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화
열쇠장이는 긴장한 상태에서 열쇠 복제에 들어갔다. 이후 밀실에서는 철을 연마하고 두드리는 소리가 계속해서 들려왔다. 범한은 긴장한 상태에서 밀실 입구만 바라보고 있었다. 범한은 오죽이 홍사상 태감을 얼마나 잡아 둘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다. 늙은 홍사상 태감은 함광전 지근거리에서 기거하고 있던 터였다. 그러니 그가 벌써 황궁에 돌아와 있다면 아무리 열쇠 복제에 성공해도 범한이 다시 황태후의 방으로 들어가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열쇠장이가 드디어 열쇠를 복제해 냈다. 땀범벅이 된 그가 범한에게 열쇠를 건넸다. 두 열쇠를 비교해 보니 정말로 구분이 되지 않을 정도로 똑같았다. 더군다나 녹슬어 생긴 얼룩도 거의 똑같아 보였다. 드디어 마음이 놓인 범한은 살며시 웃으며 물었다.
“전에는 무슨 일을 했습니까?”
범한은 여전히 검은 복면을 쓰고 있는 터라 그의 웃는 모습은 괴기스러웠다.
“소인은…… 도둑질을 했습니다.”
여전히 땀에 절어 있는 열쇠장이는 비밀스러운 일을 마친 자신에게 어떤 일이 기다리고 있을지 모르고 있었다.
범한은 열쇠장이가 자신의 동업자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한데 실눈을 뜨고 탁자 위에 놓여 있는 공구와 거푸집을 바라보고 있자니 절로 이맛살이 찌푸려졌다. 범한은 거푸집 옆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거푸집을 손에 쥐고는 끄응, 하는 소리와 함께 패도의 기를 몸 밖으로 빠르게 발산해 거푸집을 산산조각 냈다.
범한은 다시 왕계년에게 모든 금속 공구들을 다시는 쓸 수 없도록 망가뜨리라고 했다. 그리고 열쇠장이에게는 남쪽으로 가 한동안 머물라고 했다. 한시름 놓은 범한은 황궁에 다시 잠입하기 위해 길을 나섰다.
* * *
범한이 함광전으로 다시 들어왔을 무렵, 그가 뿌려 놓은 향은 냄새가 많이 옅어진 상태였다. 밤바람이 살랑살랑 불어오고 있는 함광전은 여전히 평화롭고 조용했다. 범한은 귀신처럼 다시 침대 아래로 미끄러지듯 들어가 복제한 열쇠를 넣은 후 들고 온 접착제를 발라 비밀 공간을 감쪽같이 원래 상태로 만들어 놓았다. 이제 조용히 궁전에서 나가는 일만 남아 있었다.
시각을 알리는 북소리가 울린 지 얼마나 지났는지 모를 무렵, 범한은 떠날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때 범한의 눈이 황궁 다른 쪽에 자리 잡은 작은 별궁으로 향했다. 그곳은 지금은 광신궁이라고 불리고 있었으며 장 공주의 처소였다.
만약 범한이 다른 엉뚱한 짓을 하지 않는다면 그는 오늘 완벽하게 일을 마치게 되는 것이었다. 그러니 즉각 황궁에서 나가야 했다. 그런 후 일이 점차 커지고 때가 무르익기를 기다려야 했다. 하지만 그토록 원했던 열쇠를 얻었다는 기쁨에 머리가 어떻게 되었는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지 몰라도 범한은 이내 조금 의외의 행동을 저지르고 말았다.
범한은 암흑이 엄호만 해준다면 아무리 경비가 삼엄한 황궁 안일지라도 자유롭게 다닐 자신이 있다고 생각했다. 이에 복도를 따라 걸어갔다. 오죽과 비개라는 야행성인 두 암흑 대사의 방법을 따라 광신궁까지 접근했다. 하지만 범한에게는 어려운 일이었다. 복도를 따라 오던 중 계속 하품하던 궁녀와 스치기까지 했으니 말이다.
