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5화 평말에서 불어오는 바람
범한은 스스로를 음치라고 생각해서 추태를 부리지 않으려고 오전 내내 앉아서 차를 마시며 물배만 채우고 있었다. 주변을 둘러보니 동료들도 그저 손에 궁에서 나온 신문이 들려 있을 뿐 모두가 비슷한 상황이었다. 너무 배가 부른 그는 한숨을 내쉬고는 다른 사람들처럼 신문을 손에 들고 화장실로 들어갔다.
신문에 나온 주요 기사는 진평평이 경도로 돌아와서 황궁 편찬자들이 다시는 그의 연애사에 대한 글을 쓸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범한은 바지를 올리고 화장실에서 나오다가 무의식적으로 신문을 속옷 안쪽에 넣고 말았다. 담주에서 지낼 때 생긴 것으로 가지고 있던 은전을 숨기던 습관에서 나온 것이었다.
자리로 돌아가서 계속해서 차를 마시는데 방 안에서 킥킥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겼다, 이겼어! 하늘이 도왔어!"
조정과 북제 사이의 힘겨루기가 결국 조정의 승리로 막을 내린 것이다. 꼭두각시 같은 제후국 간에 작은 전쟁이 일어나고 나면 북쪽의 어떤 영토가 경국의 세력 안으로 들어오게 될 게 틀림없었다.
방 안의 관리들이 모두 모여들어 신문을 들여다봤다. 신문에는 북쪽에서 일어난 모든 일들이 정확하게 적혀 있었다. 황궁에서 나온 신문은 시기적인 면에서나 정보적인 면에서나 사람들에게 인기가 좋았다. 더군다나 경국이 승전고를 울렸으니 두말할 나위가 없었다. 범한은 어딘지 모르게 씁쓸해하며 욱여넣은 신문을 꺼내 속으로 문서각 대서법가 반령 어르신에게 미안한 마음을 전했다. 그러곤 다시 자리로 돌아가 차를 마시기 시작했다.
한편 전쟁 얘기에 한창 신이 난 옆 사람은 범한의 고요함을 눈치채지 못했다. 오히려 소경 대인이 그를 보고 미소를 짓더니 범한에게 밖으로 나오라고 했다. 영문을 모르는 범한은 초조해하며 밖으로 따라 나가 구석지고 조용한 곳에 다다랐다. 두 사람은 정원 깊숙한 곳까지 들어갔다. 그곳에는 돌로 만든 탁자 하나와 의자 두 개가 있었다. 소경 대인은 범한에게 앉으라고 권하고는 웃으며 물었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기뻐하는데 왜 혼자만 그리 조용히 있는지 물어봐도 되겠나?"
소경 대인의 성은 임(任), 이름은 소안이었다. 한때 걸출한 인물로 훗날 군주와 결혼하여 그 후로 태상사에서 편안하게 지내고 있었다. 범한이 처한 상항과 비슷했고 어찌 보면 앞으로 범한이 살아갈 모습일 수도 있었다. 범한은 임 대인이 무슨 일로 속이 상해서 이리 탄식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기에 함부로 말할 수 없어서 그저 웃으면서 말했다.
"조정이 이긴 일은 실로 당연해서 깜짝 놀라지 않은 것입니다."
"왜 그게 당연한 일인가?"
임 소경이 궁금한 듯 물었다. 범한은 국방이나 전쟁에 대해 이렇다 할 식견이 없었기에 그저 돌려 말할 수밖에 없었다.
"그야, 황제의 지혜가 뛰어나고 병사들의 충성심도 하늘을 찌르니 북제가 벌벌 떨 수밖에요."
임 소경은 웃는 얼굴로 범한을 바라보았다.
"아, 이제야 생각났네. 이번 전쟁은 따지고 보면 범한 대인과도 관련이 아예 없지는 않군."
범한도 멍해 있다가 문득 생각이 났다. 이번 경국이 병사를 파병해 제원조와 맞선 이유 중 하나는 북제의 자객이 경국의 경도에 잠입하여 대신의 자제를 해하려 한 것 때문이었다. 북강에서 죽어 갔을 사람들 대부분이 각 주의 규방에 있는 아녀자들이라고 생각하니 마음이 답답했다.
