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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여년-89화 (89/1,108)

089화 하지

그때 서재 밖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한밤이 다 되었는데 대체 누가 이리도 소란을 피우는 건지. 그런데 재상과 원굉도는 밖에 누가 있는지 정확히 알고 있는 표정이었다.

이윽고 문이 열리고 스무 살이 조금 넘는 뚱뚱한 사람이 서재로 걸어 들어왔다. 뒤쪽에 늙은 어멈 몇 명과 종들이 있기는 했지만 이들은 이자를 말리지 않았다. 대신 잔뜩 긴장한 채로 서재 밖에 서서 재상을 향해 사죄하고 있었다.

재상가에는 매우 엄한 규율이 하나 있었다. 바로 재상 어르신의 윤허가 없으면 그 누구도 사사로이 서재에 드나들어서는 안 되며, 만일 드나들었을 시에는 엄히 처벌한다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임약보는 알겠다는 듯 사람들을 향해 손을 내젓기만 했다. 그러고는 한껏 따뜻한 얼굴로 뚱뚱한 사람을 바라보며 작은 소리로 말했다.

"대보야, 왜 또 말을 듣지 않는 게냐?"

대보라고 불린 이 뚱뚱한 사람은 미간이 넓고 눈빛이 조금 멍한 것이 머리에 문제가 있어 보였다. 하지만 임약보의 말을 들은 후로는 곧장 안정을 되찾고 부끄러워하며 말하기 시작했다.

"대보는 말을 잘 들어요. 그런데 동생이 아직 안 왔어요."

그는 임약보의 큰아들로 어릴 때 큰 병을 앓고 난 뒤 이렇게 변해 버렸다. 지능이 서너 살 정도의 아이 수준밖에 되지 않아서 문밖출입도 거의 하지 않았다. 그를 두고 경도 사람들은 재상가의 불행이라며 동정하였고 그에 대해서는 일절 언급하지 않았다.

대보는 평소 동생 임공을 가장 좋아했다. 그러니 최근 이틀간 동생이 보이지 않자 초조해졌던 것이다.

큰아들의 말에 임약보는 슬픔이 밀려들어 가슴을 쥐어짜는 듯한 통증에 가슴을 부여잡았다. 그러기를 한참 후, 진정이 된 임약보가 부드러운 음성으로 큰 아들을 다독였다.

"동생이 밖에 나갔단다. 며칠 후면 돌아올 것이야. 대보는 착하지? 그러니 얼른 가서 자려무나."

아버지의 설명에 임대보는 드디어 안정을 되찾았다. 그리고 바보처럼 웃으며 늙은 어멈들을 따라 방으로 돌아가 이내 곤히 잠들었다.

침묵이 흘렀다. 잠시 후 임약보가 싸늘하게 말했다.

"이제 내게는 아들 하나와 딸 하나뿐입니다. 대보가 저 모양이니 원 형, 내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원굉도가 잠시 얼굴을 찌푸렸다.

"만약 큰 공자님을 생각하신다면, 신아 아가씨를 범한에게 시집보내는 건 좋은 생각이 아니십니다. 범 공자는 정치적인 알력 싸움에 휘말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향후 안정적인 삶을 살기는 힘들겠지요. 그렇다면 나중에 큰 공자님을 신아 아가씨께 맡기는 것도 쉽지 않을 것입니다."

임약보가 고개를 내저으며 차가운 음성으로 말했다.

"범씨이기 때문에 그러한 일들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나는 범한이 아주 독종일 거라 확신하고 있어요. 그래야 우리 신아와 큰아이를 평생 안전하게······."

말을 끝낸 임약보는 금세 평온을 되찾았다. 그러고는 긴 책상 앞으로 걸어가 얇은 장막을 하나 열어젖혔다. 장막 뒤에는 천하대세도가 있었다. 아무 말 없이 이것을 바라보던 임약보의 미간에 점점 주름이 지기 시작했다. 그의 눈은 이따금 동이성 부근을 훑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의 눈이 더 많이 머문 곳은 경국의 북방, 즉 경국과 북제 사이에 복잡하게 들어서 있는 작은 제후국들이었다.

매우 오랜 시간이 흐르고 임약보는 이맛살을 찌푸렸다.

"당장 책략을 세워야겠습니다. 비록 큰 전쟁이 아닌 것 같고 양측이 직접 접촉할 가능성은 없는 것 같지만, 북쪽에 있는 모든 군(郡) 지역은 저 여러 소국으로 식량과 말을 옮길 테니, 미리 단단히 준비를 해둬야 할 것입니다."

원굉도가 알겠다고 대답하자 이내 재상이 기침을 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기침을 너무 심하게 해서 그런지 눈가에 눈물방울이 고인 것 같았다. 지도 앞에 선 재상은 뒷짐을 지고 미간을 찌푸린 채 계획을 짰다. 그런 그의 모습은 오늘 친아들을 잃어버린 아버지처럼 보이지 않았다.

