교 사절단으로 북제에 가는 일은 자신의 이름에 도금을 하고 더 빛을 낼 기회이기도 했다. 하지만 범한은 만약 자신이 고작 누런 동에 불과하다면 아무리 도금을 해도 진짜 황금이 될 수 없다고 생각했다. 비록 아직까지 감찰원 계획 중 가장 위험한 부분은 모르고 있었지만 그래도 이번 북제행에서 분명 무슨 일이 일어나리란 것 정도는 충분히 예측할 수 있었다.

창밖에는 눈보라가 일고 있었다. 하지만 장원 내부에서는 길게 뻗은 행랑을 통해 간혹 즐겁게 웃는 소리며 붉은 불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그래서 눈은 내리고 있었지만 범한에게는 참으로 따뜻한 밤이었다.

범한은 서한 두 개를 손바닥 위에 올려놓더니 낯빛 하나 변하지 않고 가루로 만들어 버렸다. 그러고는 창문을 열고 그 가루를 눈밭에 뿌려 다시는 찾을 수 없도록 만들었다. 열린 창문으로 들어온 차가운 밤바람이 범한의 얼굴을 덮쳤다.

방 안의 촛불도 잠시 어두워졌다가 다시 밝게 타올랐다.

“얼른 창문 닫아 줘요. 얼어 죽겠어요.”

일찌감치 이불 속으로 들어간 임완아가 입과 코는 따뜻한 이불 속에 그대로 둔 채 얼굴을 반만 내밀었다. 그리고 범한을 바라보며 두 눈으로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있었다.

‘얼른 자요! 대보 오라버니는 원래 말을 잘 들으니까 그냥 여자들과 저러고 놀게 두고 걱정하지 말아요.’

범한은 미소 띤 얼굴로 침대에 다가가 앉았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손을 뻗어 이불 속에 넣더니 아내의 풍만한 가슴을 부드럽게 주물렀다. 그러고는 입으로는 밖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다.

“대보 형님은 당연히 착하죠. 한데 우리의 저 착한 남동생에 대해서도 알아 둘 필요가 있어요. 그냥 내버려 두면 또 내일 형님을 데리고 곰을 잡으러 간다고 할 거예요.”

혼례를 치른 지 이미 오래건만 임완아는 아무 때나 불쑥 들어오는 상공의 늑대 같은 손길에 아직 적응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에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고 눈에서는 눈물이 왈칵 쏟아질 것만 같았다. 임완아는 손을 들어 자기 가슴 위에 놓여 있는 음탕한 손을 잡아 저지했다.

“왜 또 점잖지 못하게 이러는 거예요!”

“부인께서 내게 자러 들어오라 하니 내 어찌 점잖게 굴 수 있겠습니까?”

범한이 웃으며 손으로 등불을 껐다. 그러자 부부만 있는 방에는 고요함이 흘렀다. 부스럭대며 옷 벗는 소리가 나더니 범한은 걸치고 있던 마지막 옷마저 벗어 버리고는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 임완아는 범한의 차가운 몸이 닿자 부르르 떨며 말했다.

“매일 이렇게 늦게 침소에 드는데도 나는 상공이 책상 앞에서 무엇을 했는지도 모르고 있어요.”

“이게 바가지 긁는 건가요?”

범한은 어린 처를 놀렸다. 임완아의 나이는 아직 만 열여섯도 안 된 상태였다. 만약 전생의 세계에 살고 있는 중이라면 현재 완아는 아직 부모님 품에 있는 어린 아가씨였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여기에서는 지금 자신의 처가 되어 밤마다 잠자리를 요구받고 있으니 그녀가 좋아서 받아주는 건지, 아니면 참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이런 생각을 하는 와중에도 범한의 손바닥은 저절로 임완아의 부드러운 가슴을 만지며 장난을 치고 있었다. 범한은 얇은 옷 한 겹 위로 느껴지는 풍만하고 매끄러운 감촉이 너무나도 좋았다.