"전쟁은 참으로 흉악한 일인 줄 아나 성인이라도 어찌할 방법이 없다지 않습니까."
범한은 경국이 수십 년간 태평성대를 이룬다 해도 뼛속까지 스며들어 있는 상무정신은 결코 사그라지지 않으리란 걸 알고 있었기에 평소 어떤 일에든 조심스러웠다. 하지만 임 소경의 얼굴을 마주하고 있자니 그저 잡담일 거라는 생각에 입에서 나오는 대로 몇 마디 내뱉었다.
임 소경은 범한의 말이 마음에 들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긴 하지만 그렇게 얻은 땅이 적지 않으니 경국은 앞으로도 태평세계를 누리겠지. 그거면 된 거 아니겠소."
범한도 꽉 막힌 평화주의자는 아니었기에 그 사실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임 소경이 또 이야기했다.
"전쟁의 공은 모두 황제께 돌아가지만 조정에서도 전쟁을 위해 두어 달 동안 전심전력으로 준비를 하지."
범한은 임 소경의 말에 다른 뜻이 있음을 간파했다. 그 말은 조정의 문관들도 전쟁을 위해 애쓰고 있다는 의미였다. 범한은 두 번째 인생을 살면서 전쟁의 승패를 가리는 것은 결국 후방임을 알고 있었기에 진심을 담아 대답했다.
"조정의 대인 모두가 위대한 공적을 세우셨죠."
임 소경이 만족스러운 듯 웃었다.
"재상 대인과 자네가 앞으로 장인과 사위가 된다며? 언제 시간 있을 때 댁에 가서 안부라도 전하고 오게나. 그래야 사이가 좋아지지."
"당연하죠. 말씀 감사합니다."
범한의 등줄기에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이제 곧 완아와 혼인을 하는데 아직 장인 될 분을 뵙지 못했다는 건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그나저나······ 이것은 임씨 집안과 범씨 집안 간의 광명정대한 교류인데 어째서 임 소경이 직접 이런 말을 하는 것일까.
아니나 다를까, 임 소경이 작은 소리로 말했다.
"스승님께서는 자네 혼자 찾아오길 바라시네. 다른 사람을 놀라게 하고 싶지 않으신 거지."
범한은 왠지 모르게 두려운 생각이 들었다.
* * *
둘째 날 조정에서는 온통 아첨하는 말뿐이었다. 군사들은 적지 않은 보상을 받았으며 감찰원도 4처도 실력을 인정받고 황제에게 표창까지 받았다. 하지만 모두가 예상했던 것과 달리 호부 시랑인 사남 백작 범건은 앞에 나서서 이번 전쟁의 승리를 모두 재상의 덕으로 돌렸다. 그의 살뜰한 보살핌 덕에 후방으로 넉넉히 군량미를 지원받아 군사들이 큰 공을 세울 수 있었다는 얘기다. 다른 신하들은 원래 정적이었던 두 사람 사이가 어떻게 사이가 좋아졌는지 도통 감을 잡을 수 없었다. 하지만 이내 두 집안의 혼사를 떠올리고는 이 상황을 금세 이해했다.
그때 더욱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예부 상서 곽유지가 반대 의견을 내놓은 것이었다. 이보다 더 놀라운 건 진평평의 등장이었다. 그는 황제께 인사를 올리고는 바퀴 달린 의자에 앉은 채 딱 한마디만 내뱉었다.
"재상, 고생하셨습니다."
상황이 이렇게까지 되자 원래 오백안과 북제가 결탁한 일로 끊임없이 재상을 공격하던 사람들이 한순간 잠잠해졌다. 황제도 같은 의중을 내비치니 임약보는 다시 자리를 잡을 수 있게 되었다. 조정에서 들리는 소문에 따르면 재상은 백작가와의 혼인으로 이미 2 황자에게 기울어져 있었다. 원래 조정에서 이렇다 할 힘도, 존재감도 없는 2 황자였는데 갑자기 한순간 핵심 인물로 떠오른 것이다.
