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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여년-124화 (124/1,108)

124화

한편 범한은 말 그대로 경도를 들썩이게 만드는 인물이 되어 있었다. 그러자 범한보다 범한의 배후에 있는 세력에 관심을 가졌던 사람들이 이제는 범한이란 인물 자체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어찌 되었든 이 세상에서 일대 대가인 장묵한에게 피를 토하게 만들 정도로 직접 충격을 준 이는 범한 한 사람뿐이었으니 말이다. 그것도 그렇게나 어린 나이에.

그리고 범한을 끌어들이려던 황태자와 2 황자의 행동은 둘이 같이 짠 것처럼 동시에 강도를 높이기 시작했다. 이홍성은 자주 유가 군주를 대동하고 백작가로 찾아와 차를 마셨으며, 신기물 역시 오랫동안 만나지 못했다는 걸 핑계로 범한의 마음을 떠보러 찾아왔다.

하지만 범한은 여전히 해야 할 일이 많아 만나는 걸 잠시 고사했다. 연회가 있던 날 준비한 계획 가운데 범한은 두 개만 완성한 상태였다. 그중 하나는 열쇠를 찾는 것이었고 나머지 하나는 동이성의 운지란을 모함해 범한 자신의 생명과 안전을 확보하는 것이었다. 운지란을 모함한 이유는 조정에서 그를 밀착 감시하도록 만들기 위해서였고 이는 거의 성공적이었다. 경국의 감시가 강화되자 낭패에 빠진 이 9등급 고수는 경도를 떠나는 날까지 범한을 찾아가 대결할 생각 자체를 하지 못했으니 말이다.

범한은 장 공주와 북제가 결탁했음을 알고 난 후부터는 그들을 한꺼번에 궁지에 몰아넣을 기회만 노렸다. 그러다 동이성 사절단이 경도에서 떠나기 이틀 전에 드디어 때가 왔다고 생각했다.

장 공주와 북제의 젊은 황제는 밀약을 맺고 있었지만 범한은 그 사실을 이용해 그들을 칠 방법이 없었다. 어떤 물적 증거나 인적 증거도 확보하지 못해서였다. 그렇다고 해서 범한이 감히 황제 앞에 나가 그 사실을 고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가 아무리 경도에서 유명 인사가 되었다고는 해도 황제를 접견하는 일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직접 고하지 못하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그에게 경국 황제는 복잡한 인물이었고 또한 황제가 장 공주와 관련된 추문을 듣고서 황실의 체통을 지키기 위해 자신을 죽여 입막음할 가능성도 있어서였다.

만약 경국의 일반 백성에게 이와 같은 일이 일어난다면 그 사람은 비밀을 평생 마음속에 묻어 둬야 한다. 그리고 평생 말조차 꺼내지 못하다가 결국에는 답답함에 피를 토하고 죽는 수밖에 없다.

하지만 범한은 그럴 수 없었다. 그에게는 두 세계의 기억과 지식이 있었다. 그리고 여론과 선전의 중요성 그리고 파급력을 알고 있었다. 또한 자신이 미치광이에 가까운 장 공주와 맞서려면 그에 상응하는 정신 나간 수단을 동원해야 한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연회가 열린 후로 경도의 종이 시장을 독점하고 있던 서산 제지소와 황실 금고와 관련 있는 곳에서는 시도 때도 없이 담박서국의 장사를 방해하고 있었다. 그런데 장 공주 쪽에서는 감찰원 8처를 움직여 제재할 방도가 없었는지 작게 치고 빠지는 식의 방해 작전만 펼쳤다. 하지만 범한은 이 모든 방해가 폭풍이 몰아치기 전 고요함 같은 것임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선수를 치기로 마음먹었다.

그날 밤 오죽은 구석에 서서 범한이 하는 말을 들고 있었다. 상자를 연 후 오죽은 분명 백작가에 더 자주 찾아오고 있었다. 범한의 안위를 걱정이라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범한은 생각하면서 차근차근 말을 이어 갔다.

