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6화 황제가 보는 앞에서 죄를 뒤집어씌우다
"재상 대인의 아들이 세상을 떠났으니 제가 이런 말을 하기 송구하옵니다만, 신하 된 도리로 어찌 감히 폐하를 속일 수 있겠나이까. 부디 폐하께서는 신이 멋대로 말한 죄를 용서해 주시옵소서."
황제가 이맛살을 찌푸렸다.
"어서 말을 해보시오."
진평평이 힘줄이 드러난 마른 손으로 주먹을 쥐더니 입가에 가져다 댔다. 그리고 가슴속에 있는 모든 가래를 게워 내는 사람처럼 몇 차례 기침을 해댔다. 기침을 마친 진평평은 담담하게 이야기를 시작했다.
"재상의 둘째 아들 임공이 살해당할 때 오백안과 함께 있었습니다."
"오백안은 누구인가?"
황제가 미간을 찌푸리며 재촉했다.
"조금 더 상세히 말해 보시오."
오백안은 경도 관리들 사이에서는 꽤 유명한 인물이었다. 그래서 지금 편전에 들어 있는 대신들 대부분도 그를 알고 있었다. 다만 그들은 오백안이라는 모사가 황태자와 2 황자 사이를 오가고 있다고만 알았을 뿐, 재상가 공자와 함께했다는 사실은 금시초문이었다. 이 순간 대신들은 또다시 재상 대인을 바라보았다. 대신들 입장에서는 걱정거리만 더 늘어나는 순간이었다. 만약 미친개인 진평평이 물고 늘어진다면 다 같은 문관으로서 체면이 말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한편 임약보는 여전히 벌겋게 충혈된 퉁퉁 부은 눈을 하고는 아무 걱정 없는 사람처럼 의자에 앉아 있었다.
"신이 얼마 전 범건 아들의 자객 사건을 조사하다가 사리리로부터 자백을 받아 냈습니다. 북제와 연락하고 있는 자가 바로 오백안이란 사실을 말입니다. 사사로이 서쪽 오랑캐 궁수를 경도로 들인 자는 순성사 참장 방달인이었습니다. 창주성 밖에서 죄인을 탈취하려던 기마대장은 방달인의 먼 친척이자 오주의 참군 방휴의 수하였고요. 그래서 정리를 해보면, 자객 사건을 기획한 자는 오백안이고, 집행자는 방휴와 방달인으로 북제 자객을 맞이하고, 살인하여 입막음하는 일을 했습니다. 하온데 궁수의 시체가 조사 전 모두 불탄 사건은 지금도 아무런 단서를 찾지 못했습니다."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이오?"
"신에게는 다른 의도가 없습니다. 다만 궁금할 뿐이지요. 왜 임 공자가 죽기 전에 범건의 아들 자객 사건의 주모자와 함께 창산 근처 장원에 있었는지 말입니다."
진평평이 말을 마치자 대신들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예부 상서 곽유지가 앞장서서 재상을 변호하기 시작했다.
"우선 사리리가 고문을 이기지 못하고 아무 말이나 했다는 건 차치하겠습니다. 어찌 되었든 오백안은 이전 사건에 연루된 자이니 말입니다."
곽유지는 황제를 향해 먼저 사죄를 올렸다.
"신이 잠시 마음이 급했습니다. 부디 폐하께서는 성은을 베풀어 주시옵소서. 사실 그 오백안은 20년 전에 진사가 되었습니다. 경도에서는 재주 많기로 유명해 많은 이들과 교제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임 공자도 그와 함께하는 일이 빈번했는데, 어찌 이와 같은 사실로 사자를 능멸할 수 있겠습니까? 재상 대인의 아들을 잃은 슬픔이 채 가시지도 않았는데, 진평평 대인은 이리도 근거 없는 말을 하시다니요. 참으로······ 너무하군요! 너무합니다!"
그러자 임약보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황제를 향해 허리를 굽혀 절을 했다. 그리고 침통해하며 말했다.
"우매한 자식이 매사 행동이 경솔하였고 그 때문에 뜻밖의 변고를 당하였습니다. 하오나 제 자식 놈에게 신하로서 불경한 마음이 있었다고 한다면 그 말은 믿지 못하겠나이다."
그가 계속 말을 이어 나갔다.
