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2화
두 사람은 지금 황궁 안이라 그들 뒤에는 상궁이며 태감, 궁녀 등이 잔뜩 따르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모두 고개를 숙이고 어느 정도 거리를 유지하고 있었다. 이에 범한은 조금 전까지 신혼부부가 한 말들을 그들은 듣지 못했으리라 생각했다.
범한이 임완아를 정면으로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부인, 나에게 좀 배우십시오. 그래야 표정 하나 안 바꾸고도 경천동지할 일들을 할 수 있어요.”
이 말에는 다른 의미도 숨어 있었다. 하지만 임완아는 그 숨은 의미까지 모두 이해하지는 못했다. 오늘 두 사람은 혼인 후 첫 입궁한 것이었다. 그래서인지 후궁들은 임완아가 찾아오자 이 귀여운 여인을 끌어안고 기쁨의 환성을 질렀고 이것저것 선물을 챙겨 주었다. 범한은 그녀들이 주는 선물을 거절하지 않고 넙죽넙죽 받았다. 그런데 마마님들이 임완아를 예뻐하는 모습을 볼 때마다 마음 한편이 서늘해졌다. 황족인 장모님을 두었으니 나중에 부부간 다툼이라도 난다면 자신은 처형되어 땅에 묻히지도 못할 거란 생각이 들어서였다.
황제에게는 모두 네 명의 아들, 즉 한 명의 황태자와 세 명의 황자가 있었다. 이는 어떻게 보면 그가 호색한은 아니란 걸 증명해 주는 것이기도 했다. 정말 희한한 건 황궁에 후궁이 이리 많은데도 공주를 낳은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다는 점이었다. 그러니 어려서부터 황궁에서 자란 임완아는 마마님들의 사랑을 독차지할 수밖에 없었다.
임완아는 황궁 생활이 익숙했기에 범한이 처음 입궁했을 때처럼 긴장해 조심하는 모습은 전혀 없었다. 오히려 제집에 돌아온 양 뒤뜰에서 장난을 치며 놀았다. 이런 임완아에게 영향을 받은 것도 있고 또 자기가 가장 꺼리는 장 공주가 지금 신양에 가 있기도 해 범한은 마음 편히 임완아를 따라 황궁 곳곳을 거닐었다.
아까 두 사람이 걸으면서 이야기를 나눈 창산 휴가 건은 황후를 알현했을 때 범한이 제안한 사항으로 이미 여러 마마님들에게까지 허락을 받은 일이었다.
그런데 임완아가 추위를 잘 타는 바보였다니.
그렇다 할지라도 범한은 이미 마음을 굳힌 상태였다. 내년에는 경국과 북제가 정식으로 포로 교환을 시작하기로 되어 있었다. 왕계년을 통해 감찰원 쪽 일을 듣고 있던 범한은 이 포로 교환이 자신과 연관이 있을 것만 같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조용한 곳에서 일련의 일을 처리하고 준비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애석하게도 이번 황궁행에서 범한은 처외삼촌인 황제 폐하를 알현하지 못했다. 이에 임완아는 살짝 실망한 기색을 내비쳤다. 반면 범한은 속으로는 전혀 그렇지 않은데도 겉으로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행동했다.
* * *
백작가에서 마차 행렬이 위풍당당하게 출발했다. 오늘 임약보 재상까지 딸을 배웅하기 위해 나서다 보니 마차 행렬 규모가 처음보다 훨씬 커지고 말았다. 그러자 거리에서 지켜보고 있던 사람들이 손가락질하며 수군대기 시작했다. 며칠 전 재상가와 백작가가 혼례를 치를 때도 경도의 절반이 들썩였는데 며칠이나 지났다고 백작가의 ‘시선’ 공자는 또 이런 야단법석이냐고 말이다.
“어째 혼례를 올리자마자 경도를 떠날꼬.”
인파 속에 있던 한 노인이 뒷짐을 진 채 이맛살을 찌푸렸다.
“요즘 젊은것들은 가문 위세만 믿고 여기저기 쏘다니며 노는 것만 알지. 범 공자란 자도 듣자 하니 태학원 봉정씩이나 된다던데 왜 또 창산으로 가느냔 말이여.”
“이보세요. 뭘 모르시나 보죠?”
옆에 있던 젊은 사람이 노인을 비웃으면서 설명해 주었다.
“범 공자는 이번에 밀월을 하러 떠나는 겁니다. 그래서 일부러 외진 곳을 찾아가는 거라고요.”
“밀월이 무엇이여?”
한 아주머니가 흥에 올라 질문을 던졌다.
“꿀처럼 달콤하게 지낸다는 뜻입니다.”
그러자 백작가와 먼 친척 관계에 있는 어느 가난뱅이 서생이 비웃으며 설명을 이어 갔다.
“여태 그것도 몰랐습니까? 범 공자가 직접 만든 신조어라고요.”
그러자 아주머니가 화를 냈다.
