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0화
그런데 느닷없이 범한의 머릿속에 오죽 아저씨가 스치고 지나갔다. 만약 이 대종사님이 평소처럼 구석에 서 있는 걸 좋아한다면 잠시 후 자신들이 침대 위에서 한창 즐거워하고 있을 때 구석에 있는 오죽이라는 유령을 보게 될 게 뻔했다. 그러면 범한은 놀랐을 때 하는 행동을 할 게 뻔했다. 이에 범한이 서둘러 두어 번 헛기침을 하고는 작게 말했다.
“아저씨, 여기 계세요?”
아저씨는 방 안에 없었다.
범한에게 손이 잡혀 있는 임완아는 곧 무슨 일이 일어날 것만 같았다. 이미 부끄러워 죽을 지경인데 갑자기 범한이 아저씨를 부르는 소리를 듣자 갑자기 궁금증이 일어 불쑥 말이 튀어나오고 말았다.
“네?”
“별거 아니에요.”
범한이 미소 지으며 부가 설명을 했다.
“나중에 진정이 좀 되면 당신과 만나게 해줄게요.”
“네.”
임완아는 얼떨떨하기만 할 뿐 누구를 두고 한 얘기인지는 몰랐다.
“부인.”
임완아의 머리 위에는 붉은 천이 씌워져 있었다. 예법에 따르면 이 천은 원래 신랑이 자를 이용해 벗겨야 했다. 한데 범한은 그 규칙을 무시하고 두 손으로 천 양쪽을 살포시 잡고 천천히 벗겼다. 붉은 천이 움직이자 부끄러워하는 여인의 백옥같이 하얀 아래턱이, 또 부드러운 입술이, 살짝 솟은 코끝이, 긴장해 꼭 감겨 있는 두 눈이, 살며시 떨리는 두 눈썹이 차례대로 나타났다.
촛불은 점점 어두워지고 범한은 살짝 긴장한 채로 침대 가장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오른손 엄지로 부인의 귀밑에 자리 잡은 부드러운 턱을 살며시 쓰다듬었다.
* * *
“컥! 컥!”
방 밖에서 때마침 분위기를 깨는 기침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이어서 호위병들이 검을 칼집에서 빼는 소리, 그리고 신음하며 누군가가 땅바닥으로 쓰러지는 소리, 마지막으로 오늘 밤 당직인 왕계년이 놀라는 소리가 차례대로 들려왔다.
범한은 이맛살을 찌푸렸고 어느새 문밖으로 나와 있었다. 몸에 걸친 혼례복이 어두컴컴한 밤이어서 그런지 유난히 더 매력적으로 펄럭였다.
붉은 구름이 지나갔지만 범한은 상대가 누구인지 정확히 볼 수 없었다. 범한은 손을 털고 발걸음을 옮겨 상대방이 자신의 어깨를 치려는 걸 피했다. 그사이 범한은 머리카락에서 가느다란 침을 꺼내 상대방의 어깨에 꽂아 넣은 상태였다. 이 침에는 강력한 독이 발라져 있어 범한은 상대방이 몸이 굳어 다시는 움직이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
곁눈질로 주변을 살펴보니 돌계단 앞에 있는 시위들은 이미 서너 명이 쓰러져 인사불성이 되어 있었고 왕계년은 겁에 질려 자신의 뒤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범한은 깜짝 놀랐다. 이 세상에 내가 만든 독을 맞고도 아직 움직일 수 있는 자가 있다니. 몸 뒤쪽에서 전해 오는 바람을 뚫는 소리와 함께 범한은 끄응 소리를 내며 손바닥을 칼처럼 공중으로 휘둘렀다. 한데 손날로 그자의 얼굴을 베려던 순간 고통스러운 신음 소리와 함께 배를 움켜쥐고 바닥에 무릎을 꿇어 버렸다.
그자는 범한이 벨 수 없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지금 범한은 독까지 당한 상태였다.
범한이 본 자의 모습은 머리카락은 헝클어져 있었고 온갖 고초를 겪은 얼굴에 늙은 사람이었다. 하지만 얼굴을 제대로 본 건 아직 아니었다. 하지만 염색이라도 해놓은 듯한 음침한 담갈색 눈동자는 얼핏 보기에도 공포 그 자체였다.
“스승님?”
범한은 너무 놀라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한데 배가 뒤틀리듯 아파 오자 우선 서둘러 허리춤에서 아무 환약이나 대충 꺼내 먹었다.
