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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여년-84화 (84/1,108)

084화 쓰러진 포도나무 넝쿨

하지만 상황은 여전히 그의 통제하에 있었다. 방달인 참장을 이미 죽여 입막음을 했으니, 감찰원에서 배후가 자신이란 것을 밝혀 냈을지라도 재상을 의심해 조사하지는 못할 게 뻔했다. 그래서 오백안은 임공에게 서둘러 경도로 돌아가도록 한 것이었다.

임공이 그의 말을 듣지 않고 웃으며 말했다.

"제가 이 장원을 꾸린 지 꽤 오래되었습니다. 그러니 황궁 호위병이나 감찰원 사람이 온다 한들 이곳에서 누군가를 체포해 가기란 쉬운 일이 아니지요. 더군다나 선생과 제가 이처럼 은밀히 만나고 있으니 우리 두 사람이 여기에 있는 줄 누가 알겠습니까?"

오백안이 생각을 해보더니 과연 그의 말이 맞는 것 같아 마음을 놓았다. 그런데 기질상 모사의 풍모를 버리지 못했는지 포도나무 넝쿨 아래에서 부채질을 하기 시작하더니 웃으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 포도나무 넝쿨은 이리도 우아한데 갑자기 재미난 이야기가 생각나는군요. 아내를 무서워하는 한 관원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그가 집에서 아내에게 빰을 꼬집혔답니다. 그가 다음 날 관아로 갔더니 태수가 무슨 일이냐고 물었지요. 그러자 관원이 매우 난처해하며 대답을 했습니다. 그가 말하기를, 어젯밤에 바람을 쐬다가 포도나무 넝쿨이 갑자기 넘어져 얼굴에 상처를 입었다고 했답니다. 태수가 크게 노하여 호통을 쳤습니다. "분명 네 집에 있는 막돼먹은 여자가 한 짓이 아니냐! 어찌 이런 일이! 어서 저자의 처를 잡아 오너라!"라고 했답니다. 그런데 이때 모든 이야기를 몰래 듣고 있던 태수 부인이 불쑥 나타나 화를 내며 대놓고 태수에게 호통을 쳤답니다. 황당해진 태수가 서둘러 관원에게 이렇게 말했답니다. "이만 물러가 있거라. 우리 집 포도나무 넝쿨도 무너진 것 같구나."라고 말이지요."

오백안의 이야기가 끝나자 두 사람 모두 소리를 내 웃기 시작했다. 임공도 이 이야기를 들어 본 적 있었지만 이번에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다른 의미를 잡아 냈다. ‘설마 오 선생이 우리 아버지께서 어머니를 무서워하는 걸 조롱하는 건가?’라고 말이다. 그런데 그의 어머니는 일찍 죽었으니······ 그렇다면 설마 재상이 장 공주를 무서워하고 있단 말인가.

임공과 오백안이 앉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았지만 분명 누군가가 이곳으로 잠입해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밖을 지키고 있던 고수들은 분명 이 쇠막대기 아래에서 죽었을 것이리라. 장원에 있는 고수들이 죽으면서 비명 한 번 지르지 못하다니! 임공은 몸에 한기가 들기 시작하고 두려움에 부들부들 떨며 소리쳤다.

"누구냐! 할 말이 있으면 말로 하거라!"

오죽은 그의 말에 답하지 않았다. 대신 귀신처럼 장원 한쪽 끝에서부터 그를 향해 질주해 왔다.

임공이 크게 소리를 지르며 허리 두르고 있던 검을 빼 들고는 오죽의 머리를 향해 휘둘렀다.

오죽이 살짝 몸을 틀자 검 끝이 그의 몸을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오죽의 몸은 이미 임공의 얼굴 앞으로 바짝 다가와 있었다. 두 사람이 바짝 붙어 있는 모양은 누가 봐도 기괴할 정도였다.

