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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여년-111화 (111/1,108)

111화

범한이 일어나 누이가 그린 지도를 바라봤다. 급히 그려 난잡하기는 하나 자신이 설명한 그대로였다. 범한은 만족스러운 듯 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일은 이미 정해졌어. 여기에 대해서는 모른 척해.”

그 말에 범약약은 발끈하며 지도를 빼앗았다.

“일이 정해졌다고요? 무슨 일이 정해졌는데요? 이게 엄청 위험한 일이라는 건 알고 있어요? 절대 모른 척할 수 없어요. 아버님께 가서 다 말할 거예요.”

범한이 난처한 미소를 지으며 누이의 머릿속에는 황제의 권력에 도전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깊이 박혀 있다고 생각했다. 물론 그도 누이가 자신의 안전과 집안의 미래를 걱정한다는 건 알고 있었다. 만약 자신이 몰래 황궁 지도를 만들었다는 사실이 알려진다면 백작가와 황실의 관계는 틀어질 게 분명했다.

“걱정하지 마. 지도를 모두 외우면 태울 거니까 아무도 모를 거야.”

범한이 안심시키며 말했다. 그러자 범약약은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얼굴로 물었다.

“오라버니, 왜 이런 일을 벌이는 거예요?”

범한이 한숨을 내쉬고는 허리를 굽혀 누이의 두 눈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황궁 안에 내가 가지고 싶은 물건이 있거든.”

“황궁 안에 들어가 물건을 훔치겠다는…… 거예요?”

놀란 범약약이 큰 소리로 말하다 입을 틀어막았다. 자신의 말이 밖으로 새어 나가지 않았는지 살피며 그녀가 믿을 수 없다는 눈빛으로 범한을 바라봤다.

“맞아. 하지만 원래 내 것을 가져오는 거니까 훔치는 건 아냐.”

놀란 마음을 진정시킨 범약약은 침착하게 이유를 고민해 보고는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설마…… 오라버니의 생모인 섭 부인과 관련된 일인가요?”

범한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너에게 거짓말할 수는 없지.”

짧은 대답이었지만 그 안에는 서로에 대한 견실한 믿음이 담겨 있었다. 범한이 계속 말했다.

“아무 일 없을 테니까 걱정하지 마. 네 오라버니가 어떤 사람이니? 일곱 살 어린아이와 주먹질을 하고 칠순 노인을 발로 차며 공동묘지에서 소리 지를 수 있는 사람이잖아. 이런 나를 누가 건드리겠어?”

범한이 장난치며 농담을 하자 범약약은 겸연쩍은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여전히 눈빛에는 걱정이 가득 담겨 있었다. 범한은 겉으로는 밝고 온화한 사람이었지만 속은 차갑고 강한 사람이었다. 그 사실을 아는 범약약은 설득할 수 없다는 걸 알기에 그저 집 안에서 아무 일 없기를 기도하는 수밖에 없었다.

누이의 얼굴에 깃든 수심을 본 범한이 자책하며 말했다.

“나는 참 이기적인 사람이야. 매번 나 혼자서 감당할 수 없는 일을 벌이고는 너에게 사실을 알려 주잖아. 겉으로는 믿기 때문에 알려 주는 척했지만 사실은 부담을 나눌 사람이 필요해서였어. 하지만 돌이켜 보니 너를 괴롭히는 일이었던 것 같아. 나야 너에게 털어놓고 부담을 줄일 수 있지만 너는 그럴 수가 없잖아. 내 어머님이 섭가의 주인이라는 거나 내가 황궁에 잠입해 물건을 훔칠 거라는 걸 누구에게 말할 수 있겠어?”

범약약은 걱정하는 눈빛으로 범한을 바라보다 말했다.

“믿기 때문에 그렇게 힘들지 않아요. 그리고 나는 오라버니가 나에게 솔직하게 말해 주는 게 좋아요.”

* * *

여전히 진행되는 협상에서 국경을 다시 구분하는 일은 난항을 겪고 있었다. 범한이 준 분석 보고서를 기반으로 협상을 책임진 홍려사 관리들은 강경한 태도로 북제를 압박했다. 하지만 무슨 이유 때문인지 북제 사신들은 노골적으로 협상을 미루었다. 마치 어떤 소식을 기다리는 눈치였다.

