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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여년-112화 (112/1,108)

112화

이후 협상은 두 부분으로 진행되었다. 경국과 북제는 협상 탁자에서 단어 하나까지 신중하게 검토하며 국가의 체면을 지키기 위해 애썼다. 그래서 매일 홍려사 안에는 싸우는 고성과 함께 탁자를 내리치거나 의자를 차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채소 시장에서 악다구니를 쓰며 가격을 흥정하는 여자들과 다를 바가 없었다.

반면 다른 협상은 분위기가 완전히 달랐다. 은밀하고 조용히 진행된 이 협상에는 홍려사 관리들이나 북제 사신단이 아닌 진짜 권력을 쥐고 있는 인물들이 있었다.

감찰원 4처를 주관하는 언약해는 포로 교환 기밀 협정 문서에 서명한 뒤 문서에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사실 그는 친아들과 관련된 이 협상을 맡지 않으려 거절했지만 진평평의 고집스러운 요구에 어쩔 수 없이 오게 된 것이었다.

북제의 볼품없는 관리가 빙그레 웃으며 문서에 서명한 뒤 언약해를 향해 나지막이 말했다.

“언 대인, 걱정하지 마십시오. 아드님은 잘 지내고 있습니다.”

언약해가 무표정한 얼굴로 쌀쌀맞게 말했다.

“내가 어렸을 때부터 가르친 놈을 어떻게 잡았는지 궁금했는데, 오늘 네놈의 바보 같은 모습을 보니 어떻게 된 일인지 알겠군.”

북제 관리는 언약해의 거친 말에도 화내지 않고 능글맞게 반박했다.

“언 대인, 말을 삼가시지요. 아드님이 아직 저희 손에 잡혀 있다는 걸 아시지 않습니까. 만약 저희가 바보라면 저희에게 잡힌 아드님은 뭐가 되고, 또 그런 아드님을 가르친 대인은 뭐가 됩니까.”

그 말에 언약해는 냉소를 지으며 나가려다 말했다.

“내 아들은 너희에게 잡힌 게 아니지 않은가.”

문을 나가자 바퀴 달린 의자에 앉은 진평평이 그를 향해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한자리에 너무 오래 앉아 있어서 그런지 인내심이 예전만 못하군.”

“저도 인내심은 아직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뒤에서 펼쳐지는 중상모략까지 참을 수는 없지요.”

언약해가 자신의 상사에 대한 존경을 드러내며 말했다. 그가 진평평의 바퀴 달린 의자를 밀며 천천히 밖으로 나갔다.

바퀴 달린 의자에 앉아 있는 진평평이 손가락 하나를 펼치며 말했다.

“조정 안에 나를 죽이고 싶어 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모르네. 이번에는 빙운이를 소은과 교환해서 데려올 수 있겠지만 이제는 소은과 같은 인물이 없으니 그러지 못할걸세.”

“다음은 없습니다.”

“그 사람을 찾을 방도를 생각해야겠어. 이번에 폐하가 우리 편을 들어준 것은 누군가가 우리를 가르치려 한다는 걸 분명히 아시기 때문이지. 하지만 나는 농락당하는 걸 좋아하지 않아.”

“저도 그렇습니다. 비록 포로 교환이 순조롭지는 않았지만 빙운은 죽지는 않았으니 젊은 시절 쓰라린 교훈을 얻은 셈으로 치면 됩니다.”

언약해는 자신의 상사가 이 일을 해결할 방법을 찾아낼 것을 알고 있었기에 조급해하지 않았다.

“맞아. 그래서 이번에 그 애를 보내서 경험을 시키기로 결정했네. 몇 달이면 족할 테니 오래 걸리지는 않을 거야.”

“몇 달이요? 이번에 사신이 북제로 돌아가는 일을 말하는 것입니까?”

“맞네. 그가 언빙운이 무사히 돌아올 수 있도록 잘 처리해 주기를 바라.”

“누구입니까?”

“가기 전에 내가 자네들과 한번 만나게 해주지.”

