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경여년-90화 (90/1,108)

090화 장원

동이 틀 무렵, 쨍쨍한 태양이 아직 얼굴을 내밀지 않은 틈을 타 범한은 호위병과 왕계년 소대의 보호하에 경도에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범씨 가문의 장원에 다다랐다. 이번 여정은 더위를 피하기 위함이 아니라 제사를 지내기 위해서였다.

무덤 앞에는 이미 호위병의 지휘하에 과일과 향촉 등 제사에 필요한 물건들이 잘 차려져 있었다. 범한은 새로 세워진 묘비를 조용히 바라보자니 마음이 복잡했다. 다시 태어난 후부터 줄곧 품고 있던 마음이 뜻밖에도 어느 순간 희미해져 버렸다.

지전을 태우느라 연기가 피어올랐다. 범사철은 연기를 견디기 힘겨워 이미 마차로 돌아간 지 오래였다. 하지만 범약약은 눈을 반쯤 뜬 채로 무덤 앞에 서 있는 오라버니의 소매를 꼭 잡은 채 안간힘을 쓰며 연기를 참아 내고 있었다. 그녀는 여기에 잠들어 있는 세 명의 호위병이 모두 오라버니를 위해 죽은 것을 알고 있었기에 진심으로 고마운 마음을 전하고 싶었다. 그녀는 어려서부터 범한의 편지로 이런 교육을 받아 왔기 때문에 아랫사람을 위해 제사를 지내는 것이 규율을 벗어나는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자욱하게 피어나는 연기 속에서 아무 말 없이 범한 뒤에 서 있던 새로 온 호위병들은 연기 때문인지 불 때문인지 알 수 없었지만 어느새 붉어진 눈으로 도련님의 뒷모습만 바라보고 있었다. 앞으로 모시게 될 도련님이 어딘지 모르게 달라 보였다. 잠시 후 호위병 한 명이 친절하게 말을 건넸다.

"도련님, 여기까지 친히 발걸음하신 것만으로도 도련님의 성의는 충분히 보이신 것 같습니다. 연기가 꽤 많으니 이제 그만 마을로 돌아가시는 게 어떠신지요."

범한도 자욱한 연기 탓인지 눈을 비비며 마차로 돌아갔다. 미리 타고 있던 범사철은 담박서국의 최근 한 달간 장부를 보고 있다가 범한과 범약약이 마차에 오르자 자리를 내주고는 낮은 소리로 물었다.

"형님, 사람의 마음을 매수하시려는 겁니까?"

범한은 마음이 무거웠지만 살짝 웃기만 할 뿐 크게 개의치 않았다. 그리고 범사철의 머리를 헝클어뜨렸다.

"넌 정말! 이 세상에는 진심으로 일어나는 일도 있단다. 무정하면 진짜 영웅호걸이라 할 수 없듯이······."

"자식을 사랑하지 않는 자를 어찌 대장부라 할 수 있을까."

범약약이 말을 거들자 범한은 몹시 의외인 듯 여동생을 쳐다봤다.

"너······."

범약약이 고개를 숙인 채 마저 말을 이었다.

"며칠 전에 오라버니가 말했었잖아, 그냥 그걸 기억하고 있었던 것뿐이야."

여동생의 지혜가 이렇게 뛰어날 줄이야. 범한은 매우 기뻤다.

"기억해, 어느 주씨 성을 가진 사람이 한 말이니까."

범사철이 혼자서 투덜거렸다.

"흥, 또 필명을 바꿨나 보지? 《석두기》 다음으로 또 언제 나오려나?"

지금 범한에게는 글을 쓰고 정리할 시간이 전혀 없었다. 하지만 필명이라는 말을 듣고 보니 특별한 이유 없이, 괜한 오지랖으로 항상 누구의 글인지 설명하곤 했던 기억이 났다.

그는 멋쩍음에 살짝 부아가 치밀어 올라 범사철에게 계속해서 훈계했다.

