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6화 검은 주먹의 영광스러운 전설
그 소리에 별궁 입구가 조용해졌다. 경국은 태평성대를 구가하고 있고 북쪽 변방에서는 여전히 작은 전투가 계속되고 있었지만 이미 개국한 지 수십 년이 지났기 때문에 무예를 숭상하는 기질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섭령아는 장수 집안의 외동딸이기에 허리춤에 작은 칼을 차고 있는 것이 전혀 이상하지 않았다. 다만 이 칼을 범한 앞에 떨어트린 것이 문제였다.
눈썹을 치켜세운 범한은 그녀가 결투를 신청한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원래 범한이 살던 세상과 마찬가지로 유럽 귀족들은 결투를 신청할 때 상대방의 얼굴에 장갑을 던졌다고 한다. 범한은 오른쪽 얼굴이 간지러워 긁적거렸다. 경국에서 결투를 신청할 때 상대방의 얼굴에 칼을 던지면 어떨까 생각하니 조금 우스웠다.
모든 사람이 범한을 바라보고 있었고 바짝 긴장한 범약약도 범한의 소매를 끌어당겼다. 섭령아는 연약한 여인의 모습이었지만 집안 대대로 내려오는 장수의 기질을 무시할 수 없었다. 하지만 상대방인 범한도 이미 도전장을 받은 이상 사내대장부로서 싸우지 않을 수 없었다. 다만 결과에 따라 경도에서 고개를 들고 다니지 못할 수도 있었다.
두 사람 사이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아지자 문 앞을 지키던 호위병들은 봐도 못 본 척, 들어도 못 들은 척할 뿐 별저에 있는 아가씨에게 알리지 않았다.
‘아가씨의 가장 친한 친구분께서 미래 부군이 되실 분에게 결투를 신청했습니다.’
누가 감이 이런 어리석은 짓을 할 엄두를 내겠는가.
"범 공자께서 친히 문무에 뛰어나다고 하셨는데, 제가 시를 짓는 실력이 형편없어서 어쩌죠. 그렇다면 과연 범 공자께서 완아를 보호할 능력을 가지고 있는지 실력 한번 볼까요?"
이렇게 말하면 이상하긴 하지만, 섭령아가 허리춤에 꽂은 칼을 땅으로 내던진 후부터 그녀에게 아주 이상한 변화가 생겼다. 순간 차분해진 그녀의 눈동자에 자신감이 가득했다. 연약한 여인의 체구에서 생각지도 못한 아주 큰 힘이 뿜어져 나와 범한에게까지 미쳤다.
그 순간 범한은 그녀가 공공연하게 드러나진 않았지만 강한 내공을 가진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는 얼굴에 엷은 미소를 띠고는 손을 내저으며 사람들이 생각지도 못한 말을 내뱉었다.
"거절하지요."
결투를 거절하는 일은 보기 드문 광경이다. 게다가 여인에게 받은 결투였기에 어쩌면 범한은 한동안 제대로 고개를 들고 다니지 못할 수도 있다. 사람들은 범한이 왜 이런 예상치 못한 선택을 했는지 알 수 없었다.
범한은 진심으로 설명했다.
"저도 웃음거리가 되는 걸 원치 않습니다. 하지만 제가 완아의 친한 친구와 어떻게 싸울 수 있겠습니까?"
사람들이 야유를 퍼붓기 전에 그가 웃으면서 말했다.
"더군다나 전 피치 못할 사정을 제외하고는 여인을 해하지 않습니다."
마차는 진작 도착했지만 이곳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은 것을 눈치채고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왕계년도 범한이 섭령아와 대치 중인 것을 보았지만 감찰원 신분을 내세워 상대를 압박할 수 없는 노릇이라 발만 동동 구를 뿐이었다.
말을 마친 범한은 다시 범약약의 손을 잡고는 시위라도 하듯 마차로 향했다.
분노 가득한 고함 소리가 하늘을 찔렀다. 마침내 섭령아는 거침없이 계속되는 범한의 가시 돋친 말을 견디지 못하고 그 순간 폭발하고 말았다. 깜짝 놀란 사람들은 모두 범한의 뒤로 몸을 숨겼다. 그때 주먹 한 방이 날아왔다. 다행히도 그녀에게 무도의 유풍이 남아 있어서 몸을 움직이기 전에 소리로 그 움직임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몸 뒤에서 거친 바람 소리가 느껴지자 범한은 오른손에 힘을 주어 누이를 옆으로 돌린 후 바로 몸을 돌렸다.