"그 오백안이란 자는 신도 만나 보았습니다. 참으로 재주가 많은 사람이기에 그와 함께 경도 주변에 있는 명승지도 함께 다녀왔습니다. 오백안과 친한 사이인데 그가 살인 사건을 저질렀다면, 그렇다면 신도 그와 같은 의심에서 자유로울 수 없을 것입니다!"
"맞습니다."
다른 대신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신 역시 오백안이란 자와 만나 본 적 있사옵니다. 그자의 사람됨은 매우 바른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런데 그자가 정말로 흉악하고 잔인한 자라 한들 그게 임 공자와 무슨 상관이란 말입니까? 그러니 진평평 대인은 자중하세요!"
임약보가 흥분하며 말했다.
"만약 신이 이번 일과 연관되어 있다면 하늘이 절 벌하실 겁니다, 하늘이요!"
재상이 이리 나오니 몇몇 대신들은 그를 따라 함께 무릎을 꿇었다. 그러자 황제는 의자에 앉아 턱을 괸 채 장난기가 가득한 눈으로 진평평을 힐끔 쳐다보았다. 잠시 후 황제가 표정을 차갑게 바꾸더니 신하들을 자리에서 일어나도록 했다. 황제가 정색을 하고 신하들에게 말했다.
"진평평이 이미 용서를 빌었소. 하나 그에게도 아직 할 말이 남아 있으니 우선 끝까지 들어 봅시다."
조정에서는 항상 지금과 같았다. 진평평은 늘 혼자였고 문관들은 꼭 자신들끼리 똘똘 뭉쳐 서로를 감싸 주었다. 진평평이 담담하게 임약보를 한번 바라보고는 말했다.
"재상 대인께서는 노여움을 거두시지요. 본관은 단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했을 뿐입니다. 감찰원이 경도를 매일 밤낮으로 수색했지만 오백안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귀댁의 공자가 그자와 포도나무 넝쿨 아래에서 술을 나누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저 역시 그 연유가 궁금했을 뿐입니다."
"오백안이 지난 자객 사건의 숨은 주모자란 사실이 그때는 알려지지 않았소. 그러니 그때 임 공자는 오백안과 함께 창산으로 가 풍경이나 감상하고 있었던 것일지 모르오. 진평평, 그러니 이 일에 대해서 그대는 차후 다시 논의하도록 하시오."
황제가 불쑥 차갑게 말을 던지며 진평평의 진술을 가로막았다.
황제가 자신들을 편들자 대신들은 한시름 놓았다. 하지만 임약보는 황제의 ‘차후 다시 논의하도록 하라’는 말이 심장에 꽂히며 몸에 한기가 들었다. 이 말은 곧 트집을 잡아 분풀이하지 말라는 황제의 경고였기 때문이다.
이는 일종의 거래 같은 것이었다. 명확히 말로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서로가 뻔히 아는 거래였다. 임약보는 아들 임공의 죽음과 백작가가 아무 관계가 없다는 원굉도의 판단을 믿고 있었다. 그래서 군말 않고 황제의 말을 받아들였다. 어쨌든 혹시라도 감찰원에서 오백안이 북제와 결탁했다는 사실을 믿고 추적이라도 해나간다면 이는 역모죄이므로 결국 임약보 자신은 재상 자리에서 쫓겨날 수밖에 없기 때문이었다.
"그대가 앞서 이 두 가지 사건이 원래는 하나라고 하였는데, 대체 왜 그리 말한 것이오?"
진평평이 무표정한 얼굴로 대신들을 쓱 둘러보았다. 대신들은 서늘한 독기를 품은 그의 눈빛이 무서워 불편한 듯 몇 차례 헛기침을 해댔다. 이윽고 진평평이 다시 입을 열었다.
"형부와 감찰원에서 죽은 자의 상처와 살해 현장을 조사했습니다. 그 결과 그들을 죽인 범인은 동이성의 사고검이 남기는 흔적과 같은 계통인 것으로 판단했습니다. 그래서 신은 두 사건이 본래 하나의 사건이라 한 것입니다."
‘사고검’, 이 석 자를 듣자 무공을 모르는 대신들도 모두 반응을 보였다. 그들은 앞서 창산 장원의 습격 사건에서 진평평이 범인은 하나이고, 아무도 모르게 고수 10여 명을 그것도 일격에 죽였다고 한 말이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다만 임약보만이 아무런 표정 변화가 없어 마치 진작부터 이 사실을 알고 있는 듯 보였다.