“그런 이상한 단어를 왜 알아 둬야 하는지 모르겠네. 그러니까 그 밀월인가 하는 게 조용한 데 가서 며칠 지내는 거면 거기서 즐겁게 지내다가 포동포동한 아기 만드는 거 아닌감?”
* * *
경도를 떠나는 마차 안 왼쪽에는 임완아가 앉아 있었다. 그녀는 모피 안에 웅크리고 앉아 봄을 머금은 것 같은 촉촉한 눈동자와 웃는 눈매로 범한을 바라보고 있었다. 또 오른쪽에는 상냥하고 예절 바른 범약약이 있었다. 범약약은 귤의 껍질을 까고 다시 세심하게 흰 부분까지 벗겨 내더니 과육을 쪼개 범한의 입에 넣어 주었다.
범한은 눈을 반쯤 감은 상태에서 임완아의 표정을 곁눈질로 보다가 참지 못하고 이맛살을 찌푸리며 말을 꺼내고 말았다.
“이제 겨우 가을인데 아무리 추운 게 싫어도 그렇지 어찌 벌써부터 그러고 있는 거예요?”
그러자 임완아가 웃으며 모피 속에서 기어 나오더니 범한에게 찰싹 붙어 입을 벌렸다. 범한은 그 순간 가슴이 설레서 그녀가 범약약에게 말하는 걸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언니, 나도 귤 먹여 줘요.”
범약약이 살며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폐병에는 귤을 먹으면 안 돼요. 화(火) 기운이 위로 솟구친다고요.”
그러자 임완아가 얼굴을 찡그렸다.
“아, 짜증 나.”
범한은 뜻밖에도 처와 누이동생 간에 호칭 정리가 안 된 것을 알고 두 사람에게 물었다.
“대체 호칭이 어떻게 된 거지?”
그러자 임완아가 혀를 입술 밖으로 살짝 내밀었다.
“전부터 언니라고 부르던 게 습관이 되어 그래요.”
범약약도 웃음을 터트리더니 손가락으로 범한을 가리키며 말했다.
“두 사람이 혼례를 치르기 전에 부르던 게 습관으로 굳어졌나 봐요.”
범한은 체념하며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마차 안은 따뜻했다. 그리고 경도를 나선 후로는 계속 울퉁불퉁한 산길을 달렸으니 쉬이 피곤해질 수밖에 없었다. 임완아는 범한의 어깨에 더 가까이 기대기 시작했고 범약약 역시 턱을 괸 채 마차 벽에 기대어 쉬었다.
임완아는 범한의 어깨에 기대 잠들어 있었다. 그런데 별안간 마차가 흔들리자 놀라 잠에서 깨 두 눈을 비비며 물었다.
“도착했나요?”
“어찌 벌써 왔겠습니까?”
범한이 웃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창산 별장은 별궁만 못할 겁니다. 게다가 산허리에 있어서 경도에서 나와 사흘 정도를 가야 해요.”
임완아가 평온한 표정으로 범한을 바라보았다.
“혼인 후 서둘러 경도를 떠난 거잖아요. 요양 때문만은 아니고 또 다른 이유가 있는 거지요?”
범한은 그녀를 속일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리고 속일 생각도 없었다. 이에 미소를 지으며 임완아의 질문에 대답해 주었다.
“당신의 두 사촌 오라버니들이 매일 백작가로 사람을 보내고 있어요. 나는 그들이 무섭거든요. 그러니 숨는 수밖에요. 지금 어느 쪽으로 붙을지 정한다면 어느 쪽에 서든 둘 다 바보 같은 선택이 될 거예요.”
경도를 떠난 지 이틀이 지났을 무렵 마차 행렬은 산허리를 느긋하게 지나고 있었다.
창산의 웅장함은 이루 말로 다 형용할 수 없을 정도였다. 수백 년 전 한 제왕이 수십만 명의 사람을 동원해 산에 마차가 다닐 수 있게 길을 닦는 공사를 강행했었다. 창산을 자신의 피서지로 사용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이 도로에 어마어마한 비용과 백성들의 노동력이 동원돼 보수 공사가 진행되기도 했었다. 그런데 보수가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 공사를 진행했던 제왕이 자기 비(妃)들의 보드라운 몸 위에서 죽고 말았다. 그것도 이 보수한 도로를 단 한 번도 직접 이용해 보지 못한 채로.
수백 년 동안 천하의 흥망성쇠가 얼마나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경도와 가장 가까이 있는 이 거대한 산은 차츰 황족들과 관료들의 후원으로 자리 잡아 갔다. 그리고 이전 황제 때부터 몇 가지 법령이 반포되자 그러한 분위기는 더욱 견고해져, 춥고 매서운 산바람조차도 창산을 파고든 관리들의 입김을 내몰지 못했다.