광신궁 안에 아직 불이 밝혀져 있는 것으로 보아 누군가 깨어 있는 게 분명했다. 광신궁은 문이 하나밖에 없는 별궁이었고 다른 궁과 달리 궁 밖에 작은 담벼락이 하나 더 둘러쳐져 있었다.
산전수전 다 겪었으니 조그맣고 더러운 고랑 따위 뭐가 무섭겠는가. 한데 범한은 시대를 풍미하던 많은 고수들이 평범한 사람에게 당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던 터라 신중하게 행동했다. 범한은 조심스럽게 광신궁 뒤쪽으로 돌아갔다. 그러고는 우선 눈을 감고 숨부터 죽인 후 복도에 있는 굵은 기둥을 타고 위로 기어 올라갔다.
범한은 매끄러운 기둥을 손바닥으로 붙잡았다. 그런데 오늘 정신을 너무 많이 소모한 터라 조금 조바심을 내서 그런지 기둥 위로 올라간 범한은 꽤 힘들어 보였다. 범한은 다시 조심스럽게 광신궁 천장으로 올라갔다. 하지만 감히 기와를 열고 훔쳐보는 행동까지는 하지 못했다. 결국 범한은 실눈을 뜨고 유리 기와 중 가장 들킬 염려가 없는 반투명의 기와를 찾기 시작했다.
어쩌면 운이 너무 좋았던 것일 수도 있다. 궁전 꼭대기에는 원래 반투명의 기와가 필요 없었다. 한데 장 공주가 태양 빛이 방 안으로 들어오게 하는 것을 좋아한 터라 범한은 지붕 꼭대기에서 반투명 기와 하나를 찾아낼 수 있었다. 범한은 이내 조심스레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이때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기 위해 매 동작을 간결하고 안정적으로 해나갔다.
반투명한 기와 아래에는 등불이 켜 있지 않았다. 그렇다 해도 범한은 밤에도 잘 보이는 시력을 활용해 모든 걸 똑똑히 보았다. 게다가 뛰어난 청력으로 그 안에서 들려오는 소리까지 똑똑히 들었다. 범한은 눈을 가늘게 떴다. 자신의 추측이 맞았고 게다가 운까지 나쁘지 않다는 걸 알게 되어서였다.
* * *
장 공주 이운예는 나른한 기색이 가득한 얼굴로 평상에 기대 있었다. 그녀는 용모가 아름다웠으며 새하얗고 얇은 옷 하나만 걸치고 있었다. 그 아래로 명확히 드러난 신체 곡선은 성숙하면서도 풋풋함이 있었다. 만약 그녀의 이러한 모습을 세상 남자들이 보았다면 모두 그녀의 맨발 아래에 엎드려 그녀를 경배했을 것이다.
한데 장 공주는 황제와 가장 가까운 누이동생이었다. 그러니 미색으로 누군가를 유혹할 필요가 없었다. 그리고 그녀 앞에 있는 일흔은 족히 되어 보이는 자, 그러니까 오늘 밤이 오기 전까지 세계 제일의 도덕군자이자 문장의 대가라고 불렸던 그 역시 미색으로 홀릴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장묵한이 헛기침을 두 번 했다.
“저는 할 일을 마쳤습니다. 그러니 장 공주마마께서는 협의한 내용을 이행해 주시기 바랍니다.”
장 공주는 많은 돈을 들여 만든 가짜 족자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그러다 환하게 웃자 순간 방 안에는 봄기운이 도는 것만 같았다. 장 공주가 부드러운 음성으로 조심스럽게 말했다.
“나는 그대, 장묵한 대가가 범한을 밟아 버리길 바랐소. 다시는 경도에서 얼굴을 들고 다니지 못하도록 말이오. 한데 그대는 내가 원한대로 해주었소?”
장묵한이 흐릿하게 웃음을 지었다.
