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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여년-114화 (114/1,108)

114화

곽보곤.

황태자의 측근이자 황궁 편찬인 곽보곤도 오늘 연회에 와 있었다. 범한의 시선이 향한 곳을 바라보던 황태자도 범한처럼 영문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득의양양한 표정을 짓고 있는 곽보곤을 바라봤다.

‘도대체 무슨 속셈인 거지?’

이때 장묵한이 헛기침을 하고는 황제에게 공손하게 말했다.

“소신의 몸은 비록 대제에 속해 있지만 마음은 항상 문학에 있습니다. 양국의 우애를 상하게 하고 싶지는 않지만 문학가인 이상 냉정한 평가를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 말에 황제의 표정도 점점 풀리더니 온화한 목소리로 말했다.

“장 선생, 괜찮네.”

황제의 말과 동시에 황후가 술잔을 내밀자 장묵한이 말했다.

“바람은 거세고 하늘은 높으니 원숭이가 슬피 울고, 맑은 하천가 하얀 모래섬에 새들이 날아돌아 오네. 끝없이 아득한 나뭇잎이 우수수 떨어지고 무궁한 큰 강은 세차게 흐른다. 만 리 쓸쓸한 가을에는 언제나 나그네가 되어 평생 많은 병을 앓으며 홀로 높은 곳에 올랐구나. 고난과 힘겨움에 어느새 머리는 하얗게 새어 버려 초라한 심정에 마시던 탁주 잔을 새로 멈춘다.”

천하를 움직이는 문학 대가의 말에 기년전에 무거운 침묵이 감돌았다.

“이 시에서 앞에 네 문장이 특히 좋습니다.”

장묵한이 말을 마치자 중신들은 그가 왜 그런 말을 했는지 도통 이해할 수 없었다. 이 시는 올해 초 처음 등장한 후 일찌감치 널리 경도에 퍼져 있었다. 여러 시인들은 ‘큰 강’이라고 된 부분에서 ‘큰’ 자가 조금 거슬리게 들리는 것 빼고는 이 시는 천의무봉이라 할 만큼 완벽하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이 시의 정수는 후반 네 구절이었다. 그런데 왜 장묵한은 사람들과 반대의 생각을 말하는 건지.

사람들은 장묵한이 하는 말을 가만히 듣고 있었다.

“전반의 네 구절은 좋았습니다. 하지만 후반의 네 구절은 그저 그렇습니다. 그 이유는…… 그 마지막 네 구절은 범 공자가 쓴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가 말을 마치자 기년전에 있는 사람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내 모두 입을 꾹 닫아 버렸고 한순간 죽음과도 같은 침묵이 흘렀다.

범한은 짐짓 경악한 척했다. 하지만 실제로는 뒤에 숨은 사정을 잘 알고 있던 터라 오히려 금세 차분한 모양새로 돌아왔다. 그러더니 잔뜩 취한 몸을 탁자에 기울인 채 미소를 가득 머금은 얼굴로 장묵한을 바라보았다.

몇 달 전 임완아가 그의 시가 베낀 것이란 이야기가 나돈다고 범한에게 말해 준 적 있었다. 그때 범한 자신은 그 이야기를 그다지 마음에 두지 않았다. 그런데 오늘 와서, 그것도 이렇게나 공개적으로 표절 시비가 터져 버릴 줄이야. 곽보곤이 이런 일을 벌이려면 분명 어느 지체 높은 분의 명령을 받아야만 가능할 터인데.

범한이 경도로 들어온 후 가질 수 있던 유일한 것이 바로 문인으로서의 명성이었다. 그런데 그 명성이 지금 모두 손상된다면 글재주와 인품을 중요시하는 이 세계에서 자신은 자진해 파혼을 선언해야만 했다.