"사람 마음은 매수할 수 있지만 감정이라는 건 자연스럽게 만들어지는 거지. 사람에게 감정이 없어 봐, 그럼 괴물밖에 더 되겠어? 이 세상에서 살면서 아무도 신경 안 쓰고 핏줄도 몰라보고, 또 생사에도 별 관심이 없으면 신선이 돼야지, 뭐 하러 사람으로 살겠어?"

범사철이 고개를 내저으며 반박했다.

"형님은 신선도 아니면서 어떻게 신선의 기분이 어떤지 안다는 거지?"

범한도 지체 않고 바로 대답했다.

"물론 난 신선이 아니라 사람이지. 그래서 아는 거야. 사람이 신선처럼 된다고 해서 정말 불로장생하는 것도 아니니까. 오히려 최악일 것 같지 않아?"

이렇게 말하고 나니 범한은 갑자기 오죽 아저씨가 떠올라서 강한 불안함과 자책감이 밀려왔다. 앞으로 오죽 아저씨가 정말 늙게 된다면, 진짜 말 못 하는 독거노인이 될까 봐 걱정스러웠다. 범한은 그저 오죽 아저씨가 이 어두운 세상을 잘 견뎌 내길 속으로 바랄 뿐 직접 나서서 찾을 생각은 하지 않았다.

가족묘를 떠난 마차가 마을에서 가장 넓은 논두렁을 따라 겨우 마을을 벗어났다. 마차가 큰 성 밑에 다다르자 마을 사람들이 다가와 그들을 반갑게 맞았다. 이곳은 소작인들뿐 아니라 범씨 집안에서 형편이 좋지 않은 가족들도 살고 있었다. 그들은 경도처럼 번화하고 비싼 곳에서는 도저히 살아갈 방법이 없어 이리로 내려온 것이다. 소유한 땅은 없으면서도 차마 체면은 꺾지 못해 소작인처럼 농사를 지으면서 세를 낼 수도 없었다. 비록 사남 백작 범건이 기꺼이 희생하면서까지 가난한 친척을 보살피는 인물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들을 굶어 죽게 내버려 둘 수는 없었기에 하는 수 없이 범씨 가문의 땅 일부와 자잘한 일들을 관리하게 하면서 매월 일정 수준의 돈을 버는 것으로 가족을 부양하도록 했다. 지금 경도에서도 범한을 서자라고 무시하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는 데다가 무엇보다 범씨 집안의 미래가 이 예쁘장한 도련님에게 달려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에 각별히 예를 다해 모셨다.

조금 이상하긴 하지만 범건은 범한에게 조상의 제사를 지내는 일에 대해 한 번도 얘기한 적이 없었다. 범한도 잊어버린 척하고 있었지만 속으로는 여전히 궁금증이 해결되지 않아 답답해했다.

마을 어르신이 건넨 차를 단숨에 마신 후 주위를 둘러보았다. 범한은 호위병의 안내를 받으며 서쪽 수풀에 있는 작은 정원으로 갔다. 그곳은 등자경의 집이었다. 안으로 들어가니 먼저 와 있는 등자경이 단정하게 서서 범한 일행을 기다리고 있었다. 등자경이 범한에게 난처해하며 말했다.

"도련님, 제가 마중을 나가려 했는데 후삼아가 한사코 못 가게 해서요."

범한은 등자경의 말을 크게 신경 쓰지 않는 듯 그를 부축하여 안채로 들어갔다.

"후삼아를 나무랄 필요 없어. 내가 시킨 거니 말이야."

후삼아는 최근 범한의 부하로 들어온 호위 무사로 마을로 들어올 때 선발대로 나섰던 자다. 범한은 살짝 통통해진 등자경의 얼굴을 보며 물었다.

"다리는 좀 어때?"

등자경이 하하 웃어 보였다.

"괜찮습니다. 벌써 움직일 수 있는걸요. 며칠만 지나면 경도로 돌아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혹시라도 여기서 요양하기가 쉽지 않다면 경도로 돌아가서 해도 괜찮은데."

말하는 도중에 등자경의 아내와 딸이 범한에게 인사를 올리기 위해 들어왔다. 범약약은 상금을 내어 주곤 등자경의 다섯 살 난 딸아이에게 이것저것 물어보며 아이를 안고 밖으로 나갔다. 방 안에 남자들만 남게 되었다.