그리고 불쑥 푸웁! 하는 소리가 났다

임공의 등 뒤를 뚫고 나온 쇠막대기에서 붉은 피가 뚝뚝 떨어졌다. 그는 자기 앞에 선 검은 천으로 눈을 가린 사람을 겁에 질려 이해할 수 없다는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자신은 당당한 재상의 아들인데, 어떻게 자신에게 말할 기회조차 주지 않고 곧바로 죽여 버리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쇠막대기는 오죽이 임공에게 다가가기도 전에 그의 몸을 꿰뚫었다. 오죽이 그의 몸에 밀착된 순간에 임공은 남은 힘으로 마지막 몸부림을 치고 있었다. 그러자 가슴을 관통한 쇠막대기를 타고 임공의 시체가 앞으로 미끄러졌고, 쇠막대기는 뒤로 더 길게 빠져 나오게 되었다. 참으로 끔찍하고 무서운 광경이었다.

척! 하는 소리와 함께 오죽이 임공에게 꽂혀 있던 쇠막대기를 뺐다. 그러자 임공의 가슴에서 피가 분수처럼 뿜어져 나왔다. 매우 느긋하게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는 오죽은 벌써 옆으로 세 발자국이나 이동해 쏟아지는 피를 피한 상태였다.

쇠막대기는 심장을 정확히 관통해 작은 구멍을 내 놓은 상태였다. 이에 핏물은 그 구멍을 통해 마치 꽃이 피어나듯 아름답게 뿜어져 나왔다.

이 피비린내 나는 1막을 보고 있던 오백안은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그는 자신의 입을 틀어막고 아무런 소리도 새어 나가지 않도록 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그는 상대방이 눈을 검은 천으로 가리고 있는 것을 보고는 그가 맹인임을 알아차렸다. 이에 임공이 죽은 틈을 타 도망치려 했다.

오죽이 살짝 고개를 갸우뚱하더니 몸을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그 순간 오백안은 강렬한 절망감에 휩싸였다. 하지만 처참하게라도 웃음을 지으며 최대한 침착하게 말하려 애썼다.

"나는 재상의 사람이 아닙니다! 장수님, 다른 사람을 위해 목숨 바쳐 일하는 건 앞날을 위해서도 좋은 일이 아닙니다. 이 오백안이라는 늙은이는 경도에서 교류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만약 장수님께서 큰 뜻을 품으셨다면, 아니면······."

오백안이 갑자기 하던 말을 멈추었다. 그러고는 아주 난처하다는 듯이 고개를 숙여 자신의 울대뼈를 관통한 쇠막대기를 바라보았다.

그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이 자객은 왜 자신의 말을 끝까지 들으려 하지 않는 것일까. 자신은 연약한 서생이라 아무런 위협도 되지 않는데 말이다. 더군다나 자신은 실책 따위는 없었던 모사이고, 더욱이 말재주는 천하무쌍해서 이 눈먼 자객이 자신의 말을 끝까지 들어 준다면 자신을 죽이지 않았을 터인데. 게다가 자신은 남은 생 동안 해야 할 큰일들이 아직 많이 남아 있으니 이렇게 죽을 수는 없었다.

그러나 모사 오백안은 이렇게나 쉽게 죽어 버렸다.

* * *

오죽은 30여 년을 살면서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게 있었다. 동이성에서도, 북제에서도, 경도에서도 그리고 이곳에서도 대체 왜 자신이 죽이려는 사람은 쉬지 않고 무언가를 말하는 것일까. 이와 관련해 예전에 아가씨가 오죽에게 다음과 같이 말해 주었다.

―칼이 말보다 훨씬 힘이 세서 그래.

오죽은 자신이 아가씨의 말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왜 세상 사람들은 이와 같은 진리를 아직까지 모르고 있는지 그게 이해가 되지 않았다.

오죽은 오백안에게서 쇠막대기를 거둬들였다. 그러고는 쓸쓸하게 장원 밖으로 걸어 나갔다.

