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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여년-88화 (88/1,108)

088화 그 여인

어두운 황궁 밖, 장 공주의 가마를 밝히고 있는 등불만이 빛을 발하고 있었다. 한동안 침묵이 이어졌다. 이는 가마 안 연약해 보이는 여인이 얼마나 큰 심리적인 타격을 받았는지, 그리고 그 이야기 때문에 얼마나 분노하고 있는지를 잘 보여 주는 증거였다. 한참이 지나고 장 공주의 삭풍같이 차가운 목소리가 가마 밖으로 들려왔다.

"그 아이는 내 딸이야! 내 딸을 그 사남 백작가의 잡종 놈 아들에게 보낼 수는 없어!"

장 공주는 황궁 안에서든 밖에서든 언제나 부드럽고 교양 넘치게 행동해 왔다. 그래서 그 누구도 공주에게 이런 살벌한 면이 있을 줄 생각지도 못했다.

"공주마마시라면······ 폐하의 뜻을 꺾을 수 있었을 것 같습니까?"

자기도 모르게 자책, 원망, 개탄이 모두 섞인 음성으로 말하기 시작한 임약보가 말을 이어 나갔다.

"더군다나······ 폐하께서 신아가 제 딸인 걸 만천하에 공개하셨습니다. 그 말인즉슨, 그 아이는 명예롭지 못한 인생을 살 수밖에 없다는 뜻입니다."

장 공주의 음성은 이미 처량하게 변해 있었다.

"당신은 참으로 모질군요."

임약보는 상대방의 목소리에서 역겨워하는 기분을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이에 임약보가 혐오감을 드러냈다.

"공주마마께서 황실 금고와 관련된 일을 걱정하고 계신 거라면, 저는 이미 그 일은 신경도 쓰지 않고 있습니다."

장 공주가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당신이 신경 쓰지 않으면 누가 신경 써야 하는 거죠? 일개 아녀자의 몸으로 황궁에서 홀로 황실 금고를 지키는 게 쉬운 일인 줄 알아요?"

가마 안에 있는 임약보의 얼굴 위로 증오가 들끓었다.

"저에게 딸이 있어도 만날 수 없습니다. 우연히 황궁 연회에서나 먼발치에서 슬쩍 바라볼 뿐인데, 이게 아비란 자가 할 짓이냔 말입니까. 그러니 저라고 쉽겠습니까!"

장 공주가 슬픔과 괴로움 섞인 음성으로 변명하기 시작했다.

"어쩔 수 없는 일 아닙니까. 당시 당신과 사통하여 임신을 했습니다. 그래서 다시는 당신의 앞길에 누를 끼치지 않기 위해 혼자서 아이를 키웠습니다. 그리고 그동안 황궁에서 당신을 위해 일했습니다. 황실 금고에 있는 숨은 은전을 당신이 사용할 수 있도록 말입니다. 설마 이런 내 노력은 조금도 생각해 주지 않는 것입니까?"

재상의 가마에서 찬바람이 쌩쌩 도는 음성이 흘러나왔다. 얌약보가 나지막하게 소리를 질러 대기 시작한 것이다.

"제 앞길이요? 지금까지 제가 언제 제 뜻대로 앞길을 갈 수나 있었나요? 그때의 가난한 서생이 지금 일대 재상이 되었으니 겉으로 보기에는 위풍당당해 보이겠죠. 하지만 딸조차도 못 만나고 있습니다. 낳아 놓은 아들 녀석은······ 아들은······."

재상의 가마에서 떨리는 음성이 새어 나왔다.

"······잔혹하게 죽었습니다. 그런데 무엇이 제 앞길이고 제가 바란 일이란 말입니까. 단지 마마께서 원했던 권력일 뿐입니다. 공주마마는 영원히 출세할 수 없는 부마에게 시집오는 게 달갑지 않으셨겠죠. 평안하게 남은 생을 보내시면 그만이니까요. 설마 지금까지 해주신 일로 저에게 감사하다는 말을 듣고 싶은 건 아니시겠죠?"

재상의 말이 장 공주를 대로하게 만들었다. 이에 공주는 울먹이며 날카로운 음성으로 재상을 질책했다.

