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화
반면 며칠 동안 홍려사 외교 관리들에게 시달린 북제 사신단은 범한을 보고 서로 의미심장한 눈빛을 주고받았다. 협상이 진행되는 동안 범한은 줄곧 아무 말 없이 있었지만 북제 사신단들은 그를 무척 미워했다. 북제 역시 경국에 많은 밀정을 포진해 두었기 때문에 홍려사가 갑자기 태도를 바꿔 강경하게 나온 이유가 범한이 배후에서 의견을 냈기 때문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다만 어떤 의견을 냈는지만 모를 뿐이었다.
이미 양측 황족이 서명까지 해서 협상을 마무리했음에도 북제 사신단은 마음이 불편했다. 범한이 취한 모습을 본 장영후가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일어서더니 공손히 말했다.
“폐하, 이번 협상이 쉽지 않아 홍려사 분들도 힘드셨을 것입니다. 제가 홍려사 관리분들에게 한잔 올려 양국의 우정을 표현해도 되겠습니까?”
장영후의 말에 옆에 앉아 있는 동이성 사신단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해롱해롱하고 있는 범한에게로 향했다. 동이성 사신단은 북제 사람들의 생각을 눈치채고는 무덤덤하게 상황을 주시했다.
높은 자리에 앉아 있는 황제와 황후는 긴장된 분위기와 범한의 눈빛이 보이지 않는 듯 호탕하게 웃으며 허락했다. 그러자 황태자가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게 하세요. 전장에서는 적이라도 밖에서는 친구가 된다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물론 술상에서도 적일 뿐이지만.”
분위기를 돋우려던 황태자는 불안한 눈빛으로 전전긍긍하고 있는 홍려사 관리들을 보고는 영문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꼬리를 흐렸다. 사실 이번 협상을 진행하면서 홍려사 관리들은 범한을 자신의 편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 범한에게 북제 사신들이 강제로 술을 먹여 취하게 하려 하자 도와주고 싶었지만 자리가 멀리 떨어져 있어 도울 방법이 없었다.
범한은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북제 사신단이 따라 주는 술을 마셨지만 마음은 불안하기가 이를 데 없었다. 최근 장 공주가 관리하는 상회가 책방을 공격하기 시작해 범사철과 섭 대행수의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장 공주의 진정한 힘은 따로 있다는 걸 알았다. 그리고 오늘 그가 하려는 일에는 술의 도움이 필요했다.
범한은 취하기도 어렵지만 술에 취한 척 연기하는 건 더 어렵다고 생각했다. 북제 사신단 중 아무도 범한을 건들려 하지 않자 마지막 순서로 나선 장영후가 용감히 범한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줄곧 황후와 장묵한과 대화를 주고받던 황제가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궁 안이 이렇게 시끌벅적한 건 오랜만인 것 같소.”
명사답게 거만한 표정의 장묵한은 황제가 물을 때만 몇 마디 답변하고는 말이 없었다. 그는 황제의 시선을 따라 시끌벅적한 곳을 바라봤다. 마침 장영후가 잘생긴 청년을 잡고는 술을 따라 먹이는 모습이 보였다. 미간을 찌푸리며 그 모습을 지켜보던 장묵한이 물었다.
“저 청년은 범 공자가 아닙니까?”
장묵한은 마치 자신의 눈을 믿을 수 없다는 듯 연신 미간을 찌푸렸다. 시 세 편으로 명성을 떨친 청년이 술고래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황제가 약간 화난 표정으로 외쳤다.
“범한.”
연회에 참석한 사람들은 모두 황제의 동태를 예의주시하고 있었기에 황제의 말 한마디에 모두 조용해졌다. 쥐 죽은 듯 조용한 연회장에서 범한의 목소리만 울려 퍼졌다.
“마셔라! 마시자!”
혀 꼬인 발음으로 소리치는 범한의 모습은 확실히 취한 것 같았다.