그리고 10년 만에 본 비개 스승이 오늘 느닷없는 방문해 준 것에 너무나 감동해 서둘러 앞으로 나아가 인사를 올리고 끌어안고 속으로 욕을 퍼부어 주었다.
* * *
“어째 겉모습은 하나도 안 변했군.”
비개는 서재에 앉아 차를 마시고 있었다. 그리고 여종이 다리를 주물러 주는 것을 즐기면서 옆에 서 있는 범한을 바라았다.
“10년이나 못 봤으니 못 알아볼 줄 알았는데 네 녀석은 아직도 예쁘장하구나.”
범한은 한숨은 내쉬었지만 감히 자리에 앉지는 못한 채 비개의 말에 대꾸했다.
“스승님, 제발 단 한 번만이라도 한밤중에 슬그머니 오지 마십시오. 오해할 수 있습니다. 이 제자, 이제는 침소에서 폭신한 베개를 쓰고 있기는 합니다만 그래도 조금 전 제가 칼로 스승님을 공격했으면 어쩔 뻔했습니까? 스승님은 감찰원 8처를 통틀어 무공이 가장 약하신 분인데 이리도 야행 잠행을 좋아하시면 아주 위험합니다.”
사실 범한은 스승 비개와 재회하는 장면을 수도 없이 상상했었다. 그리고 만약 만나게 된다면 제자와 스승이 부둥켜안고 울거나, 서로 독을 넣은 차를 마시며 각자의 기량을 겨룬다거나 할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혼례를 치른 날, 그것도 화촉동방에 이 스승이란 자가 뜬금없이 나타나 분위기를 깰 거란 생각은 결단코 한 적 없었다.
이에 스승과 헤어진 후 지니고 있던 그리움은 어느 순간 욕구 불만이 섞인 분노로 변해 버렸다. 범한은 하루 종일 ‘서른 몇 해를 참아 왔는데 뭐가 그리 급해.’라는 생각으로 자신을 다독이고 마음을 억눌러 왔던 터다. 한데 소원 성취를 바로 코앞에 두고 늙은 독쟁이가 훼방을 놓으니 꾹꾹 참아 왔던 범한은 급한 마음에 ‘언제든 오셔도 되지만 왜 하필 오늘입니까.’라며 속으로 짜증을 내고 있었다.
한데 비개는 범한의 사정은 생각지도 않고 자기가 하고 싶은 말만 했다.
“방금 동이성에서 돌아왔다. 네가 혼례를 올린다기에 며칠 서둘렀더니 드디어 도착했구나.”
비개의 말에 감동한 범한은 서둘러 허리를 굽혀 큰절을 올렸다. 더군다나 비개는 자신이 이 세계에서 살 수 있도록 가장 많이 힘써 준 두 사람 중 한 명 아니던가.
비개가 범한에게 작은 상자를 건넸다. 상자에서는 옅은 향이 은은하게 새어 나오고 있었다. 범한이 깜짝 놀라 물었다.
“이것이 무엇입니까?”
“제자에게 주는 혼례 선물이다. 마음에 드느냐?”
범한은 비개 스승이 준 선물이니 분명 비범한 물건일 거라 생각하며 상자를 열어 보았다. 안을 보니 손톱만 한 크기의 환약이 몇 알 들어 있었다. 범한은 떨리는 가슴을 안고 손톱으로 환약 위를 살며시 긁어 내 입 안에 넣고 맛을 보았다.
비개는 범한의 행동을 바라보며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옛날 그 예쁘장한 소년이 이제는 청년이 된 모습을 보니 마음이 놓였다. 특히 범한이 옛날 자신이 가르친 직업적인 습관을 그대로 실행하는 것을 보고는 더욱 마음이 놓였다.
“거북이 등껍질이고 초제(醋制)한 것이군요.”
범한이 이맛살을 찌푸린 채 열심히 환약의 성분을 분석해 나갔다.
“지황, 아교, 밀랍…… 하나가 더 있는데 그게 무엇인지 모르겠습니다.”
“일연빙.”
비개의 입꼬리가 득의양양해진 사람처럼 위로 올라갔다.
“일연빙이요?”
순간 범한은 이 환약이 어디에 쓰는 것인지 알 수 있었다. 게다가 스승님의 놀라운 수완을 생각하니 강하게 믿음이 가서 기쁜 마음에 질문을 던지고 말았다.