범사철은 여전히 장부 정리에 빠져서 등자경의 인사도 대충 흘려들었다. 범한은 별수 없다는 듯 철없는 동생을 한번 쳐다보고 등자경의 얘기에 집중했다.

"여기 아내와 아이들이 있으니 우선 여기서 몸을 추슬러 보겠습니다. 그리고 회복되는 대로 바로 경도로 올라가겠습니다."

두 사람은 생사의 기로에 있을 때 함께했던 터라 편하게 말을 주고받았다. 범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처자식과 따뜻한 아랫목에서 시간을 보내더니 그새 익숙해졌나 보군."

등자경이 하하 웃었다.

"요즘 날이 더워서 아랫목에 있다간 화상 입기 십상입니다."

담주의 날씨는 정말 좋았다. 겨울은 따뜻하고 여름은 시원해서 온돌을 쓰는 집은 하나도 없었다. 범한이 경도에 들어온 때가 마침 봄여름 시기였기에 아랫목에서 잘 기회는 아직 없었다. 등자경의 말을 들으면서 자기 밑에 있는 온돌을 슬쩍 만져 보기만 했는데도 선선한 게 좋았다. 결혼 후 창산 산기슭에서 얼마간이라도 살 수 있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온돌을 들여놓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등자경은 범한의 의식이 한순간에 10월 후 추운 겨울의 설산으로까지 흐른 줄 모르고 이야기를 계속했다.

"도련님, 여기서 과일 좀 드시면서 쉬시다가 돌아가시죠. 이 마을에는 먹을 만한 게 없을 겁니다. 그리고 시간이 늦어서 지금 출발하시면 경도에는 늦은 시간에야 도착하게 돼서 성안으로 들어갈 수 없으실 겁니다."

범한이 미소 띤 얼굴로 손사래를 쳤다.

"안 그래도 오기 전에 아버님께 말씀드려 놓긴 했어. 우리 세 사람은 여기서 하룻밤 지내고 내일 돌아간다고 말이야. 지난 한 달 내내 경도에서 여러모로 신경 쓰느라 제대로 쉬지도 못했거든. 오래 머물진 못하지만 하룻밤만 신세 좀 질게."

등자경은 그 말을 듣고 그제야 황급히 부인을 불러내 그들이 묵을 방과 뜨거운 물을 준비하라고 일렀다. 여느 시골처럼 생활이 풍족하진 않았지만 일을 도와주는 사람은 많았다. 범씨 도련님이 오늘 하루 묵고 간다는 말에 10여 명의 중년 여인들이 시중을 들어, 덕분에 짧은 시간 안에 모든 것이 준비되었다. 주변을 쓱 한번 둘러본 범한이 등자경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나와 함께 온 이들에게도 멀지 않은 곳에 자리를 좀 마련해 주게."

등자경은 여태 조용히 범한 곁을 지키고 있던 왕계년을 주시했다. 그에게서 느껴지는 분위기가 일반 호위병과는 사뭇 달랐다. 범한은 등자경이 왕계년을 주시하고 있는 것을 눈치채고 낮은 소리로 소개했다.

"여기는 왕계년이야. 내가 최근 감찰원에서 겸직을 하고 있어서, 다른 사람에게는 말하지 말고."

등자경의 안색이 싹 변했다. 범한의 눈빛에도 변화가 생긴 것을 알아차렸다. 자신이 따르던 도련님이 경도에 들어간 지 몇 개월 되지도 않아서 귀신도 놀라서 도망간다는 그곳에 들어가고 만 것이다.

범한이 왕계년을 불러 등자경을 소개했다.

"여기는 우리가 두 번째 만났을 때인가 내가 한번 말했을 거야. 등자경이라고 하네. 앞으로 두 사람이 좀 친해지다 보면 그가 얼마나 실력자인 줄 알 거야. 내 목숨을 구해 준 사람이거든."

이 말을 들은 등자경의 까만 얼굴이 살짝 달아올랐다. 그가 왕계년에게 악수를 청했다.

