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8화
그로부터 잠시 후, 오죽이 먼저 그리고 홍사상 태감 순으로 두 사람은 높은 담벼락 앞에 와 있었다. 홍사상 태감은 자기 눈앞에 있는 갈색 옷을 입은 자를 싸늘한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홍사상 태감은 이 갈색 옷을 입은 자가 어떻게 담벼락을 뛰어내려 도망가는지 일단 지켜보는 중이었다.
오죽은 곧장 담벼락 아래로 뛰어내렸다. 내려가는 와중에 속도를 줄이기는커녕 오른발로 담벼락 아래 있던 돌을 인정사정없이 밟아 돌은 순식간에 진흙 바닥 속으로 박히고 말았다. 오른발이 얼마나 큰 위력을 지녔는지 충분히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그리고 방금 돌을 찍어 눌러 버린 힘은 몸이 앞으로 튕겨 나가지 않고 위로 솟구치도록 해주는 힘으로 변하였다. 오죽은 하늘을 날기 시작했고 그의 몸은 어두컴컴한 담벼락을 따라 귀신처럼 공중으로 떠올랐다.
오죽은 세 장에 이르는 높이까지 날아올랐다. 그리고 위로 도약하게 해준 힘이 다 되어 아래로 떨어지는 순간 바람 소리와 함께 그가 쥐고 있던 검이, 대체 어떻게 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황궁 담벼락에 깊숙이 꽂혔다. 그러자 검을 꽂았을 때 생긴 힘으로 오죽은 몸의 방향을 바꾸었다. 이에 오죽은 집어 던진 돌멩이처럼 담벼락 밖으로 내던져졌다.
홍사상 태감은 헉, 소리를 냈다. 그는 방금 상황을 통해 오죽이 모든 상황을 정확히 계산한 후 체내의 정기를 재빨리 발사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벽과 부딪치려던 순간 공중으로 몸을 띄울 때 자세가 아름다웠던 이유는 정기를 아주 조금만 이용했기 때문이란 것도 알 수 있었다. 이는 조금 전 오죽의 난폭한 행동에 비하면 많이 소심한 행동이었다.
늙고 마른 태감이 도약해 세 장 높이까지 몸을 띄웠다. 그러고는 손가락 하나를 뻗어 오죽이 담벼락에 남겨 놓은 칼자국 부분에 대고 밀었다. 그러자 그의 몸이 조금 더 높이 공중으로 솟구치더니 그 역시 담벼락 밖으로 나가게 되었다. 이어 홍사상 태감은 어두컴컴한 밤에 거대한 검은 새가 움직이는 것처럼 황궁 담벼락 바깥쪽의 매끄러운 면을 피해 천천히 날아 내려갔다.
날아 내려가는 동안 홍사상 태감의 두 눈은 매가 먹잇감을 노려보듯 갈색 옷의 침입자를 지켜보고 있었다. 갈색 옷을 입은 자는 매우 수상한 낌새를 풍기며 앞서 나가고 있었다. 홍사상 태감은 잠시 음험하게 웃더니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고 나뭇가지 끝을 밟으며 민가까지 날아가 갈색 옷을 입은 자를 뒤쫓았다.
한편 호위병들은 두 절대 고수가 황궁 안에서 겨루었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었다. 모두 두 사람이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은 까닭이었다.
* * *
황궁 담벼락 아래, 암흑 속에서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는 범한은 쥐새끼처럼 살며시 고개를 기울이고 저쪽에서 들려오는 작은 바람 소리를 듣고 있었다. 그러다 자리에서 일어나 궁둥이에 묻은 덤불과 먼지를 살살 떨어내고는 매끄러운 황궁 외벽 위에 양쪽 손바닥을 가져다 댔다.
그는 오죽처럼 강인한 육체를 지녔다거나 홍사상 태감처럼 절정의 내공을 지닌 사람은 아니었다. 하지만 정기를 운용하는 방법만큼은 이 세계의 무공 연마자들과는 달랐다. 게다가 담주성 밖에 있는 이끼가 가득 낀 미끄러운 절벽도 기어올랐었는데 이까짓 황궁 담벼락 정도야.
