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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여년-117화 (117/1,108)

117화

황궁 깊이 자리 잡은 함광전으로부터 멀지 않은 곳에 태감 홍사상의 거처가 있었다. 홍사상은 자신의 거처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황태후는 오늘따라 몸이 안 좋았다. 하지만 황제가 오늘 연회에서 겪은 재미있는 일과 기다리고 있던 장묵한 소식에서 그가 범한 때문에 객혈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듣자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하지만 어찌 된 영문인지 같은 노인 된 입장에서 느끼는 비애 같은 게 있었는지 황태후는 일찌감치 잠자리에 들었다.

홍사상은 황궁 안에서 수십 년을 지낸 태감이었다. 어린 태감들은 그의 정확한 나이를 모르고 있었으며 그저 ‘대략 그가 칠팔십 정도 되지 않을까?’ 추측만 할 뿐이었다. 한데 그의 나이가 어떻든 현재 홍사상이 황궁에서 맡고 있는 유일한 업무는 바로 황태후 마마의 말동무가 되어 드리는 것이었다. 그는 경국이 개국한 이래로 줄곧 황궁에서만 지냈다. 물론 젊은 시절에는 황궁 밖에 나가 돌아다니는 걸 좋아하기는 했다. 하지만 나이를 먹고 황궁 밖이나 안이나 그게 그거란 걸 알게 되자 거의 나가지 않았다.

홍사상은 땅콩 하나를 집어 입에 넣고는 소리를 내며 씹다가 작은 술잔을 들어 그 안에 담긴 술을 음미하듯 한 모금을 마셨다. 탁자 위에 희미하게 등잔불이 켜져 있는 가운데 오늘 기년전에서 범 공자가 술주정을 부린 일을 회상하던 늙은 태감은 자기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그는 경국의 태감이라는 자부심이 있던 터라 범한이 북제 사람의 콧대를 납작하게 만들어 주자 나름 기분이 좋았다.

황궁 안 다른 곳에도 불이 밝혀져 있었다. 바로 황제 폐하의 서재로, 이곳은 태감들의 방보다 훨씬 밝았다. 그는 열심히 국사를 돌보고 백성을 사랑하는 명군이었다. 이에 항상 밤에도 상소문을 읽었으며 밤참으로 따뜻한 물을 찾았다. 그러다 보니 황제의 습관에 익숙해진 태감들도 언제든 물을 대령하기 위해 대기하고 있었다.

오늘 연회는 밤 깊은 시각에 끝을 맺었다. 그런데도 황제는 서재로 들어 국정을 돌보았다. 황제는 탁자 앞에 앉아 붓을 쥐고 있었고 그 붓의 끝부분에는 붉은 먹물이 묻어 있었다. 그것도 마치 소리 없이 날아드는 살인을 위한 칼날처럼 말이다. 붓끝이 상소 위에서 움직이는가 싶더니 순간 허공에서 멈추었다. 이 순간 황제는 이맛살을 점점 더 강하게 일그러뜨리고 있었다.

옆에서 붓을 들고 있던 태감이 조심스레 물었다.

“폐하, 피곤하지 않으신지요. 그만 쉬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러자 황제가 웃으며 질책했다.

“오늘 밤 기년전에서 네가 시를 받아 적지 않았느냐. 왜 단 한 번도 붓을 놓지 않았던 게냐?”

그러자 태감은 입술을 꿈틀거리며 잠시 웃다가 황제의 질문에 대답했다.

“나라에 시의 천재가 탄생하였으니 소인, 그와 같은 일이라면 매일매일 할 수 있사옵니다.”

그러자 황제는 잠시 웃기만 하고 더 이상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밤의 어둠 속에서 이상한 존재를 느끼기라도 한 사람처럼 고개를 들어 잠시 창밖을 바라보았다.

* * *

황궁은 넓디넓었다. 그리고 여름밤 황궁은 참으로 고요했다. 궁녀들은 졸음이 몰려와 눈을 반쯤 감고 있었지만 감히 잠들지는 못했다. 호위병들은 성 밖에서 조심스레 황궁을 수비하고 있었다. 하지만 내궁은 천하태평하기만 했다.

