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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여년-104화 (104/1,108)

104화 북제의 사신

복잡한 설명에 범한이 미간을 찌푸리자 임 소경은 다시 설명했다.

“폐하는 보상을 원하시고 재상은 암살 사건의 진상이 밝혀지길 원하시네. 그러니 자네가 폐하의 뜻에 따라 행동한다면 재상에게 미움받게 될 수밖에 없는 난처한 상황에 부닥치는 것이지. 이번 협상 과정에서 조심히 행동해야 할 거야.”

멍한 표정으로 있던 범한이 공손히 인사하며 말했다.

“제가 관직에 오른 지 얼마 되지 않아 상황을 잘 알지 못합니다. 게다가 일이 이렇게 복잡한데 8품 협률랑인 제가 홍려사에게서 말한들 의견이 받아지겠습니까.”

그러자 임 소경이 고개를 저었다.

“자네는 이제 부사일세. 한마디로 풍파의 한가운데에 서게 된 것이니 적지 않은 눈이 자네를 지켜볼 것이네.”

“저를 지켜봐서 뭘 하겠습니까?”

범한은 곰곰이 생각하다가 옅은 미소를 지으며 이어 말했다.

“소경 대인께서는 걱정이 많으신 것 같습니다.”

범한은 동궁에서 자신을 부사로 임명한 이유가 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함인지 아니면 황제에게 미움을 받게 하기 위해서인지 몰랐다. 하지만 그는 이미 충분한 준비를 해둔 상태였기에 무엇도 두렵지 않았다.

오후가 되자 홍려사에서 보낸 가마가 왔다.

홍려사는 외교부에 해당하는 기관이기에 홍려사경은 외교부 장관의 역할에 해당했다. 이전 세계에서 ‘약소국과는 외교도 없다’는 말처럼 현재 경국은 천하에서 가장 큰 강대국으로 약소국들을 억압하고 있었기에 홍려사 관리들도 자연히 많은 이익과 지위를 누릴 수 있었다. 측백나무가 빽빽하게 둘러싸여 있는 홍려사는 여름인데도 더위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범한은 쾌적하고 조용한 대청에 앉아 위쪽 대인이 하는 이야기를 들었다.

이야기하고 있는 사람은 홍려사 소경인 신기물이었다. 북제나 동이성과 협상하는 일은 경국 관리들에게는 큰일이 아니었기에 홍려사경 대인을 대신해 4품 소경 신기물이 협상을 맡고 있었다.

“이번에 조정이 범한 대인을 부사 자리에 임명한 이유는 첫째로 대인께서 인재시기 때문이고, 두 번째로 북제의 일이 대인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업무가 익숙하지 않더라도 너무 조급해하지 마십시오. 하다 보면 점차 익숙해지실 겁니다.”

신기물은 가장 아래 자리에 앉은 준수한 청년의 뒤를 봐주는 사람들이 많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최대한 공손하게 말했다.

“그렇고말고요. 범한 대인이야 시를 잘 쓰기로 유명하지 않습니까. 외국 사람들을 상대하는 일도 쉬울 겁니다.”

수많은 관리가 범한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은 교묘한 말로 아첨을 하면서도 범한이 홍려사의 모든 공로를 빼앗아 가지 않을까 경계하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주변 분위기를 눈치챈 범한은 공손히 일어나 주위에 인사한 뒤 온화한 표정으로 관원들을 향해 말했다.

“제가 태평사에서 근무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조정의 일을 잘 알지 못합니다. 그런 저를 황궁에서 다시 부사로 임명한 것은 경국의 자식들이 함부로 죽임을 당하지 않도록 북제의 적들을 감시하라는 뜻일 것입니다. 하지만 제가 이번 협상에서 어떤 공적을 세울 수 있으리라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소신이 외교에 관해 아는 바가 없으니 폐를 끼치지 않도록 많이 가르쳐 주시기 바랍니다.”

관료 사회에 대한 경험이 부족하다 보니 범한의 말은 다소 거칠었다. 하지만 이 무례한 말을 들은 홍려사의 관리들은 비로소 마음을 놓았다. 사남 백작의 서자인 범한이 협상 과정에 참여한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외교 전문가라 자부하는 홍려사 관리들은 마음이 불편했던 게 사실이다. 마치 만찬을 즐기는 까마귀 무리 안에 갑자기 독수리가 나타나 음식을 뺏는 형국이었다.

범한이 공을 가로채지 않겠다고 말하자 홍려사 관리들은 모두 안심했고 신기물 역시 좋아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모두 만약 이번 협상이 성공한 뒤 받게 되는 보상은 공로에 따라 나누어지므로 권위가 높은 자제가 많은 부분을 받게 될 거라는 건 알고 있었다.