그런데 범한은 장묵한이 앞 네 구절을 읽기 시작할 때 이와 같은 걱정을 일찌감치 내려놓았다. 자신이 가장 우려하던 일이 일어나지 않을 거라 확신해서였다. 이 시에서 나온 ‘큰 강’은 원래 원문에서는 전생의 양쯔강을 이르는 표현, 즉 ‘장강(長江)’으로 표기되어 있었다. 그런데 범한이 보기에 장묵한 대가는 그 점을 모르는 것 같았다. 그 말인즉슨 장묵한은 범한이 표절했다는 걸 증명하기 위해 자신의 학문적인 역량과 도덕적 명성만 내세워 범한을 압박하고 있는 것이었다.

한데 장 공주가 장묵한을 어떻게 구워삶았길래 이 명성이 자자한 장묵한께서 천리를 마다 않고 경국까지 와 소인배 짓거리까지 하게 되었는지는 범한으로서도 영문을 알 수 없었다.

* * *

침묵이 흐르기 시작한 지 한참이 지났다.

황제의 미간이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황제는 표절에 대해 말하면서도 장묵한에게 근거도 없이 이러쿵저러쿵해서는 안 된다며 오히려 그를 엄하게 꾸짖었다.

“근거가 없는 말입니다.”

줄곧 범한 옆에 앉아 있던 예부 시랑 장자건이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어 갔다.

“장묵한 선생은 대가입니다. 제가 어린 시절 배우는 입장이었을 때는 선생이 주를 단 경서를 금과옥조로 여기고 공부했습니다. 그러니 천하에 선생의 말을 의심할 자는 감히 없을 것이옵니다. 하오나 이번 일은 남의 글을 베낀 것과 관련되어 있으니 어쩌면 선생께서 소인배에게 속아 이러시는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말을 마친 장자건은 자신의 윗사람인 공자 곽보곤을 한번 쳐다보았다. 하지만 그것은 자신이 말한 소인배가 누구인지 기탄없이 드러내려는 행동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장묵한이 고개를 들었다. 지혜로 빛나는 두 눈에는 복잡한 심경이 언뜻언뜻 비치고 있었다.

“이 시에서 뒤의 네 구절은 제 스승이 옛날에 정주를 지나면서 지은 시옵니다. 스승의 유작이기에 제가 수십 년 동안 마음에 간직하고 있었지요. 하온데 범 공자가 대체 어디에서 연이 닿아 이 구절을 보았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속세의 먼지에 가려져 있던 진주가 다시 태양을 보게 되었으니 이 늙은이는 그것만으로도 꽤 괜찮은 일이라 생각합니다. 하오나 범 공자는 이 시로 명성을 얻으려 하다가 도리어 이 늙은이 때문에 이루지 못하는 일이 벌어졌군요. 선비란 모름지기 마음을 닦고 덖을 닦아야 하는 법. 문장을 쓰는 재주는 그다음입니다. 이 늙은이, 재주를 목숨만큼 아끼기에 경솔하게 이런 말까지 하고 싶지 않았으나, 제가 경국까지 온 건 모두 범한 공자의 사람됨을 보기 위해서였습니다. 하온데 제 생각과 달리 범한 공자는 잘못을 뉘우치고 고치기는커녕 오히려 더 기고만장해하는 것 같습니다.”

범한은 장묵한이 염치가 없어도 너무 없다는 생각에 하마터면 웃음을 터뜨릴 뻔했다. 그런데 주변에 웃는 이가 단 한 명도 없고 내부 분위기도 갑자기 무겁게 내려앉아 감히 웃을 수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만약 장묵한의 지적이 기정사실화된다면 범한은 이제 관리들이 모이는 문단에 얼굴을 내밀기는커녕 조정에서 낯조차 들 수 없게 될 게 뻔했다.

천하 선비들은 장묵한이 평생 보여 준 품성, 도덕성 그리고 문장력을 높이 평가하고 있었다. 이에 그 누구도 장묵한이 한 말에 토를 단다거나 의구심을 갖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범한이 읊은 시를 두고 장묵한이 자기 스승의 유작이라고 주장했으니 더 말할 필요가 없지 않을까. 스승 된 자의 인품을 가늠하는 잣대가 온전히 천하 선비들이 보이는 존경심이었으니 누가 감히 의심 따위를 할 수 있겠느냔 말이다.

