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화 자신을 지키는 방법
높은 곳에 앉은 황태자가 한숨을 쉬었다. 그는 여색을 좋아하고 성격이 유약하지만 바보는 아니었다. 그렇기에 그는 전체적인 흐름에서 본다면 신 소경의 견해가 정확하다고 생각했다. 다만 정치란 한 치 앞도 알 수 없기에 자신이 조심한다고 해서 줄곧 황위 자리를 탐내고 있는 두 형이 가만히 있으란 법은 없었다.
황태자가 관자놀이를 누르면서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어쨌든 일국의 황태자인 나도 나라의 인재를 영입하고 싶은 뜻이 있네. 그리고 형들에 대해서는 함부로 말하지 말게.”
“범한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곽보곤이 고집을 꺾지 않고 묻자 신기물이 쌀쌀맞은 목소리로 말했다.
“저는 그 일에 대해 곽 대인이 잘못 판단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무슨 일을 말하는 건가?”
황태자가 궁금한 표정으로 묻자 신기물이 곽보곤을 흘겨보며 말했다.
“곽 대인을 포함한 많은 관리들이 정왕부가 가깝다는 이유로 백작가가 2 황자의 편에 섰다고 말하지만 증거는 없습니다. 만약 백작가가 곽 대인의 말처럼 2 황자 편에 섰다면 범한은 이번에 동궁에서 준 관직을 받지 않았을 겁니다. 그러니 범한이 곧 재상의 사위가 돼서 황태자 저하께 충성할 수 없다는 곽 대인의 판단은 황당한 억측일 뿐이지요.”
신기물의 말에 곽보곤이 눈을 부릅떴다.
“억측이라고요? 조정에서나 밖에 들리는 소식에 의하면 재상이 장 공주와 결별하고 동궁의 영향력에서 벗어나려 하는 게 분명한데 억측이라니요!”
“일국의 재상이 황실 사람의 간섭을 받지 않으려는 건 당연한 것 아닙니까.”
흥분해 말하던 신기물은 자신의 말이 지나쳤음을 깨닫고는 황태자에게 허리를 숙여 사과했다. 황태자는 괜찮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계속 말해 보라는 표시를 했다. 그러자 신기물은 다시 입을 열었다.
“곽 대인의 말은 문제의 소지가 있습니다. 모두 재상 대인과 장 공주가 결별한 사실은 알고 계실 겁니다. 하지만 이게 동궁과 무슨 관련이 있습니까? 이것이 재상 대인의 충성심이 변했다거나 황태자 저하에게 등을 돌렸다는 의미는 아니지 않습니까?”
황태자가 미간을 찌푸렸다.
“하지만…… 재상 대인 때문에 고모께서 매우 화가 나셨는걸.”
“저하, 외람되지만 장 공주의 입장만 보고 재상 대인의 충심이 변했다고 생각할 수 없습니다.”
신기물이 당당하게 말하자 황태자가 더욱 미간을 찌푸렸다.
“하지만…….”
그가 뭐라고 말하려다 멈추자 곽보곤이 잽싸게 입을 열었다.
“하지만 재상 대인의 충심이 변하지 않았다면 어째서 이전처럼 조회 뒤 동궁을 찾지 않으시는 겁니까?”
신기물이 자신 있게 웃으며 대답했다.
“소신도 그 점을 부인하지 않겠습니다. 하지만 먼 미래에 힘을 겨루게 된다면 총명한 신하는 저하의 편에 서서 자기 집안을 보존하려 할 것입니다. 재상 대인 역시 지금은 저하와 2 황자 사이에서 흔들리는 것 같지만 결국에는 저하의 뜻을 따라 우리 편에 설 것입니다. 그리고 재상의 마음을 잡기 위해서라도 범한을 편으로 끌어들여야 합니다. 재상 대인에게 가문을 이끌 아들이 없는 상황이니 범한이 재상가의 미래도 짊어진 셈입니다. 그러니 만약 범한이 저하의 편에 선다면 재상 대인도 따라올 것입니다.”
“정왕 세자와 범한의 관계가 어떤지나 잊지 마시오.”
곽보곤이 코웃음을 치며 말하자 신기물이 차갑게 쏘아붙였다.