회의가 끝난 뒤 신기물은 범한을 작은 방 안으로 데리고 가더니 커다란 보관장에 가득 들어 있는 문서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관련 자료들은 모두 여기 있네. 이번 협상에서 북제는 은전과 우리가 점령한 방대한 토지를 교환하고 싶어 하네. 동이성은 아무런 요구 없이 두 건의 암살 사건을 해결하고 싶어 하는데 그중 한 건은 외양간 거리에서 범 공자가 공격을 받은 일이지. 이미 범 공자를 공격한 두 명의 여자 자객이 사고검의 제자인 걸로 밝혀졌네. 다른 하나는 창산 부근 장원에서 발생한 사건인데…….”

신기물이 설명을 멈추고 잠시 고민하다가 다시 말했다.

“자네도 알다시피 이 사건은 복잡해서 유리한 증거를 찾아내지 못한 상황이야.”

범한이 고개를 끄덕이며 생각했다.

‘설마 오늘부터 앞으로 협상이 진행되는 십여 일 동안 종이 냄새가 진동하는 이 방에 틀어박혀 문서들과 씨름해야 하는 건가.’

그의 마음을 읽은 듯 신기물이 웃었다.

“여기서 근무하고 싶지 않으면 저택에 가지고 가서 봐도 되네. 다만 ‘기밀’이라 적힌 붉은색 문서들은 절대 관아 밖으로 가지고 나가서는 안 되네.”

범한은 임 소경이 자신이 이곳에서 근무하면서 다른 사람의 일을 방해할까 봐 그런 말을 한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기뻐하며 대답했다.

“사실 오늘 갑작스럽게 이곳에 오게 되어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습니다. 대인께서 이해해 주신다면 문서들을 가지고 가서 집에서 검토하고 싶습니다. 잠도 집에서 자고 싶고요.”

8품 협률랑밖에 되지 않는 범한이 4품 홍려사 소경인 자신에게 당당히 집에서 일하겠다고 말하자 신기물은 당황한 표정을 지으며 큰 소리로 웃었다. 그러고는 재빨리 목소리를 낮췄다.

“범 공자, 동궁에서 자네에게 걸고 있는 기대가 크네.”

범한이 옅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저도 알고 있으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아버님께서 항상 신하는 신하로서의 도리를 다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대답에 황태자의 심복인 신기물이 만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사남 백작의 충심은 나도 줄곧 높이 평가하고 있네.”

이후 몇 가지 대화를 더 나눈 뒤 신기물은 방을 나갔다. 범한은 떠나는 그의 뒷모습을 보면서 빙그레 미소 지었다. 사남 백작은 황태자가 자리를 지키는 이상 백작가는 황태자에게 충성할 것이라 말했지만 범한은 이 말을 믿지 않았다. 하지만 상대방이 동궁의 사람인 이상 쉽게 자기 생각을 드러낼 수는 없었다.

이후 10여 일 동안 범한은 신기물에게 말한 대로 매일 자신의 집에서 잤다. 물론 그에게 잠은 곧 수련을 위해 필요한 과정이므로 소홀히 할 수 없었다. 그리고 업무 자료는 이미 왕계년이 검토하고 있었다.

사실 범한은 왕계년이 자신 몰래 감찰원 원장에게 보고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기에 복잡하고 재미없는 일은 그에게 맡겼다. 그는 진평평 원장이 어머니와 아버지의 체면 때문에라도 자신이 조정에서 망신을 당하지 않도록 적절하게 처리해 줄 거라고 생각했다.

그는 이용할 수 있는 자원은 적극적으로 사용했다.

과연 며칠이 지나자 왕계년이 초췌한 모습으로 두 사람이 만나기로 한 근거지에 와서는 두꺼운 문서를 건네주었다. 범한이 들춰 보니 문서는 두 부로 되어 있었다. 하나는 홍려사 고위 관원들만 볼 수 있을 법한 참고 자료였고 다른 하나는 북제와의 협상을 예상한 자료였다.

자료 안에는 북제의 내부 상황이 자세하게 분석되어 있었다. 나이 어린 북제 황제와 황태후가 서로 권력 다툼을 하고 있다는 내용과 고하 국사가 평화주의라는 등의 내용이 담겨 있었다. 또 자료에는 황태후의 친아들인 영국후가 이번 전쟁에서 패배해 북제 문신들의 공격을 받고 있으며, 나이 어린 북제 황제는 배상이 얼마가 되든, 영토를 얼마나 떼어 주든 상관없이 이번 기회를 빌려 후당의 세력을 없애 버리고 싶어 한다고 적혀 있었다. 반면 북제 황태후는 이번 사건을 최대한 빨리 마무리해서 조정의 분란이 가라앉기를 바라면서도 이번 협상에 대해서는 최대한 차분하게 진행하라고 지시했다고 적혀 있었다.

