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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여년-92화 (92/1,108)

092화 알아보지 못한 옛 친구

섭경미, 그녀에겐 천하의 남자들이 한없이 우스운 존재였다.

범한에게 한 가지 의문이 생겼다. 만약 어머니라는 여인이 정말 죽은 게 아니라 어딘가 안 보이는 곳에 숨어서 부드럽지만 차가운 미소를 띤 채 하루하루 발버둥 치며 살아가는 자신의 일거수일투족을 묵묵히 지켜보고 있다면 어떨까.

하지만 사남 백작은 모든 환상을 단칼에 깨버렸다. 그는 어머니의 무덤이 경도의 은밀한 곳에 있으니 때가 되면 그를 데리고 가 인사를 시켜 주겠노라고 말했을 뿐이다.

범한은 크게 한숨을 내쉬고 꿇어앉아 건너편 집에 대고 절을 올렸다. 범약약은 범한이 무슨 연유로 이런 행동을 하는지 몰라 살짝 당황해서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남보다 영리한 그녀였기에 이내 뭔가를 알아차리고는 자기도 모르게 놀란 기색을 보였다가 가까스로 진정했다. 그리고 범한을 따라 건너편에 대고 절을 올렸다.

숲이 우거져 있어서 맞은편에 사람이 있더라도 보기 힘들지만 남녀 둘이서 무릎을 꿇고서 저 먼 곳을 향해 절하고 있는 광경은 그런대로 의미 있어 보였다.

범약약이 뜻밖의 행동을 하자 범한은 그녀를 일으켜 세웠다.

"왜 날 따라 한 거야?"

약약이 억지로 웃어 보였다.

"내가 호칭을 뭐라고 해야 하지? 이모?"

그러자 범한은 웃으면서 대답했다.

"너라면 눈치챌 줄 알았어. 오늘 널 여기 데려온 건 너한테는 숨기고 싶지 않아서야. 혼자만 알고 있고 다른 사람에게 말하면 안 되는 일도 있잖아. 정말 고민되는 일이지."

범약약이 한숨을 내쉬었다.

"어렸을 때 왜 오라버니가 내내 담주에서만 사나 했어."

"내가 아는 거라고는 어머님이 섭씨 가문 사람이라는 것뿐이야. 어렸을 때 아버님이나 새어머님한테 들은 거 없어?"

범약약은 생각해 보다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범한은 한숨을 내쉬고는 어쩌면 황실에 섭씨 가문을 무척이나 미워하는 누군가가 있어서 아버지도 이 일을 숨기고 계신 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 조정의 권력을 보면, 애초에 사남 백작이 섭씨 집안 여식과 얽히지 않았다면 이런 관계를 맺을 수 있었을까? 어떻게 황실의 눈을 피할 수 있었을까? 감찰원이 아버지를 숨겨 주지 않았다면, 진평평이 아무리 자신의 어머니를 존경해서 자신의 파리 같은 목숨이라도 부지해 주려 해도 이 일을 숨길 힘이 없었다면 절대 불가능했을 것이다.

이해할 수 없는 여러 가지 생각들이 그를 몹시 화나게 했다. 엄마 없는 아이처럼 범한은 이런저런 의문을 품기 시작했다. 이런 생각들이야말로 그를 여러모로 불쾌하게 만들었다.

* * *

범한과 범약약 두 사람은 그 집에 가까이 갈 엄두도 내지 못하고 숲을 지나자 나오는 길을 따라 경도 방향으로 향했다. 멀리 갈 준비를 하기 위해 둘은 역참을 찾아 주인에게 마차 한 대를 구해 달라고 했다.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왼쪽으로 난 작은 길이 보였다. 그 길로 들어서 보니 푸른 잔디 사이로 이끼가 잔뜩 낀 돌 하나가 보였다. 아무 생각 없이 지나가다가는 발견하기 쉽지 않은 곳에 있었기에 어딘지 모르게 매우 특별해 보였다. 지금까지 여기에 있는 걸 보니 사람이 발길이 닿지 않았던 곳임이 틀림없다.

시력이 좋은 범한은 이 길 끝에 있는 작은 나무다리를 발견했다. 태평 별저로 이어지는 길일 거라는 생각이 들어서 자기도 모르게 깊은 한숨이 내쉬고 억지로 시선을 돌리고는 웃었다.

"손수건이 벌써 말라 버렸네. 날이 너무 덥지?"

범약약의 양미간에는 여전히 한기가 남아 있었지만 범한에게는 느껴지지 않았다. 그때 그녀의 이마에서 땀방울이 송골송골 배어나 두 뺨 위로 흘러내렸다. 하지만 그녀는 괜찮다고 말하고는 범한을 따라 계속해서 걸었다.

얼마 가지 않아서 찻집 하나가 나타났다. 청죽으로 만든 찻집은 바람도 잘 통하고 햇빛도 잘 가려져 무척이나 시원해 보였다. 범한이 범약약을 끌고 안으로 들어갔다.

"여기 차 두 잔이요."