“얼마 전에 일을 꾸민 자들이 누구의 부하였는지나 잊지 마십시오. 그쪽에서 교묘한 수를 써서 범한과 저하를 만나게 하려 하지 않았습니까. 저하께서 범한을 모욕하게 한 다음 자신의 진영으로 끌어들이려 한 속셈이었지만, 다행히 저하께서 영리하게 행동하시어 그쪽에서 원하는 상황은 만들어지지 않았습니다.”
황태자가 기분이 좋은지 웃자 신기물은 계속 말했다.
“백작가가 그쪽 편에 섰다면 왜 그런 짓을 벌였겠습니까. 저는 백작작가 이 일의 감춰진 배후를 언젠가는 밝혀낼 거라 믿습니다. 그리고 만약 진상이 밝혀진다면 범한도 그쪽에 환멸을 느낄 것이니 지금 백작가의 태도에 대해서 걱정할 필요는 없지요.”
황태자가 무슨 생각이 났는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범한이 아직 배후를 모르고 있으니 내가 은근슬쩍 알려 줘도 괜찮겠군.”
“범한을 얻는 것은 경국에서 가장 큰 세력인 백작가와 재상가를 얻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문관과 귀족 중 최소 절반이 두 가문 출신입니다. 더구나 몇 년이 지난 뒤 황실 금고를 범한이 관리하게 된다면…….”
신기물이 목소리를 낮춰 황태자에게 속삭였다.
“결코 시 몇 편 지은 8품 말직 관리로만 봐서는 안 됩니다.”
황태자는 무언가 깨달은 듯한 표정을 짓더니 한동안 마음속으로 상황을 계산했다. 이윽고 그가 탁자를 치며 말했다.
“범한에게 기회를 줄 것이니 그가 나를 실망시키지 않았으면 좋겠소.”
동궁의 계획이 정해지자 곽보곤은 실망을 감추지 못했고 신기물은 득의양양한 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황태자는 자신이 영리하고 사람을 포용할 줄 아는 사람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세 사람 모두 황후와 장 공주가 과거 범한을 암살하려 했다는 사실은 모르고 있었다. 동궁을 뒷받침하는 가장 강한 힘과 범한의 지키는 힘이 이미 담주와 외양간 거리 그리고 창산에서 충돌했었다는 걸 그들은 몰랐다.
물론 그들은 몇 년 뒤 상황이 놀랍고 불가사의하게 변할 거라는 것도 예측하지 못했다. 황궁의 어둠은 다른 곳보다 더욱 짙었기에 모든 진상과 과거를 가려 버렸고, 멀리 있지 않은 미래도 볼 수 없게 만들었다.
* * *
감찰원의 정보가 만들어 낸 자신감은 이후 협상 상황을 급격히 변화시켰다. 북제는 경국 사람들이 인내심을 드러낼 때까지 협상을 끌었다. 하지만 북제의 예상과 다르게 홍려사 소경 신기물은 기세등등한 태도로 이틀간 열린 협상에서 북제의 주장을 조목조목 반박하며 상황을 유리하게 이끌었다.
세 번의 협상을 통해 포로 교환과 공납과 같은 문제들이 전부 해결되었다. 이제 남은 것은 가장 어려운 문제인 제후국 사이 영토를 다시 나누는 일이었다.
범한은 접대 부사이기에 줄곧 초연한 태도로 과정을 지켜보며 신기물의 학식과 패기 그리고 협상에서의 언변에 진심으로 감탄했다. 황태자 주위에서 자신의 이익만 챙기려는 곽보곤과 같은 사람들과는 달랐다. 한편 신기물은 시간이 있을 때 범한과 교류하며 그를 관찰했다. 그는 범한이 나이가 어림에도 자신의 감정과 생각을 드러내지 않는 걸 보며 깊이를 알 수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협상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감찰원의 도움을 받은 보고서를 신기물에게 준 뒤로 범한은 별다른 일은 하지 않았다. 적은 공적만 인정을 받더라도 지금 생황에 만족했기에 불만은 없었다.