"도련님께서 괜한 말씀을 하시네요. 사실 그날은 도련님께서 제 목숨을 구해 주신 게 맞습니다."

왕계년은 손을 맞잡고 웃기만 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도 등자경처럼 현재 자신의 상태에 대해 몹시 만족하고 있었다. 감찰원으로 성공적으로 복귀했을 뿐만 아니라 감찰원 원장이 직접 그를 만나 줬고 월급도 적지 않게 올랐기 때문이다. 수년 전 문직으로 자리를 옮기고 난 후 정말 오랜만에 이런 대우를 받았다. 범대인은 제8품 태상사 협율랑에 불과했지만 허리에 요패를 차고 있었다. 이 요패는 자신의 부하들 외에 감찰원 간수 몇 명과 목철만 알고 있을 뿐 다른 사람들은 정확히 알지 못했다. 작지만 이런 신비로운 권력을 손에 쥐니 마음이 편안해졌다.

저녁 식사도 나름 괜찮았다. 등자경은 너무 시골이라 먹을 만한 음식이 없다고 거듭 말했다. 하지만 솥 안에는 윤기가 좔좔 흐르는 고기가 먹음직스럽게 익어 가고 있었고 부드럽고 파릇파릇한 채소가 곁들여 차려져 있었다. 정말 산해진미가 따로 없었다. 범사철도 입맛이 돌았는지 안하무인으로 달려들어 고기를 뜯었다. 그 모습이 웃긴지 범한은 사철을 한번 쳐다보고는 젓가락으로 고기를 집어 입으로 가져갔다. 이건 대체 무슨 고기인지 부드러우면서도 씹으면 씹을수록 고깃결이 하나하나 느껴졌다. 지금까지 어디서도 맛보지 못한 황홀한 맛이었다.

"무슨 고기지? 고라니 고기인가?"

곁에 있던 등자경의 아내가 범한의 물음에 바로 대답했다.

"흰 사슴 고기입니다."

‘흰 사슴’이라는 말에 범한은 젓가락질을 멈추고 멍하니 있었다. 그 순간 아주 오래전 일이 떠올랐다. 담주에서 지내던 시간보다 훨씬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갔다. 당시 범한이 범신이었을 때, 침대에 누워 있자면 매일같이 그렇게 흰 사슴 고기가 먹고 싶었다. 그걸 본 간호사도 꿈이 크다며 놀리곤 했었다. 전생의 범신 또한 흰 사슴 고기를 먹어 본 적은 없었고 그저 고향 사람들이 제일 좋아하는 음식이라는 것만 알았다. 이런 기억들이 점점 흐려진 걸 보니 전생에 대해 오랫동안 생각하지 않았던 게 분명하다. 그런데 오늘 흰 사슴 고기를 맛보고 나니 오랫동안 묻어 둔 감정들이 되살아나는 것 같았다.

* * *

범약약이 옆에서 작게 한 입 베어 물더니 옆에 있는 범한의 안색이 이상해 보였는지 조심스럽게 물었다.

"왜 그래?"

범한은 얼른 정신을 차리고 씩 웃어 보였다.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그러곤 고개를 돌려 등자경에게 지금 맛본 이런 야생의 토산품 중 소금에 절여 건조한 게 있는지 물었다. 등자경에게 긍정적인 답을 얻은 범한은 신이 나서 수십 근을 사들여 경도로 가지고 갈 준비를 마쳤다. 등자경은 나름 준비한 것들이 이토록 도련님의 마음을 사로잡을 줄 미처 몰랐기에 덩달아 기분이 좋아졌다.

범한은 술잔을 들어 둘러앉은 사람들과 함께 건배를 하고는 웃었다.

"등자경, 자네는 아직 몸이 성치 않으니 조금만 마시지."

옆에 있던 범약약은 범한이 무안해할 정도로 뚫어지게 쳐다보며 미소를 지었다. 사실 범한은 조금 전 맛본 음식을 경도로 가지고 가려는 건 자신이 먹고 싶어서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완아에게 맛보여 주고 싶어서였다. 범한은 약약이 자신의 의중을 알아차린 것을 눈치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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