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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여년-103화 (103/1,108)

103화 작은 바늘

“홍사상 태감을 궁 밖으로 불러 두 시간 정도 붙잡아 주셨으면 합니다.”

범한은 미간을 찌푸렸다.

“홍 태감이요? 황궁 내관의 우두머리이자 세 황제를 섬긴 원로잖아요. 개국 때부터 있었던 사람이라 세력이 상당하다고 들었어요. 황궁에 들어가 열쇠를 훔칠 때 그분을 밖으로 불러야 하는 이유가 뭐죠? 이 일과 무슨 관련이 있는 건가요?”

말하던 범한은 무언가 깨달은 듯 놀라더니 오죽의 눈을 가린 검은 천을 바라보며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설마 홍 태감이 베일에 싸인 대종사인가요?”

과거 비개는 천하의 4대 종사를 설명하면서 동이성의 사고검, 북제 국사 고하, 경국 섭류운 외에 다른 한 명의 종사는 경국 사람이지만 누군지 확실히 알려지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러며 감찰원은 조사를 통해 그가 경국 황궁에 숨어 있을 것이라 짐작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오죽이 고개를 저었다.

“저도 그와 겨뤄 본 적이 없기에 모릅니다. 하지만 현재 황궁에서 저를 가장 쉽게 발견할 수 있는 사람은 홍사상 태감입니다.”

범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오죽의 신중한 모습을 보며 홍 태감이 황궁에서 잘 알려지지 않은 인물임이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더구나 오죽마저 두려워할 인물이라면 1대 종사 중 한 명이라 해도 이상할 게 없었다.

사실 오죽은 섭류운을 죽이지 못하는 걸 한스러워할 만큼 감정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러니 천하 종사 중 누구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다만 자신이 대놓고 행동하면 범한과의 관계가 발각될 수 있기에 최대한 조용히 열쇠를 훔치려는 것뿐이었다.

범한은 최근 북제와 동이성 사절이 오는 일과 관련 지어 홍 태감을 부를 방법이 없을까 생각했지만 좋은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렇다고 이 일을 아버지에게 부탁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한동안 고민하던 그의 눈이 순간 반짝였다.

“완아가 황궁의 일을 잘 알고 있을 거예요. 줄곧 황궁에서 생활하다가 올해 초에 나왔다고 들었거든요. 제가 내일 가서 방법이 있는지 알아볼게요.”

오죽이 아무 말 없이 범한의 눈을 보다가 차갑게 말했다.

“홍사상을 두 시간 정도 황궁 밖에서 잡고 계시면 됩니다. 도련님이 어떤 방법을 사용하시든 상관없습니다.”

범한은 어깨를 으쓱했다.

“아저씨는 항상 가장 어려운 임무를 제게 맡기시네요.”

며칠 동안 오죽과 대화할 기회가 없던 범한은 오죽에게 유머 감각이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망각한 듯 농담을 했다. 그러자 오죽이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제가 홍사상을 죽이러 가겠습니다. 성공하든 못하든 대략 세 시간 정도는 붙잡아 둘 수 있을 테니 도련님께서 황궁으로 들어가 열쇠를 찾아오십시오.”

범한이 난처한 표정으로 괜한 말했다고 생각하며 공손하게 말했다.

“아뇨! 물건 하나 슬쩍 가져오는 데 굳이 홍사상과 싸울 필요는 없죠. 제가 그와 접촉할 방법을 찾아볼게요.”

오죽이 떠난 뒤 범한은 그제야 오죽을 찾을 방법이 없다는 걸 깨달았다. 설사 홍 태감을 황궁 밖으로 불러낼 계획을 세운다 해도 오죽에게 그 사실을 어떻게 알린단 말인가. 다시 침대에 누운 그가 검은색 가죽 상자를 바라봤다. 심드렁하게 바라보던 아까의 눈빛과는 달랐다. 열쇠가 황궁에서 가장 보안이 삼엄한 곳에 있다는 것은 상자 안에 아주 중요하고 위험한 물건이 들어 있다는 의미였다.