담벼락 한 귀퉁이, 가짜 산 옆에 오죽이 온통 연한 갈색으로 된 옷을 입고 어둠과 혼연일체가 되어 있었다. 그리고 밖으로 드러나 있어야 하는 두 눈은 여전히 검은 천으로 가려져 있었다. 이 순간 오죽의 온몸은 어떤 무공의 도움이라도 받은 듯 주변 무생물과 매우 유사한 존재로 변해 있었다.

심장 박동과 호흡은 최대한으로 느려진 상태였고 이미 주변에서 불어오는 따스한 밤바람과 하나가 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누가 오죽 옆으로 지나간다 하더라도 일부러 살펴보지 않는 이상은 절대 발각될 염려가 없었다.

오죽은 등불이 밝혀진 황제의 서재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그렇게 한참을 있다가 천천히 고개를 숙이고 얼굴에 복면을 뒤집어쓰더니 말없이 서재 맞은편 방향으로 걸어갔다. 오죽은 불빛이 비치는 곳만 교묘하게 피하며 걷고 있었다. 지형을 따라, 화초를 따라 걸었으며 아무런 흔적도 없이 산으로 들어갔고,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고 호수를 건넜다. 형체도 없는 귀신처럼 호위병들이 삼엄히 지키는 내궁 안을 무서울 정도로 느긋하게 걸어 다녔다.

방 안에 있던 등잔불에서 갑자기 불꽃이 튀었다. 이는 원래 좋은 징조였다. 하지만 홍사상의 흰 눈썹은 오히려 불만스러운 것이 있는 것처럼 위로 솟구쳤다. 그런데도 그는 늙어 빠진 오른손에 젓가락을 쥐고 별다른 큰 동작 없이 차분하게 기름에 튀긴 땅콩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씹어 으깨 천천히 삼키고는 이 사이에 남은 땅콩 향을 즐겼다. 그러고는 다시 술잔을 들어 마시더니 이내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주 오랜만이군, 이 황궁 안에 누군가가 들어와 돌아다니기는.”

홍사상 태감은 눈이 조금 어두웠기에 조금 멀뚱멀뚱 창밖을 바라보며 작은 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손가락은 벌써 가볍게 한 번 튕긴 상태였다.

뜰 밖으로 통하는 문은 열려 있었다.

홍사상 태감이 들고 있던 젓가락이 강한 정기에 의해 화살처럼 밖으로 튕겨 나갔다. 슉슉, 하고 동시에 두 번 소리가 나더니 순식간에 창문을 뚫고 문밖 어두운 구석을 향해 곧장 날아갔다. 바로 오죽의 얼굴을 향해서였다.

젓가락은 바람 소리를 내며 날아갔다. 이 바람 소리는 누군가를 놀라게 하기에 충분했다. 만약 제대로 날아갔다면 젓가락은 화살처럼 그 누군가에게 꽂혔을 것이다. 대충 손가락을 튕겼을 뿐인데 이렇게나 신묘한 능력을 발휘하다니. 홍사상 태감은 참으로 무서운 실력을 지닌 자였다.

하지만 왜인지 모르겠지만 오늘 오죽은 평소보다 반응이 약간 느린 것 같았다. 몸을 늦게 돌리는 바람에 젓가락에 옷의 오른쪽 어깨 부분이 찢겼다.

슉! 젓가락이 진흙 바닥에 사선으로 박히더니 미세하게 부르르 떨었다.

정원 밖에 있는 갈색 옷의 손님을 바라보는 홍사상 태감의 눈가도 살며시 떨렸다. 상대방의 얼굴이 복면에 가려져 있어 용모를 정확히 파악할 수 없었다.

“누구냐?”

늙은 홍사상 태감이 활짝 웃으며 물었다. 보아하니 신분이 낮은 시종일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겉으로 드러난 것보다 훨씬 무서운 존재임은 분명할 거라고 그는 생각하고 있었다.