경험이 풍부한 홍려사 소경 신기물은 북제 사신들에게 꿍꿍이가 있음을 단박에 눈치챘다. 이날 오후 조금의 진전도 없이 협상이 끝나자 신기물은 작은 찻주전자를 들고 범한에게 따라오라는 눈짓을 했다. 다른 관리들을 피해 가까스로 조용한 장소를 찾은 뒤 신기물은 피곤한 표정으로 말했다.

“범한 대인, 일이 이상하게 돌아간다고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이번 협상에서 범한은 줄곧 지켜만 보는 것처럼 보였지만 사실은 처음부터 끝까지 참여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 역시 북제 사신들의 태도가 이상하다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만약 그들이 협상에 유리한 무언가를 가지고 있다면 이렇게 노골적으로 협상을 미룰 리는 없었다.

잠시 고민하던 그가 근심 어린 표정으로 말했다.

“아마도 북제 사신들은 협상에 유리한 상황이 되기를 기다리는 것 같습니다.”

신기물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오늘 밤에 입궁해 폐하께 감찰원 4처가 홍려사의 일을 도울 수 있게 해달라고 요청할 생각입니다. 북제가 무슨 생각을 하는 것 같은데 도통 알 수가 없느니 불안해서 견딜 수 없습니다.”

난간에 기대 북제가 뭘 하려는 건지 곰곰이 생각하던 범한의 머릿속에 불현듯 감찰원이 북제에 설치한 첩보망과 언빙운 공자가 떠올랐다.

범한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리 없는 신기물이 다시 말했다.

“오늘 밤에 궁에 들어가도 원하는 걸 얻지 못할지도 모릅니다. 혹시 아는 게 있으시면 알려 주시기 바랍니다.”

신기물은 지난번 보고서가 사남 백작의 도움을 받아 작성한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범한은 사실 사남 백작이 황제를 도와 어떤 힘을 휘두르는지 알지 못했다. 그는 속으로 최소한 언빙운의 안전을 확인해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날 밤 근거지로 사용하는 작은 집에서 왕계년을 만난 범한은 자신과 신기물이 걱정하는 바를 털어놓던 중 그의 얼굴에서 불길한 징조를 감지했다.

“소식이 안 온 지 이미 8일이 넘었습니다.”

왕계년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자 범한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대인의 직급에서 이런 정보를 얻기 힘들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단지 언 공자에게 안전에 주의하라는 말을 전해 달라는 것뿐이에요.”

왕계년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단선 연락이라 끊기면 다시 연락을 잇기가 힘듭니다. 게다가 언 공자는 북제 밀정의 총책임자인 만큼 그에게 무슨 일이 생겼다면 차라리 연락하지 않는 게 낫습니다.”

“어쨌든 그에게 몸조심하라는 말을 전해 주십시오.”

범한이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는 국가의 이익을 위해 사람을 희생시켜도 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더욱이 언빙운은 고관대작의 자식임에도 4년 동안 나라를 위해 희생하고 있었다. 이미 자신을 경국의 한 일원이자 감찰원 조직원으로 생각하고 있는 범한은 만난 적도 없는 언빙운을 진심으로 공경했다.

언빙운에 대한 지시가 마무리되자 범한은 다시 말했다.

“제가 감찰원을 통해서는 할 수 없는 일을 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대인께서 좀 도와줬으면 좋겠군요.”

갑작스러운 말에 왕계년이 얼떨떨한 표정으로 범한을 바라봤다.

“이 일은 진평평 원장에게 보고해서는 안 됩니다.”

비록 담담한 말투였지만 왕계년은 그 속에 담긴 서늘한 기운을 감지했다.

“알겠습니다.”

왕계년은 자신과 가족의 목숨이 온화해 보이지만 무서운 마음을 품고 있는 범한에게 달려 있다는 걸 알았다. 게다가 진평평 원장도 범한에게 무조건 복종하라고 말했기에 그는 순순히 답했다.