이런 이유로 중신들은 이미 모두 범한이 시를 베꼈다고 인정하고 있었고 이에 범한을 바라보는 그들의 기괴한 눈빛에는 은근하게 혐오감이 깔려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중신들이라고 해도 장묵한의 명성만 믿고 그의 주장을 기정사실화해 버릴 수 없는 노릇이었다. 어쨌든 경국의 체면과도 연계된 문제이니 말이다.

황제가 문연각 대학사 서무를 잠시 차갑게 쳐다보았다. 잠시 어색함이 흐른 후 대학사 서무가 난처해하며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장묵한에게 인사부터 올렸다.

“스승님께 인사드립니다.”

대학사 서무가 장묵한에게 스스로를 제자라 칭하며 예를 갖춰 인사부터 한 이유는 그가 과거에 북제에 있는 장묵한에게 찾아가 문하생이 되어 공부했기 때문이다. 사실 지금 이 순간 서무는 장묵한의 말을 믿고 있었다. 하지만 황제가 근엄한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니 어쩔 수 없이 범한을 위해 변명할 수밖에 없었다.

“스승님, 범 공자는 줄곧 시에 뛰어난 재능을 보여 왔습니다. 그리고 앞의 네 구절 역시 매우 뛰어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그가 이 시를 베꼈다고 하신다면 저로서는 실로 믿기 힘듭니다. 범 공자의 실력을 보면 굳이 남의 것을 베낄 필요도 없어 보이니까요.”

그가 말하는 사이 장묵한은 이미 자리에 앉아 있는 상태였다. 장묵한은 기침을 두어 번 하고는 온화하게 꾸짖었다.

“서무야, 설마 이 늙은이가 내 스승님의 명성을 도용했다 의심하는 것이냐?”

서무는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감히 대꾸조차 하지 못했다. 더군다나 황제의 싸늘한 눈빛까지 더해지자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정중히 뒤로 물러나 버렸다. 이런 상황에서 만약 누군가가 다시 장묵한의 말에 의구심을 표한다면 이는 곧 장묵한을 스승도 부모도 몰라보는 파렴치한으로 몰아붙이는 꼴이었다. 그러니 누구도 감히 나서서 스승을 모욕했다는 오명을 뒤집어쓰려 하지 않았다.

한데 황제는 저들과 같은 평범한 문인도, 황후도, 황태후도 아니었다. 더군다나 이 장묵한이란 작자를 원래 싫어하고 있던 터라 냉랭하게 말했다.

“경국은 무엇보다 법률을 우선시하므로 북제처럼 어수룩하게 일을 처리하지 않는다. 그러니 장 선생, 만약 누군가의 죄를 알리고 싶다면 그에 합당한 증거가 있어야 할 것이다.”

신하들은 황제의 말에 노기가 서려 있음을 알아차렸다. 그러니 장묵한이 정말로 범한이 표절했다는 증거를 내놓는다면 어쩌면 범한은 재기할 수 없을 거라 생각했다.

장묵한이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허리춤에서 족자를 꺼내며 말했다.

“이것이 바로 제 스승이 친필로 쓴 시입니다. 여기에 방씨 가문 사람이 있다면 이내 이 글이 작성된 연대를 알아차릴 것입니다.”

이어 장묵한은 범한을 바라보며 그를 동정하는 것처럼 말했다.

“범한 공자는 본디 시문에 재주가 있습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외연 묘사에만 치중하고 시 속에 숨은 마음의 소리는 모른단 말입니까! 즉 시의 마지막 네 구절이 어떻든지 간에 범한 공자의 나이와 경험에 비추어 과연 그런 시가 나올 수 있을까요?”

사람들은 차분하게 흘러나오는 장묵한의 노쇠한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장묵한은 다음과 같이 시를 해석하기 시작했다.