임완아가 작게 음, 하고 소리를 내더니 범한의 품으로 쏙 들어왔다. 범한은 고개를 숙여 임완아의 통통한 입술을 자신의 입에 담았다. 두 사람의 몸이 서서히 부대끼기 시작하자 실내 온도도 올라가는 것만 같았다. 두 사람의 몸은 이미 달아올라 있었다.

* * *

구름이 흩어지고 비가 멈추고 안개도 사라지면 언젠가는 꽃도 피고 지기 마련이다.

창밖에는 여전히 눈보라가 휘몰아치고 있지만 이불 속은 여전히 따뜻한 봄이었다. 피곤해진 임완아가 수줍게 고개를 숙이고 범한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범한은 그런 처를 사랑스럽게 바라보다가 손가락으로 그녀의 입술을 쓰다듬었다. 그런데 불쑥 경묘에서의 닭 다리가 생각나는 건 뭔지…….

“당신…… 당신…… 손도 안 닦았잖아요.”

임완아가 부끄럽기도 하고 화도 나 고개를 홱 돌렸다. 하지만 범한은 웃으며 온화하게 말했다.

“뭐가 더럽다고 그럽니까? 우리 완아 몸은 안 깨끗한 데가 없는데!”

임완아는 부군이 부끄러운 말을 더 하기 전에 서둘러 화제를 돌렸다.

“북제에 가는 건가요?”

범한이 임완아를 꽉 끌어안고는 반문했다.

“나랑 한평생 같이 살고 싶지 않아요?”

“네?”

범한은 어둠 속에서 완아의 표정을 볼 수는 없었지만 분명 상공이 왜 이런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며 긴장하고 있을 게 뻔하다고 생각했다. 이 세계에서는 여인이 출가하면 남편을 따르게 되어 있었고 중도에 이혼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임완아는 화가 나 재빨리 질문을 던졌다.

“상공, 왜 그런 질문을 하나요?”

이제야 자신이 부적절한 질문을 던졌음을 안 범한은 쓴웃음을 지으며 얼버무렸다.

“그냥 물어본 것뿐입니다.”

사실 범한은 아직도 전생의 습성을 몇 가지 지니고 있었다. 그래서 비록 완아와 혼인을 하고 합환주까지 마시기는 했지만 그래도 이 귀여워 죽겠는 소녀 입에서 듣고 싶은 말이 있었다.

“그냥 물어본 거라고요?”

임완아가 반신반의하며 부드럽게 말을 이어 갔다.

“상공은 지금 사사와의 일을 생각하고 있는 거군요.”

그 말에 범한은 경도에 일부러 두고 온 사사 생각이 났다. 등자경은 그녀가 경도에서 꽤 잘 지내고 있다고 했다. 한데 할머니께서 벌여 놓은 이 일은 결국 언젠가는 범한이 해결해야 할 문제였다.

범한이 임완아를 안심시켰다.

“그런 생각을 할 새가 어디 있겠습니까. 우리 두 사람이 평생 함께 지내기로 약속했으니 당연히 오래오래 같이 지내야 하지 않겠어요? 게다가 당신 어머님께서 나를 탐탁지 않게 보시는 거 잘 알잖아요.”

범한의 말은 임완아에게 신선하고 재미있게 다가왔다. 특히 ‘평생 함께 지내다’란 표현은 귀로 쏙 들어와 그녀의 마음을 훈훈하게 해주었다. 범한의 해명에 매우 만족한 임완아가 은근하게 화답했다.

“시집을 왔으니 남편을 따라야죠. 그게 내가 할 도리니까요.”

“그럼 다 끝난 얘깁니다!”

어둠 속에서 범한은 온화해 보이게 살짝 미소를 짓고는 작은 소리로 말했다.

“경도에 계신 황실 어르신들께서 마작판을 크게 벌이셨는데 당신의 상공인 내가 패나 될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

그러자 임완아가 미소를 지었다.

“사람을 때리는 건 제가 상공만 못하죠. 하지만 마작은 당신보다 내가 더 낫습니다.”

이는 범한이 기년전에서 장묵한이 피를 토하도록 만들 때 한 말을 응용한 것이었다. 이 말이 벌써 경도에 파다하게 퍼졌던 것이다.

