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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여년-126화 (126/1,108)

126화

말을 마친 진평평 원장이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어 갔다.

“잊지 말게나. 4년 전, 내가 자네 아들을 북쪽으로 내쫓았단 걸 말일세.”

이에 언약해가 뭐라 말하려 하자 진평평은 냉정하게 손을 흔들며 그를 저지했다. 그러고는 다시 담담하게 말했다.

“빙운이가 돌아오면 주격의 자리에 앉힐 계획이라네. 주격은 며칠 더 살 수 있었는데 말이야. 한데 오늘 종잇조각이 여기저기 뿌려지고 경도 민심도 술렁이고 있으니 자네에게 알려 줄 필요가 있었네.”

진평평 원장은 잠시 말을 끊고 한숨을 쉬고는 계속 자신의 생각을 이어 갔다.

“줄곧 그늘 속에 숨어 있던 일인데 느닷없이 온 경도가 알아 버렸지 않나. 이리도 황당하고 효과적인 방법을 쓴 걸 보면 십중팔구는 폐하를 압박하고 있는 거야. 이 일을 알고 있는 신하들에게 폐하께서 명령을 내리도록 말일세.”

진평평 원장이 두 번 기침을 하고는 다시 말을 이어 갔다.

“지금 감사원에 제사가 있다는 건 자네도 잘 알고 있을 걸세. 지난번 자네에게도 말해 줬으니. 그 사람을 북제로 보낼 생각이네.”

언약해가 이맛살을 찌푸렸다.

“너무 위험합니다.”

언약해는 진평평의 뜻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다. 바로 그 제사에게 소은을 죽이라는 임무를 내리려는 것이다.

“제대로 갈고닦지 않으면 제대로 된 그릇이 되지 않는 법이네.”

진평평 원장의 두 눈에 피로가 고여 있었다.

“만약 그가 성공한다면 훗날 자네가 그를 도와 이 감찰원을 잘 이끌어 주기 바라네.”

드디어 진평평 원장의 본심을 알게 된 언약해는 놀라 더 이상 말할 수 없었다. 대신 진평평 원장이 앉아 있는 의자 앞에 꿇어앉아 정중히 머리를 조아리며 절을 올렸다.

* * *

“대체 누구 짓인 건지!”

진평평 원장이 바퀴 달린 의자를 밀며 창가로 가더니 마른 손가락으로 검은 천 한쪽 자락을 잡고 천천히 젖혔다. 그러고는 아이처럼 머리를 빼꼼 내밀고 창밖을 내다보았다. 며칠간 내리던 가을비도 멈춘지라 밖에는 햇볕이 내리쬐고 있었다. 그리고 저 멀리 보이는 황궁도 다시 황금빛을 발하고 있었다.

진평평은 바퀴 달린 의자에 몸을 반쯤 누인 채 검은 천으로 가려진 창문 끝자락에서 들어오는 빛에 기대어 손에 들고 있던 종잇조각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결국에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녀가 북제와 결탁한 것만 써도 될 것을, 황궁 안에 미남자를 두고 음란한 행동을 한다는 건 대체 왜 쓴 거지?”

이 문제는 황궁의 명예와 연관된 터였다. 이에 진평평 원장은 회의에서 이것을 의제로 상정하기에는 좀 거북해 그냥 넘겼다.

진평평이 성냥개비처럼 가지런하게 적힌 종이 위 글자를 보며 웃음을 터뜨렸다.

“진짜 웃기군. 정말로 못 봐주게 악필이야. 한데 글씨체만 보면 동이성의 그 바보가 쓴 것 같아.”

“동이성아, 동이성아, 정말 너희가 한 짓이냐?”

진평평은 자문자답을 하던 중이었다. 그러다 생각났는지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옛날 사고검은 그냥 바보였지 이런 미치광이는 아니었어. 장 공주에게 맞서고 있는 그 미친 녀석이 참으로 쓸모 있는 방법을 썼군. 이것저것 가져다가 한데 몰아넣고는 아무도 모르게 해놓았으니 말이야. 하나 폐하께서 정한 규칙을 어지럽혔으니 폐하의 심기를 건드린 거야!”