그러자 바로 범한의 얼굴을 향해 주먹이 날아왔다. 아주 작고 귀여운 데다 너무 하얘서 푸르스름한 정맥이 희미하게 보일 정도였다. 주먹을 쥐자 밖으로 튀어나온 엄지손가락에 분홍색 매니큐어가 칠해져 있었다.
이렇게 짧은 시간 안에 세세한 상황까지 살피는 걸 보면 범한은 정말 뼛속까지 정이 많고 욕망이 넘치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섭령아의 주먹이 빠르고 강하긴 하지만 담주 절벽에 나타난다는 신출귀몰한 누구보다 훨씬 느린 게 분명했다.
그는 땅에서 발끝을 한 치만큼 옮기고 몸 전체를 기이하게 왼쪽으로 비켜섰다. 그러자 살의에 가득 찬 주먹이 허공을 가르며 그의 뺨을 스쳐 지나갔다.
웅, 하는 소리와 함께 주먹이 허공을 가르자 또 한 번 바람 소리가 들리면서 범한의 머리카락이 흩날렸다. 그리고 이때 그는 오른손을 감쪽같이 들어서 집게손가락을 약간 구부려서 번개 같은 속도로 섭령아의 맥문 위에 튕겼다.
이 수법은 대내시위 통솔자인 궁전도 차마 피하지 못했던 것이니 섭령아가 버틸 리 만무했다. 역시나 그녀의 신음 소리와 함께 꽉 쥐고 있던 주먹에도 힘이 풀렸다. 하지만 범한은 방심하지 않고 눈을 거슴츠레하게 뜨고 뒤로 세 걸음 물러나 손바닥을 내밀어 공중에 세 번 내리쳤다.
팍! 팍! 팍! 소리가 그의 귓가에 울려 퍼졌다.
섭령아는 주먹을 거두면서 다섯 손가락을 봄날의 복숭아 나뭇가지처럼 펼치더니 그대로 범한의 관자놀이 쪽을 향했다. 하지만 범한은 본능적으로 몸을 숨기며 무섭게 돌진하는 그녀의 공격을 막아 냈다.
"섭령아, 그만두지 못해!"
구경하던 사람들이 화들짝 놀라 소리가 나는 곳을 주목했다. 경국의 대종사인 섭류운, 바로 섭령아의 작은할아버지가 서 있었다. 이 여인이 정말 섭류운에게 무술을 전수받은 거라니 실로 믿기지 않았다.
놀라움이 진정되기 전에 범한은 담담한 얼굴로 앞으로 나가더니 주먹으로 섭령아의 손바닥을 제대로 쳤다.
퍽 하는 소리와 함께 섭령아의 복숭아나무 가지 같은 손가락이 하나하나 흩어졌다. 범한이 손에 모인 패도의 기가 인정사정없이 그녀의 손가락을 망가뜨려 놓았다. 뒤로 반 장쯤 밀려난 섭령아는 자신의 손목을 붙잡고 아파서 어쩔 줄 몰라 하며 범한을 노려봤다. 범한의 몸속에 이토록 신기한 힘을 지닌 정기가 흐르고 있을 줄 몰랐는데 대련을 해보고 나니 자신의 경락을 따라 흘러들어 와 말할 수 없는 고통을 안겨 주었다.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더 이상 싸우고 싶은 마음이 사라질 정도였다.
"당신은 내 상대가 되지 않습니다."
범한이 태연하여 웃으면서 또 한 번 그녀의 자존심을 건드렸다.
그러자 섭령아는 이를 악물고 다시 한번 범한을 향해 돌진해 왔다. 이전보다 훨씬 강하고 맹렬했다. 그녀는 다섯 손가락을 하나로 모아 칼처럼 만들어서 가로로 내리꽂았다. 손이 바람을 가르며 소리를 냈다. 비록 그녀는 여인이지만 선천적으로 타고난 정기는 여느 사내 못지않았다. 그래서 섭류운도 처음에는 마음이 쓰이긴 했지만 그녀의 정기를 넘어서는 고수를 만난 지금은 그녀도 만만치 않은 실력을 발휘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 두고 보고 있었다.
범한은 끝없이 쏟아지는 그녀의 공격에 크게 흔들리지 않았다. 그저 다리만 바삐 움직일 뿐, 담주 절벽에서 목숨 걸고 수련했던 기억을 떠올리며 끝을 보기로 작정한 섭령아의 장풍 공격을 모두 피해 냈다.