“만약 흔적을 남기고 싶지 않다면 뭐든 뺏어야 합니다.”

그러자 오죽은 몸을 살짝 기울여 범한의 말을 이해했다는 행동을 보였다.

범한이 계속 말했다.

“요 며칠 동안 황실 금고 소속인 서산 제지소와 만송당이 담박서국 장사에 압박을 가하고 있어요. 그러니 우리는 황실 금고가 갖고 있는 종이를 훔치고 만송당의 먹물을 이용해야 합니다. 그런데 아저씨, 아저씨가 쓴 글씨를 누가 본 적 있나요?”

그러자 오죽이 냉랭하게 대답했다.

“걱정하지 마세요.”

범한은 이 황당해 보이는 계획이 분명 주효할 것임을 알기에 활짝 웃었다.

“전단지란 것은 크기가 너무 클 필요 없습니다.”

범한은 두 손을 움직여 전단지의 크기를 나타냈다.

“중요한 건 수량입니다. 가급적 많은 곳에 붙이고 뿌려야 하니까요. 특히 태학 같은 곳에 뿌려야 합니다. 그리고 문연각의 교학원 같은 곳에는 더 많이 붙어야 하고요. 젊은 혈기의 학생들이 더 쉽게 선동되는 법이에요. 그러니 문연각에 있는 학사들은 이런 풍격의 것들을 좋아할 거예요. 아마 전단지를 본 후 화가 나서 자신들의 수염을 쥐어뜯을걸요.”

그런데도 오죽은 여전히 차갑게 물었다.

“내용은요?”

“네?”

범한이 눈썹을 씰룩이며 탄식했다.

“제가 무슨 지하당원이라도 된 것 같네요.”

범한은 전단지가 어떻게 선동이란 걸 할 수 있는지 재차 자세히 설명하며 전단지 내용은 진짜 같기도 하고 가짜 같기도 한 세부 사항이 들어가야 한다고 말했다. 예를 들어 장 공주가 어떻게 장묵한과 대화하게 되었으며, 북제에 잠복해 있던 언빙운은 어떤 고초를 겪고 있고, 또 그가 어떻게 황궁의 지체 높은 분들께 버림을 받았으며, 장 공주가 조정의 이익에 반하는 행동을 함으로써 자신은 어떤 이득을 얻었는지. 그리고 황궁에 얼마나 많은 가짜 태감이 있으며 그 태감들 중 얼마나 많은 사람이 정부를 두고 있는지 등등을 오죽에게 이야기해 주었다.

그러자 오죽은 냉정하게 분석했다.

“장 공주가 그렇게나 큰 이익을 희생하고 겨우 금전적인 이득 일부만 취했다는 걸 믿을 사람은 없을 겁니다.”

그러자 범한은 또 눈썹을 치켜세우며 말했다.

“이 세상에 아저씨처럼 총명한 사람은 많지 않아요. 그래서 단순히 백성들이 믿어 주었으면 하는 것뿐인 거죠. 그리고 이번 일은 황제 페하께 일깨워 드리기 위해 저지르는 일이에요.”

그러자 오죽이 이번에도 냉정하게 말했다.

“황제께는 도련님의 일깨움 따위는 필요하지 않습니다.”

범한이 슬그머니 웃었다. 황궁에 사는 장 공주와 북제가 연계되어 있다면 무수한 밀정을 수하로 둔 황제가 그 사실을 전혀 모른다는 게 말이 되지 않는다. 이에 범한이 탄식하며 말했다.

“그래서 모르겠습니다. 폐하께서는 왜 장 공주를 그녀의 영지가 아닌 황궁에 살도록 내버려 두는 걸까요?”

“장 공주는 황태후가 가장 아끼는 막내딸입니다. 그리고 황제의 누이동생이고요. 게다가 황제는 무언가를 무서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아저씨가 보시기에 제가 계획한 일이 일어나면 황제께서 어떻게 반응하실 것 같나요?”

범한은 오죽의 분석력을 신임하고 있던 터였다.