“범한!”
범한이 취한 모습을 본 황태자는 화를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 어쨌든 범한이 부사가 된 건 동궁의 추천 때문이었고 그래서 연회에도 참석할 자격을 얻은 것이었다. 그러니 범한이 추태를 부린다면 황태자 처지에서도 난처할 수밖에 없었다.
이상한 분위기를 감지한 듯 범한이 서서 주변을 살폈다. 초점을 잃은 흐리멍덩한 눈에 달아오른 얼굴이 한눈에 봐도 취한 것 같았다.
“누가 나 불렀지?”
범한의 말에 백작가와 재상가와 교우가 깊은 대신들은 경악한 표정을 지었다. 당장이라도 범한의 입을 틀어막은 뒤 마차에 태워 백작가로 돌려보내고 싶은 모습이었다.
의외였던 점은 높은 용상에 앉은 황제가 범한의 실언을 듣고도 화를 내지 않는 점이었다. 오히려 재미있다는 듯 미소 지었다.
“짐이 불렀다.”
황제의 말을 들은 범한은 정신을 차린 듯 급히 엎드렸다.
“소…… 소신,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너무 많이 마시는 바람에…….”
범한이 갑자기 움직이자 그를 잡고 술을 먹이느라 취해 있던 장영후가 땅에 자빠졌다. 경국 대신들은 적국의 수장이 넘어지자 고소하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북제 사신단 중 유일하게 취하지 않은 두 사신이 급히 달려 나와 장영후를 부축해 자리로 데리고 갔다. 그러자 궁녀들이 재빨리 해장국을 가져다줬다.
황제가 말했다.
“짐도 네가 술을 많이 마신 걸 알고 있다. 하지만 궁 안에서 추태를 부린 일은 벌을 받아야 할 것이야.”
범한이 엎드린 자세를 유지한 채 쓴웃음을 지었다.
“소신, 폐하께서 내리시는 벌을 달갑게 받겠지만 멀리서 손님이 오셔 너무 기뻐 그리된 것입니다. 북제 사신들을 대접하는 게 부사가 해야 할 일이라 최선을 다하려 했습니다.”
“쓸데없는 소리. 폐하의 말에 토를 달더니 오만방자하기 이를 데 없구나.”
황제 옆에 앉아 있던 황후가 말했다. 그녀는 폐하가 완아를 가장 아낀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혼인할 범한까지 아낀다고는 생각하지 않았기에 따끔하게 질책했다.
“범한.”
황제가 그의 이름을 다시 부르자 모든 사람이 귀를 쫑긋 세우고 황제의 목소리에 담긴 의미를 음미했다. 여러 차례 범한의 이름을 부른 걸 보면 백작가와 황실의 관계는 확실히 평범하지 않은 듯했다.
황제가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백작가와 짐의 사이가 돈독하지만 내 눈에 너는 일개 아랫사람에 불과하다. 게다가 신하라면 마땅히 짐이 말할 때는 입을 다물고 가만히 들어야 하는 법이야! 네가 이전에 식당에서 오만방자하게 굴었던 일을 짐이 모를 거라 생각하지 말거라. 혈기 왕성한 나이라서 그런지 말이 거침없고 오만방자하군.”
황제는 질책하면서도 은연중에 범한을 감싸 주고 있었다. 경국 대신들과 양국 사신단도 바보는 아니었기에 황제의 뜻을 알아챘다.
황제가 한결 가벼워진 목소리로 말했다.
“늦여름 밤에 세 나라가 우애를 다지기 위해 모였으니 시를 잘 쓰기로 유명한 범한이 시를 한 편 써보도록 하게.”
황제가 범한의 체면을 살려 주고 싶어 한다는 걸 눈치챈 대신들은 연거푸 맞장구를 쳤다. 그들은 황제가 이번 연회를 기회로 신하들에게 8품 협률랑인 범한이 어떤 인물인지 보여 주고 싶어 한다고 생각했다. 다만 범한이 만취해 있어 이 기회를 놓칠까 봐 모두 불안한 모습이었다.