그날 밤 불길한 징조는 사실로 확인되었다. 감찰원 4처의 북제 첩보망은 다행히도 대부분 유지되어 있었다. 하지만 밀정 총책임자인 언빙운은 북제 수도에 있는 포목점에서 북제 황궁 고수를 만나 생포된 뒤였다.

이런 일은 일반적으로 하부 조직을 먼저 알아낸 뒤 서서히 위로 올라가 최종 첩보망을 포착하는 형식으로 진행되었다. 그러니 사건이 갑작스럽게 발생했다는 것은 경국 내부 고위층 중에서 북제와 내통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는 의미였다.

언빙운이 생포되었다는 소식은 극소수의 사람들에게만 알려졌다. 이 일로 경국의 명성에 흠집이 생겼지만 북제도 이득을 얻은 건 없었다. 언빙운을 잡아 자신들이 원하는 이익과 교환하려 했던 북제의 의도와 다르게 그저 경국의 사기에 약간 타격만 줬을 뿐이었다.

경국 조정에서 감찰원 4처를 주관하는 언약해의 장자 언빙운은 이미 4년 전에 죽은 사람이었다. 그가 북제 밀정으로 파견되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이 소식을 아는 몇몇 사람들은 며칠 동안 뜬눈으로 밤을 지새워야 했다.

홍려사 가장 은밀한 방 안에서 신기물이 두 눈을 감고 손에 들린 종이를 범한에게 건네주었다. 종이에는 옅은 구름이 얼음 위를 떠다니고 있는 장면이 그려져 있었다. 이 그림은 오늘 협상에서 북제 사신 중 한 명이 신기물에게 몰래 준 것이었다. 당시 북제 사신의 눈빛이 너무 의미심장해서 하마터면 신기물 옆을 지키던 호위병이 그를 공격할 뻔했다.

그림에는 ‘빙운’이라는 두 글자가 희미하게 숨겨져 있었다. 바로 북제 사신들이 이 소식을 이미 알고 있으며. 곧 협상에 이용할 거라는 의미였다.

“내부 첩자가 있는 게 틀림없어!”

범한과 신기물이 동시에 소리친 뒤 입을 틀어막았다. 두 사람은 북제 밀정 총책임자인 언빙운은 절대 고문에 입을 열 만큼 약한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러니 북제가 이처럼 쉽게 언빙운을 생포하고 그의 이름까지 알고 있다는 것은 다시 말해 경국 조정 안에 북제와 은밀히 연락하는 사람이 있다는 의미였다.

신기물이 근심 가득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이 일이 생기기 전까지는 황태자와 저도 언 공자가 북제에 간 것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조정에서 언빙운이 북제에 간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고작 다섯 명 정도입니다. 그들 중 북제와 내통한 사람이 있다면 어리석은 짓을 한 것이지요. 고위 관직에 있는 사람이 다른 나라와 내통해서 얻는 게 뭐가 있겠습니까.”

근심 가득한 눈으로 서로를 바라보던 두 사람은 서로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음을 눈치챘다. 만일 내부 첩자가 벌인 일이 아니라면? 만일 어느 대신이 감찰원을 공격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한 일이라면?

범한은 처음 왕계년에게 언빙운이 북제에 있다는 말을 들었을 때 이런 기밀을 왕계년이 알고 있는 게 이상했다. 감찰원 내부 정보 보안에 문제가 있는 게 아닌지 의심이 됐던 것이다. 나중에 진평평 원장이 자신에게 알려 주기 위해 왕계년에게 말해 줬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그래도 무섭기는 마찬가지였다. 만일 이 정보가 자신을 통해 새어 나간 것이라면 그 뒷일을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분명 미친놈이 아닙니까? 조정의 권력 싸움에서 이기기 위해 나라의 이익을 저버리다니요.”

신기물이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의 말에 범한은 황궁에 들어갔던 때를 떠올리며 경국에 이런 미친 짓을 할 사람이 많다고 생각했다. 그가 정신을 집중하며 물었다.

“언 공자가 잡힌 일에 대해서 폐하께서는 뭐라 하셨습니까?”

“북제는 폐하를 너무 쉽게 봤어요.”

신기물은 높은 황위에 앉아 있는 황제를 떠올리고는 두려운지 심호흡을 했다.

