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화 황태자의 등장
범한은 어쩔 수 없이 방에 들어가 종이와 벼루, 먹을 챙겼다. 범약약이 약속이나 한 듯 책상에 앉아 붓을 뽑아 들었다. 순간 누이의 시중을 들게 되자 범한은 멋쩍은 웃음을 지었고, 뒤따라 들어오던 세 여자도 웃음을 참지 못했다.
“누이가 서예를 잘해서.”
범한이 난처한 표정으로 해명을 했다. 비록 그도 담주에 있을 때 서예 연습을 부지런히 했지만 범약약만큼 잘 쓰지는 못했다.
잠시 뒤 범약약은 하얀 비단 위에 해서체로 범한이 부르는 가사를 적기 시작했다. 가사를 듣던 상문의 눈이 반짝였다. 완성된 가사를 받아 읽던 그녀가 기뻐하면서 범한에게 공손히 절을 했다.
“범 공자에게 이처럼 큰 은혜를 받으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임완아와 범약약도 범한이 쓴 가사를 읽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만약 상문이 좋은 가락을 만들어 부른다면 경도에서 오래도록 사랑받는 노래가 될 것이 분명했다.
범한이 오늘 베낀 것은 명나라 극작가 탕현조의 가사였다.
‘좋은 시절 아름다운 경치는 어느 하늘에 있고, 즐거운 마음은 어느 집 정원에 있을까. 떠오른 해가 저무니 노을이 푸른 기와를 비추는구나. 부슬비에 자욱한 안개가 사방에 끼어 봄 경치를 보지 못한 아리따운 여인이 슬퍼하네.’
범한은 가사를 음미하는 여자들을 보면서 속으로 《모란정》 전편을 베껴야겠다고 생각했다. 사실 요새 책방을 운영하는 데 정신이 없어서 문화를 전수하는 일에는 소홀했던 게 사실이었다.
“슬픔이 묻어나는 작품이네요.”
한동안 침묵하고 있던 섭령아가 비로소 작품에 담긴 의미를 이해한 듯 서글픈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자 범약약의 안색이 순간 바뀌면서 여기 가사 중 ‘좋은 시절 아름다운 경치는 어느 하늘에 있고’라는 구절이 이미 《석두기》에 있는 걸 떠올렸다.
‘만일 상문이 이 가사로 노래를 부른다면 《석두기》를 오빠가 썼다는 걸 사람들이 알지 않을까.’
범약약은 은근슬쩍 범한을 바라봤다. 득의양양한 표정으로 웃고 있는 것이 아무래도 눈치채지 못한 표정이었다. 그녀는 항상 자신의 오라버니가 더 유명해지길 바라고 있었기에 그 모습을 보고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다물었다.
모두가 원하는 것을 손에 얻었다. 임완아는 ‘잔재주’를 조금이나마 배웠고, 상문은 범한의 가사를 얻었으며, 범사철은 배가 터지도록 실컷 고기를 먹었다. 또 대보는 오랜만에 말을 실컷 탈 수 있었고, 범약약은 아름다운 풍경을 감상하며 기분을 전환할 수 있었으며, 임완아는 친오빠를 만날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많은 것을 얻은 사람은 범한이었다.
이렇게 피서가 끝났다면 모두가 웃을 수 있었을 것이었다. 하지만 범한은 왕계년이 보낸 보고를 받고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가 예상하지 못했던 방향으로 상황이 흘러가기 시작했다.
‘황태자가 이곳으로 오고 있다고?!’
“당장 돌아가자!”
황태자가 오늘 피서 장원에 온다는 소식을 들은 범한은 왕계년에게 당장 경도에 돌아갈 준비를 하라고 말했다. 황태자가 오는 이상 더는 이곳에 머무를 수 없었다. 백작가가 2 황자 편에 섰다는 소문이 난 데다가 재상도 동궁과 관계를 끊은 상황이었다. 더구나 범한의 뒤를 지키는 것은 황태자가 적대시하는 세력이었다. 만약 이곳에서 만났다가 모두의 앞에서 황태자가 자신에게 모욕을 줘도 자신은 피할 방법이 없었다.