"임약보, 지금 이 자리까지 와놓고도 어찌 그런 막말을 하는 것이냐! 만약 네가 원치 않는 것이었다면, 옛날 너를 도찰원에 넣어 주고 급사중으로 임명했을 때는 왜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던 게냐! 너를 한림원에 넣어 줬을 때도 왜 괴로워하지 않은 거지? 이부 시랑의 실무 관리직에 들어가게 해줬을 때도 왜 자책하지 않은 거냔 말이다! 높은 자리로 올라갈 때는 내가 해준 것들은 기억도 안 하고 있다가 이제 와 조금 어긋나는 것이 생겼다고 내게 모든 분풀이를 하다니!"

"예아, 잘하셨소."

장 공주의 목소리가 커질수록 임약보의 목소리는 도리어 평온해졌다. 대신 그의 말에는 훨씬 더 깊은 원망이 담겨 있었다.

"그대가 이렇게 막돼먹은 여인이란 걸 잘 알고 있었소. 그리고 남은 평생을 슬퍼하면서 살 사람도 아니란 것도 말이오. 그런데 그런 당신 모습이 정말 역겹다는 거 알고 계시오?"

장 공주는 너무 화가 나 말문이 막혀 버렸다.

"신아의 혼사에 관해서는 제가 결정했습니다. 범한에 대해 관찰도 해봤고요. 어떤 사람인지를 떠나 적어도 쉬이 죽을 사람은 아닌 것 같더이다."

임약보가 냉정하게 말을 이어 나갔다.

"저는 제 딸이 과부가 되는 걸 원치 않습니다."

그러자 장 공주가 매섭게 비난했다.

"오늘 정신이 좀 어떻게 되었군요. 공이가 살해당하자 성급히 사남 백작가까지 끌어들이다니. 설마 진평평 그 늙은이가 한 말을 믿는 건 아니겠죠? 사고검씩이나 되는 인물이 무엇 하러 경도에 와 살인을 하겠습니까! 범건이 다 뒤에서 꾸민 일일지도 모르지 않습니까."

임약보가 차갑게 받아쳤다.

"죽은 사람은 제 아들입니다. 설마 제가 아들의 마지막 모습마저 보지 않았다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그 상처는 아무도 흉내 내지 못합니다. 사고검만이 낼 수 있는 예리함과 제멋대로인 느낌이 있었습니다. 설령 제가 틀렸다 하더라도 제가 거느리고 있는 사람이 잘못 봤을 리는 없습니다."

장 공주는 자신이 재상을 설득할 수 없음을 알자 목소리에서 힘을 빼고 애원하기 시작했다.

"내가 조사를 마칠 때까지 기다려 줘요. 당신이 날 동정하지 않아도 좋아요. 하지만 우리 신아만큼은 그 백작가에 시집보내서는 안 됩니다!"

한동안 침묵이 흐른 후 임약보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오백안이 제게 범한을 죽일 계획을 제안했었습니다. 저는 동의하지 않았지만 그 우둔한 공이 녀석이 동조했을 줄은 생각도 못 했습니다."

장 공주는 아무 말도 않았다. 상대방에게 자신이 이번 일과 무관함을 믿게 할 수 없다는 걸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오백안은 당신 사람입니다."

임약보의 차가운 음성은 밤바람에 흔들리는 가림막까지 얼려 버릴 기세였다.

"그자가 마마 사람인 건 예전부터 알고 있었습니다. 저를 감시하도록 붙인 사람이란 것도요. 하지만 제 아들이 당신 때문에 죽게 될 줄은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그러니 이제 그만합시다."

밤바람이 황궁 벽을 감싸 안고 불기 시작할 무렵, 푸른색 가마가 서서히 어둠 속으로 사라져 갔다. 그리고 남겨진 다른 가마 옆으로 등 하나가 힘없이 툭 떨어졌다. 가마 안에서는 여인이 훌쩍이는 소리가 들릴 듯 말 듯 새어 나왔다.

태감이 두려움에 덜덜 떨며 앞으로 나아갔다. 궁녀는 옆에서 등불을 들었다. 가마를 따라온 일행은 황궁의 측문 안으로 천천히 들어갔다.

