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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여년-131화 (131/1,108)

131화

다음 날 새벽, 까치가 나뭇가지 위에 앉아 계속해서 울어 댔다. 까치 소리가 들리니 점점 노랗게 물들어 가는 나뭇잎도 경사스러운 기운이 물들어 훨씬 노곤해지는 것만 같았다.

범한이 문을 열고 기지개를 활짝 켰다. 얼굴에는 아직 피곤함이 가시지 않았지만 눈동자만큼은 그 어느 때보다도 맑게 빛나고 있었다. 범한이 하품을 한 후 웃음을 짓더니 뒤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어서 나오지 않고 뭐 해요, 하루 계획은 새벽에 세운다 하지 않습니까. 당신 이름이 신아(晨儿)인데, 그건 새벽이란 뜻 아닙니까. 당신이 바로 새벽인데 계속 늦잠 자기예요?”

그러자 부끄럼 섞인 임완아의 다급한 대답이 방 안에서 들려왔다.

“당신처럼 수치심을 모르는 사람은 처음입니다. 얼른 문 닫아요.”

범한이 하하 웃었다.

“어제 혼례를 치렀으니 지금은 모두 피곤할 거예요. 그러니 이리 이른 아침에 깨 있는 건 우리 둘뿐일걸요!”

범한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뜰 여기저기에서 갑자기 사람들이 나타나 남자건 여자건 할 것 없이 범한을 향해 인사를 올렸다.

“도련님, 기침하셨습니까.”

범한은 깜짝 놀라 서둘러 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잠시 후, 어린 여종들이 방 안으로 들어와 신혼부부를 도와 씻기고 옷을 입힌 후 두 사람을 데리고 밖으로 나왔다.

범한이 조심스레 임완아의 손을 잡아 주더니 불만에 찬 처의 얼굴을 살피며 미소를 지었다.

“어젯밤에는 스승님을 모시느라 함께 있는 시간이 줄었네요. 그러니 오늘은 더 일찍 들어오리다.”

임완아는 어려서부터 황궁에서 자란 터라 언행이 각별히 조심스러웠다. 그런데 오늘 이상한 소리를 즐겨 하는 사람을 부군으로 삼았다는 걸 알게 되자 부끄러워하며 범한을 꾸짖었다.

“또 점잖지 못하게…….”

범한은 살짝 차가운 임완아의 작은 손을 잡아끌며 미소 지은 얼굴로 정색하며 말했다.

“호수에 다녀온 후 우리 둘 다 경전을 삐딱하게 보기 시작하지 않았습니까.”

“또 그러는군요.”

“오늘부터 나를 상공이라 불러 줘요.”

“그러죠, 상공.”

임완아가 부끄러워하며 부탁을 들어주는 모습은 범한에게는 그야말로 사랑스러움 그 자체였다.

범한은 ‘상공’이라는 두 글자를 듣자 패를 가지고 노는 마작이 생각났다. 그러다 이번 생의 기묘한 만남이, 또 광란의 지난밤이, 화촉동방의 아름다움이, 황제에게 쫓겨난 장 공주가 연달아 떠올라 저도 모르게 은근히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내가 다른 사람보다 확실히 더 많은 패를 가진 것 같습니다.”

경도에 들어온 후 범한은 이제야 비로소 행복을 찾았다는 기분이 들었다. 이에 소리를 낮춰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원 나이트 인(ONE NIGHT IN) 경도, 우리는 수많은 정을 나누었지요.”

범한의 품에 있던 임완아는 범한의 노랫말에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무고한 큰 눈동자는 한마디도 못 알아듣겠다고 말하고 있었다.

* * *

화원 모퉁이를 돌면 백작가 본가였다. 이곳은 지금 온통 들뜬 분위기였다. 남녀 종들이 열을 맞춰 양쪽으로 서서 신혼부부를 맞이했다. 종들은 아씨 마님이 대단한 신분이란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범씨 일족들도 어젯 혼례식 때 황궁에서 보내 준 하례품들에 압도되어 있는 상태였다.