섭령아의 장풍은 갈수록 강해져 주변에서 구경하던 사람들조차 두려움에 떨 정도였다.
범한 또한 무수한 칼날이 자신의 곁을 날고 있는 것 같아 소름이 돋을 지경이었다. 끙, 하는 소리에 몸 안에 있던 패도의 기가 온몸에 흘렀다. 범한은 발꿈치를 땅에 대고 뒤로 밀려나지 않도록 허리에 온 힘을 집중하며 안간힘을 썼다. 모든 사람이 누구한테 뒤에서 맞기라도 한 것처럼 전부 앞으로 쓰러지고 난리가 났다.
장풍이 사라지자 범한도 사라졌다.
* * *
얼마 후, 구경하던 사람들은 놀라서 입을 다물지 못했다.
사라진 범한은 섭령아를 품에 안은 채 두 손으로 그녀의 겨드랑이를 꼭 누르고 그녀의 무시무시한 손을 자신의 어깨에 걸쳐 놓고 있었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범한은 섭령아의 손이 위력을 나타내기 전에 상대방을 껴안는 느낌으로 그녀의 급소를 잡아낸 것이다.
범한의 이 수법이 무례해 보일 수 있지만 실제로 엄청난 힘의 장풍 속에서 그녀에게 접근해 공격을 멈출 방법을 찾아야 했다. 그리고 이 방법은 순식간에 아주 작은 공간을 찾아내야 해서 그의 속도와 통찰력이 아니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아니면 지금쯤 이곳은 아수라장이 되어 버리고 말았을 것이다. 물론 이 방법 또한 오죽 아저씨에게 배운 것이었다.
섭령아는 범한이 귀신처럼 자신에게 쓰러져서 심지어 자신을 안고 있는 걸 알고는 인상을 찌푸렸다. 그녀도 상대방이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것을 똑똑히 보았다. 대체 어느 정도의 무술 실력을 가진 것인지 내심 놀랍고 혼란스러웠다.
그녀는 아무렇지 않게 범한의 정강이뼈를 밟았다. 제대로 디뎠다면 범한은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그녀 쪽으로 넘어갔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여기까지는 생각지 못했다.
바로 그때, 범한의 손이 스르르 풀리자 그녀의 손도 자연스럽게 아래로 떨어졌다.
범한은 상대방이 잠시나마 불편한 틈을 노렸다. 그 짧은 순간을 이용해 그는 가차 없이 주먹을 날렸다.
외양간 거리 살인 사건을 제외하고 범한이 경도에서 날린 세 번째 주먹이었다. 그의 주먹에 상대방의 코가 나가곤 했는데 이번에도 예외는 아니었다.
퍽, 하는 소리와 함께 한 줄기 아름다운 선홍빛 꽃잎이 휘날리는데 어딘지 모르게 로맨틱했다.
* * *
섭령아가 코를 막고 웅크리고 앉았다. 그녀의 손가락 사이로 피가 뚝뚝 떨어졌다. 결국 그녀는 큰 소리로 울기 시작했다. 범한은 몹시 답답했다.
‘자기가 먼저 싸우자고 해서 응한 것뿐인데 졌다고 울어 버리면 나더러 어쩌란 말이지?’
섭중가의 여종들이 그녀를 둘러싸긴 했지만 한꺼번에 우르르 몰려들진 않았다. 누군가와 싸움을 벌인 게 오늘이 처음은 아니었지만 여전히 범한을 노려보는 눈들이 많았다. 범한은 아무렇지 않은 듯 멋지게 긴 소매를 털어 냈다. 이 광경을 멀리서 지켜보고 있던 황궁 시위는 깊은 탄식을 감추지 못했다.
"섭씨 아가씨댁에서 내려오는 무예도 만만치 않은데 아가씨가 범한에게 당할 줄이야."
범한은 웅크리고 앉아 울고 있는 섭령아를 보고 있다가 그제야 그녀가 겨우 열다섯 살의 소녀란 걸 깨달았다. 그렇다고 양심의 가책을 느끼진 않았다. 여인을 때리지 않는다고 해서 여인한테 맞고 싶어 하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어머니가 처음 경도에 오셨을 때, 지금 울고 있는 이 여인의 아버지, 지금 경도의 수비를 맡고 있는 섭중 대인을 곤경에 빠트렸었고, 자신과 오죽 아저씨도 일찍이 섭류운과 한차례 대결을 벌여 몇 달간 꼼짝도 못 하게 한 적이 있었다.