책방 운영은 경여당 일곱째 섭 대행수가 관리하고 있었고 범사철이 항상 가서 회계를 점검했기에 범한은 신경 쓸 필요가 없었다. 한편 두 달 뒤 있을 혼인 준비로 재상가와 백작가 부인들은 바빴다. 더구나 유씨 부인은 범한이 가짜 부마가 되는 일을 반기면서 새어머니로서 임무를 다하기 위해 정신이 없었다. 그녀는 범한이 황제의 수양딸과 결혼한다면 집안의 작위를 물려받을 수 없다는 걸 알기에 누구보다도 혼사에 기뻐했다.
하지만 임완아의 어머니이자 황궁 안 노처녀인 장 공주가 자주 찾아와 이러쿵저러쿵 불평하며 사남 백작 범건의 체면을 깎으려 했다. 궁전 예절에 대해 전혀 모르는 범한은 매번 꽁무니를 빼기 바빴기에 임완아와 범한을 돕는 범약약은 매일 밤 머리를 싸안고 고민해야 했다.
2 황자는 정왕 세자를 두 차례 보내 만남을 요청했다. 하지만 범한은 지난번 피서 때 황태자를 우연히 만난 일이 신경 쓰여 만남을 월말로 미루고 그때까지 진상이 밝혀지기를 바랐다. 어쨌든 백작가에 대한 동궁의 태도가 조금은 변한 건 사실이었지만 2 황자의 요청을 계속 거절할 수는 없었다. 그나마 협상에 전념해야 한다는 핑계로 만남을 미룰 수 있어 다행이었다.
최근 유일하게 그를 걱정하게 만든 것은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북제 사신 장묵한과 동이성 사신인 사고검의 수제자였다. 두 사람은 각각 문예와 무공에서 최정상에 있는 인물임에도 경도 안에서 지나칠 정도로 조용하게 행동했다. 장묵한은 황태후의 요청을 받아 황궁에서 학술 강연을 했고, 사고검의 수제자 운지란은 줄곧 사절단 안에만 머무르고 있었다.
두 사람 중 범한은 운지란을 가장 경계했다. 어쨌든 문장가로 명성이 자자한 장묵한은 자신과 부딪칠 일이 없었지만 운지란은 자신과 목숨을 걸고 싸워야 하는 원수였다. 하지만 경도에 있는 이상 상대방이 자신을 공격하지 못할 거라 믿었다. 그래서 범한이 지금 가장 골몰하고 있는 것은 사실 열쇠를 찾는 일이었다.
어두운 밤 범한은 검은색 가죽 상자를 바라봤다. 열쇠 구멍이 있는 황동에는 비개 선생이 준 비수로 열려고 했던 흔적이 남아 있었다. 상자 안에 무엇이 들었는지 궁금했지만 열쇠가 없는 이상 알 수는 없었다.
범한은 황궁에 있는 홍 태감과 연락을 시도하던 중 사실 하나를 발견했다. 비록 현재 자신은 경도에서 돈을 쓸어 담고 있는 것 같았지만 천하 최고봉에 있는 사람들과는 아주 많은 격차가 있다는 것이었다. 황태자와 2 황자가 자신과 친해지고 싶어 하는 이유는 자신의 뒤에 있는 재상가와 백작가 때문이지 본인이 뛰어나서가 아니었다. 그러니 자신의 명성에 기대 황궁에 들어가 홍 태감을 만나는 건 불가능했다.
임완아도 아무 때나 황궁에 들어갈 수는 없었기에 그를 도와줄 수 없었다. 홍사상을 만나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오죽의 말대로 황궁 밖에서 두 시간 동안 잡아 두는 건 거의 불가능했다.
2 황자의 부탁을 받고 정왕 세자 이홍성이 범한을 찾아왔을 때 그가 은근슬쩍 황궁에 있는 홍 태감을 만나게 해줄 수 있냐고 부탁했다. 하지만 이홍성을 고개를 저으면서 홍 태감은 황태후 궁에만 머무르고 절대 황궁 밖으로는 나오지 않는다고 말했다.
“아무래도 방법을 바꿔야 할 것 같아요.”
범한이 상자를 침대 아래로 밀어 넣고는 벽 구석에서 자고 있는 듯한 오죽에게 말했다.
“홍 태감을 나오게 할 방법이 없어요.”
오죽이 천천히 고개를 들며 말했다.
“그럼 제가 그의 시선을 붙잡아 둘 수 있으니 도련님께서 황궁에 들어가 열쇠를 찾으십시오.”