“만 리 쓸쓸한 가을이라니 이 얼마나 가슴 시린 상황이란 말입니까! 평생 많은 병을 앓았다는 구절이 나올 수 있었던 것도 모두 제 스승의 생이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생이 얼마 남지 않은 무렵 홀로 높은 곳에 올라 도도히 흐르는 강줄기를 바라보고 있자니 절로 자신의 처지가 처량하게 느껴져 쓴 구절이니…… 아직 나이 어린 범한 공자가 평생 많은 병을 앓았다는 구절을 어찌 쓸 수 있겠습니까!”

장묵한이 말을 이어갈수록 사람들은 이 젊은이가 그와 같은 시를 쓸 수 없다는 생각을 더 강하게 갖게 되었다. 장묵한의 설명이 다시 차분하게 울려 퍼지기 시작하자 사람들은 그의 말에 다시 귀를 기울였다.

“어느새 머리는 하얗게 새어 버렸다는 구절은 머리카락이 희끗희끗한 노인의 모습을 묘사한 것인데 범한 공자의 머리카락은 아직 칠흑같이 검지 않습니까! 그러니 이 시를 범한 공자가 썼다면 억지로 구슬픈 척한 것이겠지요.”

* * *

장묵한은 마지막 구절을 설명하는 부분에서는 아까보다 소리를 낮췄다.

“마지막 구절에서 마시던 탁주 잔을 새로 멈춘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범한 공자처럼 지체 높은 가문 출신이 어찌 ‘초라한 심정’을 알 수 있을까요. 그러니 마시던 탁주 잔을 새로 멈춘다는 표현에서도 범한 공자는 제 스승이 어떤 심정으로 이 구절을 썼는지 모를 것입니다.”

이 말을 할 때 장묵한은 범한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데 그의 눈썹 언저리에서는 살짝 조급함 같은 것이 보였다.

“제 스승은 만년에 폐병으로 고생해 술을 마실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새로 멈춘다’란 단어를 쓰신 것입니다.”

종이에 적힌 증거가 애당초 필요 없었다니. 장묵한의 말이 끝나자 중신들은 맥이 풀리고 말았다. 범한이 해명할 수 없는 문제들만 장묵한이 콕콕 집어 설명했으니 그들이 보기에 범한이 표절이라는 죄명에서 벗어날 가능성은 매우 희박했다.

바로 이 순간, 조용했던 기년전에서 뜬금없이 박수 소리가 울리 퍼졌다.

취해 탁자에 엎드려 있던 범한이 느닷없이 몸을 일으키더니 미소 띤 채 장묵한을 바라보며 천천히 손뼉을 쳤던 것이다. 범한은 장묵한의 설명에 진심으로 탄복했다. 장 선생의 스승이 누구인지 아는 사람은 없겠지만 어쨌든 그는 시만 가지고 원작자인 두보가 겪은 일, 예를 들어 병환이 깊었던 것 같은 정황들을 정확히 추리해 냈다. 이에 범한은 세상이 장묵한을 두고 문학계의 일대 대가라고 부르는 데 이는 전혀 과장된 표현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범한은 장묵한이 오늘 자신을 음해하기 위해 일찌감치 가짜 족자까지 만들었다는 걸 알고 있던 터라 그의 능력에 마냥 감탄만 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범한은 때 묻지 않은 맑은 얼굴로 거친 표정을 짓더니 술김에 새어 나오는 것 같은 웃음을 지으며 입을 뗐다.

“장묵한 선생, 오늘 댁의 사부님 체면까지 모두 깎을 셈이시군요. 대체 무슨 영문으로 과거 쌓아 둔 명성을 다 내팽개치고 이러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옆에 있던 사람들은 진실이 까발려지자 범한이 실성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범한에게서 갈수록 심한 말이 튀어나오자 그들의 이맛살은 점점 더 심하게 일그러졌다. 그러자 황후도 조용히 옆 사람에게 범 공자가 무슨 이상한 짓을 하기 전에 시위를 불러오라 분부했다.

그런데 생각하지도 못한 일이 일어났다. 황제가 싸늘하게 손을 내저으며 모두에게 범한의 말을 들어 보라고 행동을 취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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