지금 섭령아를 한 대 치고 나니 영광스러운 전설의 연장선에 있는 것 같았다.
범한은 성격상 대결이 끝나면 항상 바로 집으로 돌아갔지만 범약약이 이렇게 자신을 노려보고 있을 줄은 생각도 못 했다. 범약약은 범한의 행동이 지나치다고 생각했는지 손수건을 꺼내 섭령아의 코피를 닦아 주었다.
"섭령아는 코끝이 정말 예뻤는데 지금은 그저 콧물 흘리는 어린애 같잖아."
"섭중의 성도 섭이고 어머님 성도 섭이네. 설마 그때 이 이유로 서로 눈엣가시처럼 여긴 건가. 지금 나랑 섭령아처럼 말이야."
사실 범한은 침착한 사람이었는데 지금은 난처한 나머지 어딘가 불편한 듯 정신이 반쯤 나가 있었다. 차라리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자신의 감정을 숨기는 게 나을 것 같았다.
* * *
한참 뒤에 울고 있던 섭령아가 범약약의 위로 덕에 드디어 안정을 되찾았다. 그러곤 미움이 아닌 일종의 경외심 가득한 눈빛으로 범한을 쳐다보았다. 어쨌든 그녀는 섭씨 집안사람이기에 재주는 남보다 못해도 치사하게 굴진 않았다. 그녀는 예를 갖춰 패배를 인정했다.
상대방이 신사적으로 나오자 범한도 계면쩍은 듯 헛기침을 하고는 바로 질문을 던졌다.
"방금 무슨 장법을 쓰신 건가요?"
"대벽관이요."
섭령아가 코를 킁킁거리며 살짝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내가 졌어요. 하지만 제 기량이 부족한 것이지 우리 집안의 무예와는 상관없어요."
범한은 그제야 섭령아에게서 귀여운 면을 발견했는지 흐뭇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대벽관이라, 이름이 멋지네요. 류운이 쓰는 장법의 축약본인 것 같던데 아가씨께서도 그 정도의 무예를 닦으셨다니 대단하십니다."
섭령아는 피가 흐르는 코를 꼭 막고 흥흥 소리를 내더니 범한에게 질문을 던졌다.
"그럼 범 공자가 쓴 건 어떤 무술인가요?"
섭씨 일가는 대대로 무예 집안이었기에 상대방이 지금껏 본 적도, 상상해 본 적도 없는 무술을 펼치니 궁금해 죽을 지경이었다. 경국 사람들은 무술을 좋아하긴 하나 지금까지 범한 같은 사람은 없었다. 그저 자신의 정기와 속도, 판단에만 의지하다니. 그뿐만 아니라 인간의 구조를 샅샅이 이해하고 있어서 상대방을 공격할 때 의외의 부위를 노리는 방법이 정말 대단하다고 느껴졌다. 섭령아는 본 적이 없어도 어쩌면 그녀의 집안사람 중 누군가는 본 적이 있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범한은 조금 전 쓴 검은 주먹이 무술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냥 익힌 잔재주들일 뿐입니다. 아가씨는 얼른 들어가셔서 상처를 치료하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소위 이 잔재주들은 오죽이 가르쳐 준 살인 기술과 비개가 가르쳐 준 식인술이었다. 거기에 외양간 사건 당시 처음으로 사용해 본 경험이 한데 섞여 일종의 기법이 되어 버린 것이었다. 범한은 이것을 잔재주라고 불렀는데 따지고 보면 정확하게 맞아떨어지는 이름이었다.
훗날 범한의 잔재주는 경도에서 유명해져서 무술을 익히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봐야 하는 필독서가 되었다. 물론 현재로선 감히 상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만약 그걸 알았다면 범한은 멋진 이름을 지었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은 잔재주가 대벽관을 이겼다.
‘무도 연구’는 주로 집안 내부에서만 진행되기 때문에 딱히 새로울 것이 없었다. 그래서 범한과 섭령아도 결코 이런 얘기를 따로 해본 적은 없었다. 패배를 인정한 섭령아는 자리를 떠나기 전 자신이 가지고 있던 칼을 범한에게 건넸다. 이는 무예를 겨룬 후 패배를 인정한다는 뜻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