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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여년-129화 (129/1,108)

129화

드디어 신랑 신부가 맞절을 하는 시간이 되었다. 범한과 임완아는 붉은 줄을 한쪽씩 잡았다. 두 사람은 줄을 사이에 둔 채 애정 어린 시선으로 서로를 바라보다가 다시 천천히 몸을 굽혀 살포시 맞절을 했다. 그러자 이 질투 나게 아름다운 장면을 보고 있던 범약약은 감동해 눈물을 쏟고 말았다. 반면 옆에 앉아 있던 범사철은 신랑 신부가 맞절하는 모습이 너무 닭살 돋아 온몸이 근질거리는 것만 같았다.

부모에게 절을 할 때 범건은 수염을 어루만지며 앉아 있었다. 그리고 유씨 부인은 조금 머뭇거리다가 어머니가 앉아야 하는 자리에 앉았다. 그러자 혼례를 보고 있던 관원들과 귀족들은 ‘유씨 부인이 언제 정부인이 되었던 거지?’라고 생각하며 어리둥절해했다.

그들은 지금 이 장면이 범한이 한 달 동안 몰래 계획한 결과라는 걸 알지 못했다. 범한은 원한을 덕으로 갚는 부류는 절대 아니었지만 원수를 죽을 때까지 가슴에 새기고 있는 부류도 아니었다. 이에 유씨 부인을 향한 경계를 풀 수는 없었지만 그녀가 아버지께 한결같은 마음으로 신경 쓰는 것을 보고는 유씨를 정부인으로 만든다면 유씨 쪽 세력을 누그러뜨리는 동시에 그녀의 마음을 더욱 편히 만들어 줄 수 있을 거라 생각하게 되었다.

물론 혹시라도 유씨 부인이 나중에 범한에게 나쁜 짓을 할 수도 있었다. 그렇다 해도 이제 범한에게는 자신을 보호하면서 동시에 적에게는 해를 입힐 수 있는 능력이 충분히 있었으므로 그녀가 두렵지 않았다.

추측이기는 하지만 그가 보기에 유씨 부인도 사실은 불운한 사람이었다. 게다가 아버지와의 사이에서 범사철까지 낳지 않았는가. 그러니 범한은 유씨 부인을 저대로 내버려 두고 싶지 않았다. 한데 범건은 범한의 요청에 긍정적인 답변을 주지 않고 있었다. 그러다가 어젯밤 황궁에서 황태후의 허락이 담긴 서신이 도착하자 그제야 요구를 아무 말 없이 받아들였다.

유씨 부인 입장에서는 10년을 참고 견딘 끝에 정부인의 자리에 앉게 된 것이다. 그러다 보니 어색한지 앉아 있는 내내 매끄러운 의자 팔걸이 부분을 만지작거렸고 신부가 건네는 찻잔도 불안하게 받아 들었다. 그리고 차의 맛을 음미하기는커녕 단번에 호로록 마셔 버리고는 이내 신부 옆에 있는 범한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범한을 바라보는 유씨 부인의 눈빛은 어딘가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범한의 눈은 그녀를 보고 있지 않았다. 범한은 미소 띤 얼굴로 아버지에게 차를 올리고 있었다.

이때 유씨 부인의 입꼬리에 아주 힘겹게 살짝 미소가 지어졌다.

혼례식에 참석한 관리들은 내부 사정을 모르기에 당황해서 예식을 지켜보고 있었다. 반면 대청 한쪽에 자리 잡고 있던 유씨 부인의 친정 쪽 관리들은 지금 이 상황을 보며 탄식하고 있었다.

그런데 바로 그때 밖에서 떠들썩한 소리가 들려왔다. 범한이 자리에서 일어났고 수모가 임완아를 부축해 일으켰으며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일제히 밖을 바라보았다.

“성지요! 범씨는 성지를 받으라!”