그가 떠난 후, 포도나무 넝쿨은 쩌걱, 하는 소리와 함께 쓰러졌다. 오죽이 빠르게 이동하면서 만들어 낸 살기를 이기지 못한 탓이었다. 넝쿨이 쓰러지자 짙푸른 잎들이 두 구의 시체를 어지럽게 덮어 버렸다. 그리고 오래된 등나무 넝쿨도 함께 쓰러져 시체를 덮어 버렸다.

* * *

며칠이 지나도록 감찰원에서는 아무런 소식도 들려오지 않았다. 그런데도 목철은 그사이 한차례 범한에게 찾아가 아부 작전을 펼쳤었다. 하지만 이때 범한은 유명하지는 않지만 실력이 대단한 오백안이란 모사가 종적을 감춘 상태라 기분이 좋지 않은 상태였다. 그래서 목철이 손바닥으로 범한의 다리를 가볍게 토닥였을 때 범한은 오히려 자신을 무겁게 내리치는 것처럼 느껴졌다. 이로써 목철은 범한에게 좋은 인상을 남기는 데 실패하고 말았다.

사남 백작이 은밀히 움직이는 세력들까지 조용히 수색대로 합류했다. 하지만 역시나 아무런 수확을 거두지 못했다. 더군다나 왕계년이 온통 회색 분장을 하고 진행하는 추적도 실패로 끝나자 범한은 잠시 오백안을 머릿속에서 지울 수밖에 없었다. 대신 누이동생, 서점, 닭 다리 등 비교적 밝고 긍정적인 단어들을 억지로 떠올리며 오죽 아저씨가 어떻게 나올지 인내심을 갖고 기다리기로 했다.

오백안의 일을 잠시 잊기로 마음먹은 그날 오후였다. 범한은 억지로 기운을 차려 범약약과 범사철을 데리고 정왕부에 갔다. 그런데 그날따라 정왕이 없었다. 이에 세자 이홍성이 어쩔 수 없다는 듯 말했다.

"부왕께서 오늘 입궁하셨다네. 황태후께서 뵙자고 하신다고 들었네."

범한은 그냥 하하하 웃으며 다른 생각을 하지 않으려 노력했다.

범한과 이홍성은 초여름의 더위를 피해 후원에 있는 차양 아래로 가 과일을 먹으며 대화를 나누었다. 몇 사람이 함께 있는 자리였지만 모두들 낯선 사이가 아니었다. 군왕의 막내딸, 그러니까 예전에 범한이 흥미를 가졌던 유가 군주도 그곳에 있었지만 모두들 그 자리를 피할 이유가 없었다.

범한은 이 어린 군주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다가 순간 두려워졌다. 예전에 누이동생 범약약과 《석두기》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다가 범한이 《석두기》 작가라는 걸 안 유가 군주가 자신과 사랑에 빠진다거나, 자신을 흠모하게 된다거나 하는 환상을 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유가 군주를 직접 본 후로 범한은 그런 불경한 생각들을 모두 끊어 버렸다.

군주는 아주 예뻤다. 작은 얼굴에 볼은 발그레했다. 게다가 매우 온화하고 예절 바른 사람이었다. 또한 범한이 이 세계로 온 후 만난 여인 중 가장 온화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범한은 코를 하늘 높이 치켜든 채 이 군주에게는 조금도 눈길을 주지 않았다.

그녀는 이제 겨우 만 열두 살이었다. 즉 순수하기 그지없는 풋과일에 불과했으니 범한에게는 아직 어린애라고밖에 할 수 없는 나이였다. 범한은 다정한 사람이기는 했지만 난잡한 난봉꾼은 아니었다. 그래서 열두 살 먹은 아이를 두고 이상한 상상을 한다는 것 자체가 그에게는 공포로 다가왔고 또한 그런 생각은 절대 하지도 않았다.

그런데 무서워하는 것일수록 자신에게 달라붙는다는 말이 있듯이, 유가 군주는 오늘 범약약 곁에 얌전히 앉아 자기도 모르게 계속해서 범한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리고 범한을 바라보는 커다란 눈동자에서 간간이 부끄러워하는 기색이 여실히 드러나 범한은 걱정, 당황, 심란, 두려움에 떨어야 했다.