황제 폐하가 유정강 찻집에서 말했듯이 범한은 경도에서 편안하게 지내야 했지만, 황태자는 그걸 바라지 않을 터. 범한은 자신으로 인해 황제와 황태자 사이가 갈리는 걸 원치 않았다. 황제가 별 볼 일 없는 대신의 아들을 위해서 자기 아들을 탓할 리는 없었기 때문이다.
범한이 돌아가겠다고 말하자 모든 일이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그는 황태자와 마주칠 기회 자체를 차단한 생각이었다. 그래서 황태자에게 자신을 모욕하고 갈등을 조장해 역모죄를 뒤집어씌울 기회를 주지 않을 생각이었다.
정신없이 짐을 싸면서도 범한은 마음이 좋지 않았다. 한편 황태자와 친척인 임완아는 흉악한 사람을 만나는 것처럼 겁을 내며 떠나려 하는 범한의 모습이 불쾌했다. 또 어렸을 때부터 황태자와 놀았던 섭령아도 범한이 지나치게 예민하게 행동한다고 생각했다. 황태자는 황제의 명에 따라 어렸을 때부터 섭중가에서 무공을 훈련했기 때문에 섭령아와도 친분이 두터웠다.
하지만 범한은 8품 협률랑에 봉해졌지만 어디까지나 사남 백작의 서자였다. 그러니 어려서부터 황궁을 자기 집 드나들 듯이 하며 황실 사람들을 만난 두 여자와는 다를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그는 이 일이 가져올 파장도 생각해야 했기에 가볍게 받아들일 수 없었다.
범한이 서두른 까닭에 황태자의 행렬이 피서 장원에 도착할 때쯤 범한의 행렬은 이미 대로를 달리고 있었다. 대로에서 만난 양측이 스칠 듯 서로를 지나쳤다.
바로 이때 징과 북 소리가 울리더니 황태자의 행렬이 멈춰 섰다. 그러고는 황궁의 시위가 범한 일행에게 멈추라는 신호를 보냈다. 범한은 무표정한 얼굴로 마차 가림막을 젖혀 황금빛 마차를 바라봤다. 훗날 천하의 권력을 거머쥘 열여덟 살의 젊은 남자가 무기력한 모습으로 뒤에 있는 마차에 뭐라고 말하고 있었다.
황태자 이승건의 외모는 이목구비가 뚜렷해서 수려했다. 하지만 얼굴색이 창백하고 입가가 거뭇거뭇한 것이 안색이 좋지 않았다. 더위를 피하고자 피서 장원을 찾은 그는 같이 놀면서 자란 임완아와 섭령아의 마차가 보이자 잠시 멈춰서 인사라도 나눌 생각이었다.
피서 장원에서 하룻밤을 자고 돌아간다는 임완아의 말을 들은 이승건이 안타까워하며 말했다.
“몸도 좋지 않으면서. 어의가 찬 바람 쐬면 안 된다고 말했으니 조심해야지.”
섭령아가 옆에서 웃다가 끼어들었다.
“명의가 돌봐 주고 있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임완아가 미간을 찌푸리며 섭령아에게 눈치를 주고는 웃으며 해명했다.
“여름이 돼서 괜찮아요.”
하지만 임완아의 해명이 무색하게 이승건이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섭령아를 바라봤다. 그녀에게 마차에 임완아의 남편이 될 범한이 타고 있다는 말을 들은 이승건은 반가워하며 말했다.
“그 백작가의 검은 주먹 말이야? 최근에 가장 유명해진 사람인데 나도 만나 봐야겠어.”
“놀라게 하지 마시고 다음에 기회가 되면 보시죠.”