모든 것들이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공식적인 포로 교환과 비공식 밀정 교환 협약을 통해서 모두 만족한 결과였다. 경국은 체면과 토지를 얻을 수 있었고, 북제는 체면과 소은 그리고 황제가 좋아하는 여인을 얻을 수 있었다.

한편 동이성 사절단은 줄곧 조용히 경도에 머물고 있었다. 경도 조정도 창산 부근에서 발생한 일을 빌미로 더 많은 돈을 받아 내기 위해 동이성 사절단을 일부러 냉대했다. 동이성은 천하의 거상들이 밀집해 있는 곳이다. 경국 조정에서 남쪽 항구를 개방하기 전에 먼저 다른 나라들과 무역을 벌일 정도로 동이성은 엄청난 재력을 가지고 있었다.

사흘 뒤 경국 황제가 황궁으로 양국의 사신을 불러 연회를 베푸는 날, 범한은 부사 신분으로 연회에 참석할 예정이었다. 두 번째 입궁이자 계획을 실행하기로 결정한 날이었다.

자신의 방에서 모든 일을 세심하게 준비하던 그는 침대 아래 검은색 가죽 상자를 바라봤다. 요 며칠 공무를 보며 몇 가지 일들의 내막을 알게 되면서 그는 경국은 강성하고 거만한 것처럼 보이지만 조정 안 몇몇 사람들은 다른 사람에게는 말할 수 없는 생각에 얽매여 여전히 검은 속내를 품고 있다고 생각했다.

황제가 무자비하다고 해서 황족에게 무자비한 것은 아니었고 더욱이 천하의 신하들과 백성들에게 그런 것도 아니었다. 범한은 황제가 감찰원에 맞서려 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상대를 죽여 본보기로 삼지 않는 건 그 사람이 자신의 아내, 누이, 아들이거나 심지어 어머니일 수 있기 때문이었다.

“오로지 자신의 이득만 고려하는 사람이 되어야 해.”

이것은 범한이 이 세계에 오고 난 뒤 수시로 자신에게 한 말이었다. 그의 눈빛이 점차 싸늘하게 변하더니 가늘고 긴 비수를 숨기고는 독을 묻힌 바늘 세 개를 조심히 자신의 머리카락에 꽂았다.

사흘 뒤 연회가 개최되는 날 거리에는 홍등이 걸렸고 경도 전체는 시끌벅적했다. 북제 사신단과 동이성 사신단은 환영을 받으며 경국에서 가장 웅장한 황궁에 들어갔다. 마치 삼국이 서로 전쟁하고 암살하던 일이 없었던 것처럼 평화롭고 화기애애한 모습이었다.

연회 장소는 황궁 외성인 기년전으로 정해졌다.

곧이어 아름답게 생긴 궁녀들이 음식이 담긴 접시와 술을 들고 들어왔다. 범한은 눈썹을 치켜세우고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넓을 황궁 안을 바쁘게 왔다 갔다 하는 궁녀들을 바라봤다. 잘생긴 범한의 시선을 의식한 궁녀들이 볼을 붉히며 슬쩍슬쩍 그를 훔쳐봤다.

나라를 주름잡는 유명 인사들이 한자리에 모였음에도 쥐 죽은 듯 조용했다. 연회에는 병을 핑계로 진평평 원장과 재상 대인이 오지 않은 걸 제외하고 각 부처를 주관하는 대신들과 귀족들이 모두 나와 있었다. 그리고 맞은편에는 북제 사신단과 동이성 사신단이 앉아 있었다.

범한은 비록 신분은 낮았지만 부사라는 이유로 중앙에서 약간 아랫자리에 앉았으나 나이가 지긋한 고관의 옆자리라서 거북하고 불편했다. 그걸 느꼈는지 옆에 앉은 고관이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연회에서 지켜야 하는 규범이 많기는 하지만 폐하께서는 너그러운 분이시니 너무 긴장할 것 없습니다.”

범한의 옆자리에 앉은 고관은 바로 예부 시랑 장자건이었다. 범한은 예부 상서 곽유지의 집안과 사이가 좋지 않았기에 자연스럽게 그를 경계하고 있었다. 하지만 장자건의 말에 악의가 없자 안심하며 말했다.