이 모든 사건의 배후에 태상사 임 소경과 태상사 8품 협률랑의 담장 밖 대화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은 아무도 알지 못했다.
장인 될 사람이 자신을 통해 크게 이득을 보았으니 범한도 내심 안정감이 생겼다. 물론 재상이 자신의 둘째 아들을 죽인 사람을 찾아낼까 두렵긴 했지만 이미 두 달도 지난 일이니 혼자서 잘 묻어 두기로 했다.
태상사의 업무는 매일 출근하지 않고 열흘에 한 번 정도 가서 출근 확인만 하면 됐다. 그날 오후 범한은 마차를 타고 별궁으로 향했다.
경도 사람이라면 그의 혼사에 대해 모두 알고 있는 데다가 백작가가 가진 재산도 어마어마했기 때문에 호위병들은 한순간도 주변 감시를 소홀히 하지 않았다. 범한과 범약약은 안으로 들어갔다. 범한이 정원에 핀 아름다운 꽃들에게도 눈길을 안 주고 곧장 돌길을 따라 작은 방 안으로 들어가자 범약약은 깜짝 놀랐다.
"오라버니, 여기 길을 아주 잘 아는 것 같은데."
범한이 살짝 웃어 보였다.
"내가 기억력이 좋잖아. 너도 뭐, 잘 아네."
그러면서 속으로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었다. 사실 범한은 열흘에 두세 날 정도 이곳에 와서 밤을 지새웠으니 모르는 척하는 게 더 힘든 일이었다.
그리고 애석하게도 예법에 따라 앞으로 부마가 될 범한은 별궁 안으로 들어가서 임완아를 만날 수 없었기 때문에 밖에 앉아서 차를 마시고 약약 혼자서만 안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범한은 전혀 아무렇지 않았다. 어차피 밤마다 와서 정혼자를 만나고 갔기 때문에 하나도 조급하지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두 사람이 밖으로 나왔다. 범약약 뒤에 따라 나오는 사람은 다름 아닌 경도 수비대장 섭중의 외동딸 섭령아였다. 시원시원한 눈매에 짙은 눈썹을 가진 그녀는 거칠어 보이기는커녕 오히려 밝아 보였다.
섭령아는 낯선 남자가 앉아 있는 것을 보고 조금 당황하긴 했지만 범한이 일어나 인사를 건네자 당황도 이내 사라졌다.
"아가씨, 오랜만에 뵙습니다."
인사를 건네긴 했지만 범한은 뭔가 부적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난번 섭령아를 만났을 때는 분장을 하고 있어서 의사 신분이었는데, 오늘은 이렇게 신분을 밝히고 인사를 나누고 나니 혹시라도 섭령아가 눈치를 채지 않을까 불안했다.
하지만 그의 예상과 달리 그녀는 공손하게 인사를 올렸다.
"소녀, 범 공자께 인사드립니다."
섭령아가 그의 신분을 알고 있고 그의 말에 놀라지 않는 것을 보니 임완아가 친한 친구인 섭령아에게 두 사람 사이의 일을 말한 모양이었다.
"아가씨 덕분에 완아가 병상에 있으면서도 지루해하지 않고 잘 지내는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섭령아가 차가운 말투로 대답했다.
"별말씀을 다 하시네요."
범한은 섭령아가 자신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 것을 알았지만 크게 개의치 않았다. 그는 잘생긴 얼굴로 세상 모든 여자들의 환심을 살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끝까지 예를 갖췄다. 그리고 범약약을 찾았다.
"물어본 일은 어떻게 됐어?"
"뭐가 그렇게 급해, 완아 언니가······."
갑자기 범한이 손사래를 치며 웃었다.
"집안 얘기는 집에 가서 하자."
그 말에 섭령아가 버럭하더니 속으로 궁시렁거렸다.
‘역시 범한이라는 작자는 옹색한 인간이군. 범씨와 임씨 집안의 일이니 나는 몰라도 된다는 말이야?’
