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8화
범약약과 범사철도 오늘은 보기 좋고 활기차게 꾸미고 있었다. 특히 범약약의 경우 평소 약간 도도하고 차가운 얼굴에 분홍 의상을 입으니 유난히 활기차 보였다. 그런데 범약약과 범사철은 그들의 오라버니이자 형인 사람이 불쌍한 몰골을 하고 있자 입을 막고 웃기 시작했다. 그러다 범사철이 툭 농담을 던졌다.
“어디서 온 꽃 떡이냐?”
범한은 화가 났지만 꾹 참고 앞으로 두 발자국 나아갔다. 한데 몸에 단 옥이며 장신구가 너무 많아 계속해서 딩당딩당 울려 범한은 자조하며 구시렁거렸다.
“어디서 온 꽃 떡은 고사하고 알록달록 움직이는 대형 풍경이 됐잖아.”
범한은 너무나 괴롭게도 알록달록 대형 풍경이 된 상태에서 거리를 한 바퀴 돌고 와야 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말이 아닌 가마를 타고서였다. 만약 말을 타야 했다면 범한은 분명 부끄러워서 담주로 미친 듯이 내뺐을 것이다.
어찌 되었든 신부를 맞이하는 행렬이 겨우겨우 재상가 저택에 당도했다. 임완아는 이미 10여 일 전에 재상가로 건너와 있던 터였다. 온 경도의 눈이 지켜보는 가운데 별궁으로 신부를 맞이하러 갈 수 없기에 나온 방법이었다.
폭죽이 터지자 가마에 앉아 있던 범한은 깜짝 놀랐다. 그리고 희미한 폭죽 냄새가 코로 밀려들자 어째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아주 오래전 물건이 떠올랐다. 범한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어 그 생각을 떨쳐 버리고는 얼굴에 억지로 미소를 띠고 가마 밖으로 나가기 위해 일어섰다.
예식 규율에 따라 범한은 집 안으로 들어갈 수 없었다. 재상도 오늘은 사남 백작가로 들어갈 수 없었다. 폭죽과 나팔, 피리 소리가 울리는 가운데 재상가 대문이 서서히 열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저택에서 원굉도가 나왔다. 재상의 책사, 원굉도는 오늘만큼은 평소와 달리 특이한 모자를 쓰고 있었다. 붉은 꽃이 달린 나뭇가지가 꽂혀 있는 모자로 생각 외로 꽤 풍류가 있어 보였다.
“범한 공자.”
원굉도가 활짝 웃는 얼굴로 범한을 맞았다.
범한은 속으로 씁쓸히 웃으며 상대방을 욕하고 있었지만 억지로 활기찬 모습을 하고 그의 인사에 화답했다.
“원굉도 선생.”
두 사람은 과거 재상부에서 몇 차례 본 적 있어 각자의 신분을 알고 있던 터라 전혀 어색하지 않게 인사를 나누었다.
오늘 경도에서 신부를 맞이하는 일을 해주는 사람 중 절반 정도가 사남 백작가로 고용된 상태였다. 이들 아낙들은 재상가 대문이 열리자 곧바로 복을 비는 말들을 쏟아 내기 시작해 신랑을 맞이하러 나온 원굉도를 얼떨떨하게 만들어 버렸다. 이들은 말을 마치자마자 곧바로 문 앞으로 우르르 몰려갔다.
그곳에는 진짜 강력한 저항 세력들이 이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앞서 오늘 경도에서 신부를 맞이하는 사람 중 절반을 사남 백작가가 빼앗아 왔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나머지 절반은 어디로 갔을까. 바로 재상가였다. 두 집안에서 고용한 사람들이 서로 침을 튀기며 축하 인사를 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는 겉으로만 축하하는 것일 뿐 실은 보이지 않는 칼을 겨누고 상대를 공격하는 행위였다. 이들은 서로 자신을 고용해 준 쪽을 높이고 상대방을 낮추는 데 열을 올렸다. 이들이 하는 말을 듣고 있으면이번 혼례가 재상가 딸이 백작가 아들에게 시집가는 게 아닌 그냥 돈 많은 토호들의 혼례처럼 생각될 정도였다.
범한은 그저 쓴웃음을 짓고 있을 뿐이었다. 그도 이 상황이 경국의 풍습이란 것쯤은 잘 알고 있었다. 신랑은 신부를 맞이하기 전에 신부의 집 앞에서 반드시 한바탕 떠들썩하게 해주어야 했다. 이것은 신혼부부가 나중에 언성 높여 싸우게 될 걸 다른 사람들이 미리 해주는 의식이었다.
풍습이기 때문에 마음에 상처를 입는다거나 화를 내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런데 이 의식에서는 어느 쪽이 이기느냐가 중요했다. 신랑 쪽이 신부 쪽을 누르는 게 아니라 신부 쪽이 신랑 쪽을 눌러야 했다. 혼례를 올리면 여자가 남자의 집으로 가서 살게 된다. 그러니 신부 입장에서는 힘든 시집살이가 시작되기 전에 합당한 지위를 보장받을 필요가 있었고, 이를 위해 본때를 보여 줄 필요가 있었다. 이러한 이유로 혼인을 하는 두 집안이 아낙들을고용해 혼례의 첫 관문인 입씨름 의식을 치르는 것이었다.