이에 원굉도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 한숨에는 재상을 향한 약간의 감동과 꺼림칙함이 동시에 담겨 있었다. 원굉도는 임약보가 이번 생에 부와 권력을 쥐고도 한 하루도 편히 쉬지 못하는 건 모두 공주 때문이며 그녀와 얽히는 바람에 인생을 망쳤다고 생각했다.

* * *

이 모든 일이 전부 하루 동안에 일어났다. 그리고 이러한 은밀한 거래, 또는 말다툼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는 이도 없었다. 사남 백작 범건과 진평평이 만나고, 재상 대인과 장 공주도 사적으로 만났지만 조정 대신 가운데 두 만남을 아는 사람의 수는 모두 다 합쳐 봤자 열 손가락을 넘지 않았다.

그래서 범한은 자신의 미래가 이미 금빛 찬란한 대로 위로 배정되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만약 경도로 들어온 후 몇 달간을 여명 전 어둠기라고 한다면, 범한은 그동안 이 먹물처럼 진득한 어둠에 휩싸여 모든 감각 기관을 봉쇄당한 채 큰 압박감을 받아야만 했었다. 그런데 뒤이어 온 날들은 전혀 새로운 세상이었다. 별안간 하늘에서 신이 나타나 깨끗한 물 한 바가지를 그의 얼굴에 뿌려 준 것만 같았다. 그만큼 그는 상쾌하고 자유로웠으며 그 어느 때보다도 맑은 정신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며칠 동안 범한은 ‘미래 처남의 죽음은 자신과 무관하다’며 계속 자기 최면을 걸었다. 이렇게 해야만 가장 볼 면목이 없는 임완아와 마주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임완아는 둘째 오빠의 죽음을 전해 들은 후로 계속 우울해했다. 비록 몇 번 만난 적 없는 남매이기는 하지만 피는 물보다 진하다고, 그녀도 슬프고 힘들 수밖에 없었다. 범한은 그녀의 이런 행동들이 신경 쓰였고 견디기 힘들 정도로 마음이 아팠다. 비록 그가 자신을 죽이려 한 자객의 배후라 할지라도 말이다.

그런데 예전의 범한은 가끔 자신은 피가 차가운 것 같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만약 담주에서 지낼 때 범사철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다면 어쩌면 자신은 조금도 슬퍼하지 않았을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물론 지금은 예전과 상황이 달라져 있었다. 그리고 범건의 두 번째 부인 유씨도 지금의 상황을 묵인하고 있는 것 같았다. 유씨 부인이 이상하리만큼 자신의 본분을 지키고 있고, 또 범사철이 범한과 함께 경도를 나돌아다녀도 전혀 저지하지 않은 데에는 경도에 있는 유씨 가문에서 이상한 낌새를 눈치채고 유씨 부인에게 충분한 정보를 제공해 준 것도 한몫했다.

사실 범한을 가장 안심하게 한 요인은 따로 있었다. 바로 재상가 둘째 공자의 죽음과 자신을 연관 지어 의심하는 사람이 없어 보였던 것이다. 물론 재상 대인도 포함해서 말이다. 사실 이번 사건과 관련해 범한과 정왕은 조금 과하게 우려한 면이 있었다.

오백안과 임공은 감찰원에서도 찾아내지 못할 정도로 꼭꼭 숨어 있었다. 그렇다면 이 세상에 네 명의 종사 말고 또 누가 그들을 찾아낼 능력이 있을까. 오죽과 범한의 관계만 사람들에게 밝혀지지 않는다면 범한이 임공의 죽음과 연계되어 있음을 아는 이는 하나도 없었던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범한에게 전혀 생각지도 못한 소식이 날아들었다. 이는 재상가에서 나온 정보로 여러 사람을 거친 후 은밀하게 나온 정보였다. 바로 재상 대인이 시월에 치러질 혼사를 어느 정도 허락하는 의사를 보였다는 것이다. 범한은 재상이 젊은 자식을 앞세운 후 정말로 의욕을 잃어 그런 결정을 내린 건 아닌지 계속 따져 보았다.

그런데 그러는 사이 늙고 간교한 능구렁인 사남 백작은 세상 사람들 중에서 가장 먼저 숨은 원인을 간파하고 있었다. 사남 백작이 판단하기에 재상과 동궁, 또는 장 공주가 무슨 이유에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서로 틈이 벌어진 것이었다. 이는 임약보가 새로 투자할 곳을 찾고 있다는 뜻이며, 어쩌면 재상의 정치 축이 2 황자 쪽으로 이동하는 흔적일 것이라고 범건은 분석했다.

두 건의 암살 사건은 경도의 봄 하늘에서 떨어진 날벼락 같았다. 날벼락이 내리면 빗줄기도 쏟아지는 법. 빗줄기는 이 두 사건을 점점 희석하고 잊혀 가도록 만들었다.