“즉각 감찰원을 움직여 도련님께서 일으키신 영향력을 일거에 불식시킬 것입니다. 그리고 장 공주에게 큰 상을 내려 황실의 단결력을 외부에 보여 줄 겁니다. 또한 전단지 사건이 잠잠해지면 적당한 기회에 장 공주를 그녀의 영지인 신양으로 돌려보낼 것입니다.”

이어 오죽은 자신은 별 관심 없다는 듯 말을 이어 나갔다.

“장 공주에게 상을 줄 때 완아 군주께도 함께 상을 내릴 것이며 도련님의 관직도 높여 줄 것입니다.”

오죽의 분석에 범한은 쓴웃음을 짓고 말았다. 충분히 일어날 가능성 있는 일이란 건 범한도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 이야기가 오죽의 입에서 나오니 왜 조금은 썰렁한 농담처럼 들리는 건지.

“그렇다면 왜 황제 폐하께서는 장 공주를 황궁 밖으로 내보내기 위해 저처럼 이런 간단한 방법을 생각해 내지 못하시는 걸까요? 만약 아저씨 말씀대로라면 황제 폐하께서는 장 공주와 북제가 결탁했다는 걸 벌써 알고 계실 텐데요.”

“첫째, 도련님의 방법은 너무 변태 같습니다. 둘째, 황제는 자신의 누이를 출궁시키기 위해 그녀를 압박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분은 수면 아래에 있는 사람들이 수면 위로 떠오르기를 기다렸다가 일망타진하는 걸 즐깁니다. 그리고 이는 그분의 습관이기도 하고요.”

범한은 오죽이 황제의 능력을 십분 신뢰하고 있음을 알게 되자 이맛살을 더 강하게 찌푸렸다. 황실 사람들은 몽땅 인정머리 없는 나쁜 놈들이기는 하다. 그래도 황제와 장 공주를 비교했을 때 겨우 두 번 만난 황제가 장 공주보다 자신에게 훨씬 따뜻하게 대해 준 건 사실이었다. 이에 범한은 몇 년 후에 발생할지도 모르는 반역을 두고 자기도 모르게 걱정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우리의 이번 계획으로 황궁의 내부 국면이 완화되는 건가요? 장 공주에게도 황궁 내부에 조력자가 있지 않을까요?”

“제가 조사해 보겠습니다.”

오죽은 여전히 냉담한 말투였다.

범한은 잠시 생각해 보았다. 그리고 계획대로 하는 편이 낫다고 결정하고는 쓴웃음을 지었다.

“어떻게든 장 공주를 한동안 황궁에서 멀리 떨어뜨려 놓아야 해요. 그러지 않으면 황제 폐하께서 그들을 일망타진할 시기를 놓치실 거예요. 그러니 제가 먼저 그들 손에 죽을 각오를 해야 합니다. 황제 폐하께서는 상대가 먼저 움직일 때까지 기다릴 능력과 담력을 지니신 분이지만 우리는 그렇지 않잖아요.”

감히 외국과도 결탁하는 세력이 집요하게 범한을 노리는 중이라면 범한에게는 오죽의 뒤꽁무니에 바짝 붙어 도망 다니는 것 말고는 다른 도리가 없었다. 하지만 세계 일주가 소원인 범한도 이런 식으로 도망 다니는 건 바라던 바가 아니었다.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가세요.”

범한은 오죽을 향해 오른팔을 한번 휙 휘저었다. 그러고는 자신은 확실히 청년 지도자의 기백이 있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전생에 범한은 항일 전쟁과 관련된 영화를 많이 보았다. 그래서인지 지금 이 순간 어두운 밤에 휩싸여 있는 경국은 일본군에게 점령된 베이징이고 자신과 오죽은 침략자에 맞서는 용감한 학생이며, 지금은 조심스럽게 전단지를 뿌리며 경국 백성들을 향해 후안무치한 통치자에 맞서 일어나라 호소하는 중인 것 같다고 생각했다.