‘안에 뭐가 들어 있을까. 국경 수비 지도나 감찰원의 상급 밀정의 명부가 들어 있을까, 아니면…… 섭가의 보물 지도?’

심란해져서 잠이 달아난 범한은 일어나 상자를 발로 차 침대 아래로 넣었다. 마치 이렇게 하면 더 안정된다는 듯이.

* * *

범한은 범약약의 방에 찾아가 옷을 꿰맬 바늘과 실을 달라고 했다. 범약약은 상자에서 꺼낸 바늘과 실을 건네주면서 물었다.

“자수할 때 쓰는 건데 터진 옷은 궁녀들에게 주면 꿰매 줄 거예요.”

범한이 웃으며 말했다.

“내가 하고 싶어서 그래. 이 일은 다른 사람에게 말하지 말고 바늘 세 개만 줘.”

범약약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혼인날이 다가오자 백작가는 일찌감치 준비를 시작했다. 범한과 임완아의 혼인은 특별했기에 규정을 다시 세워야 했다. 어쨌든 임완아의 군주 신분은 황궁 안에서만 통용되는 것이었다. 그렇기에 다른 군주들처럼 황실에서 공개적으로 나설 수도 없었다.

두 사람이 신혼을 보낼 저택은 백작가 가까이에 있었다. 이전부터 비어 있던 정원으로 범건이 연초부터 공사를 시작한 터라 지금은 웅장하고 화려한 저택이 지어져 있었다. 이곳 후원에 달린 문은 백작가로 바로 통할 수 있게 되어 있었고 정문은 다른 대로와 연결되어 있었다.

저택 안에 나무와 가짜 산도 이미 완성된 상태였다. 거대한 저택이 너무 조용하고 황량해서 아무도 이곳에 오래 머무르고 싶어 하지 않았다.

검은 그림자가 비치더니 범한이 조용히 정원에 떨어졌다. 그의 오른손에는 두부 한 모가 들려 있었고 왼손 손가락은 바늘 세 개를 쥐고 있었다. 구석진 곳을 찾아간 그는 두부 조각을 조심히 버드나무 가지에 올려놓았다. 그가 만든 두부는 상당히 부드러웠기에 놓자마자 흔들거리며 금방이라도 부서질 것 같았다.

범한은 눈을 감고 천천히 단전 안 난폭한 정기를 상승시켜 머리끝까지 이르게 한 뒤 다시 허리 뒤 설산에 흡수시켰다. 이렇게 하나는 크고 하나는 작은 두 개의 정기 통로가 만들어지자 몸과 마음이 평온한 상태에 들어갔다.

바람 소리가 들리자 범한은 발끝에 힘을 주고 앞으로 몸을 숙이더니 순식간에 튕기듯 제자리로 돌아왔다. 영리한 물고기가 아둔한 어부의 낚싯바늘을 놀리는 것 같았다.

잠시 뒤 그가 뒷짐을 지고 천천히 앞으로 걸어가 눈을 찌푸리며 버드나무 가지에 있는 두부를 바라봤다. 두부 위에 꽂힌 세 개의 바늘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범한은 만족한 표정으로 바늘을 거둬들였다. 그는 외양간 거리에서 자객을 만난 뒤 자신에게 적합한 무기를 찾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오죽의 무기는 막대기였는데 나무든 쇠든 오죽의 손에 있으면 사람의 목숨을 뺏을 수 있는 강력한 무기가 되었다. 범한은 손에 익은 무기가 많을수록 자신의 목숨을 지키기 쉽다는 걸 알고 있었다.

사실 그는 늘 가지고 다니는 가늘고 긴 비수를 좋아했다. 비개가 그에게 준 비수는 담주와 외양간 거리에서 두 번이나 자신의 목숨을 구해 주었지만 황궁과 같은 장소에는 들고 갈 수가 없었다.