이 방법은 범한이 가장 믿고 있는 구석이기도 했다.
범한은 날지 못하는 박쥐처럼 황궁 담벼락 위를 천천히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비록 느리기는 했어도 안정적이어서 아래로 미끄러져 떨어질 일은 절대로 없었다. 만약 이 순간 아침이 밝아 누군가 먼 곳에서 발견한다면 분명 붉은색 담벼락 위에 갑자기 검고 흉측한 점이 생겼다고 생각할 것이다.
담벼락을 넘어간 범한은 혹시라도 있을지 모르는 보초에게 들킬세라 조심했고, 이에 그의 두 발을 황궁 안 풀밭 위에 안전하게 내디딜 수 있었다. 밖에 앉아 명상할 때 범한은 자신이 제작한 황궁 지도를 머릿속에서 여러 번 반복해 살펴보았다. 그러다 이제 황궁 안으로 들어와 서게 되자 범한은 밤하늘 아래 놓인 거대한 궁들을 바라보며 저 멀리서 들릴 듯 말 듯 들려오는 북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어느새 범한은 긴장감과 흥분을 동시에 느끼고 있었다.
지금 이 순간 범한의 머릿속에 있던 지도는 눈으로 볼 수 있는 실제 통로로 변해 있었다. 범한은 마지막으로 숨을 고른 후 어둠이 짙게 깔린 황궁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오로지 머릿속 기억에 의지한 채 인공으로 조성된 산과 화초들의 엄호를 받으며 아무 소리도 내지 않고, 속도도 줄이지 않은 채 목적지를 향해 나아갔다. 범한이 황궁으로 잠입한 방법은 오죽과 유사했다. 하지만 자잘한 부분에서는 여전히 차이가 있었다. 범한의 계산 능력이 여전히 오죽만 못하기 때문이었다.
그사이 밤은 더 깊었고 궁 안 사람들 대부분은 자고 있었다.
범한은 함광전 밖 어둠 속에 몸을 숨긴 채 내궁에 고수가 있는지부터 확인했다. 고수가 없는 걸로 보아 칼을 찬 호위병들은 모두 함광전 앞부분과 모퉁이 부분에 있는 것 같았다. 한데 호위병들의 위치를 대충 확인한 범한의 이맛살이 절로 찌푸려졌다. 황궁을 호위하는 사람들이 이리도 허술하다니. 이건 너무 위험하잖아. 북제가 황궁에 고수라도 잠입시키면 어쩌려고 이러는지.
한밤중에 몰래 황궁에 잠입한 도둑 주제에 나라와 백성 걱정이라니 범한은 참으로 희한한 인물임은 분명했다. 그런데 범한의 이러한 계산에는 착오가 있었다. 다시 말해 이 세계에서 호위병들에게 들키지 않고 한 번에 다섯 장 높이의 담벼락을 뛰어넘을 수 있는 사람은 몇 명의 최고 고수밖에 없다는 걸 우선 생각해 냈어야 했다. 그리고 혹시라도 정말로 고수인 종사가 나타난다면 일반 호위병들로서는 속수무책일 것이란 점도 생각했어야 했다.
게다가 범한은 이 세계에서 스파이더맨처럼 벽을 타는 무공을 쓸 수 있는 사람은 자기뿐이란 사실도 잊고 있었다.
오죽은 닷새 전에 황궁에 들어온 적 있었다. 그리고 그때 열쇠가 함광전의 모처에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이에 범한이 가장 먼저 탐색해 볼 장소는 바로 오죽이 알아낸 장소였다. 한데 너무 오랫동안 아무 일도 없어서 그런지 황태후의 거처인 함광전은 불침번을 서는 궁녀들마저 잠들어 조용하고 평화로웠다. 하지만 향로를 관리하는 어린 태감들만큼은 몰려오는 졸음을 참아 가며 멍하니 깨 있었다.