“오늘 그자를 궁지로 몰아넣은 일은 제가 17년 동안 쌓아 온 청렴한 명성을 건 도박이었습니다. 제가 졌으니 결과에 깨끗이 승복합니다. 범한 공자는 실로 하늘에서 인간계로 떨어진 시의 신선 같았습니다. 만약 공주마마께서 제게 그사실을 상세히 알려 주셨다면 이 같은 굴욕은 감수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자 장 공주가 한탄했다.
“나도 그 어린애가 시를 잘 짓기로 유명한 것만 알았을 뿐, 그러한 광기가 있는 줄은 몰랐소.”
눈을 감은 장묵한의 얼굴 위로 안타까운 표정이 일었다. 그리고 잠시 후 느릿느릿 말하기 시작했다.
“제가 안타까워하는 건 다름이 아닙니다. 반평생 도리를 지키며 살았는데 늙어 이리 추한 행동을 하게 되었습니다. 만약 범한 공자가 인간의 모든 마음을 담은 300편의 시를 짓지 않았더라면 천하 사람들은 이 늙은이의 말을 믿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범 공자는 남의 글이나 베끼는 파렴치한으로 낙인찍혔겠지요.”
노인이 눈을 떴다. 그의 눈동자는 이미 그가 담담하고 깨끗한 마음가짐으로 돌아왔음을 알려 주고 있었다. 눈을 뜬 장묵한은 이내 미소를 지었다.
“그것도 괜찮겠지요.”
“괜찮겠지요?”
장 공주가 맨발을 동동 구르며 입술을 살며시 깨물고는 원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장묵한 대가! 황태후마마께서 당신의 재능과 덕을 높이 사, 내 그대를 궁에 초대해 머물게 했소. 게다가 나는 그대가 요청한 일을 이미 잘 처리해 주었단 말이오. 그런데 그대도 나처럼 약속을 지켰소? 설마 두 나라 간에 협의가 체결돼 그대의 형제가 곧 영접을 받으며 귀국하게 되니, 범한이 명성을 이어 가도록 그냥 내버려 둔 것 아니오? 이 늙은 여우 같으니, 거짓으로 재주를 아끼는 척하면 마음이 편할 것 같았소?”
장묵한이 엷게 웃음을 지었다.
“잘못된 건 잘못된 것입니다. 오히려 이 늙은이가 가족을 생각하는 마음에 장 공주마마의 계략에 빠져 경국으로 오게 된 것이지요. 제 형제는 반평생 수없이 살인을 했습니다. 그러니 만약 장 공주마마께서 약속을 되돌릴 생각이시라면 저도 어쩔 수 없습니다. 북제로 돌아간 후 제 형제를 위해 기도하는 수밖에요. 귀국의 감찰원 감옥에 갇혀 있는 제 형제가 조금이라도 더 편히 지내게 해달라고 말이지요.”
장 공주가 어이없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북제가 소은을 돌려받을 수 있게 된 건 내가 그대의 제자인 황제에게 언빙운을 팔아넘겼기 때문이거늘. 즉 이 거래는 나와 그대가 아닌, 그대의 황제와 나와의 거래란 말이오. 한데 나는 약속을 이행했는데도 그대는 그렇게 하지 못했지. 오늘 밤 기년전에서 피를 토하는 척하며 패배를 인정할 게 아니라 오히려 범한이 그 시를 베꼈다고 쐐기를 박았다면, 일이 또 어떻게 흘러갔을지는 모를 일 아니오! 그러니…… 장묵한 대가, 북제로 돌아간 후 자네 제자인 황제에게 내 말을 똑똑히 전달하시오. 북제는 광신궁에 있는 나에게 선심을 하나 빚졌다고 말이오.”
그러자 장묵한이 미소를 지으며 받아쳤다.
“범한 공자는 큰 재목입니다. 시 쓰는 재능은 그를 따라갈 자가 없는데 이는 장 공주마마께서도 충분히 아시리라 생각합니다. 제가 보기에 범 공자는 한동안 이 세계에 출현하지 않았던 하늘의 자손이 아닐까 싶습니다. 하늘의 자손이 태어났는데 왜 경국에서는 서둘러 보호하기는커녕 도리어 죽여 없애려 하는 것입니까? 제가 보기에는 참으로 괴이합니다. 게다가 범한 공자가 정말로 시를 베꼈고 그게 사실로 드러났다고 해도 대체 왜 해쳐야 하는 것입니까!”
