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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여년-110화 (110/1,108)

110화

내관이 가져온 깨끗한 물에 손을 씻은 뒤 곁으로 다가간 범한은 심호흡으로 마음을 가다듬었다. 그러고는 최대한 장 공주의 검은 머리카락 사이로 보이는 흰 목덜미에 시선을 두지 않으려 노력하며 천천히 양손으로 머리를 감쌌다.

손가락 사이에 스치는 머리카락이 따뜻하면서도 간지러웠다. 범한은 두 눈을 감고 자신도 오죽처럼 검은 천으로 눈을 가리고 있다고 상상하며 손가락을 두피에 가져다 대었다. 그는 가볍게 양손의 엄지로 관자놀이를 누르는 동시에 집게손가락으로 그녀의 미간을 살며시 안마했다.

장 공주는 준비가 제대로 되지 않았던 건지 작게 앓는 소리를 냈지만 아파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범한은 침착하게 자신의 경험에 의지해 장 공주의 두피를 안마했다.

“음~.”

장 공주는 미간을 찌푸리며 자신이 조심성이 없었다고 생각했다. 예상과는 다르게 범한은 정말 실력이 있었다. 마치 손가락 끝에서 미세한 기운이 나와 두통이 생기는 부분을 만져 주는 것 같았다. 안마할수록 머리가 편안해지고 정신이 맑아져서 졸음이 몰려왔다.

“이것도 비개에게 배운 건가?”

그녀가 눈을 반쯤 감은 채 물었다.

“혈의 위치는 비개 대인에게 배웠지만 안마하는 방법은 혼자 터득한 것입니다.”

범한은 손가락으로 천천히 매끄러운 피부를 안마하며 담담하게 말했다. 그는 이전 세계에서 않아 누웠을 때 처음에는 다시 일어날 수 있다는 희망을 품었었다. 물론 희망은 곧 절망으로 바뀌었지만 간호사들이 그의 허벅지나 몸을 안마해 줬기에 그 방법을 알고 있었다.

“대단하군.”

범한의 실력에 진심으로 감탄한 장 공주가 천천히 눈을 감고는 안마를 즐겼다. 그때 속눈썹이 가볍게 떨리더니 조용한 광신궁에 차가운 목소리가 들렸다.

“신아와 혼인하면 4년 전 일은 잊어야 할 거야.”

순간 안마하던 범한의 손가락이 장 공주의 귀 아랫부분에서 멈췄다. 그곳은 보기에는 평범한 곳 같지만 치명적인 혈이 있는 자리였다.

순간적인 일에 불과했다. 범한은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다시 안마를 시작했다.

“4년 전이요?”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한 목소리로 범한이 묻자 장 공주가 미소 지었다. 아름다운 곡선을 그리는 입술이 마치 속으로 범한의 능청스러움에 감탄하는 것 같았다. 잠시 뒤 그녀가 화제를 바꿔 물었다.

“비개 밑에서 언제부터 배운 거지?”

범한은 장 공주가 은근슬쩍 정보를 캐내려 한다는 걸 눈치채고는 담담하게 대답했다.

“어렸을 때부터였습니다.”

범한의 모호한 대답에 장 공주는 더는 자세히 묻지 않고 웃는 듯 아닌 듯 한 표정으로 말했다.

“비개가 네 스승인 걸 몰랐다면 나를 포함해서 황실 사람 누구도 너희 백작가와 감찰원이 긴밀한 사이라는 걸 알지 못했을 거야.”

범한이 더욱 부드럽고 신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도 자세히는 모르지만 아버님과 비개 대인은 이전부터 알던 사이였던 것 같습니다.”

“당연히 알지. 과거 첫 북벌 때 너희 부친과 비개가 황제 오라버니를 따라 같은 진영에 있었으니까 모르는 게 이상한 거지. 내가 어렸을 때의 일이니까 너는 모르겠지만.”

“네. 그렇습니다.”

범한은 말을 많이 할수록 불리하다고 생각했기에 대답만 하고 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그러자 장 공주가 계속 물었다.

“네 할머니 건강은 어떠시니?”

“아주 건강하십니다.”

“그래, 못 본 지도 오래되었어. 내가 어렸을 때 가장 좋아했던 사람인데. 오라버니가 나를 괴롭힐 때마다 네 할머니가 보호해 줬거든.”

장 공주가 추억에 잠긴 목소리로 말하자 범한은 속으로 생각했다.

‘만약 당신이 나를 죽이려 한 걸 할머님이 아셨다면 진작 몽둥이로 때려 죽이셨을걸.’

“범건 대인이 폐하의 뜻을 정확히 말해 줬겠지.”

갑자기 화제가 진지한 쪽으로 향하자 온화하던 장 공주의 목소리에 차가움이 묻어났다.

장 공주가 황실의 금고 일을 언급하자 범한은 더는 모르는 척 넘어갈 수 없다는 생각에 웃으며 말했다.