임완아가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황태자가 인상을 구겼다.
“나중에 너희가 혼인하면 한 가족이 되는 셈인데 무서울 게 뭐가 있다고 그러지? 게다가 언젠가는 황제께서 그를 궁으로 불러 모두에게 인사시키실 텐데 그때도 무섭다며 피할 건가? 조정의 직무를 맡은 사람이 이렇게 숨어서 되겠어?”
황태자의 목소리가 갈수록 높아지자 순간 주변의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소신, 황태자 저하를 뵙니다.”
침묵을 깨고 마차에서 내린 범한이 미소 지으며 절을 했다.
황태자는 범한이 들은 대로 성격이 유약하고 몸도 허약해 보였다. 예의를 갖춰 공손히 인사하던 그는 황태자의 허락도 받지 않고 고개를 들어 상대를 바라봤다. 비록 상대방의 신분이 존귀했지만 범한은 이미 황제 폐하와 차를 마시며 대화를 나눈 경험이 있었기에 그가 두렵지 않았다.
황태자가 흥미진진한 눈으로 범한을 바라봤다. 그는 몇 개월 사이에 경도에서 유명 인사가 된 범한에게 관심이 있었고, 자신의 부친이 그의 혼인을 결정한 이유도 명확하게 알고 있었다.
만약 장 공주가 황실의 금고 관리권을 잃고 후임자가 적이 된다면 지난날 문제점이 만천하에 드러날 수 있었다. 이건 황태자가 최근에 가장 걱정하는 부분이었다. 다행히도 황실의 금고 일을 인수하려면 앞으로 2년은 족히 필요할 테니 급한 일은 아니었지만, 백작가는 정왕부와 친했고, 정왕 세자 이홍성은…… 2 황자와 막역한 사이였다.
황태자는 머리가 복잡해 마차에서 내린 아름다운 청년 앞에서 뭐라 말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동궁의 참모들은 백작가의 세력을 저지해야 한다는 쪽과 황태자의 편으로 끌어들여야 한다는 쪽으로 의견이 양분되어 있었다. 만일 평범한 가문이었다면 황태자도 신경 쓰지 않았겠지만 백작가는 다른 가문과 달랐다. 눈앞에 서 있는 청년의 할머니는 황제의 유모였기에 황태자도 함부로 백작가를 건들 수는 없었다.
“자네가…… 범한인가?”
멍하니 있던 황태자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소신 범한, 황태자 저하를 뵙습니다. 제가 황실의 마차를 미처 알아보지 못해 일찍 내리지 못한 점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
범한이 공손하게 예를 취하며 다시 인사했다.
“그래.”
범한의 맑은 얼굴을 보니 황태자는 나쁜 감정들이 일순간에 사라졌다.
“이해하네. 내 누이가 몸이 안 좋으니 자네가 신경을 써줬으면 좋겠네. 그리고 경도의 일반 자제들처럼 자네도 풍류를 즐기며 즐겁게 놀길 바라네.”
“소신, 황송하옵니다.”
황태자의 말을 들은 범한은 속으로 안심하며 공손히 대답했다.
“너무 몸을 사릴 필요는 없네. 10월에 혼인하면 자네도 황실 사람이 되는 거 아닌가. 종종 궁에 들어와서 편안히 즐기다 가도록 하게.”
범한이 옅은 미소를 지으며 그러겠다고 말하자 황태자는 그를 가만히 바라봤다.
“곧 동이성과 북제의 사절단이 경도에 도착할 거야. 외양간 거리 사건에 자네도 연관되어 있어 조정에서 자네를 부사로 임명하기로 했네. 그러니 그때가 돼서 당황하지 말고 미리 준비해 두도록 하게.”
담담하게 말하는 황태자의 목소리에 범한에 대한 호감이 묻어났다. 그 말을 들은 범한은 당황해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이미 태상사 협률랑이 된 소신이 국사에 참여하는 건 맞지 않은 것 같습니다.”