"뭐?"
황제가 미간을 찡그렸다. 세상의 지존인 황제에게 4대 종사는 별것 아닌 존재였다. 하지만 이 최강의 무공 고수들은 조정의 위엄을 위협하는 존재이므로 황제는 자연스레 불편한 기색을 드러낼 수밖에 없었다.
"범건의 아들이 죽인 자객 가운데 여자 자객 둘이 있었습니다. 감찰원이 조사한 내용을 보면, 그들이 동이성 사고검의 제자들인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다만 그들이 사고검의 제자인지 손제자인지는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한 달 전에도 사고검이 동이성에 없다는 감찰원 보고가 올라왔습니다. 그 검에 미친 자가 분명 경국으로 온 것입니다."
황제가 천천히 눈을 감으며 차가운 음성으로 물었다.
"그는 왜 범가네 자식을 죽이지 않고 도리어 오······ 오백안을 찾아간 것이오?"
"세상 사람들 모두 사고검 그자가 검에 미친 자인 걸 다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의 문하에 있는 제자들은 누군가를 암살하려다 도리어 반격을 당해 죽었습니다. 짐작건대 그는 상대방의 실력이 대단하다고 탄복했으면 했지, 원수로 보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게다가 그자는 음모니 계략이니 하는 것을 가장 싫어해, 제자들에게도 나라 간 싸움에 끼어드는 것을 엄격히 금하고 있습니다. 만약 오백안이 무언가 좋은 것을 주겠다고 약속해 두 여자 자객을 꼬여 내지 않았다면 그 둘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니 사고검은 오백안을 진짜 원수로 간주했을지도 모릅니다."
진평평은 참으로 담담하게 말해 나갔다. 거짓말을 하고 있는데도 낯빛 하나 변하지 않은 채 말이다.
한참 후, 황궁의 편전 안에서 경국 황제의 위엄 있는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경도부 윤매가 죄를 청하는 상소를 올렸다. 이에 1년 동안 직위를 강등해 감봉 처분하시오. 감찰원은 순성사에 머물며 조사하고, 순성사의 초자항을 면직하시오. 형부는 이 두 사건을 계속 수사하여 처리할 것이며, 매듭이 지어지면 동이성으로 범인을 인도하라는 조령을 내리시오."
말을 마친 황제는 앞으로 나아가 임약보에게 몇 마디 위로의 말을 건네고는 편전을 떠났다.
대신들도 모두 나가자 궁녀 하나가 나와 진평평의 의자를 밀고 내궁으로 들어갔다.
대신들은 이번 일을 겪으면서도 전혀 놀라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진평평처럼 황제의 은총을 받을 날이 있을 거란 환상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에 그들은 크고 작은 일에서 똘똘 뭉쳤고 감찰원 세력에 대항했다. 이는 곧 황제의 사적인 세력에 대항하는 것과 같았다. 그런데 이런 대항은 경국이 건국된 이래 문관들이 지니고 있던 전통적인 생각이기도 했다. 그래서 뇌리에 굳게 뿌리박힌 것이라 절대 사라지지 않을 행동이기도 했다.
대신들은 더 나아가 악독한 상상을 하기도 했다. 이 미친개 같은 진평평이 몸이 불구여서, 또 대를 이을 자식이 없어서 폐하가 이처럼 무한한 신임을 보여 주는가 보다, 하고 말이다!
* * *
조용하고 깊은 황궁 안, 이곳에는 태감도 궁녀도 없었다. 오직 황제와 진평평만 서로를 마주하고 앉아 있을 뿐이었다.
황제가 찻잔을 들어 한 모금 들이켰다. 그런데 차 온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나 보다. 이맛살을 찌푸리더니 찻잔을 진평평의 바퀴 달린 의자 앞으로 내동댕이쳤다. 찻잔은 쨍그랑, 하는 소리와 함께 산산조각 났고 그 파편이 여기저기로 튀었다.
찻물이 진평평의 바짓가랑이를 적셨다. 다리가 불편한 진평평은 황제가 집어 던지는 찻잔을 피할 수 없었던 것이다. 아까 대신들 앞에서와는 달리 황제는 유난히 차갑고 위압감 넘치는 음성으로 말했다.