희미한 향냄새가 함광전에 깔렸다. 그러자 어린 태감도 궁녀들처럼 모두 죽은 듯이 잠들어 버렸다.
등불이 희미하게 켜진 가운데 범한은 외지고 어두운 곳을 따라 침소 안으로 살그머니 들어갔다. 침소에 들어서서 멀찌감치 놓인 거대하고 화려한 침대를 보는 순간 범한은 이맛살을 찌푸리고 말았다. 침대 위에는 얇은 비단 이불을 덮고 있는 노부인이 있었다. 그런데 그녀가 과연 황태후일까.
한데 이 순간 범한은 크게 탄성을 지를 겨를이 없었다. 그러니 역사를 자신의 손으로 바꿀 수 있다는 무료한 환상도 하지 않았다. 범한은 냉정하게 침대 앞으로 그리고 다시 침대 옆에까지 다가갔다. 그런 후 세상에서 최고 권력을 쥔 이 아녀자를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이는 냉정함 까닭이었다. 바로 오죽과 비개가 범한에게 가르친 최고의 품성 말이다.
황태후의 침소에는 예상했던 것처럼 고수가 잠복해 있지는 않았다. 전생의 유명 무협 소설가 구롱(古龍)의 책에서는 황제와 황태후 곁에는 항상 숨어 있는 궁사가 붙어 있었다. 그래서 계획대로라면 분명 소설에서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고수가 있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았던 것이다.
범한은 보물을 숨겨 놓을 만한 곳을 가늠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냥 바로 황태후의 침대 밑으로 들어가 눈을 감고는 아래에 깔린 나무 바닥을 손바닥으로 더듬기 시작했다. 참으로 좋은 재질의 나무라고 생각하던 찰나 손끝으로 이상한 느낌이 전해져 왔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어두컴컴한 침대 아래 있던 범한은 두 눈을 떴다. 맑게 반짝이는 그의 눈에 황당함이 뒤섞인 기쁨이 잠시 스쳐 갔다.
범한은 담주에 있을 때 아무 제목도 쓰여 있지 않은 무공 비급을 침대 아래에, 그것도 나무 바닥 아래에 비밀 공간을 만들어 넣어두었다. 전생에 본 《녹정기》라는 소설에서도 모동주라는 인물이 침대 밑 비밀 공간에 물건을 넣어 보관했다. 그런데 경국의 황태후도 침대 아래에 이런 비밀 공간을 만들어 두었을 줄이야. 사람의 상상력은 어느 때 보면 참으로 빈약하기 그지없는 것 같다.
범한은 지니고 있던 날카로운 칼을 마루판 옆으로 끼워 넣고는 살그머니 힘을 주었다. 그러자 나무판이 아무런 소리도 없이 열렸다. 그 순간 침대 위에 있는 황태후가 몸을 뒤척이며 무어라 몇 마디 중얼거렸다. 하지만 범한은 아무런 말도 듣지 못한 사람처럼 표정 변화 없이 계속 작업에만 몰두했다. 그리고 잠시 후, 범한은 비밀 공간을 여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그 안에 손을 넣어 헤집어 놓아서는 안 되었다. 한데 다행히 범한은 밤눈이 밝은 편이라 그 안에 무엇이 들었는지 직접 들여다보았다.
비밀 공간 안에는 보석이니 은표 같은 것이 들어 있지 않았다. 겨우 종이만 한 장 들어 있었다. 서한이었다. 그리고 열쇠가 하나 있었다.
범한은 열쇠의 형태를 바라보며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그의 얼굴에서 매우 기이한 표정이 떠올랐다. 범한은 흰 천과 서신은 그대로 둔 채 열쇠만 꺼내 품에 넣고 침대 아래에서 미끄러지듯 빠져나왔다.
잠시 후 범한은 다시 황궁 담벼락 아래에 나타났다.