가마는 한참 만에 장 공주의 임시 거처인 광신궁에 도착했다. 가마의 문이 열리고 눈물범벅이 된 장 공주가 가마에서 걸어 나왔다. 태감과 궁녀 몇 명이 서둘러 고개를 숙이고는 감히 고개를 들지 못했다.

장 공주가 무기력하게 돌계단 위로 올랐다. 그리고 얼굴에 묻은 눈물을 말끔히 닦아 내고는 느닷없이 예쁘게 생긋 웃었다. 그녀는 마치 버드나무 가지처럼 청초한 자태로 살짝 부끄러워하며 입을 열었다.

"모두 죽여 버려!"

그러자 몇 개의 날카로운 빛이 번쩍였다! 아직 살려 달라 애걸도 못 한 태감들에게 장 공주 옆에 있던 궁녀들은 순식간에 소매에서 칼을 꺼내 들고 그들의 목을 그어 버렸다. 한밤의 황궁, 제대로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죽은 시체들이 바닥에 널브러져 갔다.

* * *

재상가 저택은 규모 면에서 경도에서 제일 큰 곳은 아니었다. 하지만 호사스럽기로는 으뜸이었다. 정왕은 물론이고 대대손손 부를 쌓아 온 전릉후 가문도 재상의 저택을 따라오지 못했다. 정문과 장식물들은 겉으로 보기에는 전혀 호화롭지 않았다. 그래서 물건을 볼 줄 아는 이들만 한눈에 그 가치를 알아봤다. 화려함은 걷어 내고 실속 있게 고급스러움을 갖추고 있었다. 의자만 보더라도 의자 몇 개로 정왕 저택에 있는 드넓은 묘상(苗床)과 바꿀 수 있을 정도였다.

물론 황제 폐하의 저택은 비교 대상에서 뺀 것이다. 황제의 저택은 황궁으로 불리었으며, 그 누구의 것과도 감히 비교할 수 없는 대상이기 때문이다.

임약보는 20년이라는 짧은 시간에 이렇게나 많은 부를 축적했다. 그래서 세인들은 그가 탐욕스럽고 간사하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어째서 황제가 두 눈을 시퍼렇게 뜨고도 못 본 체하는 것인지 사람들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임약보는 대청으로 가 자신을 위로하러 온 문관들과 인사를 나누었다. 그러고는 낙담한 모습으로 안채로 들어갔다. 문관들은 재상 대인의 기분이 저조하니 귀찮게 하지 말자며 속속 인사를 하고 떠났다. 그리고 긴급히 처리할 공무가 남은 관원들은 초조하게 재상이 나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안채로 들어갔던 임약보가 마침 그들이 생각이라도 난 듯 다시 대청으로 돌아와 관리들에게 무슨 일 때문인지 물어보았다. 그러고는 억지로 기운을 내 급한 일들을 처리한 후, 힘없이 손을 흔들며 그들을 배웅했다. 관리들은 저택을 떠나면서 일 때문에 찾아온 자신들을 자책하면서도 재상에게 무언가 감명받았다. 비참한 일을 당한 재상이 공무 처리를 우선으로 하다니 그들에게 재상은 그야말로 국가를 위한 불세출의 동량이었다.

안채로 돌아온 재상은 서재로 향했다. 서재로 들어온 재상은 탁자 앞에 앉아 오랫동안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대인, 지금 동궁과 반목하는 것은 부적절한 것 같습니다."

재상의 가장 가까운 친구이자 사적으로 둔 책사 원굉도가 찻잔을 건네며 말했다. 원굉도는 소복을 입고 있었다. 그는 임약보가 억지로 견디는 것을 보고 마음 한구석이 절로 먹먹해졌다. 이에 그가 조언했다.

"그 일은 나중에 이야기해 드리죠. 대인께서는 우선 쉬셔야 합니다."

하지만 임약보는 머리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그의 주름에는 근심과 걱정이 짙게 깔려 있었다. 그런 그가 작은 소리로 말했다.

"일이 이리 되었으니 내, 조카들과 임씨 가문 사람들을 위해 여러 가능성을 열어 놓아야겠습니다."

원굉도는 잠시 이맛살을 찌푸리고는 재상이 부드러운 음성으로 하는 말을 듣고 있었다.