범한은 미소를 띤 채 침대에 누웠다. 침대 아래에는 상자가 놓여 있었지만 범한에게는 전혀 걱정하는 기색이 없었다. 오죽이 상자와 관련한 기억을 모두 잃었으니 이 세계에서 저 상자를 열 수 있는 사람은 범한 자신밖에 없기 때문이었다.

범한은 마음 편히 깊이 잠들었다. 그리고 달콤한 꿈까지 꾸었다. 가을로 접어든 경도에 대설이 내렸다. 장 공주는 겁에 질려 쭈뼛거리며 마차에 올라타더니 원망이 깊게 밴 눈으로 경도를 한번 돌아보고 이내 자신이 사는 세계로 떠났다.

* * *

구월 초로 접어든 경도에 정말로 큰 눈이 내렸다. 하늘 가득 흰색 전단지가 눈처럼 휘날리며 경도 곳곳에 흩뿌려진 것이다. 특히 태학과 문연각 부근에는 그 어느 곳보다도 많은 전단지가 뿌려졌다. 아직 어슴푸레한 새벽인데도 일찌감치 일어난 학생들과 백성들은 이 낯선 종잇조각을 주워 들고 들여다보고는 아연실색하고 말았다.

이는 경국에서 일어난 첫 전단지 전쟁이었다.

그런데 범한은 여전히 경국 백성들의 피는 뜨겁다며 그들은 과대평가하고 동시에 감찰원과 6처 관아의 통제 능력은 저평가하고 있었다. 불과 두 시진(네 시간)도 안 되어 온 경도에 뿌려진 전단지가 천하대도 근처 강가에 위치한 관청에 모두 수거되어 왔는데도 말이다.

상황이 이쯤 되자 그 누구도 감히 사적으로 전단지를 지닐 생각을 하지 못했다. 백성들은 원래 감찰원과 접촉할 기회가 극히 드물었다. 하지만 이 흉악하기로 유명한 감찰원이 나서자 모두 겁을 집어먹고는 자신의 목숨과 가정을 걸고 도박을 하려 들지 않았다.

태학에서는 그 어느 곳보다도 빠르게 대응에 나섰다. 전단지가 뿌려진 당일에 황제에게 허가를 받아 가을 시험을 앞당겨 시행했다.

이 모든 조치는 반나절 만에 연속적으로 이루어졌으며 이로써 전단지로 인한 혼란 국면은 조기에 진압될 수 있었다. 하지만 소문이란 놈은 날개가 없어도 날아가고 공기가 없어도 살아 숨 쉬는 것. 사건은 조기 진압되었을지라도 소문은 곧장 경도 곳곳으로 퍼져 나갔다. 그리고 어느새 사람들은 서로를 바라볼 때 ‘밥 먹었어?’가 아닌 ‘너도 봤어?’라는 눈빛을 주고받았다.

장 공주는 원래 경도에서 평판이 좋지 않았다. 더군다나 서른이나 먹고도 혼인을 하지 않았으니 이것만으로도 사람들에게 그녀는 꽤 이상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전단지에 적힌 장 공주가 외국과 밀약한 죄상에 대해 백성들은 완전히 믿지는 않았지만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날 리 없다고 여기기는 했다. 아낙네들은 훨씬 더 간단한 논리로 장 공주를 이해하고 있었다. 바로 ‘늙어서 시집도 안 간 건 분명 문제가 있는 여자이기 때문이다.’라고 말이다.

황실 입장에서는 이런 경우는 처음이었기에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더군다나 감찰원이 나서서 제대로 조치를 했음에도 황궁의 높은 분들은 불안감을 떨쳐 내지 못하고 있었다. 급기야 황궁 안에서는 황제 폐하가 서재에서 불같이 화를 냈으며, 황태후가 광신궁에 들어간 후 뺨 때리는 소리가 몇 번 울리더니 장 공주가 한동안 울음을 그치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퍼져, 궁녀들과 태감들은 발소리마저 죽이며 걸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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