그래도 분이 풀리지 않는지 그녀가 톡 쏘아대며 말했다.
"범 공자님, 말하고 행동하는 데 있어 다른 사람을 업신여기면 안 되는 걸로 아는데요."
순간 당황한 범한은 이게 대체 무슨 말인지 갸우뚱했다.
‘섭씨 집안의 아가씨는 무슨 성질이 이리도 고약한 거야.’
속에서 알 수 없는 짜증이 올라왔지만 범한은 상대하지 않고 누이의 손을 잡고 밖으로 나왔다.
별저 밖으로 나오자 섭령아와 어린 하녀들이 함께 따라 나와 범한이 범약약의 손을 잡아당기는 걸 보며 냉소를 지었다.
범한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범약약의 차가운 손을 잡은 채 마차가 오기를 기다렸다. 약약의 얼굴이 어딘지 모르게 어색했다. 사실 이 세상에서는 범한과 약약처럼 남매끼리 친한 경우가 드물었다. 범한도 평소 크게 신경 쓰고 있던 부분이 아니었기에 누이의 표정을 보고서야 상황이 이해가 됐다. 범한은 별일 아닌 일로 트집을 잡는 섭령아에게 화가 나서 고개를 돌려 그녀에게 인상을 잔뜩 쓴 채 물었다.
"아가씨, 귀댁에서는 가르침을 주는 어른이 안 계신가 보죠? 그러니 매일 경도와 담주를 오가며 떠돌아다시는 게 아닙니까."
섭령아는 자신의 의미 없는 냉소에 상대방이 저렇게까지 화를 내니 참으로 당혹스러워 더 화를 냈다.
"지금 저에게 교양이 없다고 말씀하시는 건가요?"
"누가 그렇답니까?"
범한이 부드럽게 말했다.
"그렇게 말한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것 같은데요."
뻔뻔한 범한의 태도에 섭령아는 더욱 화가 치밀어 올라 소리를 질렀다.
"그러는 범 공자도 이제 곧 혼인하실 분이 매일 경도를 돌아다니고 있지 않나요? 태상사에 가시는 걸 본 적도 없고, 설마 공자님 댁에도 가르침을 준 어른이 안 계신 건가요?"
범한도 살짝 짜증이 나긴 했지만 자신이 화를 내지 않아야 상대방이 더 화가 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아무렇지 않은 듯 더욱 부드럽게 말했다.
"저는 정혼자를 보러 온 것뿐입니다. 사랑과 도리를 다하러 온 거지요. 아가씨와 제 정혼자는 친한 친구라고 알고 있어서 문병을 와주시는 것에 대한 감사 표시도 이미 드린 것 같은데요. 다만 앞으로 자신의 언사에 대해 주의해 주시기 부탁드릴게요. 의도적으로 상대방의 관계를 해칠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범한이 이렇게 나오자 섭령아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대체 이런 사람이 어디가 좋다는 건지 완아의 속을 도무지 알 수가 없군요."
범한은 한숨을 내쉬었다.
"제가 어디가 어떻다는 거죠?"
섭령아가 미움에 가득 차서 대답했다.
"글을 잘 쓰는 것도 아니고 싸움을 잘하는 것도 아니잖아요? 뭘 내세울 수 있죠?"
범한이 어이가 없다는 듯 웃어 보였다.
"원래 저는 제 자랑 하는 걸 정말 싫어하지만 저는 경도에서 문무를 겸비한 사람으로 소문이 자자하답니다. 그저 조용히 지내고 싶었던 것뿐인데, 오늘 이렇게 깨우쳐 주셔서 감사할 따름입니다."
범한의 태도에 섭령아는 그제야 상대방의 재명(才名)이 떠올랐다. 대체 무슨 말을 하면 좋을지 고민하다 그녀는 갑자기 붉은 입술을 꼭 깨물었다. 그러고는 허리에 차고 있던 작은 칼에 손을 얹고 여러 번 궁리하던 끝에 칼을 뽑아 들더니 범한 앞으로 던졌다. 쟁, 하는 소리가 주변에 울려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