돌아오는 대답은 적막한 침묵뿐이었다. 사람이 많지 않은 찻집 안. 가장 안쪽 탁자에 서 있던 중년쯤 되어 보이는 사람이 범한의 목소리를 듣고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움푹 들어간 눈과 매부리코가 어딘지 모르게 음산해 보였다. 그는 토끼를 바라보듯 범한을 쳐다봤다.

범한은 속으로 깜짝 놀랐다. 상대방은 경묘에서 자신과 한번 붙었던 호위 무사, 궁전 대인이었다. 왕계년이 감찰원에서 퇴출된 것도 저 사람이 미친 듯이 자신을 잡으려 했기 때문이다.

궁전은 알고 보니 대내대위의 부통솔자로 황제 곁에서 밤낮으로 지키는 일종의 금위군이었다. 그는 섭중과 사제지간으로 경국의 제1대 무관 집안인 섭씨 집안의 자제였다. 원래 한 번 보기도 어렵다는 8등급 고수로, 전력으로 보자면 범한이 죽인 정거수보다 훨씬 뛰어난 인물이었다. 그날 범한이 정거수를 단칼에 베어 죽인 건 사실 적이 얕잡아 봐서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상대가 진짜 제대로 공격했다면 범한이 죽었을 가능성이 더 높다.

지금 궁전을 이렇게 마주하고 있자니 범한은 딱히 좋은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상대를 이길 수 있을 것 같지도 않았고, 설사 이길 수 있다고 하더라도 황궁 사람과 굳이 싸울 필요가 있을까? 범한의 이마에서 땀 한 방울이 쪼르륵 흘러내렸다. 그는 마음속으로 쉴 새 없이 외쳤다.

"오죽이 착각한 거야, 오죽이 착각한 거라고."

애초에 오죽이 대위들을 헷갈리지 않았다면 범한은 경묘에 들어가지도 못했고 앞으로 있을 많은 이야기들이 생겨나지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범한에게는 지금 당장 봉착한 위기가 모두 거기서부터 시작된 것이었다. 그렇다고 그를 원망할 수는 없었기에 그저 이렇게라도 마음의 긴장을 덜어 낼 뿐이었다.

궁전이 미소 지으며 천천히 다가오더니 우렁찬 목소리로 외쳤다.

"어이, 거기 젊은이. 오늘 잘 만났네."

범한은 이 상황을 전혀 모르는 약약을 자기 몸 뒤로 잡아당기고는 역시 웃으면서 대답했다.

"다시 뵙게 될 줄 몰랐습니다."

그 순간 머릿속에 완아의 말이 떠올랐다. 그날 경묘에 있던 귀족이 다름 아닌 황제였으니 궁전도 황제를 호위하는 직분이 틀림없었다. 지금 궁전이 찻집에 있다는 것은 황제도 이곳에 있다는 방증이었다.

그렇게 생각하자 그의 시선이 궁전의 수척한 어깨 뒤를 넘어 저쪽 탁자에서 차를 마시고 있는 중년 귀족을 향했다. 가끔 고개를 들어 찡그린 얼굴로 이쪽을 두어 번 쳐다보긴 했다. 범한은 몹시 놀라긴 했지만 정작 아무런 내색 없이 쓴웃음을 지으며 속으로 생각했다.

‘저기 저분께서는 필요할 때는 없더니 지금 나타나서 뭐 하는 거야?’

"급하게 물건을 찾을 때는 보이지 않다가 생각지도 못할 때 오히려 눈에 들어온다더니."

일부러 저기 계신 귀족 들으라고 실없이 던져 본 말인데 범한의 예상과는 다르게 상대는 조금도 반응하지 않았다.

"저놈을 잡아 와라."

궁전은 자신이 모시는 분을 놀라게 하지 않으려고 작은 소리로 명령을 내렸다. 그러자 옆에 있던 호위 무사 세 명이 재빠르게 앞으로 달려 나왔다. 상대의 기세를 보니 범한 옆에 여자아이 하나가 있는 것을 보고는 쉽게 도망가지 못할 거라고 생각한 듯했다. 그들은 바로 범한을 붙잡아 궁전 앞으로 데리고 갔다.

궁전이 손짓하자 호위 무사들은 물러갔다. 그는 두 손을 조심스럽게 뻗어서 바로 범한의 맥소를 집었다. 그 순간 범한도 희한하게 손목을 비틀어 손가락 끝을 궁전의 맥소에 댔다. 대단한 동작은 아니었지만 그동안 오죽에게 훈련받으면서 단련된 본능적인 반응으로 아주 정교한 솜씨였다. 갑자기 차가운 기운이 팔을 감싸더니 홀연 상대의 팔목이 굳어지는 것 같았다.

그 순간, 궁전의 두 손이 이미 그의 손목을 단단히 붙잡고 있었다.

두 사람은 깜짝 놀랐다. 두 번째 대결 역시 살짝 닿기만 했는데도 서로 제압할 수 있다니 정말이지 신기한 일이었다. 두 사람 모두 이미 서로의 반응을 꿰뚫어 보고 있는 것 같았다.

궁전이 자신 있게 말했다.

"꼼짝 못 하게 묶어 버려!"