“그래. 대양 밖에서 나는 약재다. 네 해 전에 동이성에서 장사하는 이에게 구해 달라고 했는데 올해 드디어 구했다더구나. 거기에서 한동안 있었던 건 모두 배 들어올 때를 기다린 거였어.”
말을 마친 비개가 손을 흔들며 시중을 들던 여종을 밖으로 내보냈다.
네 해 전 황궁에서 처음 두 가문의 혼사 이야기를 들었을 때부터 비개는 임완아의 폐병을 고칠 방법을 찾고 있었다는 뜻이다. 자신의 제자가 건강한 부인을 얻도록 해주려고 말이다. 이와 같은 생각이 들자 범한은 감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
“동이성에는 또 다른 이유 때문에도 다녀왔단다.”
범한은 그 이유가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과거 사고검을 치료해 준 인연을 팔아 그들에게 약속을 하나 받아 왔단다. 그들이 나서서 너를 괴롭히는 일은 없게 해달라고 말이다.”
스승의 말을 들은 범한은 그 옆에 찰싹 붙어 앉았다. 첫날밤이 시작되려는 순간 흐름을 툭 끊어 버린 것에 대한 원망은 어느새 사라지고 범한은 감격해 말했다.
“스승님, 환약을 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스승님!”
“이 약은 처음으로 조제해 보는 것이다만 시험은 해보았다. 효험이 있더구나.”
이 말을 할 때 비개는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옅은 갈색 눈동자가 잠시 반짝 빛나더니 그가 말을 이어 갔다.
“한데 부작용이 조금 있으니 똑똑히 들어 두거라.”
“말씀하십시오.”
스승 비개의 신중한 모습을 보니 범한도 절로 엄숙한 표정으로 경청하기 시작했다.
“복용한 후 한 달간 부부 합방을 해서는 안 되느니라.”
비개는 미소만 지을 뿐 진짜 부작용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말해 주지 않았다.
* * *
“정말 독한 분이십니다.”
상대방을 물어뜯어 죽이고 싶은 표정으로 스승의 두 눈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이어 범한은 고통스러워하며 말했다.
“그러면 내일 완아에게 약을 먹여야겠습니다.”
비개는 하마터면 입에 머금고 있던 차를 범한의 얼굴에 뿜을 뻔했다. 비개가 범한의 코를 향해 손가락질하며 말했다.
“너도 참 어지간하구나! 경도에 청루가 저리 많은데 오늘 밤 꼭 그 일을 치러야겠느냐.”
범한이 껄껄 웃었다.
“스승님께서 일부러 절 놀리고 계신 거 다 알고 있거든요.”
비개는 이 예쁘장한 놈한테 두 손 두 발 다 들었다고 생각했다. 10년 전에도 요 녀석을 어쩌지 못했는데 지금은 더 강해져 있다니. 잔뜩 성난 비개가 뾰로통해져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가 전생에 네놈한테 신세라도 졌나 보다. 하는 것마다 어찌 다 네놈한테 들켜 버리는 건지, 원!”
그러자 범한은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나 스승을 위로했다.
“그거야 스승님께서 절 아껴 주셔서 그런 거죠.”
비개가 범한의 두 눈을 바라보며 한동안 침묵했다. 새로 꾸민 서재라 아직 나무 냄새가 나는 가운데 침묵이 더해지자 분위기가 조금 이상했다.
한참 후 비개가 입을 열고 담담하게 물었다.
“경도에 온 지 오래되었으니 감찰원에도 가보았겠구나. 그러고 보니 너도 이제 어떤 일들은 알게 되었겠구나.”
“일부는 알게 되었습니다.”
범한은 순수하게 웃으며 말을 이어 갔다.
“어머님에 대해서는 알게 되었는데 아버님에 대해서는 여전히 모르겠습니다.”
범한은 비개의 두 눈을 바라보았다. 비개는 범한에게서 자신과 같은 노련함, 악랄함, 독함, 부패를 보았고 무언가 압박감 같은 게 느껴져 미소를 지으며 화제를 돌렸다. 화제를 너무 교묘하게 돌린 터라 범한은 순간 되물을 수 없었다.
“너도 잘 알고 있을 것 같구나. 아가씨께서는 왼손으로는 섭가를 세우시고 오른손으로는 감찰원을 건립하셨단다. 지금 사남 백작과 진평평 원장은 모두 네가 그것들을 이어받기를 바라고 계신다. 다만 사남 백작께서는 네가 황실 금고 사업을 물려받기를 바라고 있고, 진평평 원장께서는 네게 감찰원을 물려주고 싶어 하시는 것 같구나.”
