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4화 태상사 출근
‘범씨 집안 둘째 아들이 지금은 별 볼 일 없어 보여도 결국 백작가의 재산은 다 그의 손에 들어가게 되어 있는 데다가 남부럽지 않은 권력을 가진 집안의 자제가 굳이 여기까지 와서 장사를 배울 리가 없지 않은가. 설마 범 공자는 이 일을 계기로 동생 범사철이 작위 계승을 하지 못하게 하려고 하는 건가. 그렇다고 하기엔 이런 졸렬한 수법은 정말 터무니없지 않은가.’
섭 대행수의 생각이 이런 줄 모르는 범한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제 동생은 선천적으로 장사에 소질이 있는 것 같긴 한데, 지금까지는 취미로 해왔죠. 앞으로 이 일을 계속하기에는 한계에 부딪힐 게 뻔한 노릇이라 제가 이렇게 섭 대행수께 부탁을 드리려는 것입니다."
섭 대행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는 매사에 조심스러운 사람이었기에 이런 일에 끼어들 생각이 전혀 없었다.
"범 시랑은 천하의 돈과 식량을 관장하고 있는데 이보다 더 큰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여기 경여당 같은 곳에서 감히 범사철 도련님을 가르치다니요?"
범한은 약간 실망하긴 했지만 서두르지 않았다. 언젠가는 자신이 계획한 대로 진행될 테고 여기 있는 섭 대행수는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가만히 의자에 앉아 설산의 정기를 다스렸다. 사방으로 맥이 통하자 눈을 감고 조용히 읊조리기 시작했다. 엿듣는 소리가 들리지 않음을 확인하고 나서야 목소리를 낮추어 말했다.
"한 가지 일이 더 있습니다. 섭 대행수께서 들으시겠다면 말씀드리도록 하죠."
뜻을 알 수 없는 행동에 섭 대행수는 허탈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자신이 듣지 않는다고 해도 들을 수밖에 없다는 걸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범한이 입을 열었다.
"저는 태상사 협률랑입니다."
밑도 끝도 없는 말에 섭 대인은 어리둥절하긴 했지만 그래도 지금 눈앞에 있는 이 공자가 앞으로 어떤 자리에 오르게 될 줄 알았기에 공손히 경의를 표하며 축하의 말을 전했다. 그러자 범한이 말을 이었다.
"제 정혼자는 임씨 가문의 아가씨입니다."
그 정도는 섭 대행수도 알고 있었다. 비록 15년간 경도에 틀어박혀 있었지만 그 정도 소식을 접하는 건 큰일이 아니었다.
아니나 다를까, 이내 섭 대행수의 얼굴빛이 급변하더니 범한의 두 눈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차갑게 말했다.
"범 공자께서 하고 싶은 말씀이 무엇입니까?"
범한은 담담하게 대답했다.
"늦어도 2년 안에는 제가 국고를 관리하는 권한을 갖게 되겠죠. 하지만 저도 제 능력이 부족하다는 것쯤은 알고 있어요. 아버님께서 관리하는 호부의 재산이 결국 국가 재산이라는 것도요. 그래서 저에게 그리 큰 도움이 되지 못하죠. 게다가 저는······."
그는 섭 대인의 무표정한 두 눈을 바라보며 한 자, 한 자 또박또박 말했다.
"도움이 필요해요. 섭 대행수, 당신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순간 조용한 기운만이 두 사람을 에워싸고 있었다. 두 사람의 대화는 오랫동안 이어지지 않았다. 섭 대행수는 내심 놀랐다.
‘국고? 그곳을 직접 관리한다고? 아가씨가 남기고 가신 거라 그곳에 안 간 지 오래되었는데, 그런데 조정에서 어찌 나 같은 사람이 그 사업에 다시 손댈 수 있게 허락한 걸까?’
그가 무슨 생각을 할지 대충 짐작한 범한은 슬며시 웃었다.
"여러분을 경도에 불러모은 건 제 생각이에요. 지분을 가지고 장사를 하지 못할 뿐이지, 섭가의 사업을 다시 인수하는 것까지 안 되는 건 아니잖아요. 아무도 그런 말을 한 적도 없고요."
실제로 혹하는 제안이 아닐 수 없었다. 황실의 사업을 관리하고 멀리 떨어진 각지의 광산과 염전을 관리하는 것으론 경여당 행수들의 진짜 실력을 발휘하기에 턱없이 부족했다. 게다가 경여당 행수들도 마음속으로는 내부 창고는 원래 자신들이 관리해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장 공주가 손에 쥐고 난 후부터는 아가씨가 남기고 간 재산들이 하나같이 엉망진창이 되고 있었다. 이 생각만 하면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다.
범 공자의 요청이긴 했지만 이는 분명 백작가의 뜻일 것이고, 백작가와 황제는 특별한 사이니 결국은 황제의 뜻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범한이 일어나 웃으면서 말을 이었다.
"그저 의견일 뿐입니다. 시간은 많으니 행수들과 천천히 고민해 보시죠."
