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3화
문밖을 나서니 창산의 새벽바람이 정면으로 불어와 임완아는 꽁꽁 얼어붙어 부들부들 떨었다. 하지만 시간을 지체할 수 없기에 슬그머니 웃고는 끝에 있는 다른 방으로 가 문을 똑똑 두드렸다. 눈을 게슴츠레하게 뜬 범약약이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서둘러 일어나 문을 열었다. 옷을 한 겹 밖에 걸치고 있지 않아 너무 추웠던 범약은 손을 비비고 얼굴을 찡그리며 물었다.
“이리 일찍 무슨 일이세요?”
지금까지 수줍고 귀엽기만 한 모습에 가려져 있던 임완아의 살짝 극성스러운 성격이 창산에 오더니 드디어 드러나고야 말았다. 임완아는 혀를 빼꼼 내밀더니 범약약의 허리를 끌어안고는 그녀를 이끌고 따뜻한 이불 속으로 파고들었다. 그러고는 편하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범약약은 다른 사람과 한 침대를 써본 적이 없어 그런지 느낌이 이상했다. 그런데 범약약의 기분은 아랑곳하지 않고 임완아는 너무 친밀하게 굴었다. 안은 것도 모자라 그녀 얼굴 옆에 자신의 얼굴을 바짝 가져다 대더니 그 자세로 질문을 던졌다.
“언니의 오라버니가 매일 날이 밝기 전에 어디에 가는지 알아요?”
범약약은 허리에 둘린 손이 차게 느껴졌다. 만약 오라버니가 지금 이 상황을 알게 된다면 가슴 아파할 거란 생각에 서둘러 그녀의 손부터 덥혀 주며 불편한 기색으로 말했다.
“두 사람은 부부인데 그걸 왜 저한테 물어보세요?”
그러자 임완아가 우습다는 듯이 대꾸했다.
“그분은 매일매일이 비밀투성이예요. 그 비밀을 얘기해 주기 싫은 거라면 매일 저녁 우리 둘이 방 안에서 이야기 나누며 바둑을 둘 때 오라버니가 어디 가는 건지 말해 줄래요? 안 궁금했어요?”
듣고 보니 원래 차분했던 범약약도 조금 의심이 들기는 했다. 오라버니는 아침마다 정해진 시간에 무공을 연마했고 이는 범약약도 아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최근 요 며칠 저녁마다 잠시 사라졌다 돌아오는데 그 이유에 대해서는 그녀도 모르고 있었다.
“오라버니는 아침에는 무공을 연마하시고 저녁에는…… 잘 모르겠어요. 다음에 또 그리 나가시면 물어보지요, 뭐.”
임완아가 이상하다는 듯 말했다.
“무공 연마요? 무슨 무공이요?”
“많이 궁금하셨군요.”
“당연하죠!”
임완아의 눈동자가 산장에 있는 물이 가득한 호수처럼 반짝 빛났다.
“지아비가 무엇을 하고 다니는지 부인으로서 궁금해하는 건 당연한 거예요!”
범약약은 새언니에게는 황실 사람 같은 습성이 그다지 없다는 걸 이제야 알게 되었다. 그런데도 어딘가 자신보다 조금 더 극성스러운 면이 있어 저도 모르게 웃고 말았다.
“만약 제가 혼인한 사람이라면 이렇게나 추운 날에는 차라리 이불 속에서 실컷 자는 편을 택할 거예요. 이렇게 추울 때 방에서 뛰쳐나온 걸 오라버니가 아시게 되면 꾸지람을 들어야 할걸요. 그러면 제가 끼어들어서 편들어 주지도 못해요.”
임완아는 범한이 화를 내면 어떻게 되는지 아는 게 없었다. 다만 부군의 성정은 알고 있던 터라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러다가 갑자기 방긋 웃으며 물었다.
“‘만약 혼인한 사람이라면’이라고요? 지금은 늦가을이니 이제 보니 우리 집안 아가씨에게도 이제 곧 춘곤증이 오겠군요!”
이불 속에서 두 사람이 너무 가까이 붙어 있어서인지 아니면 부끄러워져서인지 몰라도 범약약의 얼굴이 살짝 달아올랐다. 그런 범약약이 언짢은 기색으로 말했다.
“대체 왜 그러세요!”
말을 마친 범약약은 손을 뻗어 간지럼을 태웠다. 그러자 임완아가 어머, 하고 소리치며 손을 뻗어 반격했다. 침대에서 이리저리 장난을 치니 청춘 소녀들의 호흡은 더욱 거칠어져만 갔다.
* * *
범약약은 결혼한 아낙의 손놀림을 이길 수 없었다. 이에 숨을 가쁘게 몰아쉬며 어쩔 수 없다는 듯 침대에서 일어나더니 갑자기 임완아를 꽁꽁 싸매기 시작했다. 그리고 산바람이 목으로 파고들지 않을 거란 확신이 들자 범약약은 그제야 그녀의 손을 이끌고 오라버니를 찾으러 산장을 나섰다.