범한은 취기가 올라 머리가 어지럽기는 했지만 주변의 대화를 분명하게 들을 수 있었다. 그가 자조 섞인 웃음을 지으며 용상에 앉은 황제에게 조심히 말했다.
“폐하, 소신이 어찌 장묵한 선생 앞에서 비천한 실력을 드러낼 수 있겠습니까.”
이 말에 경국 대신들의 시선이 장묵한에게로 쏠렸다. 그제야 사람들은 황제의 뜻을 정확히 파악했다. 바로 범한에게 체면을 세울 기회를 줄 뿐만 아니라 경국에도 장묵한과 필적할 만한 인재가 있다는 사실을 만천하에 증명해 보이고 싶은 것이었다.
범한이 ‘만 리 쓸쓸한 가을에는 언제나 나그네가 된다’는 별명으로 불린 지도 이미 여러 달이 흐른 데다가 이후 시를 쓰지 않았기에 그의 명성은 서서히 옅어지고 있었다. 대신들은 범한이 장묵한을 끌어들이자 속으로 범한과 황제가 은연중에 북제 문단의 대가 장묵한을 공격할 계획을 주고받았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건 사실 범한이 추측해서 한 일이었다. 그는 황제의 마음을 파악하는 경험은 부족했지만, 문예를 좋아하는 황제가 군사에서는 적수가 없는 상황임에도 문학에서는 시종일관 북제 사람들에게 무시당하는 걸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있다고 짐작할 수 있었다.
장묵한은 경국에 온 뒤로 황궁에서 지내면서 황태후와 후궁들에게 극진한 대접을 받았지만, 황제가 그걸 못마땅하게 여긴다는 걸 알고 있었다.
범한은 황제가 눈을 가늘게 뜨며 만족하는 눈빛을 짓자 자신의 추측이 옳았음을 확신했다. 황제의 눈빛에는 자기 뜻을 알아챈 범한을 칭찬하는 동시에 반드시 장묵한의 코를 납작하게 해주라는 경고도 담겨 있었다.
“그럼 범 공자가 지은 시를 장묵한 선생이 품평하면 되겠군요. 만약 시가 좋지 않으면 벌주를 마시는 걸로 하지요.”
황제가 무슨 생각인지 알고 있었기에 황후도 맞장구를 치며 말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범한은 자리로 돌아가 술을 따라서 천천히 음미하고는 미간을 찌푸렸다.
모두 범한이 단숨에 시를 쓴다는 걸 알고 있기에 몰래 마음속으로 숫자를 세며 기다렸다. 대략 열다섯까지 셌을 때 범한이 두 눈을 반짝이며 미소를 짓더니 입을 열었다.
“술을 마주하고 노래하자꾸나. 인생 얼마나 살겠는가. 아침 이슬처럼 짧은 인생, 괴로운 일들도 많았네. 푸릇푸릇한 옷깃은 내 마음에 은은히 남아 있지만 그대가 있기에 지금까지 노래하네. 귀한 손님이 있어 거문고를 타고 피리를 부니, 밝은 달 같은 그대 언제 만날 수 있을까. 인연이 되어 연회를 열고 대화를 나누면 마음속 옛 은혜가 떠오를 것인데. 달이 밝아 별빛이 흐릿하니 까마귀와 까치는 남쪽으로 날아가는구나. 나무를 세 번이나빙빙 돌지만 어느 가지에 의지할 수 있을까. 산은 높은 것을 싫어하지 않고 바다는 깊은 것을 싫어하지 않으니, 주공은 입 속에 음식을 뱉어 천하의 마음을 얻었다네.”
예전과 다름없이 범한이 시를 읊자 정적이 감돌았다.