오죽이 오늘 입은 갈색 의상은 새 옷이었다. 그래서 한쪽이 찢어지자 그는 기분이 조금 이상했다. 하지만 범한의 계획만은 엄격히 따랐다. 이에 상대방을 주시하는 것처럼 고개를 들고는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죄송합니다. 오해하셨습니다.”

“오해라고? 설마 길을 잃었단 말이오?”

홍사상 태감이 아까보다 훨씬 기분 좋게 웃으며 말했다.

“황궁 안에서 길을 잃은 이는 귀하가 처음이구려. 닷새 전에도 한 번 온 걸로 아는데 줄곧 귀하를 기다렸소이다. 그대가 누군지 참으로 궁금했는데, 생각해 보니 내 옛 친구 몇몇 외에는 이리 담 큰 행동을 할 사람이 없더군요.”

오죽은 자신의 말소리에 황급해하는 느낌을 가미했다. 하지만 감정을 꾸미는 데 워낙 미숙한 터라 도리어 거짓이란 느낌이 더 강하게 났다.

“나랏일을 하고 있는 몸이라 감히 그곳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면전까지 가 인사를 드리고 싶어도 그리할 수 없는 점, 선배께서 아량을 베풀어 주시기 바랍니다.”

홍사상 태감은 이맛살을 찌푸렸고 이후로 다시는 이맛살을 펴고 웃지 않았다. 상대가 자신이 후배임을 자인했으니 이는 곧 그가 몇몇 괴물 같은 늙은 친구들의 제자란 뜻이었다. 그리고 상대방의 몸놀림을 보니 그는 적어도 9등급에 이르는 초강력 고수였다. 그래야 황궁 잠입에 성공해 자신에게 발각될 수 있었다. 한데 상대방의 갈라진 목소리는 일부러 후두부 근육을 눌러 변형시킨 것이어서 홍사상 태감은 음성만으로는 유용한 정보를 얻을 수 없었다.

“얘야, 이곳은 황궁이란다.”

홍사상 태감이 한숨을 내쉬더니 다시 말을 이어 나갔다.

“설마 이곳이 오고 싶으면 오고, 나가고 싶으면 나갈 수 있는 곳인 줄 알았더냐.”

홍사상 태감은 말을 마치자마자 자신의 오른손을 활짝 폈다. 그러자 그의 몸이 지면 위를 미끄러지듯 일어나는 것 같더니 순식간에 오죽 앞으로 다가와 있었다. 게다가 그의 비쩍 마른 손은 오죽의 얼굴을 거머쥐려 하고 있었다.

* * *

검은 복면 아래에 숨겨진 오죽의 얼굴에는 아무런 표정도 없었다. 하지만 상대방이 자신의 능력을 잘못 판단했다는 것과, 지금이 상대방을 죽일 절호의 기회란 것을 지금 오죽은 잘 알고 있었다. 죽일까, 말까? 예전 오죽이었다면 사실 고민거리가 전혀 안 되는 문제였다. 하지만 오늘 밤 오죽에게는 그렇지 않았다.

오죽의 머리는 순식간에 계산에 들어가 벌써 결론을 내린 상태였다. 그는 대략적으로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렸다. 일단 이 순간 상대방을 죽이면 자신도 약간의 대가를 치를 수밖에 없다. 그리고 자신이 치를 대가보다 더 큰 문제로는 황궁 안을 지키는 호위병들을 움직이게 만들어 범한의 다음 행동에 큰 지장을 초래하게 된다.

오죽은 뒤로 물러서서 무릎을 굽히고 팔을 접고는 팔꿈치를 들어 올렸다.

그러자 팔꿈치 아래에 있던 일반 검이 팔을 접는 순간 위로 튀어나와 홍사상 태감의 팔을 찔렀다. 오죽의 계산은 한 치의 오차도 없었다. 이때 가장 중요한 기술은 상대방이 검의 움직임을 예측하지 못하도록 만들어 검 끝을 겨누는 순간 상대가 실수하도록 만드는 것이었다.