* * *

창밖에는 눈보라가 몰아치고 있었다. 그런데 잠을 이루지 못한 범약약은 우산을 들고 밤하늘 먼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암석 절벽 끝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조심스레 서 있었다. 그녀는 웃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가장 존경하고 흠모했던 오라버니가 혼인을 했으니 자신은 이제 어떻게 해야 하나, 하는 생각에 마음이 공허한 상태였다. 오라버니인 범한은 자신에게 범사철처럼 평생을 바칠 무언가를 찾으라고 했다. 이때 그 무언가는 감정일 수도 시와 그림일 수도 있었다. 한데 범약약은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며 무엇을 쫓아야 하는지 아직도 모르고 있었다.

눈송이가 우산 위로 떨어지며 범약약의 마음을 때렸다.

그 순간 언제나 검은 천을 얼굴에 두르고 다니는 오죽이 아무도 모르게 뒤로 다가와 감정 없는 목소리로 그녀의 귀에 대고 말했다.

“비밀을 지킬 수 있습니까?”

* * *

다음 날 새벽, 범한이 무공을 연마하고 돌아왔을 무렵이었다. 임대보가 여우 털로 된 외투를 두르고 만족한 표정으로 장원 아래쪽 절벽을 바라보고 있는 게 범한의 눈에 들어왔다. 범한은 까딱 잘못하다가는 임대보가 절벽 아래로 떨어질 것만 같았다. 이에 서둘러 다가가 작은 소리로 물었다.

“대보, 지금 뭘 보고 있어요?”

그러자 임대보는 바보같이 입을 벌리고 웃으며 범한에게 보라는 듯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꼬마 범한, 저기에 크고 흰 새가 있어.”

저 멀리 산속에 흰 안개가 보일락 말락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검은 목과 검은 꼬리 깃털을 가진 백학이 고개를 숙이고 먹이를 먹고 있다가 갑자기 고개를 치켜들고는 노래를 불렀다. 학은 한동안 맑게 노래를 부르더니 다시 날개를 펼치고 아름답게 춤추기 시작했다.

범한은 살짝 놀랐다. 이리 추운 겨울에 어떻게 창산에 학이 남아 있을 수 있는 건지, 설마 저기에 온천이라도 있는 건 아닐까 생각했다. 학은 본래 구속을 싫어하고 자유로운 걸 좋아하는 동물이다. 그래서 저 멀리서 춤을 추고 있는 학은 보기에도 기분 좋고 자유로워 보였다. 범한은 저도 모르게 깊이 숨을 들이쉬었다가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대보, 저 학들이 좋아요?”

“싫어!”

의외의 답변이 돌아와 놀랐지만 범한은 미소 짓는 얼굴로 다시 물었다.

“왜요? 설마 춤이 안 예뻐서 그래요?”

그러자 임대보가 두툼한 입술을 모으고는 말했다.

“계속 뛰니까 너무 피곤할 거야. 그래서 대보는 놀랐어.”

범한이 소리를 내며 웃었다. 그러고는 손위 처남의 튼실한 어깨를 토닥였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경도로 온 후 범한을 가장 편하게 해준 건 임대보와의 세 차례 대화였다. 어쩌면 대화를 나누는 상대가 정말로 어린아이 같아서 자신이 아무런 걱정을 할 필요가 없어서 그랬던 건 아닐까.

학들의 춤은 아름답기는 했지만 임대보 말대로 피곤해 보이기는 했다.

“대보, 한동안 어떻게 놀았어요?”

그러자 임대보는 미간을 활짝 펴며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한데 어떻게 해서든 똑똑히 설명해 보려 더듬거리면서 대답하기 시작했다.

“정…… 정……말 좋았어. 마작도…… 하는데 꼬마 뚱땡이가 화냈지만, 정……말 재밌었어.”

범한은 웃으며 돌바닥 아래로 펼쳐진 소복하게 눈 쌓인 수풀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저 멀리 보이는 안개와 안개 속 백학을 한동안 아무 말 없이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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