범한은 머리가 어질어질했지만 계속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어느덧 소리가 잦아들자 범한은 기뻐서 눈을 동그랗게 뜨고 소리를 질렀다.
“다 끝난 거죠?”
* * *
그러자 잠시 난처한 침묵이 흘렀고 그사이 누군가가 범한에게 속삭였다.
“범한 공자님, 아직입니다.”
잠시 후 재상가에 고용된 아낙이 말할 거리를 찾았다는 듯 웃으며 입을 열었다.
“이제 보니 신랑 어르신이 급했나 보네! 그럴 만도 할 겨. 우리 아가씨가…….”
이들은 자기 집 아가씨를 또 한 번 한껏 치켜세웠다.
대체 얼마나 지났을까. 원굉도의 눈에 비친 범한은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이에 원굉도는 사람들을 헤치고 범한에게 다가가 작은 소리로 타일렀다.
“공자, 참아야 합니다. 경도는 담주와 달리 규칙이 좀 많아요.”
그러자 범한은 억지로 기쁜 얼굴을 지어 보이며 대답했다.
“얼마든 참을 수 있습니다.”
범한은 이 몸께서 전생까지 합쳐 서른 몇 해를 기다렸으니 당연히 참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하며 참았다. 그리고 잠시 후 이 지옥 같은 전통 의식이 드디어 끝났다. 첫 번째 의식이 즐겁게 막을 내린 가운데 대문이 열리면서 다시 두 번째 의식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두 명의 수모(手母)의 부축을 받으며 신부 임완아가 걸어 나왔다.
범한의 눈이 번쩍 뜨였다. 온통 붉은색으로 치장한 임완아는 넓은 소매가 포개지도록 팔을 들고 있었다. 머리에는 진주 관을 쓰고 있었다. 그리고 그 위로 붉은색 천이 덮여 있어 보고 있어도 보고 싶은 얼굴은 가려져 있었다. 그렇다 할지라도 범한의 그녀의 빼어나게 아름다운 자태와 혼례의 경사스러움만큼은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다.
재상가가 둘러놓은 경계선 밖에서 혼례를 구경하고 있던 백성들이 신부를 보자 범한보다도 먼저 눈을 반짝이며 환호하기 시작했다. 몇몇 젊은 사람들은 신부의 아름다운 얼굴 좀 구경하게 머리를 덮고 있는 붉은 천을 벗기라며 소리치기도 했다.
만약 평소 이와 같은 말을 내뱉었다면 이들은 재상가 사람들에게 초주검이 될 때까지 맞았을 것이다. 게다가 오늘 군중들 사이에 숨어서 상황을 살피고 있던 왕계년의 부하들에게 그들의 미래 마님을 욕보인 우라질 놈으로 간주되어 감찰원으로 끌려가 죽을 때까지 갇혀 지내게 될 것이었다.
그런데 오늘은 경사스러운 날이고 황제가 사위를 맞이하는 날이니 천하가 함께 기뻐해야 했다. 이에 재상가와 백작가는 그런 저속한 말을 듣고도 경사스러운 분위기를 깨는 행동을 할 수 없어 그냥 참고 넘어갔다. 하지만 기분이 조금 상한 범한은 담담한 표정으로 그들을 한번 쳐다보았다. 왕계년의 부하들은 범한의 의중을 알아차렸다. 잠시 후 군중 속에서 너무 작아 잘 들리지는 않았지만 아야, 하는 소리가 몇 번 흘러나왔다. 가장 흥분하면서 소리 질렀던 젊은이가 당하는 소리였을 게다.
그 후로 몇 가지 의식이 더 치러졌고 온통 붉은색으로 꾸민 임완아는 그것을 다 치른 후에야 겨우 발을 떼고 앞에 놓인 혼례용 가마에 올라탈 수 있었다.
모든 과정을 치르는 동안 범한은 임완아에게 한마디도 건넬 수 없어 그저 그녀를 바라보거나 슬쩍 그녀의 손가락 끝을 건들이는 정도로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 * *
사남 백작가는 이미 도착한 하객들과 울려 퍼지는 풍악 소리로 매우 흥겹고 떠들썩했다.
신부는 우선 내실로 들어가 잠시 앉아 있었다. 신랑은 본관 대청 앞에서 손님들을 맞았다. 범한은 미소를 가득 머금고 일면식이 있든 없든 모든 하객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러다가 가끔씩 옆에 있는 사람에게 조바심을 드러냈다.
“예식은 언제 하나요?”
“아직 한참 남았습니다, 도련님. 부부 합환주, 부부 합석, 부부 동시 식사 그리고 또…….”
이어서 나오는 말들을 범한은 흘려버렸다. 대신 욕을 내뱉어 주고 싶은 걸 간신히 참으며 급할 거 없다며 자신을 다독였다. 앞서 말했듯이 범한은 서른 몇 해를 기다리지 않았던가. 그러니 이까짓 거 더 참을 수 있지 않을까.