아들을 잃은 슬픔으로 의욕을 잃은 재상 대인은 병을 핑계로 조정에 거의 나오지 않았다. 물론 절름발이인 진평평 원장도 조정에 자주 출석하는 건 아니었다. 그는 그저 감찰원 안에서 멍하니 앉아 있다가 가끔씩 명령을 몇 번 내릴 뿐이었다.

이렇게 지내는 진평평을 떠올릴 때면 범한은 늘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 진평평은 경도로 돌아온 후에도 자신을 만나러 오지 않는 걸까. 하지만 범한은 이런 생각을 하는 동안에도 중범죄자 감옥에서 그 늙은 절름발이가 훔쳐보고 있었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런데 더 이상한 점은 진평평 원장은 경도로 돌아왔는데, 스승 비개는 대체 어디로 가서 나타나지 않는가였다.

어찌 되었든 이 짧고 극렬했던 교전 후 조정의 각 세력들은 몇 명의 생명을 대가로 내놓고는 다시 취약한 균형 관계를 구축했다. 몇 년 후 황실 금고의 통제권자 교체처럼 어떤 이들은 하는 수 없이 변화를 받아들여야 했다. 또 어떤 이들은, 예를 들어 재상처럼 자신과 가족의 안전을 보장할 다른 길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이와 같은 변화들은 범한에게는 분명 대단히 유리한 것이었다. 적어도 그는 자신의 신변 안전을 두고 지나친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었다. 이에 범한은 이제야 저 멀리 담주에 계신 할머니께 편지를 썼다. 편지에는 자신은 경도에서 매우 잘 지내고 있으니 부디 아무런 걱정도 말라는 내용이 들어 있었다.

봄이 오면 여름이 온다. 비록 쓸데없는 말처럼 들리겠지만, 천신만고 끝에 경도에서 발 디딜 곳을 찾은 범한에게는 인생에서 비 오는 우울한 날이 줄고 쾌청한 날, 행복한 날이 많아졌음을 뜻했다. 마치 저쪽에서 먼저 자신을 향해 천천히 손을 흔들어 주기 시작한 것처럼 말이다.

벌써 여름인데 곧 있으면 가을 혼례일이 되지 않을까?

* * *

조정의 칙서가 이미 동이성에 도착하긴 했지만 그들은 칙서를 다시 정중히 돌려보냈다. 그러곤 창산 아래의 장원에서 일어난 일과 자신들은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많은 양의 금과 은을 함께 바쳤다. 충분히 예측했던 반응이었다. 이는 홀로 동이성을 지키는 대종사의 자존심을 지키는 동시에 동이성 주변에 사는 수많은 백성들에게 피해가 가지 않게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그렇기에 그저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북쪽의 정세에 약간의 긴장감이 감돌았다. 북제가 경국의 내정을 어지럽힌 증거가 모두 사실로 드러난 이상 어떻게든 변명할 수밖에 없었다. 두 나라 모두 국경 지역의 전투 준비에 치열했기 때문에 각각 통제하고 있는 제후국 사이에서 작은 충돌이 벌어지기도 했다.

경국 북쪽에 짙은 먹구름이 드리워 있었지만 경도는 한여름이었다. 여름이 되면 경도 사람들 대부분은 여행을 떠나거나 여가를 즐기면서 태평성대가 가져다주는 평안과 부를 누렸다. 범한도 마찬가지였다. 지난번 외양간 사건을 직접 마무리 짓지 못했지만 적어도 자신에게 그리고 죽은 사람들에게 나름 배울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비록 자신이 하는 모든 일이 감찰원 그늘에 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지만 덕분에 감찰원에서 일을 처리하는 과정을 이해할 수 있었다. 비개 스승님께 배운 것 외에도 많은 것들을 직접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태양이 작열하는 뜨거운 여름날, 범씨 가문과 곽씨 가문 사이에 있었던 소송이 드디어 끝났다. 다른 사람들 눈에는 별일 아니게 보였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미 범한이 태상사 협률랑이 되었으니 앞으로 어느 공주의 귀인이 될 수도 있는 사람을 상대로 곽씨 가문도 함부로 일을 벌일 수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인지 재빨리 소송을 취하했다. 이로써 드디어 범한도 경도를 떠날 수 있는 허가를 얻게 되었다.

범한은 바로 경도를 떠났다. 그런 끔찍한 일을 당하고도 또다시 경도를 떠나다니 정말 보통 용기를 가진 사람이 아니고서는 엄두도 못 낼 일이었다. 하지만 최근 들어 그의 곁에는 집안에서 붙여 준 하인과 감찰원 관리 할 것 없이 그를 보호하는 사람이 제법 많았다. 또 범한에게 새롭게 생긴 감찰원 제사라는 은밀한 신분 덕분에 왕계년 외에도 각지에서 모인 사람들이 그의 새로운 수하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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