* * *
범한은 마차에 올라타자마자 왕계년을 바라보며 작은 소리로 말했다.
“최대한 빨리 가요.”
“알겠습니다.”
왕계년은 오늘 자신이 어떤 임무를 수행하고 있는지 몰랐다. 그가 알고 있는 것이라고는 길 입구에서 대인을 태운 후 자신이 약속을 잡아 놓은 그 사람을 만나러 가야 한다는 것뿐이었다.
“내가 지금 이 마차에 있었다는 걸 아무도 몰랐으면 좋겠습니다.”
“대인, 염려 놓으십시오. 추밀원에서 빌려 온 마차이니 감히 막는 자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니 대인께서 타고 계신 것도 모를 겁니다.”
“잘했습니다.”
범한은 마음이 좀 놓이자 의자 위에 몸을 반쯤 누이고는 이맛살을 찌푸렸다. 오늘 가짜로 취한 상태에서 발광을 하듯 시를 지은 후 다시 한밤중에 황궁으로 잠입해 물건을 찾았으니, 정신 소모가 너무 심했던 것이다.
마차가 어느 뜰에 당도했다. 범한도 처음 와보는 곳이었다. 두 사람은 쥐도 새도 모르게 마차에서 내려 복면을 뒤집어쓰고는 곧장 지하에 있는 밀실로 들어갔다. 왕계년이 소리를 죽여 말했다.
“대인, 이곳이 열쇠장이가 있는 곳입니다.”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두 사람의 눈에 작은 탁자가 들어왔다. 불빛 아래 놓인 작은 나무 탁자 위에 낯선 금속 공구들이 즐비하게 늘어서서 불빛을 받아 반짝이고 있었다. 이 공구들의 주인은 성실해 보이는 중년의 사람이었고 까무잡잡한 얼굴로 우직한 느낌을 주는 웃음을 짓고 있었다.
열쇠장이는 일종의 직업이자 호칭이다. 그런데 중년의 사람은 외모에서 풍기는 느낌 그대로 이름도 열쇠장이였다. 그러니 그의 솜씨가 어느 정도인지는 이름만 듣고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을 정도였다.
범한이 고개를 끄덕이며 왕계년에게 말했다.
“나가서 기다려요.”
왕계년은 어떤 일들에 대해서는 자신은 절대 알아서는 안 되며 또 그리하는 편이 가장 안전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고개를 숙인 채 곧장 밀실에서 나갔다.
“조정의 이익과 직결된 일입니다. 추밀원의 일원으로서 부탁드립니다. 나라를 위해 힘써 주시기 바랍니다.”
범한이 복면을 벗지 않은 채 조용조용하게 열쇠장이에게 말했다.
열쇠장이는 놀랐다. 그러고는 이내 최근 경도에 외국 사절단이 많이 왔었다는 걸 떠올렸다. 그리고 순간 무언가가 생각났는지 서둘러 범한을 향해 예의 바르게 인사를 올렸다. 하지만 그는 정작 자신이 대체 무엇을 해야 하는지는 모르고 있었다.
“서두르되 정확하게 처리해야 합니다.”
범한이 허리끈 안에서 열쇠 하나를 꺼냈다.
“똑같이 만들어야 합니다.”
열쇠장이가 열쇠를 받아 들고 세세히 살펴보더니 이맛살을 찌푸렸다.
“이 세상에 이런 열쇠에 맞는 자물쇠는 없는데요.”
“상관없습니다. 이 열쇠를 똑같이 복제만 해주면 됩니다. 할 수 있겠습니까?”
“어렵겠군요. 참으로 복잡하게 생긴 열쇠입니다. 설령 아무도 알아채지 못하게 똑같이 만들어 낸다 해도 이것에 맞는 자물쇠가 있을지는 저도 보장 못 합니다.”
“잘됐군요. 그러면 어서 시작해 줘요.”
범한은 열쇠장이의 답변이 의외였지만 기분은 좋았다. 하지만 그의 음성에는 오히려 냉랭함만 감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