“제가 시골에서 자라 이런 중요한 자리를 경험해 보지 못했습니다. 만일 제가 실수를 한다면 지적해 주시기 바랍니다.”

장자건이 수염을 쓰다듬었다.

“오늘 조회에서 범 공자가 협상에서 중요한 공헌을 했다고 임 소경이 극찬하더이다. 조정에는 범 공자에 대해 왈가불가하는 사람은 없소. 맞은편에 있는 저 사람들을 경계할 뿐이지.”

두 사람이 동시에 맞은편에 앉은 사람들을 바라봤다. 북제 사신단 장영후가 따분한 표정으로 연회가 시작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비어 있는 상석은 신출귀몰한 장묵한의 자리로 보였다. 한편 동이성 사절단의 상석에는 중년의 남자가 앉아 있었다. 그의 허리에 찬 검을 보고는 미간을 찌푸리며 생각했다.

‘검을 차고 입궁하다니.’

“사고검의 제자인데 검과 떨어진 적이 없다고 해서 폐하께서 허락하셨답니다.”

장자건이 범한의 생각을 읽은 듯 자세히 설명해 주었다.

“사고검의 수제자 운지란?”

범한은 서늘한 목소리로 말하며 눈을 가늘게 뜨고 상대방을 자세히 바라봤다. 순간 검을 차고 있는 남자에게서 살기가 느껴졌다.

그동안 동이성 사절단을 냉대한 것 때문에 9등급 무예를 가진 운지란의 기분은 좋아 보이지 않았다. 경국 황궁에 앉아 있으면서도 줄곧 냉랭한 모습이었다.

범한이 운지란을 자세히 살펴보고 있을 때 마침 그도 범한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순간 두 사람의 눈빛이 부딪치자 범한은 기죽은 척 고개를 숙이고는 헛기침을 했다. 상대방의 눈빛에서 흔들리지 않는 무인의 기운이 강하게 느껴졌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가 흐르면서 기년전 안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두 사람을 바라봤다. 다들 범한이 외양간 거리에서 사고검의 여제자 두 명을 죽인 일을 알고 있었다. 동이성이 이번에 공납을 바친 것도 이 사건을 수습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모두 상당한 무예 실력을 갖춘 운지란이 범한을 죽이려 하지는 않을 거라 생각했다.

다행히 황태자가 범한을 협상에 참여하게 해서 공을 세울 기회를 준 덕분에 조정에서는 어느 쪽도 범한에게 나쁜 감정을 품고 있지 않았다. 오히려 각 부처 관리들과 장군들은 범한과 같이 살기등등한 눈빛으로 동이성 수석 검사를 바라봤다. 순간 기년전 분위기가 긴장되기 시작했다.

범한이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숙이고 호흡을 가다듬으며 몸 안에 정기를 운용할 준비를 했다.

바로 그때 은은하게 장엄한 황궁 음악이 들리더니 내관이 나와 소리쳤다.

“폐하께서 듭십니다.”

천하에서 가장 큰 권력을 가진 경국의 유일한 주인인 황제 폐하가 황후와 함께 천천히 걸어 나오고 있었다. 그러고는 온화한 미소 가득한 얼굴로 용좌 앞에 섰다.

“만세 만세 만만세!”

경국 관리들이 모두 엎드려 절하고 사절단도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 기년전 안에 가득했던 긴장된 분위기가 엄숙하고 경건한 분위기로 바뀌었다.

황제가 앉은 높은 용좌 옆에는 황후의 자리가 있었고 황태자의 자리는 두 계단 아래였다. 다만 황태자 옆에는 다른 좌석이 없어 그 위엄이 드러났다. 황제가 아래 대신들을 둘러본 뒤 온화한 목소리로 말했다.

“편하게 앉으시오.”

이로써 연회가 시작되었다. 먼저 북제 사절단 대표가 앞으로 나와 황제의 공덕을 찬양한 뒤 경국과의 우애를 밝히고는 돌아갔다. 이후 동이성 운지란이 앞으로 나와 무표정한 얼굴로 몇 마디 하고는 자리로 돌아갔다.

그 모습을 보던 황후가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황제의 귓가에 대고 말했다.

