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경여년-83화 (83/1,108)

083화 지울 수 없는 흔적

또 오랜 시간이 흘렀다. 범한은 포기한 사람처럼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고는 떠나기 전 사리리에게 마지막 한마디의 말을 남겼다.

"네가 그 두 손을 들고 있는 모습이 마치······ 귀여운 강아지 같구나."

이런 상황에서 적국의 첩자에게 그와 같은 조롱을 던지다니. 이 일을 계기로 왕계년은 범한 공자가 정신이 살짝 이상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범한은 자신이 이상한 짓을 했음을 의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의 입장에서는 단지 무의식적으로 어떤 말이 튀어나왔을 뿐이다. 물론 자신도 아무렇게나 내뱉은 말이 어떤 결과를 낳을지, 또 자신에게 어떤 일이 벌어질지 전혀 알지 못했다.

사리리는 범한이 자신을 귀여운 강아지 같다고 하자 정신이 살짝 멍해졌다.

이내 그 누구도 생각지 못한 일이 벌어졌다. 이 여자 간첩은 이내 풉!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실소가 터져 나온 후 그녀의 표정에 변화가 있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그녀는 정신적으로 매우 편안한 상태인 것 같았다.

웃음이 터져 나온 후 모든 부담을 벗어 버리고 그동안 꼭꼭 숨어 있던 껍데기에서 조심스럽게 생존을 갈구하기 시작한 것 같았다. 그리고 따뜻한 물에 온몸을 담근 것처럼 편안해지자 그동안 살아오면서 누렸던 아름다운 순간들을 간절히 그리워하는 것 같았다.

사리리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창백한 입술을 달싹이며 세 글자를 말했다.

"오 선생."

범한은 ‘오 선생’이란 이름을 똑똑히 듣고서는 잠시 멍하니 있었다. 그러다 이내 왕계년을 바라보니 그도 자신도 들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범한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자 기분이 살짝 들뜨는 것 같았다. 범한은 손을 철창 안으로 집어넣었다. 그리고 사리리가 의아하게 보고 있는 가운데 건초 더미 위에 독약인 척 놓여 있는 작은 병을 집었다. 그는 병을 집어 들고는 사리리를 향해 고맙다는 한마디만을 남긴 채 곧장 몸을 돌려 자리를 떠났다.

사리리는 이제야 상황 파악이 되었다는 듯이 피로 물든 두 손으로 철창을 움켜쥐고는 떠나가는 이의 뒷모습을 보며 처참하게 소리쳤다.

"잊지 마세요, 공자님! 조상님의 명예를 걸고 한 맹세입니다!"

육중한 철문이 다시 조용히 닫히자 감찰원 감옥 안에는 다시 고요함과 흐릿한 어둠만이 남았다. 이곳에 있는 범인들은 며칠 버티지 못하고 황천길로 보내지는 터라 감옥 안에 남아 있는 범인은 그리 많지 않았다. 그래서 이 시각 통로 가장 깊숙한 곳, 그곳에서 간간이 흘러나오는 울음소리는 너무나도 구슬프게 그리고 너무나도 똑똑히 들려왔다.

* * *

잠시 후 간수가 바퀴 달린 의자를 매우 공손히 밀며 밀실 안으로 들어갔다. 의자 위에 앉아 눈을 감고 정신을 가다듬고 있던 진평평이 느닷없이 눈을 부릅뜨고는 물었다.

"내가 뽑은 제사가 어떠하더냐?"

당연히 범한을 두고 한 말이었다.

간수가 잠시 생각을 해보고는 대답을 했다.

"손은 매섭고 마음도 독하더군요. 그래도 아직 반만 독합니다."

"어떻게 반만 독하다는 것이냐?"

"손은 매서울지 몰라도 부드러운 기질을 가진 청년이었습니다."

진평평이 미소를 지었다. 그의 늙은 얼굴 위로 안도가 흘러나왔다.

"그 정도면 됐다. 그 정도면 됐어. 마음은 따뜻하되 행동이 악랄한 것이 마음은 악랄하고 행동이 굼뜬 것보다는 훨씬 낫구나. 어설퍼도 결국에는 사리리에게서 정보를 얻어 냈으니 말이다."

간수가 차분하게 물었다.

"사리리는 어떻게 처리할까요?"

진평평이 잠시 생각을 해본 후 담담하게 말했다.

"잠시 지켜보자꾸나. 만약 우리 사람이 될 것 같으면 시험을 해보는 거야. 시험에서 불합격하면 그때 죽이는 걸로 하지."

"범 제사에게는 알릴 필요 없을까요?"

"나는 지금 그에게 감찰원을 넘겨줄 준비를 하고 있는 거야. 하지만 아직은 그럴 능력이 없으니 너무 많이 알 필요도 없겠지."