조조가 쓴 시 중에서 오늘 상황과 맞고 황제의 뜻과 부합하는 구절을 골라 읊은 것이었다. 가장 좋았던 건 주공이 입 속에 음식을 뱉어 천하의 마음을 얻었다는 구절로, 실제로 이 세계에도 주공이 있었다. 게다가 이곳의 주공은 황제를 보필한 충신이 아니라 정말 황제가 된 사람이었다. 그래서 범한은 이 구절을 당당하게 베낄 수 있었던 것이다.
한참 시간이 흐른 뒤 침묵이 감돌던 기년전 안에 환호성이 들렸다.
“좋은 시야!”
대신들의 환호성에 황제도 만족한 표정으로 장묵한을 바라보며 물었다.
“장 선생은 이 시를 어떻게 생각하시오?”
장묵한은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담담한 모습이었다. 그는 살면서 이런 상황을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이 부딪쳤고 품평한 시도 기억할 수 없을 만큼 많았다. 오늘 연회에 참석한 관리 중에서도 그의 문장을 공부해 관직에 오른 사람들이 많았다. 그가 이처럼 세상 문인들의 공경을 받는 이유는 덕행과 안목이 뛰어난 이유도 있었지만 무엇보다도 학식이 깊기 때문이었다.
“좋은 시입니다.”
장묵한이 가벼운 목소리로 안주를 집어 먹으며 말했다.
“중간에 의미가 끊기기는 하지만 문장이 좋습니다. 시는 모름지기 의미와 문장이 어우러져야 하는데, 범 공자의 시는 뜻도 좋고 문장도 훌륭하니 좋은 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남경에서 이런 인재가 나올 줄은 몰랐습니다.”
장묵한의 평가에 범한이 은은한 미소를 지었다. 범한은 문단 대가인 그에게 특별한 감정은 없었다. 다만 잘난 체하는 모습이 꼴 보기 싫었기에 대충 인사하고는 비틀거리며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범한의 시에 대해 서로 이야기를 주고받던 대신들은 장묵한의 말에 고개를 들었다. 순간 연회장 분위기가 다시 무겁게 가라앉으면서 싸늘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장 선생이 바로 전에 경국을 남경이라 칭한 것은 타당하지 않소. 선생의 문장이 뛰어난 건 모두가 아는 사실이지만 시에서만큼은 범 공자보다 수준이 높다고 말할 수 없으니 멋대로 지껄이는 평가를 들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되오. 여기 범 공자만큼 뛰어난 인물이 어디 있습니까? 범 공자는 15초 만에 이렇게 훌륭한 시를 써냈습니다. 북제에도 이렇게 시를 쓸 사람이 있습니까?”
상당히 무례한 말이었다. 더욱이 황제가 있는 자리에서 나와서는 안 될 말이었다. 경국 황제는 마음에 들지 않는지 미간을 찌푸렸다. 하지만 말한 사람이 누구인지 모를뿐더러 나라를 위해 한 말이므로 죄를 물을 수는 없었다.
자리로 돌아가던 범한이 발걸음을 멈추고 몸을 돌려 장묵한을 향해 허리를 굽혀 대신 사과했다. 장묵한이 헛기침을 하며 힘들게 일어나려 하자 황태후가 보낸 젊은 내관이 부축해 일으켰다. 그가 범한을 보며 담담히 말했다.
“범 공자의 명성은 이미 대제에도 전해졌습니다. 저도 ‘만 리 쓸쓸한 가을에는 언제나 나그네가 된다’는 구절이 있는 시를 자주 읽곤 합니다.”
장묵한의 눈빛에서 자신을 불쌍하게 여기는 감정을 읽은 범한은 속으로 흠칫 놀랐다. 그는 순간 자신이 감지하지 못한 위기가 서서히 접근해 오고 있음을 직감했다. 그가 술기운이 달아오른 얼굴을 홱 돌렸다. 순간 연회석 끝자리에서 살기등등한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얼굴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