한데 언제나 빈틈없는 진평평 원장도, 음험한 미치광이인 장 공주도, 이러한 큰일을 저지른 게 겨우 두 사람, 즉 주인인 범한과 종인 오죽의 짓일 거라는 건 생각하지도 못하고 있었다.

* * *

범한은 냉정하게, 심지어는 무관심에 가까울 정도로 이번 일의 여파를 지켜보고만 있었다. 그런데 범한이 써놓은 색정문학(色情文學: 음란한 글)은 이 나라에서는 감당할 수 없는 무게 같았다. 황제의 진짜 속마음이 어떤지 그리고 장 공주의 진짜 실력이 이번 일로 크게 손상을 입은 것인지와는 상관없이, 범한이 원하던 일이 드디어 일어나게 해주었으니 말이다.

장 공주는 아무도 모르게 황궁을 떠나 자신의 영지인 신양으로 돌아갔다. 한데 범한은 전단지 사건 때문에 황실에서 어떤 충돌과 힘겨루기가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어찌 되었든 오죽이 처음 예상했던 것처럼 황제 폐하는 장 공주가 경도에서 떠나기 전에 정말로 상을 내렸고 그 바람에 범한도 많은 이득을 보았다. 그런데 겉으로 보기에 이 둘 사이에는 아무 관계도 없었기에 단순히 폐하께서 범한이 나라의 체면을 세웠다고 칭찬하는 것처럼 보였다.

성지가 당도하자 범한은 즉각 8품 협률랑에서 5품 태학원 봉정이 되었다.

잘 꾸며진 응접실에서 성지를 받아 든 범한은 머리를 긁적이며 아버지에게 물었다.

“태학원 봉정은 무슨 일을 합니까?”

“태학 학생들을 가르친단다.”

범건 역시 이번 성지 내용이 너무 뜬금없다고 생각되어 고개를 내저으며 말했다.

“정식으로 과거를 치르지도 않았는데 어찌 태학원 봉정이 될 수 있단 말인지…….”

“그렇다면 내년에 과거를 볼 필요가 없는 건가요?”

범한이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그렇구나.”

범건은 그리 기쁘지만은 않다는 듯 담담하게 말을 이어 나갔다.

“과거를 치르지 않는 건 제대로 된 방법이 아니란다. 당장은 순조로워 보일지라도 나중에 벼슬길에 많은 장애가 따르기 마련이지.”

하지만 범건은 잠시 바꾸어 생각해 보았다. 자신이 원한 건 범한이 평생 편하게 사는 것 아니었냐고. 지금 자기 앞에 있는 이 고운 청년이 마음 편히 살다 생을 마치는 거 아니었냐고 자신에게 질문을 던져 보았다.

이는 그 사람의 생각이기도 했다. 그렇지 않았으면 이 아이에게 한가롭게 살라는 의미로 이름을 ‘한(閑)’으로, 자(字) 역시 편안하게 살라는 의미로 ‘안지(安之)’로 짓지 않았을 테니 말이다.

* * *

범한은 자신이 과거를 치를 필요가 없다는 이야기를 듣고 날아갈 것처럼 기뻐 서재로 돌아가는 내내 활짝 웃었다. 그런데 서재로 들어선 순간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범사철이 눈에 들어왔다. 범사철은 먹을 갈면서 범한을 쳐다보았다.

“뭐 하는 거니?”

“기념으로 몇 자 쓰려고요.”

“뭐라고 쓸 건데?”

“반한재 시집(半閑齋詩集).”

“반한재가 뭔데?”

“바로 이 서재지요. 아버님께서 나중에 이 서재를 형님에게 주신댔어요. 물론 형님이 혼인한 후 일이지만요. 벌써 섭 대행수에게 노형거에 가서 가로로 내거는 편액 제작을 의뢰해 달라고 해놨어요. ‘반한재’라고 써서 말이죠.”