그러자 장 공주가 담담하게 설명을 해나갔다.
“나는 하늘의 자손이니 뭐니 하는 이상한 말 따위는 안 믿소. 장묵한 대가는 경서에 통달했으니 성인의 말을 잘 알고 있겠지. 만약 범한이 하늘의 자손 따위인데도 그의 능력이 고작 시나 읊어 대는 작은 재주에만 국한되어 있다면, 경국 조정으로서는 좋을 게 하나도 없는 거 아니오! 게다가 내가 왜 범한을 그리 대하는지는 대가가 신경 쓸 일 아니오.”
장묵한이 수십 년 동안 천하 지식인들 사이에 자리 잡고 있던 자신의 지위를 걸고 범한을 밟으려 했던 건 모두 장 공주의 부탁 때문이었다. 한데 그는 경국 조정의 얽히고설킨 내부 사정을 하나도 몰랐을뿐더러 장 공주와 범한이 곧 장모와 사위 사이가 될 것이란 사실도 전혀 모르고 있었다.
반면 범한은 장 공주가 왜 자신을 제거하려 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범한은 광신궁 지붕 위에서 무릎을 바닥에 대고 앉아 이 상황을 엿보고 있었다. 한데 반투명 유리 기와에 얹어 놓은 손가락 세 개가 살짝 시려 왔다. 더군다나 유리 기와를 통해 30대의 아름다운 공주를 바라보고 있는데도 범한의 두 눈은 점점 차갑게 변하고 있었다. 연회가 열린 기년전에서 곽보곤이 발언을 할 때 범한은 황궁 내 어느 귀한 분과 장묵한이 연합해 자신을 경도에서 내쫓으려 한다는 걸 짐작할 수 있었다.
표절 사건은 별것 아닌 것 같아도 인품과 연계된 일이었다. 그러므로 그때 만약 범한이 발광하듯 시를 쏟아 내 신하들과 황족들을 놀라게 하지 않았다면 모두 인품이 뛰어난 장묵한의 말을 믿었을 것이다. 그리고 범한 자신은 글 도둑으로 낙인이 찍혔을 게 뻔했다. 비록 처벌은 내려지지 않을 것이고 벼슬길도 어찌어찌해 볼 수 있었겠지만 임완아와의 혼사는 엎어졌을 것이다. 어찌 되었든 황태후가 무엇을 가장 싫어하는지는 장 공주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런데 범한의 가슴을 더욱 철렁 내려앉게 한 건 다른 내용이었다. 바로 이번 두 나라 간 비밀 협의의 중심 인물이자 북위의 밀정 우두머리 소은이 장묵한의 형님이란 사실이었다. 이는 곧 장 공주가 장묵한까지 동원해 자신을 압박하는 과정에서 경국이 북제에 심어 두었던 밀정 우두머리, 그러니까 조정 대신의 아들인 언빙운을 그녀가 직접 적국에 바쳤다는 의미였다.
참으로 대담한 짓거리 아닌가. 이런 음험한 짓까지 했는데 황제는 어찌하여 자신의 친누이가 나라의 체통을 깎아 먹는 짓을 해도 그냥 내버려 두는 건지…….
이맛살을 찌푸린 채 훔쳐보고 있던 범한에게 한여름 밤의 살랑바람이 불어왔다. 바람은 범한의 마음을 살짝 진정시켜 주었다. 범한은 자신이 들은 비밀 내용으로 상대를 협박할 수 없음을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황제의 누이동생이자 황태후가 가장 아끼는 딸이다. 그러니 이 두 가지 신분만으로도 그녀에게는 경국에서 거리낌 없이 행동하고, 더군다나 신하까지 팔아 가면서 사사로운 이익을 추구할 자격이 충분히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