하늘이 어슴푸레 밝아 오기 시작했다. 산장 사람들도 새벽일을 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누구도 두 사람이 도둑처럼 밖으로 나가는 걸 신경 쓰지 않았다. 창산 산허리 일대가 범씨 가문의 영지였으니 아무도 이들을 방해하지 않은 것이다. 두 여인은 새벽이슬을 밟으며 조심스레 숲속 작은 길을 따라 산으로 들어갔다.
“이쪽이 맞아요?”
범약약이 이맛살을 찌푸리며 말을 이어 갔다.
“산이 크니 길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조심해야 해요.”
“염려 마요!”
임완아가 웃으며 범약약을 안심시켰다.
“감이 왔어요. 상공이 어디에 있는지 느낌이 왔거든요.”
범약약은 미덥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이 직감을 믿어 주기로 했다. 그런데 생각만 그리했을 뿐 실제로는 발아래 흙을 유심히 살피며 걸었고 결국에는 누군가 지나간 흔적을 발견했다. 그녀는 이리도 조용하고 한적한 산길을 걸어간 사람은 오라버니일 것이며, 오라버니가 아니라면 이렇게 아무도 없는 산을 올라갈 만큼 고아한 흥취를 지닌 사람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두 여인은 단풍이 든 나뭇잎을 헤치고 옷에 이슬방울을 묻히며 숲을 지나 산기슭까지 이르렀다. 비개가 준 약을 먹고 몸이 많이 좋아졌으니 다행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임완아는 여기까지 올 수도 없었을 것이다. 새언니의 얼굴과 귀가 빨갛게 달아올라 있자 범약약은 안쓰러운 마음에 그녀 얼굴을 닦아 주었다. 그리고 바람막이 옷의 단추가 풀렸다는 걸 알려 주었다. 이렇게 두 사람은 앞만 보며 나아갔다.
그러다 두 사람은 직접 보지 않았다면 믿지도 않고 몰랐을 깜짝 놀랄 장면과 마주하고 말았다.
산기슭 아래로 창산에서는 보기 힘든 완만한 구릉이 펼쳐져 있었다. 그리고 가을 서리를 맞았는데도 유난히 파릇파릇한 풀이 습지를 덥고 있었다. 위를 올려다보니 열 장은 족히 되어 보이는 기이한 형세의 험준한 암벽 절벽이 있었다. 그리고 암벽 사이사이에는 황죽(黃竹)이 검처럼 삐쭉삐쭉 하늘을 향해 솟아나 있었다.
암벽 위에는 사람 하나가 있었다. 그 사람은 바로 홑옷만 입고 있는 범한이었다. 그리고 그 순간 암벽 위에서 뛰어내리려고 하고 있었다.
임완아는 그 장면을 보자마자 너무 놀라 비명을 질러 범한의 행동을 저지하려 했다. 한데 순간 부드럽고 차가운 손이 그녀의 입을 가로막았다.
범약약은 눈을 가느다랗게 뜬 채 절벽 위에 있는 오라버니를 바라보며 임완아에게 강한 척 냉정하게 말했다.
“걱정하지 마세요!”
범약약은 대체 무엇을 믿고 이런 말을 한 건지…….
범한은 이내 절벽 위에서 수직으로 내려오고 있었다. 이리저리 튀어나온 암벽 사이를 뛰어 내려오고 있었다.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밟을 수 있는 곳만 아슬아슬하게 밟으며 수직으로 내려왔고 갈수록 가속도가 붙었다. 게다가 대나무 끝에 찔릴 뻔한 적도 여러 차례.
하지만 범한은 타고난 예측 능력이라도 지닌 사람처럼 장애물을 만나기 전 한발 앞서 방향을 돌리거나, 두 번 방향을 틀기 전에 발이 떨어지는 위치를 선정하거나, 반동으로 만들어진 힘을 이용하거나 해가며 대나무에 찔리지 않고 스치듯 피했다.
이는 모두 체내에 흐르는 패도의 기를 따른 덕분이었으며 이로써 지니게 된 강한 통제력 덕분이었고, 오죽에게 배워 자연스레 익힌 본능 덕분이었다.
범한은 그 모든 동작들을 번개처럼 짧은 순간에 해냈다. 검은 광선이 내리치는 것처럼 죽림 사이를 이리저리 피하고 암벽을 지난 범한은 습지에 안착했다. 바닥으로 내려온 범한이 슬쩍 고개를 돌렸다. 헌데 그 순간 두 여인이 서 있자 깜짝 놀라 물었다.
“어떻게 두 사람이 여기에……?”
숨은 전혀 흐트러지지 않은 상태였다. 하지만 범한이 스치고 내려온 험준한 절벽 위 군데군데 솟은 대나무들은 마지막 숨을 몰아쉬기라도 하는 듯 촤라락 흔들리고 있었다.