오죽의 말에 범한은 화들짝 놀랐다.
‘지금 6등급이 채 되지 않은 내가 황궁에 들어가는 건 죽음을 자초하는 짓이잖아.’
눈을 가늘게 뜨고 생각하던 범한은 시도해 볼 만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오죽은 항상 자신에게 3품 정도의 수준이라고 말했지만 정거수를 죽인 걸 보면 자신의 능력을 오죽이 너무 과소평가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물론 이 말을 오죽에게 직접 할 수는 없었다.
“왜 그런 위험까지 감수하면서 열쇠를 찾아야 하는 거죠? 호기심 때문에 위험을 감수하는 게 너무 무모해 보여요.”
한동안 고민하던 범한은 오랫동안 가지고 있었던 질문을 토해 냈다.
“도련님은 아가씨가 뭘 남겼는지 알고 싶지 않으십니까?”
“알고 싶어요. 하지만 어머님도 제가 즐겁고 편안하게 살아가길 바라실 거예요. 자신이 남긴 물건 때문에 아들이 위험을 자초하는 건 바라지 않으실 거라고요.”
침대에 앉은 범한은 시무룩하게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그러자 오죽도 고개를 숙였다. 눈을 가린 검은 천과 주변의 어둠이 어우러지면서 범한은 왠지 모르게 한기가 느껴졌다.
“지금의 삶에 만족하시는군요.”
오죽의 말에 범한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 경도에 온 뒤, 더욱이 여름 동안 귀족 자제로서 권력과 부를 누리며 안락한 삶을 즐기게 된 건 사실이었다.
“하지만 자신의 삶을 자발적으로 통제하지는 못하고 계십니다. 지금 도련님의 삶은 진평평 원장과 범건 대인이 계획한 것입니다.”
오죽이 계속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 말이 무슨 의미인지 이해한 범한은 순간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그는 이 세상의 어두운 부분을 알면서도 여전히 믿고 싶어 하지 않았다.
“두 분을 믿지 말라는 말인가요?”
오죽이 더욱 쌀쌀맞은 목소리로 물었다.
“저는 누구도 믿지 않습니다.”
“그런 삶은 너무 힘들잖아요.”
“두 분이 돌아가신 뒤에는 어쩌실 겁니까?”
오죽이 범한이 가장 두려워하는 부분을 공격해 물었다. 그러자 범한은 미간을 찌푸리며 대답했다.
“저도 알고 있어요.”
오죽은 범한이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는 듯 냉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자신을 보호하려면 더러운 음모나 강력한 권력이 아닌 이 점을 지킬 줄 알아야 합니다.”
범한이 침대에서 일어나 자신의 하인이자 스승인 오죽을 향해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저는 아가씨께서 상자 안에 뭘 남기셨는지 모르지만, 도련님이 자신이 지키기 위해서는 적들이 두려워할 만한 힘을 길러야 한다는 건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힘을 기르기 위해서는 반드시 열쇠를 찾아야 합니다.”
“알았어요. 찾을 방법을 생각해 볼게요.”
다시 고개를 들어보니 오죽은 이미 어둠 속으로 사라진 상태였다. 10여 년 동안 비 오는 밤 오죽이 어머니를 회상했을 때 빼고는 그와 이렇게 길게 대화를 나눈 적이 없었다.
범한은 오죽의 뜻을 이해했다. 경도의 생활에 익숙해지면서 어렸을 때부터 길렀던 경계심이 많이 느슨해진 건 사실이었다. 오죽은 범한에게 집안의 권력이나 어머니가 남긴 혜택에 의지해 나약해 져서는 안 된다고 경고한 것이다. 그동안 범한은 비록 몸 안에 난폭한 정기를 수련하고 독침 쏘는 기술을 연마했지만, 오죽의 말대로 마음은 담주에 있을 때처럼 강인하지 못했다.
자신을 보호하려면 스스로 힘을 기르는 수밖에 없다. 어머니가 없는 아이는 뿌리가 연약한 새싹과 같았다. 그렇기에 자신의 힘으로 돌을 뚫고 세상 밖으로 나와 뿌리를 깊이 박고 줄기를 단단하게 해야지만 살아남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