“폐하께서 공주께 맡기셨다고 들었습니다.”

“그래? 최근에 경도에서 서점과 두부 가게를 열었다고 들었어. 하는 것 없이 놀기만 하는 자제들과 다르게 그런 일을 벌이는 건 나중에 황실 금고를 넘겨받기 위해 준비를 해두기 위함이겠지. 나도 잘하는 일이라 생각해. 다만 두부 가게는 지나친 감이 없지 않지만.”

마땅히 대답해야 할 말이 떠오르지 않자 범한은 헤헤 웃었다.

“나는 네가 죽었으면 좋겠어.”

온화하던 분위기가 장 공주의 서늘한 말에 북쪽의 추운 겨울날처럼 얼어붙었다. 광신궁이 순간 침묵에 휩싸였고 사방에 걸려 있는 하얀 천들도 순간 무기력하게 축 늘어졌다.

범한은 온화한 미소를 유지하면서 오른손을 살짝 뒤로 빼서 바늘을 꺼내기 좋게 만들었다.

감찰원은 이미 오백안과 장 공주의 관계를 알고 있었다. 장 공주는 이미 두 번이나 범한을 죽이려 했던 만큼 살기가 가득한 광신궁 안에서 세 번째 암살을 시도할 가능성이 없지 않았다.

물론 범한이 입궁한 사실은 경도 사람들 모두가 알고 있는 만큼 미치지 않고서야 황궁 안에서 자신을 죽이려 할 리는 없었다. 하지만 범한은 광신궁에 들어와 장 공주의 앳된 모습과 말투를 들으니 왠지 모르게 소름이 끼쳤다. 꼭 미친 여자를 만난 기분이었다.

범한이 장 공주를 안마한 것은 그녀의 요청에 따른 것이었고 또 임완아와 혼인을 앞두고 미래의 장모를 위해 한 것이었다. 하지만 신분과 성별 구분이 엄격한 이곳에서 만일 장 공주가 자신을 희롱했다고 모함한다면 벗어날 방법이 없었다.

범한은 이 세계에서 가장 무서운 것은 어린아이와 여자 그리고 미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이들은 이성적인 판단을 할 수 없어 다른 사람이라면 두려워서 하지 못할 일을 하기 때문이었다. 범한은 자신의 앞에 있는 장 공주를 바라보며 그녀가 이 세 가지를 모두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어린아이같이 유치하면서도 다른 사람은 하지 못할 악랄한 짓을 서슴없이 하는 걸 보면 장 공주는 분명 무서운 사람이었다.

바로 그때 궁녀 몇 명이 안으로 들어왔다. 옅은 붉은색 궁녀복을 입은 그녀들은 넓은 허리끈을 차고 있었다. 담주에서 오랜 시간 암살 훈련을 받은 범한은 한눈에 그 안에 예리한 검이 숨겨져 있다는 걸 눈치챘다. 하지만 내색하지 않고 부드럽게 장 공주의 귀 아랫부분을 안마하며 물었다.

“왜 제가 죽기를 바라십니까?”

“내가 너를 죽이고 싶어 하는 이유는 모든 사람이 알고 있잖아.”

장 공주가 여전히 두 눈을 감은 채 말했다. 마치 범한이 자신을 죽일 거라고 생각하지 않는 모습이었다.

범한은 고개를 숙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자신의 손가락에 시선을 집중한 듯 보였지만 사실 두 눈을 여전히 감고 있는 상태였다.

조용한 광신궁 안에서 살금살금 발소리가 들리더니 궁녀들이 장 공주 옆에 섰다. 범한은 여전히 두 눈을 감은 채 머리를 오른쪽으로 살짝 기울였다.

“범 공자께서는 손을 닦으시지요.”

궁녀들이 따뜻한 물과 수건을 건네며 말했다.

눈을 뜬 범한은 장 공주에게 인사한 뒤 궁녀들에게 웃으며 고마움을 표하고는 살짝 저리는 두 손을 따뜻한 물에 담갔다. 이후 수건으로 물기를 닦으며 말했다.

“공주께서는 좀 나아지셨는지요?”

그 말에 장 공주가 여린 표정을 지으며 범한을 바라봤다. 하지만 그는 장 공주는 이 세상에서 가장 두려운 사람이라는 걸 이미 알고 있었다.

“많이 좋아졌어.”

장 공주가 일어나 앉아 어깨 위 머리카락을 정리하며 말했다.

“신아와 혼인할 사람에게 이런 재주가 있는 줄은 몰랐네. 솔직히 범 공자가 조금…… 아깝다는 생각이 들 정도야.”

범한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공손히 머리를 숙여 인사했다. 이런 사람에게는 무슨 말을 하든 결과를 예측하기 어려운 만큼 차라리 말을 삼가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다.

“내가 좀 피곤하니 이만 가보도록 해. 그리고 유씨에게 오늘 나를 보러 오지 않아 실망했다고 전해.”