며느리가 건넨 차를 마신 범건은 행복한 표정으로 두 사람에게 자리에서 일어나라고 했다. 그리고 이어 임완아에게 재상의 건강이 어떤지에 대해 물으며 대화를 나눈 후 두 사람에게 편히 지내라는 말을 건넸다. 범건은 아들과 며느리가 함께 있는 모습을 바라보며 안도감을 느꼈다. 옆에 있던 범약약도 오라버니의 행복을 진심으로 빌어 주었다.

두 사람이 자신들의 저택에 돌아와 있을 때였다. 밖에서 시끌시끌한 소리가 나 어린 종이 문을 열고 내다보았다. 경도 외곽에 위치한 범씨 가문 장원 사람들이 선물을 들고 찾아와 있었다. 이들은 굳이 범한과 임완아를 찾아올 필요가 없는 사람들로 그냥 오고 싶어 찾아온 것이었다. 그런데 그들 사이에 등자경 부부도 있어 범한을 깜짝 놀라게 만들었다.

“다리는 다 나았나요?”

범한이 상석에 앉아 등자경의 다리를 관심을 갖고 바라보았다. 이에 등자경이 웃으며 대답했다.

“일찌감치 다 나았습니다. 하오나 걸을 때 조금 불편하긴 합니다.”

범한이 옆에 있는 임완아에게 미소 띤 얼굴로 말했다.

“전에 당신에게 보낸 준 노루 고기며 흰 고라니 고기는 모두 등자경이 가져다준 것입니다.”

임완아가 살며시 미소를 짓고 고개를 살짝 까딱하며 인사했다. 하룻밤 사이에 일개 소녀에서 한 집안의 안주인이라니. 그녀가 안주인 노릇을 하는 걸 보니 인생이란 언제나 갑자기 변하기 마련이라는 말이 맞긴 맞나 보다.

잠깐 대화를 나눈 후 등자경 부부는 쉬러 가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문밖을 나설 때 등자경의 아내가 이상하다는 듯 작은 소리로 말했다.

“아씨 마님에게 유난히 귀티가 나네요. 한데 몸이 연약해서 도련님과는 맞지 않는 분 같아요.”

그러자 등자경이 깜짝 놀라 아내에게 주의를 주었다.

“아씨 마님께서는 진짜 귀한 분이셔. 그러니 말조심해. 들키는 날에는 그날로 입 찢어지니까.”

그런데도 아내는 어린 티 나는 임완아를 생각하며 이유도 없이 웃다가 불쑥 몇 마디 했다.

“한데 신부가 신랑보다 인물이 떨어져서 조금 웃기네요.”

그러자 등자경 역시 웃으며 말했다.

“경도에서 도련님보다 더 예쁘장한 아가씨를 찾기가 쉬운 일은 아니지.”

이제 다른 말을 해볼까. 담주 별저에 있는 노부인도 범한에게 선물을 보냈다. 그런데 노부인의 선물은 거리에서 며칠 지체되다가 오늘에서야 겨우 경도 본가에 도착했다. 어머니의 선물이 도착했으니 범건은 이유 불문하고 친히 문밖까지 나가 선물을 맞았다. 그리고 사람을 시켜 신혼부부에게 이 사실을 전하도록 했다. 범한은 한껏 기분이 들떠 임완아의 손을 이끌고 문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사이 그녀에게 말했다.

“나를 제일 예뻐해 주는 사람은 할머님이십니다. 그런데 대체 뭘 보내셨을까요?”

문 앞에 당도한 범한은 그 자리에서 그대로 얼어 버렸다. 할머니는 정말로 생각지도 못한 선물을 보내 주었다. 바로 한 사람이었다.

사사가 한껏 즐겁고 들뜬 표정으로 자신이 몇 년 동안 모신 도련님을 바라보고 있다가 어느새 고운 자태로 인사를 올렸다.

“도련님을 뵈옵나이다. 아씨 마님도 뵈옵나이다.”