범한은 뭔가 마음에 들지 않아 따지듯 물었다.

“그렇다면 반한재 시집은 대체 뭐야!”

“어? 형님이 기년전에서 지은 시요. 벌써 태학사에서 시집으로 엮었어요. 폐하께서 문연각 명의로 책을 찍어 낼 준비를 하고 계세요. 그래서 내가 아버님께 이번 일을 하게 해달라고 했어요.”

서산 제지소에 도둑이 든 후 황실 상단에 소속되어 있던 그들은 해체되었고, 담당 관리에게 조사를 받아 오랫동안 무력한 상태로 있었다. 황실 금고도 황궁으로부터 경고를 받아 더 이상 담박서국을 괴롭히지 못했다. 다시 말해 담박서국이 드디어 기를 펼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러니 자연스레 큰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고, 섭 대행수와 어린 대행수 범사철은 단번에 황제가 편찬하는 시집에 관심이 갈 수밖에 없었다. 황궁에서 제작비 일부를 지원해 주는 데다가 인쇄와 발행 후에는 개인적으로 판매해도 된다는 황궁의 윤허도 받았으니, 이 두 사람이 봤을 때 이 시집은 틀림없이 큰돈을 벌게 해줄 사업이었다.

시집 속 시를 쓴 사람이 누구냐고? 바로 범한이었다. 범한은 누구? 바로 담박서국의 숨은 주인이었다. 이런 사업을 두고 경여당의 대행수나 그 뒤에 서서 음험하게 웃고 있는 범사철이나 모두 그 이익을 조정에 양보할 리 없었다. 범사철은 본래 형이 《석두기》의 다음 열 편을 내놓지 않아 뿔이 난 상태였다. 그러니 수중에 시집이 들어오게 된 지금, 가만히 두고 보지만은 않았던 것이다.

범한은 종이 위에 ‘반한재 시집’이란 다섯 글자를 써보았다. 또 자신의 이름도 써보았다. 그의 마음은 씁쓸하게 웃고 있었다. 그날 밤 범한은 자신의 밤중 행적을 지우기 위해 기년전에서 취한 척하다가 미치광이처럼 성미가 크게 발동하고 말았다. 그리고 순간 시를 쏟아 내기 시작한 자신의 입을 거두지 못했다. 그 시에는 수많은 전고(典故), 그러니까 옛날 고사와 경서 내용 등이 응축돼 있었으며 그중 많은 부분을 범한은 설명해 줄 수 없었다. 게다가 만약 이들 전고에 대해 제대로 설명하고자 한다면 몇 권에 달하는 역사책과 이야기책을 써야만 했다.

우선 4대 명저인 《삼국지》, 《수호지》, 《서유기》, 《금병매》가 있어야 했다. 《신설신어》도 있어야겠지, 《논어》도, 《시경》도! 이런, 이건 많은 것도 아니다. 사마광이 쓴 역사서 《자치통감》도 있어야 한다. 사마천의 《사기》도 빼놓을 수 없다. 전부 써서 보여 준다면 그 전고들에 대해 아무도 궁금해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어마어마한 작업량을 생각하니 범한은 몸서리쳐졌다. 만약 정말로 이렇게 확대해 나간다면, 어쩌면 이 담박서국은 전생 세계의 전파소로 전락할 것이고, 옛날 담주에서 범한이 세웠던 원대한 계획은 이루어질 게 뻔했다.

범한이 범사철에게 말했다.

“문연각에서 교정하면 안 돼. 그러니 네가 가져와 줘. 그러면 내가 다시 교정을 볼 테니. 그날 술을 너무 많이 마셔서 내가 무슨 허튼소리를 한 게 있을지도 모르거든.”