장 공주가 옅은 미소를 지으며 부드럽게 말했다.

범한이 광신궁을 나가자 장 공주의 심복인 궁녀가 다가와 조용히 물었다.

“공주님, 어쩔까요? 죽일까요?”

“하도 심심해서 그냥 놀래려고 한 말이야.”

장 공주가 고양이처럼 허리를 쭉 펴며 말했다.

“그런데 상당히 의외였어. 어린애가 어른처럼 참을 줄도 알고 속마음을 숨길 줄도 알다니…….”

장 공주는 애초부터 오늘 범한을 죽일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조금의 허점도 드러내지 않고 신중하게 행동하는 모습을 보면서 죽이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던 것도 사실이다. 만약 범한이 조금이라도 허점을 보였다면 그녀는 정말 그를 죽였을지도 모른다.

겹겹이 걸려 있는 하얀 천을 바라보던 장 공주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생각했다.

‘위험하다는 걸 알면서도 반격하지 않고 머리만 살짝 기울인 이유는 뭐지? 정말 궁금하네. 범한이란 아이…… 어떤 모습으로 자라게 될까? 정말 아까워.’

무엇이 아까운 것일까? 혹시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의미인 걸까?

* * *

범한은 독약을 가지고 놀며 자랐기 때문에 장 공주가 평생 보기 드문 매서운 독약같이 느껴졌다. 지금의 그로서는 그녀에게 대적할 힘이 없었다. 무표정한 얼굴로 광신궁에서 나온 범한은 졸고 있는 궁녀 성아를 깨웠다.

“돌아가자.”

그러고는 곧장 의 귀빈의 궁으로 돌아갔다.

궁녀 성아가 바라보니 범한의 등이 땀에 젖어 담청색 옷이 짙은 청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황궁을 나온 뒤 광장에 세워 둔 마차에 오른 범한은 안색이 약간 창백했다. 그는 허리끈 안에 숨긴 환약을 만지며 자신이 겁에 질린 쥐 같아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아무리 자신을 죽이고 싶어도 광신궁에서 죽일 리는 없었다.

“괜찮아요?”

범약약이 걱정되는 눈빛으로 범한을 바라보았다. 광신궁에서 있었던 일을 모르는 범약약으로서는 그저 오라버니가 여러 사람을 만나서 피곤해한다고만 생각했다.

범약약에게 미소를 지어 보인 범한은 유씨 부인에게 후궁들이 남긴 인사말을 전하고는 마부에게 빨리 백작가로 돌아가자고 재촉했다. 유씨 부인과 범약약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마차가 백작가 근처 골목길에 들어서자 범한은 유씨 부인에게 양해를 구하고는 범약약의 작은 손을 덥석 잡고 후원을 내달려 서재로 들어갔다. 갑작스러운 달리기에 범약약은 숨을 헐떡이며 물었다.

“오라버니…… 무슨…… 일이에요?”

범약약의 질문에 범한은 아무 설명도 하지 않고 다짜고짜 지시했다.

“내가 말하는 걸 기록해.”

그러고는 먹을 갈지도 않은 채 거위 깃털 붓을 집어 벼루에 조금 남아 있는 먹물에 찍고는 누이에게 건네주었다. 범약약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붓을 건네받자 그는 두 눈을 감고 황궁 안 복잡한 길과 건물들을 떠올렸다.

범한의 설명에 따라 서둘러 그리던 범약약의 얼굴이 갈수록 창백해졌다. 기억을 짜내는 데 정력을 소모하는 범한의 얼굴도 창백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두 사람 모두 얼굴이 하얗게 질릴 정도로 애를 썼지만 황궁의 지도는 갈수록 뒤죽박죽이 되었다. 범약약이 결국 낮은 소리로 말했다.

“오라버니, 이건 모반이야. 엄청난 중죄라고요.”

범한은 한숨을 쉬고는 의자에 앉아 한동안 침묵했다. 반나절 동안 황궁에서 후궁들을 만나 대화하고 복잡한 길을 외우느라 정력을 소모한 데다가 마지막에 장 공주와 긴장된 대화를 주고받아 몸이 천근만근이었다.

범한도 경국의 법률을 잘 알기에 황궁의 지도를 만드는 게 금지되어 있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이는 누군가 황궁에 침입해 대역무도한 짓을 벌이는 걸 방지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범한은 깊은 밤 몰래 황궁에 들어가 열쇠를 찾아야 했기에 지도가 필요했다.

임완아를 통해서 황궁의 길을 알아낼 수도 있었지만 너무 위험했다. 게다가 황궁 사람들이 다니는 길과 범한이 심혈을 기울여 계획한 길은 완전히 달랐다. 오죽도 불가능하다고 말했지만 오늘처럼 직접 가서 보지 않는다면 몸을 숨길 수 있는 장소나 사람의 시선을 피하는 장소 등을 담은 만족스러운 지도를 만들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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