“영토 협상에서 조금도 양보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범한이 근심 어린 표정으로 물었다.

“그럼 언 공자는 어찌합니까?”

“교환해야지요!”

신기물이 독하게 마음먹은 표정으로 말했다.

“포로 교환을 할 겁니다. 지난번 포로 협상을 전면 취소한 뒤 북제가 언 공자를 잡았다는 증거물을 가져오면 재협상을 벌일 겁니다.”

범한이 미간을 찌푸렸다.

“북제는 대어를 낚았다고 의기양양해 있으니 재협상에 동의하지 않을 겁니다.”

신기물이 서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재협상에서 두 명의 북제 포로와 언 공자를 교환할 겁니다. 만일 북제가 이 협상에 응하지 않는다면 석 달 뒤 북제 포로 천 명의 목을 베서 북제로 보낼 생각입니다.”

“세력으로 상대를 억누르는 방법은 어쩔 수 없을 때만 사용하는 것이지요. 만일 북제가 똑같은 방법으로 대항한다면 3천 명이 넘는 포로들이 죽임을 당할 겁니다.”

범한은 문서를 뒤적거리며 말하다가 순간 무슨 생각이 떠오른 듯 물었다.

“이번에 교환할 두 명은 누구입니까? 북제의 동의를 받아낼 수 있을까요?”

“한 사람은 20년간 포로로 잡혀 있던 소은입니다.”

온화한 눈으로 범한을 바라보던 신기물은 그가 소은을 모를 거란 생각에 덧붙여 설명했다.

“소은은 당시 북위 밀정 총책임자였습니다. 두 번째 북벌전에 감찰원 진평평 원장과 비개 대인이 직접 말을 몰고 천 리를 내질러 소은의 아들 혼례식에서 그를 생포했지요. 그가 잡힌 뒤 총책임자를 잃은 북위의 첩보망은 순식간에 무너졌습니다. 그래서 이후 폐하께서 직접 출정해 파죽지세로 군대를 몰아 거대하던 북위를 일개 약소국으로 만들 수 있었던 것입니다. 사실 소은이 무모하게 아들의 혼례식에 참석하려 북제 수도를 벗어나지 않았다면 감찰원은 그를 잡을 수 없었을 것이고 북벌이 순탄하게 진행되지도 못했을 겁니다.”

범한이 알지 못하는 수십 년 전 이야기를 들으며 감탄하자 신기물은 이어 말했다.

“수도를 떠난 소은도 대담했지만 적국에 깊숙이 침투한 진평평 원장이 더 대담했지요. 어쨌든 두 다리를 잃는 대가로 소은을 잡지 않았습니까. 당시만 하더라도 북위에는 소은이 있고 남경에는 진평평이 있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소은은 진평평 원장과 같은 인물이었습니다. 물론 소은이 생포되면서 더는 진평평 원장과 나란히 이름이 불리지 않게 되었지만.”

진평평이 다리를 잃은 이유를 듣게 된 범한은 속으로 그에게 그런 초인적인 용기가 있다는 게 놀라웠다. 곰곰이 생각하던 범한이 나지막이 말했다.

“소은을 언 공자와 교환하는 건 우리가 손해를 보는 것 같습니다.”

신기물이 은은한 미소를 지었다.

“어젯밤에 몇몇 대신들도 같은 생각을 했습니다. 하지만 폐하와 진평평 원장의 생각은 다릅니다. 소은은 이미 일흔이 넘었고 진평평 원장에게 패했으니 이전처럼 막강한 힘을 휘두를 수도 없지요. 반면 언 공자는 적국에서 4년 동안 잠복해 있으면서 상당한 공을 세웠습니다. 늙은 노인과 경국의 미래를 바꾸는 것인데 손해 볼 게 뭐가 있겠습니까?”

범한이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만일 북제가 원치 않는다면 누구를 추가하실 생각입니까?”

“북제가 이전에 요구했던 여자입니다.”

대답하던 신기물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범한을 보고는 다시 말했다.

“북제 황제가 그 여자를 엄청나게 좋아한다고 하더군요. 이미 범 공자도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그러자 범한은 화들짝 놀라며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설마 사리리를 말하는 겁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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