할 말을 다 마치니 더 이상 할 일이 없었다. 후원을 둘러보러 간 범약약이 별 재미없었다는 듯 돌아오자 범한 일행은 자리를 떠날 준비를 했다. 섭 대행수가 문밖까지 그들을 배웅했다. 그들이 마차에 오르자 섭 대행수는 그제야 이마의 식은땀을 닦았다.
그 순간 범한이 마차에서 얼굴을 내밀더니 큰 소리로 외쳤다.
"대행수님, 정말 생각이 있으시다면 저희 집으로 사람을 보내 주세요. 그럼 제가 동생과 함께 말린 고기를 들고 찾아뵙겠습니다."
그 소리를 들은 섭 대행수는 범 공자가 사람들 앞에서 방금 했던 제안을 발설하는 줄 알고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가 이내 안심했다. 자신을 다시 한번 설득하려는 범한의 속내를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그의 제안을 받아들인다면 범사철의 스승이 되어야만 한다. 그런데 섭 대행수는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이 있었다. 왜 말린 고기를 가지고 찾아온다고 한 걸까? 그 순간 그가 눈살을 찌푸렸다.
‘가만있어 보자, 옛날에 우리 집안에 말린 고기를 가지고 온 게 누구였더라? 뭘 하려고 했었지?’
그는 이마를 긁적이며 경여당을 돌아봤다. 아무래도 슬픔으로 그의 기억이 희미해진 것 같았다.
집으로 돌아가는 마차에서 범한도 피곤함을 느꼈다. 원래 음모를 좋아하는 스타일은 아니었지만 자신을 위해, 집안을 위해, 그리고 많은 사람을 위해 그는 무슨 일이든 해야만 했다. 원래 섭씨 집안의 사업을 동생에게 물려주는 것이 그의 계획이었다. 장사에 천부적인 소질은 아무래도 자신이 범사철보다 못한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이제야 담주에 있을 때 비개 스승님이 해줬던 말이 이해가 갔다.
* * *
"너희 집안일 말이다.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복잡하고 어려운 일이란다. 여기에는 너 한 사람의 목숨뿐 아니라 여러 사람의 목숨이 달려 있지. 그렇기에 조심하고 또 조심해야 한다. 네가 완전히 장성하기 전까지는 자신을 보호할 줄 알아야 한다. 그래야 앞으로 다른 사람을 보호할 능력이 생기거든."
"앞으로······ 누구를 보호해야 한다는 거죠?"
범한이 살짝 궁금해했다. 그러자 비개가 자신의 코를 가리키며 웃었다.
"예를 들어 나처럼 너와 결코 떨어질 수 없는 사람들이랄까."
그렇기에 범한은 무엇이든 해야만 했다. 그래야 여동생 범약약이든, 완아든 이미 자신과 떨어질 수 없는 범씨 집안사람들을 보호할 수 있었다. 그리고 경여당에 있는 어머니의 오랜 친척들이 지금이라도 행복해지도록 해줄 수 있었다. 물론 비개 스승이나 진평평 같은 늙은이를 보호해야 할 날이 올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말이다.
* * *
범 공자가 친히 경여당을 다녀간 일은 적어도 경여당에 있는 섭씨 성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실로 큰일이었다. 사업이야말로 그들이 할 수 있는 마지막 수단이었기에 대행수들은 황실을 위해 많은 돈을 벌어 주고 있었지만 여전히 공식적으로 남 앞에 설 수 없었다. 그래서 신분 있는 사람이 직접 경여당까지 찾아와서 섭 대행수와 은밀한 대화를 나누었다는 사실 자체가 놀라웠다. 이에 당시의 영광을 회상하는 사람들도 있었고 얼굴이 하얗게 질려 황실의 잔인함에 치를 떠는 사람들도 있었다.
"너무 깊이 생각하지 마시게. 범 공자가 제안한 것이니 앞으로 무슨 계획이 있을 거야."
섭 대행수는 주변 사람들의 말에 잔뜩 인상을 썼다.
"여러분의 의견을 모아 보세나. 이사가 다섯 명이고 규정에 따라 각각 한 표씩, 나는 두 표를 행사할 수 있으니······. 지금 여섯째가 백작가와 장사를 하고 있으니 그를 불러다가 의견을 한번 들어 봅시다."
남아 있는 행수들의 눈빛이 담박서국을 운영하는 일곱째 행수에게 꽂혔다. 그는 고개를 숙인 채 한참 동안 생각에 빠진 것 같더니 이내 입을 열었다.
"범 공자와 그의 동생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좋은 분들이셔. 게다가 범 공자는 평범해 보이지만 기개가 아주 뛰어난 분이야. 경도에서 그분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라니까. 평소 행동거지를 보면 백작가의 재산에 크게 연연하지도 않는 눈치고 정왕 세자 같은 분들과 어울리시더라고."
섭 대행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이르긴 하지만 일찍 준비해 보도록 하자."
이사 한 명이 반대 의견을 내놓았다.
"굳이 모험할 필요가 있을까? 우리 모두 간신히 목숨 하나 건진 건데 지금까지도 잘 버텨 왔잖아."