이런 암중의 상황을 경국 관리들은 알아낼 수 없었다. 이것은 감찰원이 북제에 포진된 밀정들이 보낸 자료를 종합해서 얻어 낸 결과였다.

자료를 읽던 범한은 한숨을 쉬었다.

“대단하네요. 이 정도 정보라면 홍려사 관리들도 함박웃음을 짓겠어요.”

잠시 생각하던 그가 왕계년에게 물었다.

“자료 내용은 얼마나 믿을 수 있는 건가요?”

며칠 동안 잠을 제대로 못 잔 듯 왕계년이 눈꺼풀을 늘어뜨리며 말했다.

“꽤 믿을 만합니다. 언빙운이 북제에 정보망을 효율적으로 깔아 둬서 참고하는 데 문제는 없을 겁니다.”

범한은 언빙운이란 젊은 공자가 존경스러웠다. 조정 고관의 아들이 국가의 이익을 위해서 몇 년 동안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일한다는 건 쉽지 않을 터. 범한은 언빙운이 북제에 머무는 이유가 자신이 열두 살 때 있었던 암살 미수 사건과 관련 있다는 걸 모르고 있었다. 만일 범한이 이 사실을 안다면 양심의 가책을 느끼거나 실소를 터트릴지도 몰랐다.

“미행만 잘하는 줄 알았는데 정보 분석에도 탁월한 재주가 있군요.”

범한은 이 자료가 어디서 온 건지 알고 있으면서도 내색하지 않고 말했다.

왕계년은 난처한 표정으로 아무 말 없이 인사를 했다.

“내일 홍려사에 가서 소경 대인과 상의를 해봐야겠어요.”

일어나려던 범한은 왕계년이 뭐 마려운 강아지처럼 머뭇거리는 모습을 보고 물었다.

“왜요? 무슨 일 있나요?”

“대인, 이 자료를 홍려사에 제출해서는 안 됩니다.”

“왜죠?”

“그게…… 문서에 홍려사경을 포함해 홍려사 누구도 볼 수 없는 기밀이 들어 있습니다.”

범한이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그럼 감찰원에서 공식적인 방법으로 홍려사에 주면 되겠군요.”

왕계년은 한숨을 쉬며 속으로 생각했다.

‘원장께서 범 공자가 협상에서 성과를 올려 승승장구할 수 있도록 6처 전체를 밤낮으로 돌려 만들어 낸 보고서를 그냥 주라니?! 감찰원 보고서 전문가들이 피와 땀으로 만들어 낸 보고서를 홍려사에 그냥 바친다면 원장 대인께서 버럭 화를 내며 바퀴 달린 의자에서 일어나 나를 죽이려 하실지도 몰라!’

* * *

연꽃이 지기 시작한 늦여름에도 날씨는 후덥지근했다. 행인들과 거리 위 개들도 더운 날씨에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8월 초여드렛날에 북제 사절단과 동이성 사절단은 경도에 진입하기 전 마지막으로 서북쪽 역참에 도착했다. 경국 황제가 특별히 두 사절단에게 황제의 별궁을 빌려주라는 교지를 내렸고, 이후 관련 부처가 며칠 동안 바삐 움직인 뒤 마침내 입경 날짜를 정할 수 있었다.

사절단 방문은 마치 가뭄에 단비가 내리듯 백성들의 지루한 일상에 활력을 불어넣어 주었다. 경도 사람들은 북제와 동이성이 협상하러 온 것이 아니라 투항 국서를 건네주러 왔다고 생각했다.

한편 부사 자리에 오른 범한은 사절단을 맞이하기 위해 그들이 지내고 있는 경도 역참으로 들어갔다. 전쟁에서 패해 많은 북제 장병들이 포로로 잡힌 데다가 영토까지 잃어서 북제 사절단의 표정은 어두웠다.

“소경 대인이신가?”

북제 사절단 중 지위가 가장 높은 사람은 황후의 친동생인 장영후였다. 높은 곳에 앉아 있던 그는 홍려사 소경도 아닌 젊은 부사가 마중을 나오자 무시당했다는 생각에 울컥 화가 났다.

“소신 범한, 인사드립니다.”

범한이 맑은 미소를 지으며 적국 사절을 바라봤다. 그는 감찰원 보고를 통해 장영후는 명목상 대표이고 황궁에서 마련한 별궁에 거주하고 있는 장묵한이 실권자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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