범한은 궁전의 부하들과 싸울 생각이 없었고 다른 생각이 있었기 때문에 인상을 찌푸리고는 되받아쳤다.

"아직 어찌 될지는 모르는 일이라고."

그는 콧방귀를 뀌었다. 등에 있는 설산이 따듯해지면서 뜨거운 줄기들이 뿜어져 나오더니 두 어깨를 타고 상대방의 몸으로 흘러들어 갔다.

궁전의 얼굴이 이내 일그러졌다. 이 젊은 청년의 정기가 패도의 기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의 뒤에 자신이 모시는 주인이 있었기에 절대 뒤로 물러설 수는 없었다. 그는 눈을 부릅뜨고 소리를 지르며 수년간 쌓아 온 강력한 정기를 손으로 끌어모았다.

그러자 서로 얽혀 있던 두 사람의 팔이 풀리더니 두 손바닥이 한곳에 맞춰졌다.

펑, 하는 소리와 함께 청죽으로 만든 찻집에서 엄청난 힘이 사방으로 뿜어져 나갔다. 한쪽 구석에서 차를 마시던 귀족이 인상을 잔뜩 찌푸렸다. 어떤 무술로도 몸을 보호할 수 없어 보이는 상황이었다. 범한 뒤에 있던 범약약도 뒤로 한 걸음 물러나다가 하마터면 넘어질 뻔했다.

호위 무사들이 칼을 꺼내 범한의 목에 들이댔다. 범한은 두 팔의 통증 때문에 반격할 힘이 하나도 없었다. 아니, 반항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궁전은 몇 차례 기침을 하고는 뒷짐 지고 범한을 바라보았다. 그는 범한의 눈빛이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 작은 소리로 말했다.

"한참 못 본 사이에 실력이 많이 늘었군."

범한의 입가에서 피가 흘렀다. 그 모습을 본 궁전은 경묘 맞은편의 어두컴컴한 방에 있던 사내를 떠올렸다. 그러자 갑자기 자기도 모르게 오한이 느껴지더니 이게 과연 잘한 일인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이번 대결은 범한이 패한 게 명확했지만 궁전의 마음은 그리 편하지는 않았다. 구석에 앉아 있던 귀족 외에는 누구도 그의 뒷짐 진 손이 몹시 떨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범한의 패도의 기가 그의 몸으로 들어가 작은 칼로 깎아 내는 것처럼 고통스러웠다. 얼마 후에야 겨우 진정되었다.

"문무에 모두 뛰어나군. 요즘 세상에 이렇게 훌륭한 인재가 드문데 말이야."

귀족은 뾰족한 칼끝이 자신의 목을 향하고 있는데도 표정 하나 변하지 않는 범한을 보고 꽤나 흥미로운 듯 웃음을 지어 보였다. 궁전은 자신의 주인이 타고난 인재에 관심이 많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주인이 지난번처럼 또 자신을 버릴까 봐 얼른 탁자 옆으로 가서 예를 갖춰 낮은 소리로 범한을 왜 생포했는지 설명하기 시작했다.

귀족의 인상이 굳어졌다가 조금씩 풀어지더니 깊은 연못 같은 눈동자에 빛이 감돌기 시작했다. 그는 가늘게 눈을 뜬 채 범한을 주시하다가 입을 열었다.

"그때 그 청년이로군."

그리고 다시 말을 이었다.

"궁전, 네가 말한 그 고수는 가볍게 처리했다고 하지 않았나. 난 그렇게 들은 것 같은데."

궁전이 무안해하며 대답했다.

"그날 날이 너무 어두워서 제대로 확인을 하지 못했습니다.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바로 차가운 대답이 돌아왔다.

"이번에는 용서해 주지. 단 앞으로 이 일에 대해 다시는 언급해서는 안 될 것이야. 그러지 않으면 온 집안이 참수를 면치 못할 줄 알아."

궁전은 두 주먹을 꼭 쥐었다.

두 사람의 목소리가 너무 작아서 바로 옆에 있던 범한에게도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모두 물러가거라. 난 이 청년과 할 얘기가 좀 있으니."

귀족의 냉랭한 목소리가 허공을 찔렀다.

궁전은 어리둥절했다. 천하를 휘두를 권력을 가지고 있지만 정작 닭 한 마리 붙들 기력도 없는 사람이 혼자서 어떻게 범한을 상대하려는 걸까. 그때 귀족도 그의 생각을 알아차렸는지 살짝 망설이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궁전은 남고 나머지는 모두 물러가거라."

"예!"

나머지 호위 무사들도 선뜻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두말하지 않고 분부대로 신속하게 찻집 밖으로 나갔다. 그제야 범한도 나름 자유로운 몸이 되어 몸을 이리저리 풀었다. 그때 약약이 앞으로 나와 그의 손을 잡아끌었다. 조금 전 위험한 상황이 떠올랐는지 금방이라도 닭똥 같은 눈물이 떨어질 것 같았다.

* * *

"협률랑 범한, 황제 폐하께 무례를 범하다니 네 죄를 네가 알렸다."

"신은 무슨 죄를 지었는지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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