"이건 모험이라고 할 수 없지. 이미 세월도 흐를 만큼 흘렀고 그때는 조정이 우리 가족 목숨을 다 쥐고 있었으니까."
다른 사람이 고개를 저었다.
"우린 단지 상인에 불과해. 반역을 할 리가 없잖아. 그런 짓을 감히 누가 하겠어. 아, 난 정말 우리가 하던 일을 되찾아오고 싶어. 생각만 해도 흥분되는걸. 유리병을 불어 본 게 대체 언제야. 그때 내가 정말 잘 불었는데 말이야."
그의 말이 다른 사람들의 아름다운 기억을 깨운 것인지 모두가 하하 웃었다.
"그때 아가씨가 너한테 허풍쟁이라고 했잖아."
이런저런 추억거리가 오가며 다들 신나게 웃고 있었다. 그때 섭 대행수가 손을 들어 분위기를 바꿨다.
"또 다른 의견은 없는 거요?"
처음 반대 의견을 냈던 이사는 웃음을 멈추고 냉정하게 말했다.
"먼저 황실에서 허락한 일인지 확인한 후 움직여야 해. 모두 원래 자리로 돌아가길 바라지만 우리에게 안전이 가장 중요해. 아가씨도 말씀하셨잖아, 무엇보다 살아 있는 게 가장 좋은 거라고."
섭 대행수가 미간을 찌푸렸다.
"당시 백작가와 우리 섭씨 집안은 사이가 좋았어. 지금까지도 감찰원과 사남 백작이 우리를 살펴 주고 있잖아. 사남 백작이 우리에게 해코지할 리 없어."
그러자 여전히 반대 입장인 이사가 차갑게 받아쳤다.
"절대 잊으면 안 돼. 당시 이씨 집안과 우리 집안은 그리 좋지만은 않았어. 결국 그들 때문에 이 꼴을 당한 거라고."
이씨는 여전히 경국을 이끄는 사람들의 성으로 이씨 집안은 당연히 황실을 뜻했다. 경여당 후원의 밀실에 잠시 정적이 돌았다. 둥근 탁자에 둘러앉은 사람들의 얼굴에 불안한 기색이 감돌았다.
섭씨 집안사람들이 모이는 것은 사실 꽤나 위험한 일이었기에 범한도 그저 선발대로 나선 것뿐이었다. 범사철의 스승이 되어 달라는 것도 모두 핑계였다. 사실 이를 신경 쓸 사람은 별로 많지 않았다. 어차피 그가 국고를 손에 넣게 될 게 언제가 될지, 얼마나 걸릴지 모르는 일이었기 때문에, 손에 들어오기 전에 자신의 능력을 증명해 보여야 했다. 그리고 능력을 증명하기 전에 반드시 황제의 의중을 알아차려야만 했다.
황제의 생각은 단순했다. 임완아와 결혼하는 사람이 바로 내부 창고를 관리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범한은 황제가 이토록 자신의 정혼자를 아끼는 이유를 잘 몰랐지만 이 혼사를 받아들이기로 한 이상 당연히 이 도전 또한 받아들여야 했다.
혼인을 치르기 전에 범한은 먼저 다른 도전과 맞닥뜨린 것이다.
태상사 협률랑은 원래 유명무실한 직위로 지금으로 따지면 명예직에 가까운 자리다. 대개 부마 자리에 오를 사람에게 내려지는 나름 점잖은 관직이다. 8품 소관이지만 나름 높은 직위였다. 초기 경국의 시를 쓰는 6품 사신과 같았는데 당시 시도 외우지 못하는 부마들이 너무 많아지자 훗날 협률랑으로 바뀌게 된 것이다. 협률랑은 과거 왕조에서 협율교위라 하여 종묘의 음률을 관장하게 하였는데 황실에서는 부마들이 시를 짓지 못하고 그저 몇 곡조 흥얼거리는 게 다라고 생각하여 그냥 이렇게 정해진 것이었다.
비록 이름뿐인 관직이긴 하나 태상사로 출근은 해야 했다. 이른 아침부터 범한은 수심에 잠긴 채 마차를 타고 태상사로 향했다. 입구에 도착하니 이미 정4품 소경이 마중을 나와 있었다. 지나친 환대에 깜짝 놀란 범한은 얼른 마차에서 내려 인사를 하고 태상사 동료들과 잡담을 나누다가 관아로 들어갔다. 그리고 작은 방 안에 앉아서 앞으로 무슨 일을 해야 하는지 소경 어르신의 설명을 듣고 있었다.
소경 어르신은 재상이 발탁한 인물이었기에 범한에게 더없이 친절했다. 하지만 소경을 비롯하여 조정에 있는 많은 관리들은 재상의 사생아 딸과 범씨 집안의 서자가 결혼하는데 왜 황궁의 법도를 따라야 하는지 여전히 이해할 수 없었다.
황제가 임씨 집안과 범씨 집안을 총애하는 건 알았지만 많은 신하들 눈에는 황제가 괜한 오지랖을 부리는 것으로 보일 뿐이었다. 하지만 은연중에 모두가 임완아의 신분을 알고 있었다. 다만 감히 입 밖으로 내뱉지 못할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