사남 백작가와 잘 아는 황궁의 후 태감이 환하게 웃는 얼굴로 문을 열고 들어와 성지를 읽어 내려갔다. 오늘이 혼례를 치르는 날이니 범건이든 범한이든 모두 황궁에서도 무슨 계획이 있을 거라 예측하고 있던 터라 그리 놀라지 않았다.

하지만 정원에 있던 6처의 관리들은 성지의 내용에 놀라고 말았다. 후 태감이 성지를 낭독할 때 등장한 하사품들이 아무리 봐도 예법에 맞지 않아서였다. 황궁에서 보낸 하사품은 비단이었다. 한데 그 수량이 규정된 양보다 훨씬 많았다. 일부 하사품은 품계에 따라 주어지는 양이 정해져 있으므로 일개 대신의 아들 혼례에 보내는 하사품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군주나 황자의 혼례식 때 내려지는 하사품처럼 보였다.

그러니 아무리 재상가와 백작가의 혼인이라고는 해도 대신들 눈에는 황실의 관심이 과해 보였다.

범한은 성지의 내용을 들으면서 붉은 천을 쓰고 있는 처에게 작은 소리로 말했다.

“무슨 뜻인지 알아들었나요? 내가 당신 덕을 본 것 같아요.”

붉은 천에 얼굴이 가려져 있는 임완아는 너무나 부끄러웠다.

* * *

후 태감이 물러나자 대신들 모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데 또 밖에서 누군가가 고함을 치기 시작했다.

“범가와 임가의 혼인은 하늘이 맺어 준 아름다운 인연이라 이에 숙 귀비마마께서 선물을 내리셨습니다.”

범한은 깜짝 놀라 임완아와 함께 다시 예를 갖추었다. 숙 귀비가 상으로 내린 것은 진귀한 원서였다. 2 황자의 모친인 숙 귀비가 범씨 가문과 오랜 친분이 있었다니 대신들은 절로 탄성을 내질렀다.

그리고 한참 후 밖에서 외치는 소리가 또 들려왔다.

“범가와 임가의 혼인은 하늘이 맺어 준 아름다운 인연이라 영 재인께서 축하하시었소.”

관리들은 또 놀라고 말았다. 영 재인은 비록 품계는 높지 않았지만 1 황자의 친모로, 1 황자는 줄곧 병사를 이끌고 변방에서 활약했기 때문에 폐하의 신임을 받고 있었다.

영 재인의 선물은 한 자루의 검으로 동이성 출신인 그녀의 성정과도 딱 맞아떨어지는 것이었다. 범한 부부는 어쩔 수 없이 또다시 예를 차리고 쓴웃음을 지으며 검을 받았다. 범한이 처에게 속삭였다.

“보았습니까? 마마님들께서도 선물을 내려 주셨군요. 영 재인마마께서 내려 주신 이 검은 당신께 주신 거예요. 내가 말을 듣지 않으면 이 검으로 찌르라는 뜻일 것입니다.”

임완아는 범한의 말에 부끄러워 죽을 것 같았다. 사람들이 다 지켜보고 있으니 이 뒈질 낭군 놈을 깨물어 줄 수도 없고 참.

숙 귀비와 영 재인이 선물을 보냈으니 황제의 다른 비빈들도 성의를 표했다. 그리고 그다지 잘 알려지지 않은 몇 명은 공동으로 성의를 표했다. 그런데 영 귀빈이 선물을 보낸 이유는 다른 후궁들과는 달랐다. 그녀는 본래 유씨 집안의 사람이었고 어젯밤 유씨 부인이 백작가 정부인이 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터라 축하를 빙자해서 골탕 먹이기에 나선 것이다. 그녀의 선물은 하나였는데 그 하나의 높이가 두 척이나 되어 혼례식에 참석했던 관원들도 깜짝 놀라고 말았다.

마지막으로 황후의 선물이 도착했다. 황후는 일국의 국모여서 그 선물의 격이 남달랐다. 그녀가 선물로 보낸 것은 맑고 투명한 옥으로 만든 여의(如意)였다. 그야말로 말로 설명하기 힘들 정도로 귀한 보물이다.