"알겠습니다."

간수가 대답하고는 진평평에게 전달 사항을 말했다.

"1처에서 이미 출발 준비를 마쳤답니다."

진평평이 두어 번 기침을 했다. 이 시각 조정의 문무백관들은 그가 황궁 안에 있다고 생각할 뿐 중죄인을 모아 놓은 감옥에 와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 하고 있었다. 진평평은 힘겹게 몇 차례 기침을 더 하고는 간수에게 밖으로 데려다 달라고 했다. 그런 후 잠시 눈을 감고 있다가 무언가를 말했다.

"그 오 선생이란 자는 참장 방달인을 죽게 만들었으니 벌써 경도를 떴을 것 같군. 어쩌면 이미 놓쳤을지도 몰라."

간수가 어깨를 으쓱했다. 그는 과거 7처 사무를 주관하던 수장이었다. 그래서 1처의 일 처리에 대해 무시하고 있었다. 게다가 그에게 조사하는 일은 아무런 재미도 없었기에 그는 오 선생이란 자를 체포할 수 있을지 여부에 대해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 다만 긴 터널을 바라보며 아직도 더 가야 한다는 걸 생각하니 머리가 살짝 아파 왔다.

"원장 대인, 다음에는 이렇게 몰래 엿들으러 오지 마십시오. 이 바퀴 의자는 정말 밀고 가기 힘듭니다."

간수의 불평을 들은 진평평이 잠시 웃음을 터뜨렸다.

그는 오늘 황궁에서 나오자마자 이곳으로 왔다. 이미 고인이 된 자의 아들이 지금은 어떤 모습으로 자랐고, 또 자신이 준비해 놓은 모든 걸 이어받을 준비가 되어 있는지 한번 보고 싶어서였다. 외양간 거리에서 발생한 자객 사건에 대해 진평평은 오죽과 마찬가지로 별것 아닌 일로 치부하며 전혀 걱정하지 않았다. 그래서 만약 범한이 그 자리에서 죽어 버렸다고 해도 진평평에게는 그리 걱정할 일이 아니었다. 오히려 범한이 이번 사건을 처리하면서 보여 준 행동과 기질이야말로 진평평에게는 훨씬 중요한 부분이었다.

다시 말해 이번 일은 범한에게 주어진 작은 시험이었다.

* * *

범한은 이와 같은 사실을 전혀 모른 채 왕계년과 함께 서둘러 중범죄자 감옥을 나섰다. 범한은 왕계년을 통해 오 선생이 경도에서 유명한 모사(謀士)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는 2 황자와 황태자 사이를 오갔지만 어떤 뚜렷한 노선을 정한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하지만 소문에 따르면, 조정과 관리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사건의 배후에는 이 중년 남자의 무서운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범한이 미간을 살짝 찌푸리자 잘생긴 얼굴에 약간 진중함이 묻어났다. 상대방이 늙은 여우라는 사실을 알게 된 이상 모든 경로를 차단해야만 했다. 하지만 그가 벌써 어느 산속으로 들어가 꼭꼭 숨어 버렸을 수도 있었다. 이른바 모사라는 사람들은 일단 숨어서 칠팔 년을 기다리고 있다가 사건이 거의 잊힐 만하면 거들먹거리며 뛰쳐나오는 걸 좋아하지 않던가. 그러고는 뱃속 가득 고여 있던 썩고 더러운 물들을 계속해서 뿌리고 다니고 말이다.

"사리리 말이 진짜인지 어떻게 확신하십니까?"

왕계년이 범한에게 물었다. 그러자 범한이 차분하게 설명했다.

"아주 간단합니다. 오백안이란 자가 만약 아직도 경도에 있다면 그건 분명 사리리가 말한 자가 아닐 것입니다. 만약 오백안이 벌써 도망갔다면 분명 사리리가 말한 자가 맞는 것이지요."

매우 간단한 판별법이었다. 이 세상에 있는 수많은 일을 보면 대개 사람들의 어리석은 판단 때문에 복잡하게 꼬여 버린 경우가 허다했다. 그러니 범한이 내놓은 것은 어쩌면 사건의 진상에 가장 근접한 해답일지도 모른다.

왕계년이 다시 긴장하며 질문을 던졌다.

"그렇다면 정말로 사리리를 놓아줄 생각이십니까? 대인, 지금 대인께는 그만한 권한이 없습니다. 그리고 조상님까지······."

감찰원 사람들은 귀신을 공경하지도 무서워하지도 않았지만, 조상에게만큼은 무한한 존경심을 지니고 있던 터였다.