임완아와 범약약은 그 장면에 너무 놀라 입이 떡 벌어져 있었다. 두 여인은 범한이 외양간 거리에서 8등급 고수를 죽인 사실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절벽 위에서 수직으로 낙하하는 위험한 장면은 그녀들이 생각하고 있던 무공과는 여전히 거리가 있었다.
범한의 정확도, 냉정함 그리고 능력, 이 모든 것이 그녀들에게는 충격이었다.
오라버니인 범한을 가장 신뢰하고 있고 임완아보다 훨씬 담담한 범약약이었지만 이번만큼은 그녀도 저도 모르게 가볍게 감탄사를 내뱉고 말았다.
“오라버니, 대체 어떻게 하신 거예요?”
범한이 풀밭에서 걸어 나오더니 두 여인을 바라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러고는 두 사람의 정수리를 양손으로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말했다.
“평소에 늘 하는 무공 연습일 뿐인데.”
범한은 과거 담주에서 본, 오죽 아저씨의 무시무시한 절벽 수직 낙하 장면을 떠올렸다. 그리고 만약 이 두 사람이 그 광경을 보았다면 분명 이 둘은 조금 전 본 자신의 낙하 장면은 별 볼 일 없어 쳐다도 안 봤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범한이 이내 이맛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이리 이른 새벽에 여기까지 온 거야? 산에 산짐승도 많은데 말이야.”
범약약이 임완아를 한번 쳐다보고는 살짝 웃으며 말했다.
“새언니가 깰 때마다 오라버니가 안 보인다고 해서 제가 오라버니를 찾으러 데리고 나왔어요. 오라버니가 어떻게 무공을 연마하는지 궁금하기도 했고요.”
범은 추위로 붉게 상기된 아내의 얼굴을 보고는 그녀의 코끝을 부드럽게 만져 주었다. 임완아는 상공이 누이동생 앞에서 자신에게 애정 표현을 하는 게 적절한 행동이 아니란 생각에 부끄러워하며 범한의 손을 살짝 피했다. 한데 이때 임완아는 상공이 이리도 대단한 고수일 줄 몰랐다는 생각을 하며 어느새 조금 전 본 광경 속으로 마음이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그러자 그녀의 생각을 알아차렸다는 듯 범한이 미소 띤 얼굴로 고개를 내저었다.
“내가 대단하다고 생각하지 말아요. 누가 그러던데 내 실력은 4등급 이상, 6등급 미만이라고 하더군요.”
임완아는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범한을 바라보았다.
“어려서부터 황궁에서 자라 7, 8등급 이상의 고수는 수도 없이 봐왔어요. 그런데 상공, 당신이 그들보다 훨씬 대단하던데요.”
“그렇습니까?”
범한이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리고 그녀의 말을 흘려버리고는 골치 아프다는 듯 말했다.
“비개 스승님의 약이 효과가 있기는 해도 창산의 새벽바람은 거세요. 이렇게 돌아다니다가 감기라도 들면 어쩌려고 그럽니까?”
그러면서 범한은 그녀 목에 둘린 모피를 단단히 여며 주었다. 그리고 당부했다.
“나는 어려서부터 매일 무공 수련하는 게 습관이 돼 있어요. 그리고 일찌감치 말해 주지 않은 건 내 잘못이 커요. 그래도 다음부터는 절대 이렇게 나오지 말아요.”
범약약은 오라버니가 새언니를 생각하는 마음이 지극하자 저도 모르게 덩달아 기분이 좋아져 미소 지은 얼굴로 두 사람을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한데 범한은 느닷없이 고개를 돌려 그녀에게 차갑게 쏘아붙였다.
“약약아, 너도 다음부터 이렇게 나오지 말아라!”
오라버니가 자신에게 화를 내자 범약약도 서둘러 뭐라 말하려 했다. 하지만 순간 눈물이 앞을 가리고 목이 잠겨 버리고 말았다.
“제가 잘못했습니다. 이후로는 꼭…….”
범약약이 하려던 나머지 말은 ‘새언니를 잘 돌보겠습니다.’였다. 한데 임완아가 다급히 불쑥 끼어들어 자신이 그녀를 끌고 나왔다며 범약약을 두둔했다.
그러자 범한이 돌연 범약약의 머리카락과 차가운 귀를 문지르며 따스하게 말했다.
“새언니는 원래 몸이 약하니 그렇다 쳐. 그렇다고 너는 이 추위에 멀쩡할 줄 알았니? 동상에라도 걸리면 어찌 시집을 가겠니?”
범한이 말을 마치자 두 여인은 그가 정말로 화나서 그런 게 아님을 알게 되었다. 그러자 두 사람은 눈앞에 있는 이 젊은 남자가 보여 준 처를 향한 사랑과 누이에 대한 다정함에 절로 행복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