오늘 혼례에 참석한 대신들은 그야말로 진귀한 구경을 한 셈이었다. 개국한 이래 대신 여럿이 여식의 혼사를 치렀지만 황궁의 높은 분들이, 그것도 이리도 많은 분들이 선물을 보내 주는 경우는 처음이었다.

물론 임완아의 진짜 신분을 알고 있는 고위 관료들은 어떻게 된 일인지 다 알고 있었다. 임완아는 단순히 장 공주의 사생아가 아니었다. 그녀는 황제와 황태후의 총애를 받으며 어려서부터 황궁에서 자랐다. 그러니 후궁들도 그녀에게 남다른 정을 갖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차츰 손님들이 안정을 찾을 무렵 6처 관원들은 조금 전에 왜 그런 일이 있었는지 드디어 알게 되었다. 그러자 그들은 제법 진중한 표정과 아까와는 다른 눈빛으로 신부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드디어 핵폭탄급 사건이 터지고 말았다. 황제의 친필이 들어간 어서(御書)를 태감들이 보물처럼 떠받들고 백작가로 들어온 것이었다. 정원에 있던 사람들 모두 무릎을 꿇고 황제의 어서를 맞이했다.

“하늘의 뜻을 받들어 황제께서 이르노니, 범한과 임완아의 혼인은 아름다운 시기에 하늘이 맺어 주신 것이니 친히 글 한 폭을 써 기념으로 남기노라.”

범건과 범한은 조심스럽게 어서를 받아 들고 그것을 펼쳐 하객들에게 보여 주었다. 새하얀 종이에 행복한 백년해로를 바란다는 ‘백년호합(百年好合)’이라는 네 글자가 들어 있었다.

내용은 매우 간결했다. 하지만 줄곧 신하의 경조사에 참여하는 걸 꺼리던 황제 폐하가 친히 글까지 써주었으니 그 속에 담긴 뜻은 절대 간결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하객들은 범한이 임완아를 처로 맞이한 건 황금 덩어리를 얻게 된 것과 같은 행운이라고 여겼다.

* * *

황궁 깊숙한 곳, 그곳에 자리 잡은 방 안에서 경국의 황제가 미소 지은 얼굴로 그림 한 폭을 보고 있었다. 그림에는 화공이 그린 황색 저고리를 입은 여인이 있었다.

황제는 가장 아끼는 완아를 범한에게 시집보냈으니 그림 속 여인도 그녀의 며느리를 좋아해야 할 텐데, 하고 생각하며 흐뭇해했다. 황제의 주변 인물들은 오늘 범한과 임완아의 혼인이 이렇게도 크고 성대할 수 있었던 건 모두 황제가 임완아를 아껴서라고 생각했다. 비빈들도 마찬가지로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구오지존인 황제는 범한에게 부마로서 혼례를 치르게 해주지 못해 그에 맞는 보상을 해준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그림 속 여인을 바라보는 황제의 입가에 미소가 흘러나왔다.

“그대도 예전에 이런 왁자지껄한 분위기를 좋아했지. 그러니 그 아이도 좋아했으면 좋겠군.”

혼례식장에서 벌어진 광경은 남녀의 애정 소설을 많이 읽은 어린 소녀들이나 좋아할 법한 일이었다. 그래서 범한은 그 선물들을 보고도 좋은 기분 같은 건 그다지 느끼지 못했다. 범한의 마음은 황궁에서 쏟아져 들어온 선물들로 동요되기에는 냉정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더욱이 그의 마음은 그리고 예식을 지켜본 하객들의 마음까지 포함해, 선물은 모두 ‘군주’인 임완아에게 들어온 것이라고 여기고 있었다.