그는 열쇠가 황궁에 있는 이상 이전 세계 소설에 등장하는 협객들처럼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어제 오죽의 등장은 그가 잃어버렸던 열정을 다시 찾게 해주었다. 세 개의 바늘을 손에 들고 햇빛에 비춰 보면서 그는 속으로 어떤 독약을 발라야 할지 생각했다.

* * *

한 치 앞도 볼 수 없는 깊은 밤에 범한은 임완아의 규방을 찾아갔다. 피서를 갔다 온 뒤로 오랜 시간 만나지 못했기 때문에 임완아는 반가움을 숨기지 못했다. 사랑을 나눈 뒤 범한은 무심하게 황궁 안의 일들을 물었다.

임완아는 황궁에서 자랐기 때문에 자세히 알고 있었다. 그녀는 범한이 입궁할 때를 대비해 묻는 것이라 생각하며 아무런 의심 없이 말했다.

“궁 안에 있는 황후마마나 후궁분들 모두 저한테 잘해 주세요. 게다가 폐하께서 여자를 별로 좋아하시지 않기 때문에 몇 년 전에 죽은 북제 황제처럼 후궁들이 많지도 않아요. 황후 외에 1 황자의 생모인 영 재인과 2 황자의 생모인 숙 귀비, 그리고 3 황자의 생모인 의 귀빈이 있어요. 이 밖에도 몇 명의 후궁이 더 있는데 굳이 인사할 필요는 없을 거예요.”

범한은 속으로 후궁들은 임완아의 생모이자 황태후의 사랑을 받으며 황실의 금고 돈을 관리하는 장 공주에게 미움을 받길 원치 않을 테니 당연히 잘해 줬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는 침대 위에서 임완아를 편안히 안기 위해 뒤척거린 뒤 물었다.

“1 황자의 생모는 왜 재인이에요?”

임완아가 설명했다.

“영 재인은 폐하가 첫 번째 북벌 때 포로로 잡은 동이성 사람이에요. 당시 폐하가 다치셨는데 영 재인이 밤낮으로 보살 펴줘서 노비 문서에서 삭제한 뒤 궁에 들였다고 들었어요. 어쨌든 경국 사람은 아니니까 폐하를 구하고 장자를 낳았어도 황태후의 환심을 얻을 수 없었고, 황후가 될 수도 없었던 거죠. 게다가 원래는 귀비였는데 10년 전에 궁에서 터진 어떤 사건 때문에 폐하께서 격노하시어 재인으로 강등시켰다고 들었어요.”

범한은 속으로 궁 안의 권력 투쟁이 상상했던 것만큼 복잡하다고 생각했다. 임완아가 한숨을 쉬더니 다시 말했다.

“다행히 1 황자가 서쪽 전투에서 공을 세워 영 재인이 궁 안에서 자리를 보존할 수 있었죠. 최근 2년간은 자주 찾아가지 못했지만 예전에는 영 재인의 처소에 찾아가 자주 놀았어요.”

범한이 다시 황궁에 알려지지 않은 비밀이 있는지 묻자 임완아는 모두 말해 주었다. 분위기를 살피던 범한이 심드렁한 목소리로 물었다.

“듣자 하니 내관의 우두머리인 홍 태감의 권력이 상당하다고 하던데요?”

“맞아요.”

오늘 밤 임완아는 새끼 고양이처럼 그의 품에 안겨서 졸린 눈으로 말했다.

“홍 태감은 개국 초기 황궁에서 일하던 하급 관리였는데, 선제께서 재위에 계실 때 신임을 받아 지금은 5품인 태감 수령 직위에 있어요. 하지만 나이가 많아서 직접 관리하지는 않고 보통 황태후마마 거처에 머무르고 있죠.”

“황태후마마 거처에요?”