하지만 홍사상 태감도 비범한 인물인지라 오죽의 공격을 은근슬쩍 비웃고는 날카로운 소리로 꾸짖었다.

“왼쪽이냐?”

목소리만 들었을 때 홍사상 태감은 약간 놀란 사람 같아 보였다. 하지만 그는 조금도 지체하지 않고 반격했다. 순간 그의 왼손이 소매 안에서 용처럼 튀어나와 바람보다도 빠르게 어마어마한 힘으로 오죽의 가슴팍을 쳤다. 그야말로 세계 최강의 실력이었다.

오죽은 다시 뒤로 한 걸음 물러서서 무릎을 세우고 팔꿈치를 가로로 휘둘렀다. 그러자 팔꿈치 부분에 들어 있던 검이 몸 앞쪽을 가로질렀다. 스스로 목을 자르려는 행동처럼 보였지만 오히려 가슴팍을 보호하는 동작이었다. 그리고 이 동작으로 오죽은 홍사상 태감의 비쩍 마른 손바닥을 절묘하게 막아 냈다.

“앞쪽이냐?”

목소리가 아까보다 더 날카로워지더니 그가 손을 거두어들이고는 허리춤에서부터 위로 끌어 올렸다. 이 동작을 하는 동안 홍사상 태감은 매우 이상해 보일 정도로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는 끄응, 하는 소리와 함께 수십 년 동안 쌓아 온 정기를 재정비했다. 그러자 그에게서 무수히 많은 기가 앞으로 쏟아져 나와 오죽을 묶어 두려 했다.

하지만 오죽은 홍사상 태감에게 기회를 주지 않고 차분하게 다시 뒤로 두 걸음 물러났다. 뒤로 두 걸음 옮겼을 뿐이니 쉬운 행동처럼 여겨질 것이다. 그런데 아무리 산책이라도 하는 양 자연스럽게 뒷걸음치며 슬쩍 빠져나갔다고 해도, 그 순간은 홍사상 태감이라는 절대 고수와 대결하는 와중이었고 또한 홍사상 태감이 발산한 기운이 오죽을 잡으려 여러 갈래로 나뉘어 공격해 들어오는 찰나였다. 그러니 오죽이 교묘하게 그리고 자연스럽게 몸은 피했을지는 몰라도, 홍사상 태감이 수십 년 동안 쌓아 온 내공 공격에 간섭을 받을 수밖에 없어 이 순간만큼은 오죽도 살짝 허둥대기는 했다.

홍사상 태감의 이마 주름이 더욱 깊게 파였다. 그런 그가 오죽을 바라보며 싸늘하게 말했다.

“검을 내보내는 방향을 바꾼다고 사람을 속일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느냐. 출입이 금지된 황궁 안에 들어오기는 했어도 이 태감인 내가 너를 좋게 보았으니 내 곁에 머무르거라!”

오죽은 살짝 고개를 들고 그의 눈을 바라보았다. 대체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지만 두 손을 모아 잡고 가슴팍 위로 끌어 올려 홍사상 태감에게 공손히 인사를 올렸다.

그러자 홍사상 태감은 이맛살을 찌푸리며 깜짝 놀라고 말았다.

* * *

사사사삭, 하는 소리가 울려 퍼지고 오죽이 몸을 돌렸다. 그러고는 마치 자기 뒤에 홍사상 태감이 없는 것처럼 검을 몸 뒤쪽으로 보내더니 이내 황궁 담벼락을 향해 내달렸다. 오죽은 참으로 빨랐다. 풀을 밟고 뛰어가더니 어느새 연기처럼 사라지고 없었다.

검을 뒤로한 자세는 쉽게 할 수 있는 동작이다. 하지만 완벽한 방어 자세이기도 했다.

“뒤쪽인가?”

순간 홍사상 태감의 두 눈에서 음침한 눈빛이 번뜩이더니 황궁 호위병을 부르지도 않은 채 두 팔을 활짝 펼쳤다. 그러자 그의 말라비틀어진 몸은 날개를 활짝 편 검은 새처럼 이내 오죽을 뒤쫓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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