"사고검이라고? 참으로 황당한 해결책이구나!"
진평평은 마치 지금까지의 일을 전혀 보지 못했다는 듯 활짝 웃으며 대단히 공손히 대답했다.
"신이 어찌 황제 폐하를 속이겠나이까. 날카로운 상처 자국 안에 갈피를 잡을 수 없는 느낌이 보이기에 형부와 감찰원에서 모두 같은 결과를 내렸사옵니다."
황제가 입꼬리를 올리고 웃으며 진평평을 잠시 바라보는데 그의 눈에서 별안간 이상한 빛이 번뜩였다. 그러고는 큰 소리로 물었다.
"오가(家)는 지금 경도에 있느냐?"
진평평이 천천히 머리를 들어 입을 벌렸다. 하지만 한참이 지난 후에야 대답을 했다.
"그렇사옵니다. 오죽 대인은 지금 경도에 있습니다."
황제는 조금 지쳤는지 미간을 문지르며 담담하게 말했다.
"대체 짐을 어디까지 속일 작정이었느냐!"
그러고는 탄식하며 말을 이어 나갔다.
"됐다. 네가 감히 짐까지 속이려 드니, 천하를 속일 수 있겠구나. 그자들에게 절대 오죽의 존재를 알게 해서는 안 될 것이다."
"알겠습니다."
진평평이 공손하게 대답했다.
"그 두 여자 자객은 정말로 사고검의 문하더냐?"
"그렇사옵니다."
황제가 느닷없이 미간을 찡그렸다.
"그 사고검이란 자가 정말로 복수하기 위해 범건의 아들을 죽이지는 않겠지?"
"일대종사입니다. 그러니 어느 정도 체면이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아직도 동이의 검 구덩이 안에서 수련하고 있는 중입니다. 범한이 동이성에 가지만 않으면 됩니다. 게다가 그 일은 역시 소신이 처리하고 있는 중입니다."
"알겠다. 전날 밤 그 일들에 관한 이야기를 끝맺지 못했으니 오늘 이어서 이야기하자꾸나."
황제는 피로를 풀기 위해 눈을 반 정도 감은 채 진평평에게 물었다.
"그리 오랫동안 경도로 돌아오지 않은 건 어사들의 상소가 두렵지 않아서였겠지. 하나 짐은 천하 백성과 신하들이 하는 이야기를 두루 들어 봐야 한다. 짐의 결정이 불만스러워 네가 짐에게 심술을 부리는 중인 걸 다 알고 있었다."
진평평은 오른손 새끼손가락 손톱을 살살 문지르고 있었다. 그런데 그의 이런 행동은 긴장해서인지 흥분해서인지 구분을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주름이 가득한 그의 얼굴은 여전히 무척이나 평화롭기만 했다.
"이번 사건 발생 후, 재상이 앙심을 품을 것으로 보입니다. 비록 그가 사고검이 한 짓이라고 믿기는 하겠으나, 그래도 자신의 아들이 범건의 아들 때문에 죽었다고 생각할 터이니, 이번 혼사는······ 아무래도 글렀겠지요!"
그러자 황제가 조용조용 말했다.
"내 보기엔 괜찮을 것이다. 정왕도 이미 입궁해 있어. 왜인지는 모르겠으나 그는 고 녀석을 좋아하더구나. 정왕이 관여치 않는다고 생각하지 말거라. 만약 그가 누군가를 보호하려 든다면, 이 조정에서 아무도 그자를 건드리지 못하니 말이다. 게다가 임약보도 총명한 사람이니 아들 임공이 죽은 이상 누군가는 믿어야 하겠지. 20년 후에는 조금 더 똑똑한 결단을 내려야 할 텐데 말이야."
"정왕 말씀이십니까?
진평평이 조금 의외라는 듯 반응했다.
"물론 정왕은 그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더군. 그래서 정왕과 고 녀석이 왜 친한 건지 모르겠단 말이야."
황제가 탄식하며 말을 이어 나갔다.
"어쩌면 모든 게 운명일 수도 있겠군."
황제의 이 말은 언젠가 이들이 겪었던 아픔을 건드린 것 같았다. 이에 황제와 신하는 동시에 약속이라도 한 듯 침묵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