임완아의 말에 범한은 순간 이전 세계 역사에서 있었던 어둡고 음침한 사건들이 떠올랐다.

“왜요?”

임완아가 궁금한 듯 큰 눈을 끔뻑이며 물었다. 그러자 범한은 그녀의 차가운 코끝을 쓰다듬었다.

“아니에요. 그냥 앞으로 황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려면 홍 태감에게 잘 보여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그럴 필요 없어요. 홍 태감은 황궁 안에서 지낼 뿐이지 일에는 관여하지 않거든요.”

범한은 품 안에 있는 임완아에게 자신의 계획을 말할 수 없었기에 은은히 웃으며 다른 질문을 했다.

“궁은 구경시켜 줄 거예요?”

임완아가 쑥스러워하며 말했다.

“아마 며칠 뒤에 황실에서 부를 거예요. 왜 그렇게 급해요?”

“이렇게 아름다운 정혼자를 두고 어떻게 급하지 않을 수 있겠어요?”

잠시 뒤 방 안이 조용해졌다. 범한은 자기 품에서 잠든 임완아를 보고는 한숨을 쉬며 모든 일이 잘 처리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 * *

다음 날 태상사에 얼굴을 비치러 가자 임 소경이 살금살금 다가와 그를 구석으로 데리고 갔다. 주변을 살피던 임 소경이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그 소식 들었는가?”

30∼40대 정도 된 임 소경의 얼굴에는 과거 준수한 외모가 아직 남아 있었다. 범한이 천연덕스럽게 모른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무슨 소식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임 소경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홍려사에서 오늘 새벽에 공문을 보내 자네를 그쪽으로 보내 달라고 요청했네.”

홍려사는 경국에서 외국 손님 접대와 각 나라 사이의 일을 전문적으로 처리하는 기관이다. 범한이 놀란 표정을 지으며 공손히 물었다.

“태상사에 온 지 열흘 정도밖에 되지 않은 저를 왜 부르는 겁니까?”

임 소경이 미간을 찌푸렸다.

“사남 백작께서 동궁과 무슨 관계를 맺으신 게 아니겠나?”

그러자 범한이 고개를 저었다.

“대인께서도 저희 아버님이 황실 사람이나 대신들과 잘 교제하지 않으신다는 걸 아시지 않습니까.”

“그건 그렇지.”

임 소경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범건은 다른 사람과 의견을 교류하지 않기로 유명했다. 황제 폐하와 어린 시절부터 같이 자란 특별한 관계였기에 사남 백작은 재상의 눈치도 보지 않았고 황자들에게도 공평하게 대우했다. 잠시 고민하던 임 대인이 말했다.

“아마도 동궁에서 자네가 이번 협상에 참여할 수 있도록 건의한 것 같네.”

적당한 대답이 떠오르지 않자 범한은 계속 놀란 척하며 말했다.

“무슨 협상 말입니까?”

“북제 사신단은 영토와 포로 교환에 대해 협상하려 할 테고, 동이성 사신단은 창산 부근에서 발생한 재상의 둘째 아들 암살 사건을 마무리 싶어 하네. 듣자 하니 동이성에서는 이 일을 마무리하기 위해 상당히 많은 은과 미녀를 데리고 왔다더군.”

임 소경의 본명은 임소안이었다. 그는 재상의 제자였기 때문에 이미 범한을 자신의 편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장병들이 사력을 다해 북위의 영토를 점령했으니 이번 협상은 잘 처리해도 본전인 셈이네. 하지만 만약 협상이 잘되지 않아 황제 폐하께서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한다면 홍려사 입장이 상당히 난처해질 수밖에 없겠지. 더구나 동이성은 재상의 둘째 아들의 죽음과 연관되어 있지 않은가. 재상 대인께서는 이번 협상에서 자네가 우유부단하게 행동하지 않길 바라시네. 하지만 동이성 사신이 경국에 왔다는 것은 폐하께서 암살 사건을 더는 추궁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의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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