그러자 범한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스승님, 예전에 제게 주신 요패가 제사패더라고요. 사실 그 제사패가 지닌 의미를 알았을 때 나중에 무슨 일이 있을지 알아챘습니다. 스승님께서는 제가 어떻게 했으면 하십니까?”
“내 생각은 사실 진평평 원장과 다르다.”
비개는 잠시 머뭇거리다 말을 이어 갔다.
“감찰원은 천자이신 황제 폐하와 지근거리에 있단다. 그러니 무서운 정치적인 투쟁에 쉽게 휘말릴 수 있어. 황실 금고는 비록 단번에 손에 쥐기는 힘든 곳이지만 감찰원보다는 통제하기 쉬울 거야.”
범한은 고개를 끄덕였지만 마음속으로는 씁쓸하게 웃고 있었다. 장 공주가 쫓겨나듯 경도를 떠나기는 했지만 자신과 관련 있었기에 이미 황실 투쟁 속에 빨려든 것만 같아서였다. 범한은 잠시 생각해 보다가 미소를 지었다.
“스승님, 이제 그만 신경 쓰세요. 긴 여정으로 피곤하실 테니 우선 댁으로 돌아가 쉬십시오. 제가 어머님의 유산을 받아들일지 말지는 지금 할 이야기는 아닌 것 같습니다. 뭐, 진 원장 대인과 아버님께서는 모두 제게 물려주고 싶어 하시는 것 같지만 많은 사람들이 원하지 않을 겁니다.”
그러자 비개가 고개를 끄덕이며 심각하게 말했다.
“복잡하게 얽힌 일이지. 더군다나 내 보기엔 재상 대인은 조정에 오래 붙어 계시지 못할 것 같구나.”
범한은 이맛살을 찌푸리며 자신의 장인이 오백안 사건에서 벗어났는데 또 무슨 일이 난 걸까 하며 궁금해했다.
비개는 자신이 내뱉은 말에 대해서는 아무런 설명도 하지 않고 작은 소리로 다른 질문을 던지기만 했다.
“오죽 대인께서는 지금 경도에 안 계시지?”
범한은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바로 대답했다.
“제가 경도로 온 후 곧바로 떠나셨습니다. 남해 쪽으로 섭류운을 찾으러 가신 것 같은데 무슨 일 때문에 그러시는지는 모릅니다.”
비개가 고개를 내젓다가 별안간 범한을 쳐다보고는 이맛살을 찌푸리며 훈계했다.
“듣자 하니 경도에서 시를 즐겨 짓다가 유명해졌다지?”
범한이 쑥스럽게 웃었다.
“스승님께서도 아시다시피 제가 어려서부터 가슴을 먹먹하게 하는 글을 쓰길 좋아하지 않았습니까.”
그러자 비개가 탄식했다.
“이제 보니 그 <소금을 훔쳐 판 신씨 이야기>도 네 녀석이 지어낸 거였구나!”
범한은 그저 소리 내며 웃기만 했다.
비개가 참지 못하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범한을 보고 말했다.
“네 모친은 누가 봐도 놀랄 만한 재주를 지닌 분이셨단다. 그리고 쉰내 나는 썩은 글쟁이들을 제일 얕잡아 보셨어. 그런데 네가 경도로 들어온 후에 그런 조잔한 기술이나 연마하는 데 열을 올리고 있었다니. 만약 하늘에 계신 네 모친께서 보셨다면 열받아 졸도하셨을 거다.”
범한은 어깨를 으쓱이며 어머니는 전생에 공포 그 자체인 이과 출신 박사였을 테니 분명 자신과 가는 길이 달랐을 것이라 생각했다.
“스승님, 옛날에 스승님과 진평평 대인 그리고 오죽 아저씨까지 모두 제 어머님을 따르셨습니까?”
“그렇단다.”
“모친께서는 일찍이 스승님께 약들을 구해 달라 하지 않으셨나요?”
“무슨 약 말이냐?”
“음…….”
범한은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가로저으며 겨우 입을 뗐다.
“춘약이나 사람을 유혹하는 미약이요.”
그러자 비개가 무언가가 생각이라도 난 듯 이상한 표정을 짓고 음흉하게 웃었다.
“이제 막 신혼인데 벌써 그런 것들이 필요한 것이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