“저 동이성 사람은 거만하기 이를 데가 없군요.”

그러자 황제는 온화한 미소를 지었다.

“사고검의 수제자가 아니오. 저렇게 거만하니까 짐이 있는 곳에 검을 차고 올 용기도 있는 거겠지.”

곧이어 궁녀들이 요리를 들고 나오자 대신들은 머리를 파묻고 먹기만 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황제도 입을 다물자 분위기가 조용해졌다.

범한은 슬쩍슬쩍 고개를 들어 맞은편을 관찰했다. 비어 있던 북제 상석에는 이미 사람이 앉아 있었다. 그는 창백하고 기운 없는 얼굴이었지만 두 눈만큼은 맑았다. 주름이 자글자글한 이마에는 마치 무수히 많은 지혜가 담겨 있는 듯했고, 입고 있는 구름처럼 하얀 도포는 왜소한 체구를 가려 주었다. 그가 누군지는 굳이 물을 것도 없었다. 문장으로 천하에 명성을 떨친 장묵한이었다.

장묵한이 언제 들어왔을지 생각하던 범한은 황제 폐하가 들어올 때 같이 들어왔을 거라 생각했다. 어쩌면 소문대로 장묵한의 글을 좋아하는 황태후 덕분에 줄곧 황궁에서 머무르고 있었던 건지도 몰랐다.

범한이 몰래 장묵한을 바라볼 때 높은 곳에 앉은 누군가도 그를 지켜보고 있었다. 술을 홀짝이는 황후의 시선이 범한이 있는 자리를 향해 있었다. 황후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저 청년이 완아와 결혼해 부마가 될 범한이군요.”

황제가 은은한 미소를 지었다.

“그렇소. 젊은 사람이 경도에서 시로 이름을 알리더니 오늘 조회에서는 신기물과 임소안이 입이 마르도록 칭찬하더이다. 황태자의 측근인 신기물과 재상의 문하생인 임소안이 앞다투어 칭찬하는 이유가 궁금하긴 하지만.”

황후가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아마도 황태자가 인간관계를 이해한 것 아닐까요? 게다가 곧 있으면 재상의 사위가 될 사람이잖아요.”

“인간관계를 이해했다고?”

황제가 웃는 듯 아는 듯 한 표정을 지으며 아래 앉아 있는 자신의 아들을 바라봤다.

“짐의 아들도 인간관계의 중요성을 아는군.”

약간은 못마땅하다는 듯한 말투였음에도 황후는 이전처럼 질책하지 않고 냉정한 평가를 하는 것에 안심하고는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승건이도 이제 세상일을 이해하기 시작한 것 같습니다.”

황제는 웃기만 할 뿐 아무 말이 없었다.

반면 범한은 연회가 진행될수록 긴장되어 연거푸 술을 들이켰다. 비록 황주처럼 도수가 높지 않은 새콤달콤한 술이었지만 주변 관리들의 시선은 불안하기만 했다. 술에 취해 행패라도 부릴까 봐 걱정하는 것 같았다. 예부 시랑 장자건이 보다 못해 말했다.

“범한 대인, 너무 많이 마시지 마십시오. 이곳에서 예의에 어긋나는 행동을 했다가는 큰 벌을 받게 됩니다.”

그 말을 들은 범한은 장자건이 자신에게 이곳은 풍류를 즐기는 유정강이 아닌 삼엄한 황궁이며, 그의 신분은 취객이 아니라 관리임을 일깨워 주려 한다는 걸 이해했다. 범한은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정기를 운용해 불그스름한 얼굴에 풀린 눈동자를 하고는 조용히 말했다.

“너무 긴장돼서 술이라도 마시지 않으면 견딜 수가 없습니다.”

범한이 술기운이 달아오른 얼굴로 부정확한 발음으로 말하자 장자건은 어두운 얼굴로 말했다.

“재상 대인은 병을 핑계로 오지 않으시고, 사남 백작은 일이 있어 못 온다고 하시면서 저에게 범 공자를 부탁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니 만약 범 공자가 취해 추태라도 부린다면 제가 두 분의 얼굴을 어떻게 보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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