그리고 선물이 들어올 때마다 범한은 살짝 딴생각을 하고 있었다. 황궁에서 선물이 올 때마다 이렇게 무릎이 남아나지 않게 끓어 대느니 차라리 오죽 아저씨에게 막대로 몇 대 맞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었다.

혼례 분위기를 돋우는 풍악이 울려 퍼지는 가운데 범한과 임완아의 혼인 예식이 막을 내렸다. 신혼부부는 화촉동방으로 인도되었고 하객들은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런데 오늘 이상하게도 정왕 말고는 단 한 사람도 술에 취한 이가 없었다.

신혼방으로 향하는 부부를 보며 사남 백작의 얼굴에 온화한 미소가 떠올랐다. 가장 걱정했던 일이 벌어지지 않아 안도하고 있었다. 이제 보니 황태자와 2 황자도 잘 알고 있었다. 자신들의 신분은 고려하지도 않고 범한의 혼례에 하객으로 참석했다면 황궁의 경계와 범한의 저항을 불러일으켰으리란 걸 말이다. 그렇다고는 해도 황태자와 2 황자는 사람을 시켜 귀한 선물을 보내기는 했다.

밤이 되고 신랑 신부가 여종의 안내에 따라 최근에 수리한 저택이자 그들의 신혼집에 도착했다. 저택에는 붉은 촛불이 밝게 켜 있었고 곳곳에 붉은색으로 된 기쁠 ‘희(喜)’ 자가 곳곳에 붙어 있어 경사스러운 분위기 가득했다.

범한은 도착하자마자 한숨부터 돌렸다. 반면 이곳에 있던 종들은 젊은 주인들을 아직 무서워했다. 그들은 모두 범한이 사 온 사람, 정왕부에서 보내준 사람 그리고 황궁에서 임완아를 따라온 보모였다.

범한은 방으로 들어서자마자 허리부터 쭉 펴더니 활짝 웃으며 종들에게 모두 물러가라고 명령했다. 모든 종들이 문밖에 모여 신랑 신부에게 머리를 조아리며 인사하자 임완아의 몸종 사기가 서둘러 그들에게 상여금부터 나누어 주었다.

“사기야, 너도 피곤할 테니 그만 가서 자려무나.”

범한은 처음에는 싱글벙글 웃으며 말했지만 이내 사기를 향해 미간을 좁히며 ‘Y’자 주름을 만들어 보였다.

사기는 조금 난감하다는 듯 ‘아직 합환주도 안 마셨는데.’라고 생각하며 아가씨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바로 이때 붉은 천을 쓰고 있던 임완아가 무릎에 올려놓았던 손을 보일 듯 말 듯 흔드는 게 보였다. 어서 나가라고 재촉하는 것 같았다.

몸종 사기는 입을 가리고 웃으며 서둘러 신방에서 나와 문을 닫았다.

이제 신방에는 범한과 임완아 두 사람만 남아 있었다.

“나와! 나한테 맞고 싶지 않으면.”

범한은 임완아의 생각과 달리 냉정하게 말했다. 그러자 범사철이 뚱뚱한 몸을 꿈틀거리며 난처하다는 듯 침대 아래에서 기어 나와서는 고개를 푹 숙이고 밖으로 튀어 나갔다.

범한이 이맛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침대 뒤에 있는 변기통 냄새에 질식해 죽게 놔둘 걸 그랬나.”

여전히 붉은 천을 뒤집어쓰고 있는 임완아가 푸흡, 하고 웃었다.

“그 변기통은 아직 쓰지도 않은 거예요.”

범한은 임완아의 말이 맞는다고 생각했다. 금색 테두리가 칠해져 있는 변기통 안에는 향초가 들어 있었다.

이제 다른 사람도 없는 것 같고 붉은 촛불이 은은하게 켜져 있자 범한은 눈을 한번 또르르 굴렸다. 그리고 두 번 헤헤, 소리 내며 웃고는 앞으로 걸어가 넓은 소매 밖으로 나와 있어 찬기가 있는 임완아의 두 손을 덥석 붙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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