"내가 조정에 너무 오랫동안 있었습니다. 대체 얼마나 많은 이들에게 잘못했는지 모르겠군요. 아들 둘과 딸 하나 중에 공이가 인재가 되기만을 바랐거늘. 이렇게 비명횡사하다니. 이제 대보와 신아만 남았는데······ 그 아이들의 미래도 생각해 둬야겠지요."

원굉도가 다시 이맛살을 찌푸렸다.

"너무 갑작스레 변화를 주시는 것 같습니다."

임약보의 눈빛이 돌연 따뜻하고 부드러워졌다.

"아비 된 자로서 너무 몸을 사려서는 안 되겠어요. 하나 적자의 황위 계승을 꺼내기엔 폐하께서 아직 장년의 나이로 한창이시군요. 짐작건대 그 얘기를 꺼낼 수 있을 때가 되면 원 형과 나는 죽고 없을 테니 구태여 많은 걱정을 할 필요는 없겠지요."

임약보가 심호흡을 해 서늘한 공기를 들이마셨다.

"손에 쥔 권력으로는 아무것도 얻을 게 없다는 걸 알고는 있었지만, 사남 백작과 감찰원이 오랫동안 몰래 손을 잡아 왔으니 이왕 이렇게 된 거, 나까지 가세한다면 그들도 거절하지 못할 겁니다."

원굉도가 미소를 지었다.

"범건 시랑이 폐하와의 친분만 믿고 이번 혼사를 단번에 성사시킨 줄 알았는데, 생각해 보니 대인께도 일찌감치 마음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임약보가 미소를 지었다.

"그동안 그 범한이란 녀석을 직접 살펴보려 했습니다. 내 딸과 어울리는지 알아보려 말입니다."

원굉도가 중간에 끼어들었다.

"그렇다면 장 공주 쪽은······."

원굉도는 재상의 둘째 아들이 비명횡사한 이유는 장 공주가 세운 계략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음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장 공주를 입에 담을 때 아주 조심스러워했다.

"장 공주 이운예가 오백안에게 암살 계획을 세우도록 한 건 처음이었지만, 일거삼득의 계략이었어요. 우선 범한을 죽이면 그녀가 황실 금고에 대한 권한을 다시 쥘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 공이를 움직이게 하면 그걸 빌미로 재상가가 그녀 곁에 더 견고히 붙어 있도록 옭아맬 수 있고요. 그런데 이운예도 범한을 죽이기가 그리도 힘들 줄은 생각하지 못했을 겁니다. 그래서 오백안 그 개자식이 내 아이와 함께······ 죽은 거고요."

서릿발 같은 눈빛이 번쩍였다.

"하나 그녀에게는 여전히 요긴한 수단이 남아 있었어요. 폐하의 마음을 정확히 계산하고 있었던 겁니다. 애당초 정거수 일행이 경도에서 도망쳤다고 해도 아마도 이운예 자신이 재상인 척하며 내린 명령으로 창주에 있는 방휴를 죽이고, 이것으로 북제가 살인을 했다는 확실한 증거를 만들어 냈을 것입니다."

원굉도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고 보니 폐하께서 대규모로 병력을 동원하고 싶어 하신다는 걸 장 공주는 정확히 예측한 것 같습니다."

그러자 임약보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북벌이 한창일 때 폐하께서는 총력전을 펼치지 않으셨고, 그 때문에 일부의 성공만 거두셨어요. 지금도 그 점을 늘 아쉬워하십니다. 그러니 장 공주는 폐하께 좋은 구실을 제공해 준 것뿐입니다. 폐하께서는 장 공주가 직접적으로 참견하는 걸 좋아하지는 않으셔도 그녀의 호의는 기특하게 받아 주신 것이지요. 다만 옛날에 맺어 놓은 화약(和約: 평화 조약)은 이것저것 너무 복잡하게 얽혀 있으니, 폐하께서는 이번에 많아 봤자 소국 몇 개만 빼앗아 북제에게 본때를 보여 주시려 할 것입니다."

원굉도가 탄식했다.

"장 공주는 참으로 놀라운 지략가였군요. 정말로 대적하기 쉽지 않겠습니다."

임약보가 서서히 눈을 감았다.

"나는 그녀와 대적하겠다는 생각을 한 적이 없으니······ 젊은 사람들에게나 맡길까요?"

"알겠습니다, 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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