범한은 할머니가 저 먼 담주에서 사사를 경도로 보낼 줄은 생각도 못 하고 있었다. 범한은 자신과 함께 몇 년 동안 평온한 세월을 보낸 이 여인을 보니 기쁘기도 했지만 동시에 이 일을 대체 어찌 처리하면 좋을지 모르겠다는 생각에 머리가 아파 왔다. 할머니의 뜻은 아주 명확했다. 자신에게 사사를 방으로 들이란 것이었다. 게다가 사사의 모습을 보니 할머니가 원하는 것 말고는 다른 해결 방안이 없어 보였다.

“우선 가서 쉬어요.”

범한은 최대한 온화해 보이려 노력했다.

그런데 사사에게는 앞에 있는 도련님이 여전히 조금은 낯설게 느껴졌다. 경도에서 수많은 시련을 겪었을 테니 성정이 자연스레 침착하게 변한 것 같았다. 그런데 그것 말고도 말로는 표현 못 할 기질 같은 게 생긴 것 같았다.

사사가 조금 불안한 기색을 보이자 범한은 웃긴다는 듯 말했다.

“이런, 또 무슨 생각을 하는 겁니까? 배불리 먹고 충분히 쉬면 내가 데리고 나가 경도 구경을 시켜 줄 텐데.”

그러자 사사가 섭섭해하며 말했다.

“사사는 도련님 시중을 들기 위해 왔습니다. 도련님께 제 시중을 들어 달란 적 없습니다.”

범한은 속이 뻥 뚫리는 기분이었다. 어려서부터 자신과 함께 자란 여인이라 그런지 사사는 말과 행동이 꽤 직설적이었다. 자기에게 크게 화조차 내지 못하고, 더욱이 자신의 의견에 대놓고 반박도 못 하는 본가의 다른 여종들과는 사뭇 달랐다.

범한이 사사 앞으로 다가가 조금 마른 그녀의 얼굴을 토닥이더니 웃었다.

“그렇고말고요. 사사가 날 시중들어야지요. 그런데 책을 쓸 먹을 갈아 주기 전에 먼저 씻기는 해야겠지요. 온몸에서 식초 냄새 같은 땀내가 나잖아요. 붉은 소맷자락과 향기에 싸여 한밤의 독서를 하는데 사사가 내게 그 식초 냄새를 풍기고 있다고 다른 이들이 말하게 만들 건가요?”

경국에는 ‘방현령의 부인이 식초를 마셔 자신의 뜻을 밝힌다.’는 전고도, 그와 연관된 이야기도 없었다. 일단 ‘방현령의 부인이 식초를 마셨다’에 관한 전고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방현령은 전생 당나라 태종 이세민 때의 재상이었다. 그에게는 무섭고 엄하지만 살뜰히 챙겨 주는 부인이 있었다. 어느 날 방현령과 태종 이세민이 술을 마시다가 농담을 나누었는데 이세민이 농담으로 한 말을 지키고 말았다. 바로 미인 두 명을 내려 준 것이었다. 무서운 부인 때문에 걱정하던 방현령은 하는 수 없이 그녀들을 집으로 데려갔고 화가 난 부인은 그녀들을 내쫓았다. 이 사실을 알게 된 황제가 재상 부부를 불러들여 혼내 주는데 미인들을 집으로 들이거나 방현령의 부인에게 독주를 마시라고 했다. 방현령이 울며 황제에게 아내를 용서해 달라고 애원하는 가운데 부인은 독주를 마셔 버렸고, 이걸 본 황제가 질투심은 대단하지만 남편에 대한 사랑 역시 지극하다는 것을 알고, 그녀가 마신 건 독주가 아닌 식초임을 알려 주면서 그들을 용서해 주었다. 이후 사람들은 ‘식초를 먹는다(吃醋)’를 ‘질투심’, ‘질투하다’와 같은 의미로 쓰게 되었다. 그러니 방현령 부인이 식초를 마셔 뜻을 밝혔다는 말은, 달리 말하면 방현령 부인이 질투해 자신의 의사를 밝혔다고도 볼 수 있다.

그러므로 방금 범한은 식초 냄새란 말을 통해 은근슬쩍 여인 간 질투심이 일어날 수 있다는 걸 암시하며 비꼰 것이었다. 한데 그 말에 담긴 은근한 맛을 알아듣는 이가 경국에는 없었다. 결국 범한은 조금 전 한 말은 돼지 목에 진주 목걸이 같았다며 유감스럽게 생각했다.