대체 점심에 무엇을 먹었는지 범한은 기억나지 않았다. 그는 단지 술을 많이 마셨고 하객으로 온 관리들로부터 지금 이 순간을 담은, 그러니까 아름다운 여인과 아름다운 광경을 담은 시 두 수를 지어보라는 호의, 또는 사욕에 찬 요구를 들어야 했다는 것만 기억하고 있었다. 하지만 범한은 술을 많이 마시기는 했어도 자신이 시단에 선언한 내용을 굳건히 기억하고 있던 지라 그들의 요구에 일일이 웃으며 사양의 의사를 내비추었다.
축하연이 시작되고 나자 정왕부에서도 드디어 하객이 도착했다. 그러자 모든 관리들이 일제히 일어나 사람들을 맞이했다. 범한은 꽃을 재배하는 농민처럼 입고 나타난 정왕을 바라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속으로 ‘처음 왕야를 만났을 때 왜 알아차리지 못했을까.’라고 생각했다.
정왕은 줄곧 범한을 좋아했다. 그래서 오늘 화려하게 차려입은 모습을 보고는 목소리를 죽여 작은 소리로 질책했다.
“꾸며 놓은 꼴하고는.”
범한은 정왕의 성정을 잘 알기에 웃어넘겼다.
“정왕께서도 혼례를 올리실 때 저처럼 꾸미셨을지 모르지 않습니까.”
세자 이홍성이 옆에서 작은 소리로 맞받아쳤다.
“어쩌면 자네만도 못했을 것이네.”
그러자 정왕이 성을 내며 질책했다.
“네가 아닌 이 몸이 혼례를 올린 것이니라. 네가 알긴 뭘 안다 나서느냐!”
옆에서 정왕과 세자가 말다툼하는 걸 본 관리들은 감히 나서서 무어라 하지는 못하고 대신 숨어서 키득거렸다. 그런데 혼례를 주관하고 있던 사남 백작 범건은 고개를 내저으며 쓴웃음을 지은 채 권했다.
“왕야, 오늘 말이 좀 많으십니다.”
겨우 백작 지위에 있는 범건이 정왕에게 이리도 편히 말할 수 있는 건 그와 10여 년을 교류해 온 사이기 때문이었다.
그러자 정왕이 아들과 다투는 일 따위는 이제 관심이 없다는 듯 손을 내젓고는 곧장 범건을 따라 안채로 들어갔다. 한참을 걸어가던 정왕이 잠시 발걸음을 멈추고 몸을 돌려 범한에게 정색하며 말했다.
“오늘 꽤 멋지구나!”
범한은 순간 깜짝 놀라 서둘러 감사의 예를 올렸다. 그런데 정왕은 또 이맛살을 찌푸렸다.
“원래는 두 해 후에 유가 군주를 자네에게 주려 했는데 우리 누님께서 내가 점찍은 사윗감을 빼앗아 가실 줄이야.”
정왕은 정말로 깊이 유감이라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으며 안으로 들어갔다.
정왕의 누님이 누구냐고? 당연히 범한의 장모인 장 공주다. 정왕이 이 말을 할 때 목소리가 작았길 다행이지 하마터면 주위 사람들 모두 그 이야기를 들을 뻔했다. 범한은 정왕이 유가 군주를 자신에게 시집보내려 했다는 걸 듣고 나서는 자기도 모르게 두려움이 밀려들어 가슴이 답답했다.
이 와중에 이홍성이 옆에서 아직 정신을 못 차리고 있는 범한의 어깨를 한 대 툭 치며 작게 이야기했다.
“자네와 교분을 생각해 더 일찍 왔어야 하나 자네도 알지 않나. 이런 장소에는 내가 일찍 오기 좀 그렇다는 걸 말일세.”
세자의 말뜻은 범한도 충분히 알고 있었다. 비록 상대방과 자신이 꽤 교분이 있다고는 해도 그는 정왕의 세자였다. 그러니 대신들보다 일찍 나타나 범한을 도와주는 건 예법에 전혀 맞지 않는 행동이었다. 이에 범한이 엷게 웃으며 무언가 말하려 하는데 이홍성이 먼저 또 작은 소리로 범한에게 말했다.
“유가는 오늘 오지 않았다네. 대신 내게 자신의 말을 전해 달라더군.”
범한의 눈썹이 살짝 씰룩이며 ‘유가 군주가 평소 약약이와 친하고 자기하고도 친한데 왜 오늘 혼례에는 나타나지 않은 걸까.’라고 생각했다.
이 순간 이홍성이 범한의 표정을 보며 씁쓸하게 웃었다.
“누이동생은 지금 왕부에서 눈물을 훔치고 있다네. 부왕께서 조금 전 하신 말씀은 진심이셨단 말일세. 만약 자네 정혼자가 대단한 가문의 여식이 아니었다면 부왕께서 분명 황태후마마께 자네와 유가가 혼인할 수 있도록 직접 나서 달라며 부탁했을 수도 있다네.”
범한은 잠시 놀랐다가 이내 고심에 빠지고 말았다. 이런 상황에서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정말 모르겠으니 아예 입을 꾹 다물고 있는 편이 유리하다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