범사철은 활을 든 왕부의 하인들이 데리고 나갔고 범한과 세자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일들을 가지고 대화를 나눴다. 그리고 두 낭자는 작은 소리로 자신들만의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범한이 난처한 기분이 들 무렵, 왕부 하인 하나가 급히 걸어 들어와 이홍성의 귓가에 무언가를 말했다. 그러자 이내 이홍성의 낯빛이 변하더니 그가 의심의 눈초리로 범한을 바라보았다.

"무슨 일이라도 났답니까?"

범한이 차양을 바라보며 미소를 지은 채 말을 이어 나갔다.

"왕부의 포도 넝쿨은 정말 멋지게 세워 놨습니다. 그런데 웃긴 이야기 하나가 생각나는군요."

그런데 세자는 범한이 여인들 앞에서 자신의 재주를 뽐낼 기회를 주지 않았다. 그는 무거운 표정으로 범한을 한쪽으로 끌고 가 작은 소리로 속삭였다.

"일이 터졌네."

"무슨 일인데 그러십니까?"

범한은 분명 무언가 중대한 일이 터졌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이홍성 이 녀석이 이렇게 서두르지 않았을 테니 말이다. 하지만 범한은 억지로 웃으며 말을 이어 나갔다.

"왕부의 포도 넝쿨이 쓰러지지 않았다면 그걸로 됐습니다."

그런데 말하고 나니 이상했다. 이미 혼인을 할 나이가 지난 이홍성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아직까지 아내를 맞이하지 않은 상태였다.

"자네와 그런 장난 같은 말을 할 때가 아니네."

이홍성이 심각한 얼굴로 계속 말했다.

"어제 창산 아래에 있는 장원에서 살인 사건이 일어났네. 오백안과 재상의 둘째 공자 임공이 모두 죽었어."

범한이 깜짝 놀라 이홍성에게 되물었다.

"뭐라고요?"

이홍성이 대답했다.

"자네의 미래 처남이 죽었다고!"

범한은 순간 복잡한 친척 관계며 호칭 같은 것은 떠오르지도 않았다. 그냥 경황이 없는 상태로 상황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오백안의 죽음은 이미 예견하고 있던 터였다. 하지만······ 만약 오죽 아저씨가 손을 쓴 게 아니라면 다른 사람이 그의 입을 막기 위해 나섰다는 건데. 그런데 어떻게 재상의 둘째 아들까지 살해당한 거지?

그는 자신의 몸값이 처남이 될 사람에 훨씬 미치지 않는다는 걸 너무나도 잘 알고 있던 터였다. 그런데도 오백안과 처남이 같이 죽었다니! 그렇다면 지난번 자신을 살해하려던 사람이······ 설마 장인어른이 되실 재상이라고?

범한은 아직 만나보지도 못한 처남에게 아무런 감정이 없었다. 하지만 이후 따라올 일들을 생각하니 조금 골치가 아팠다. 그러다 마음이 조금 안정되자 세자에게 물어보았다.

"어떻게 죽었다고 합니까?"

이홍성은 두 사람이 발견되었을 당시 현장 상태에 대해 범한에게 이야기해 주었다. 그 장원은 매우 외진 곳에 있었기 때문에 원래 이 무서운 살인 사건은 훨씬 더 후에나 발견되어야 했다. 그런데 사건 발생 사흘째 되는 날이 마침 그곳에 관리가 소식을 전하는 날이라, 장원에 들어간 이가 시체 여러 구를 보고 깜짝 놀라 상부 기관에 보고한 것이었다. 그리고 사망자가 재상의 아들과 특별 신분이었던 오백안이어서 이 소식이 경도부와 형부를 통해 곧장 황궁으로 전해진 것이다.

그리고 정왕은 오늘 입궁했다가 우연히 이 소식을 듣고는 황궁 내 친한 태감에게 부탁해 세자에게까지 알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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