부끄럽고 난처해진 사사는 범한에게 다시 인사를 올리고 여종을 따라 씻으러 갔다. 본가 여종들은 사사라는 여종이 자신들과는 처지가 많이 다른 듯 보여 그녀에게 예의 바르게 대해 주었다.

* * *

“저 여인이 바로 사사인가요?”

“예전에 담주에 있는 여종이 사기보다 부지런하다며 자주 얘기했었는데 오늘에서야 그 사람을 보게 되었네요.”

아무리 임완아가 귀한 군주 신분이고 경국이 아직 남존여비 사회란 걸 감안해도 범한이 보기에 임완아는 사사의 등장으로 까칠하게 변했다거나 앞서 생각하는 구석이 없었다. 이에 범한은 나중에 자신이 첩을 여럿 두려 할 때 당당한 군주 신분인 그녀가 그 여자들을 질투하긴 할까, 궁금증마저 들었다. 하지만 이내 자신은 다행히 그런 일과 아무 관련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만약 자신이 정말로 첩을 들이려 한다면 그때는 단단히 화가 난 이 작은 호랑이에게 자신의 두 팔이 물어뜯길 거라 생각했다.

* * *

“혼인은 사랑의 무덤입니다.”

범한이 케케묵은 말을 툭 내뱉더니 다시 말을 이어 갔다.

“그러니 우리는 많이 걷고 한 쌍의 산송장은 되지 말자고요.”

임완아가 이맛살을 찌푸리며 입꼬리를 아래로 내리더니 불쌍한 사람처럼 말했다.

“나는 추위를 많이 타요.”

“창산은 눈이 멋져요. 가을과 겨울에 유난히 아름다운 곳이에요.”

범한이 살짝 미소를 머금고 아내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리고 여행사 직원처럼 상대를 혹하게 만들려 했다.

“스승님이 만든 약을 먹고 효과를 봐 어의에게 경하한다는 말까지 들었지만, 그래도 해발 고도가 높은 곳에 가 있는 편이 당신 몸에 훨씬 좋아요.”

임완아가 고개를 기울여 범한의 품에 기대더니 두어 번 머뭇거리다가 작은 소리로 이야기했다.

“해발 고도가 무슨 말인지 아직도 모르겠어요.”

“그건 해면보다 얼마나 더 높은지를 뜻하는 말입니다.”

막상 범한도 쉬이 설명할 수 없었다.

“아직도 모르겠어요.”

임완아가 얼굴을 찡그리며 말을 이어 나갔다.

“안 가면 안 되나요? 산에 올라가는 것도 추위도 모두 무서워요.”

그러자 범한은 언짢은 기색으로 말했다.

“당신 얼굴이 얼마나 동그래졌는지 좀 봐요. 나쁠 건 없으니 운동 좀 합시다.”

순간 흥, 소리를 내며 임완아가 범한의 품에서 벗어나더니 얼굴을 찌푸렸다.

“어젯밤에는 내가 살이 붙어 좋다면서요!”

범한은 하마터면 웃음이 터질 뻔했다. 하지만 계속 정색하며 임완아를 진정시키려 했다.

“등불이 꺼진 후에는 통통한 게 좋지요. 하지만 밝은 낮에는 눈으로 보는 거니…… 마른 게 보기 좋죠.”

임완아가 화가나 끄응, 소리를 내더니 앞서 행랑을 걸어가기 시작했다. 범한은 서둘러 따라가기는 했지만 처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지는 못했다. 대신 한 발자국 정도 앞으로 더 나아가 작은 소리로 웅얼웅얼 말했다.

“난 당신의 그 포동포동한 살들이 가장 좋은데 설마 모르고 있었어요?”

가을날 황궁 안에서 임완아는 정면으로 여름 바람이라도 맞은 듯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그리고 앞으로 두 걸음 걸어가 범한의 손을 잡고는 살그머니 말했다.

“뒤에서 따라오는 사람도 많은데 당신은 부끄럽지도 않나 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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