황태자가 콧방귀를 뀌었다.
“공적을 올리지 않으면서 앞으로 나랏일은 어떻게 처리하려고 그러나?”
범한은 황태자의 말에 노기가 있는 것을 알아채고는 잽싸게 그러겠다고 대답한 뒤 감사 인사를 했다. 그러자 황태자가 만족한 표정으로 손을 내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다시 고개를 돌려 임완아를 바라봤다.
“고모께서 보고 싶어 하시니까 자주 궁에 들어오도록 하렴.”
그러고는 잠시 머뭇거리다 다시 말했다.
“고모께서 최근에 자주…… 두통에 시달리고 계셔.”
황태자의 목소리는 담담하고 표정도 온화했지만 범한은 그의 유약한 눈빛에 담긴 불안감을 발견했다.
임완아가 아무 말 없이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황태자 저하께서 마차에 오르셨다!”
지시가 들려오자 황태자의 행렬이 천천히 피서 장원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행렬이 사라지는 걸 끝까지 바라보던 범한이 가볍게 한숨을 쉰 뒤 굳어 있던 허리를 폈다. 그가 씁쓸한 표정으로 웃었다.
“신하로서 행동하는 건 정말 힘들어.”
“군주를 섬길 충심도 없는 거예요?”
섭령아가 말꼬리를 물며 비꼬았다.
“령아, 허튼소리 하지 마!”
범사철이 범약약을 무서워하듯이 섭령아는 임완아를 무서워했다. 임완아가 버럭 화를 내자 섭령아는 도망치듯 마차 안으로 들어갔다.
임완아는 범한 옆으로 걸어갔다. 여전히 마차가 사라진 방향을 바라보고 있는 범한을 보며 그녀가 말했다.
“뭘 걱정하는지 알고 있어요. 오라버니들 사이가 좋지 않으시니 우리는 어느 쪽에도 서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범한은 궁에서 자란 임완아가 정치 식견이 높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더니 무언가 생각이 난 듯 그녀를 바라봤다.
“가장 나이가 어린 황자는 몇 살이에요?”
“문운은 이제 여덟 살밖에 되지 않아서 이런 일은 알지 못해요.”
임완아가 대답하고는 범한을 위로했다.
“태상사는 부마에게 주는 유명무실한 관직이잖아요. 아마도 일과 관련되어 있으니까 예의상 협상에 참여하게 해준 걸 거예요.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그 말에 범한은 속으로 황태자가 무슨 속셈으로 자신을 끌어들이든 이미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자신의 진심을 임완아에게 말할 수 없었기에 거짓 한숨을 쉬었다.
“황태자 저하를 보니 너무 긴장되더라고요.”
이전 세계에서 범한이 만난 가장 높은 사람은 기껏해야 학교 교장 정도였다. 그런데도 그는 귀족 가문에 태어나 높은 사람들을 만나면서도 이상하게 긴장되지 않았다. 며칠 전 황제 폐하를 만났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임완아가 웃더니 그의 소매를 잡아끌었다.
“황태자 저하가 한 말 못 들었어요? 혼인 전에 입궁해서 황실 사람들을 만나라고 했잖아요. 그럼 어른들도 좋아하실 거고 넓은 황궁을 거닐다 보면 익숙해질 거예요.”
“어르신들이요?”
범한은 임완아가 말한 사람이 황후와 후궁들이라는 걸 알고는 몸서리쳤다.
“이제 가자. 황태자께서 떠나신 지 오래되었는데 언제까지 말의 엉덩이만 보고 있을 거예요?”
참다못한 범사철이 머리를 빼꼼 내밀고 소리쳤다. 중간 마차에 타고 있던 대보가 범사철의 말을 듣고는 큰 소리로 웃기 시작했다.
범한도 웃으며 고민을 훌훌 털어 버리고는 마차에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