법령이 반포되자 창산에서는 수렵, 개간, 나무 태우기 등의 행위가 금지되었다. 가난한 민중들이 산에서 할 수 있는 모든 일이 금지된 것이다. 그리고 창산은 순전히 돈 있는 자들을 위한 휴가 명승지로 자리 잡았다. 이에 지금의 창산은 몇 군데 남아 있는 사당에서 고행하는 수련자, 은둔자가 지내는 곳을 빼면 모두 황제가 일부 대신들에게 상으로 나누어 준 땅이 된 상태였다. 그리고 이곳은 조정 대신들이 별장을 짓고 정사를 돌보면서 쌓인고단함을 푸는 곳이 되었다.
범씨 일족의 별장은 산허리에 지어졌다. 선대 황제가 붕어하기 반년 전에 좋은 자리를 골라 하사해 준 곳이었다. 사방이 고요했고 별장 앞에는 맑고 작은 계곡물이 흘렀는데 산봉우리에서 떨어진 단풍잎이 이 계곡물을 타고 흘러내려 왔다. 계곡 옆에는 노란 꽃이 군데군데 피어 있었고 공연을 할 수 있는 누각이 있었다. 한데 때마침 맑고 서늘한 늦가을이고 하늘에서는 가끔씩 기러기가 날아가니 이루 말할 수 없이 적막하고 고요했다.
범한 일행이 도착하자 산장 안은 금세 사람들 소리로 넘쳐났다. 산장 청소는 선발대로 출발해 도착한 사람들이 일찌감치 해놓은 상태였다. 그리고 말린 과일이며 산짐승 고기 등을 백작가에서 별도로 넉넉히 준비해서 보냈다. 도련님, 아씨 마님 그리고 아가씨가 이곳에서 얼마나 지내다 갈지 딱히 정해진 게 없기 때문이었다. 백작가에서는 본가에서 노래 부르는 여인 셋도 함께 딸려 보냈다. 이에 산장에서는 날마다 노랫가락이 울려 퍼졌다. 어쩌면 노랫소리에 겨울나기를 준비하던 다람쥐들이 수도 없이 놀라 달아났을지도 모른다.
“참으로 좋은 곳이구나.”
종이 방을 정리하는 사이 범한은 평평한 바위가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발밑 멀지 않은 곳에서 피어오르고 있는 운무(雲霧)를 바라보았다. 그러다 저 멀리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는 곳에 있는 푸른 숲이 유난히 선명하게 눈에 들어오자 범한은 절로 감탄사를 내뱉었다.
임완아가 범한의 몸에 살며시 기대고는 미소를 지었다.
“정말로 좋아요. 어렸을 때 창산에 잠시 머무른 적이 있었어요. 그런데 수려함이라든가 그윽한 느낌은 여기 당신 집안의 산장만 못했어요.”
“이제 우리 둘의 집안이지요.”
범한은 표현을 바로잡아 주고는 아내의 옷깃을 조심스레 여며 주었다. 창산은 본래 한기가 강하니 자칫 임완아가 감기에나 걸리지 않을까 걱정되어서였다.
그러자 임완아가 소리 내어 활짝 웃었다.
“알았어요, 상공.”
이로부터 수일 동안 이들 젊은 남녀는 조용한 산중에서 세상 그 누구보다 평안하고 행복한 하루하루를 지냈다. 범한은 세상과 단절된 채 여러 날을 지내는 이 상태를 즐겼다. 매일 임완아를 데리고 미끄러운 산길을 걷거나 아니면 누이동생 뒤에 서서 그녀의 긴 속눈썹을 본다든가, 창산의 아름다움을 어찌 종이 위에 옮길지 고민을 하면서 말이다.
청산에서 지내는 나날 동안 혼례를 치른 임안와와 범한은 제대로 된 부부의 삶을 보내고 있었다. 이 신혼부부는 서로 반하고, 담벼락을 넘나들며 만나는 전율을 느끼고, 또 한껏 걱정하는 과정을 거친 후 이곳에서 최종적으로 마음 놓고 ‘사랑’한다는 게 무엇인지 제대로 느끼고 있었다. 격정이 끝난 후 찾아온 은은한 향기가 더욱 지속적인 향을 내뿜는 것처럼 말이다.
어느 날 새벽녘이었다. 임완아가 부스스 눈을 뜨고 무의식적으로 통통한 팔을 살며시 움직이다가 곁에 있어야 할 사람이 사라지고 없는 걸 발견했다. 이리도 따스한 이불을 마다하고 상공은 대체 어디로 간 걸까.
하지만 임완아는 놀라지 않았다. 첫날밤 이후로 그녀는 범한이 매일 아침 일찍 일어난다는 걸 알고 있었다. 어디에 갔다 오는지는 몰랐지만 나중에 자신이 잠에서 깨기 전에는 슬그머니 방으로 돌아와 있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임완아는 줄곧 궁금했었지만 본가에 있을 때는 알아볼 방도가 없었다. 하지만 여기는 집안 어르신이나 자신을 성가시기 따라다니는 보모도 없는 창산 아닌가. 임완아는 눈을 또르르 굴리고는 침대에서 일어나 두툼한 방한용 옷을 몸에 걸치고 부드러운 신발을 신고는 도둑처럼 슬그머니 문을 열고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