범한은 머리를 굴렸다. 얼버무릴 것은 얼버무리고 안 될 것 같은 것은 고통을 참으며 살점을 도려내자고 말이다. 즉 취기를 구실로 몽땅 잊어버렸다고 하는 거다. 어찌 되었든 거나하게 취한 다음 날에는 대개 기억 상실증 같은 것이 오지 않던가.

“걸작이 될 거예요!”

범사철이 고개를 가로로 내저으며 말을 이어 갔다.

“한 5년 후에 말이죠. 형님이 절필 선언한 게 사람들에게 잊힐 즈음에 다시 문단에 복귀하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는 돈을 긁어모으게 될걸요!”

범사철의 말에 범한은 웃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러다 별안간 서재 한구석에 놓여 있는 분홍색 종이에 시선이 꽂혀 궁금한 마음에 범사철에게 물었다.

“저건 뭐니?”

범한은 흠칫 놀라고 말았다. 이제야 자신의 혼례일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이 생각나서였다. 그런데 최근에 너무나 많은 일이 발생해 툭 까놓고 말하자면, 지금 임완아를 향한 범한의 마음은 경묘에서 느꼈던 첫 느낌과는 많이 달라진 상태였다. 범한은 이제는 자신과 그녀의 어머니가 어떻게 해도 함께할 수 없는 사이란 걸 알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은 황제 폐하가 모든 걸 통제해 주고 있기는 해도 일단 그가 더 이상 관여하지 않기로 마음먹으면, 그날부로 장 공주는 자신을 죽이려 들 게 뻔하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러니 어쩌면 범한 자신이 장 공주를 죽이게 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이에 오랫동안 고대하던 혼례일이 코앞으로 다가왔지만 범한의 마음은 오히려 불안하고 슬펐다.

* * *

며칠 후 담박서국의 주력 서적인 《반한재 시집》이 출간되었다. 범한은 담박서국이 출판권을 쥐게 되자 많은 부분을 대대적으로 삭제해 버렸다. 그리고 이제 조금 숨 좀 돌리나 싶을 때 예상하지도 못한 출판 기념회가 시작되어 범한의 이름으로 세자 이홍성과 홍려사 소경 신기물 등이 초대되어 왔다.

범한은 깜짝 놀랐다. 그래서 재능을 겸비한 누이동생 범약약을 자기 대신 출판 기념회에 보냈다. 《반한재 시집》의 판매가 대대적으로 시작되었지만 범한은 ‘시선은 신비감을 유지해야 한다’는 핑계를 들어 참석하지 않고 대신 별궁으로 숨어들어 임완아와 만났다.

기년전 연회에서 8품 협률랑이 시 300수를 즉석에서 지어 대가 장묵한이 피를 뿜었다는 이야기는 벌써 경도 안에 파다하게 퍼져 있었다. 게다가 범한이 읊은 시 중 일부도 벌써 민간에까지 흘러든 터였다. 그런데 작가가 직접 수정한 판본까지 출간되다니 이는 정말로 희귀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시집은 출간되자마자 폭발적으로 팔려 나가 ‘종이 품귀 현상’과 ‘종잇값 상승’을 불러왔고 범한의 명성은 순식간에 한 단계 더 도약했다.

지난밤, 작은 누각에는 또 가을바람이 불어왔다.

범한이 따스한 눈으로 자신의 정혼자를 바라보며 미소 짓는 얼굴로 말했다.

“그대가 말해 준 그 방법은 안 되겠네요.”

그러자 임완아가 이맛살을 찌푸리더니 입을 귀엽게 오물거리며 말했다.

“며칠 동안 바깥출입을 전혀 못 했어요.”

사실 이 어린 아가씨도 최근 경도에서 벌어진 일들을 알고 있었다. 어려서부터 황궁 후궁들 손에 금이야 옥이야 하며 자랐어도 말이다. 물론 후궁들이 잘 대해 준 건 그녀도 잘 알다시피 그녀가 병약해 자신들에게 해가 되지 않아서였고, 황제 폐하가 유난히 아껴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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