범한은 왕계년의 물음에 답을 하지 않았다. 그저 마음속으로만 이 세상에 계신 조상님은······ 자신과 큰 관계가 없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범한은 이번에는 자신이 나설 차례가 아니란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왕계년에게 오 선생 일을 1처에 알리도록 했다. 목철이 범한의 신분을 알고 있으니 분명 왕계년이 하는 말을 믿어 줄 거라 생각했다.

두 사람이 헤어질 때 범한은 골목 어두운 곳을 향해 아래턱을 매우 조심스럽게 끄덕였다. 그리고 골목에 숨어 있는 사람에게 오백안이라는 이름이 맞는지 다시금 확인했다.

지시를 마친 범한은 느긋하게 집으로 돌아와 담을 넘어 집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가만히 자신의 침대에 몸을 누이고 내일 듣게 될 소식을 기다렸다.

감찰원으로 돌아간 왕계년은 너무나 놀라운 광경을 보고야 말았다. 1처의 동료들이 이미 출동할 준비를 마치고 대기 중인 게 아닌가. 그런데 왕계년을 향해 목철이 살며시 웃음을 지어 보였다.

범한은 밤이 되자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집안사람들과 인사를 나누었다. 그리고 아버지께 부탁해 만든 밀실에 들어가 품에서 단단히 밀봉해 놓은 작은 가죽 주머니를 조심스럽게 꺼내 들었다. 그리고 다시 작은 파란색 병 안에 든 것을 그 가죽 주머니에 쏟았다. 이 병은 푸른색을 띠는 청사(淸砂) 공예품으로, 구멍이 일반 도자기보다 커 향이 은은하게 나는 미향을 담는 데 제격이었다.

사리리의 경계심을 늦추기 위해 그야말로 많은 공을 들였다. 범한은 벽 한 귀퉁이에서 옹기를 꺼내 뚜껑을 열었다. 그러자 코를 확 덮치는 미향의 향에 범한은 하마터면 혼절할 뻔했다.

범한은 이 작은 푸른색 병을 옹기 안에 넣어 놓고 다시 침소로 돌아왔다. 범한은 두 다리에 얇은 비단 이불을 돌돌 말며 조금은 불안한 사람처럼 잠들었다.

다음 날 왕계년이 찾아와 보고했다. 그는 매우 송구스러워하며 오백안이 이미 경도에서 도망갔다고 전했다. 하지만 범한은 이미 짐작한 일이었으므로 전혀 상심하지 않았다.

* * *

경도로부터 80여 리 떨어진 곳에 신분 높은 이들의 별장지인 장원이 위치해 있었다. 이곳은 멀리 창산의 눈 쌓인 산봉우리가 보이는 곳이었다. 이에 초여름이라 할지라도 서늘했다. 이곳에 심어진 포도나무는 이미 잎이 무성해져서 장원을 짙푸르게 물들여 놓은 상태였다.

범한이 겨우겨우 알아낸 오백안이란 인물은 이 시각 아주 자유로운 기분으로 포도나무 울타리 위에 앉아 한 젊은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가 살짝 나무라는 투로 말했다.

"여기로 오면 안 되는 거였습니다."

앞에 있는 젊은이는 재상가의 둘째 공자인 임공이었다. 그는 오백안을 바라보며 매우 공손하게 대답했다.

"오 선생께서 경도에서 쫓기듯이 나오셨어도 이 조카, 선생님을 배웅하러 와야만 했습니다."

오백안이 살며시 웃음을 지었다. 그는 천하를 손아귀에 넣고 싶어 하는 자였다. 그러므로 임공이 찾아온 것도 그에게는 모두 다 계산된 일이었다. 세상 사람들은 오백안이 2 황자와 황태자 사이를 오가는 줄로만 알고 있지, 재상과의 관계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가 다시 임공을 나무랐다.

"너무 큰 위험을 무릅썼습니다. 재상 대인께서 공자님과 내가 꾸민 계획인 걸 모르고 계십니다. 만약 다른 사람이 우리 관계를 알게 되었다가는 공자님 아버지께서도 빠져나오기 어려우실 겁니다."

임공이 음흉하게 웃으며 말했다.

"선생께서 노산으로 수행을 떠나신 후 경도가 일대 소란에 휩싸였었습니다. 그 바람에 황태자께서 우리 임씨 가문에 의탁해야 지존의 자리에 무사히 앉으실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셨지 뭡니까."

"잘되었군요!"

하지만 말과 달리 오백안은 걱정스럽다는 듯 이야기를 이어 갔다.

"아가씨의 혼사 소식이 있은 후, 황후께서 장 공주마마에게 많이 냉랭하게 대하실지 모르겠군요. 황후께서 보시기에는 장 공주마마가 황실 금고의 통제권을 잃을지도 모르니까요."

연초에 발생한 재상의 사생아 딸 사건부터 황제의 혼사 명령까지, 오백안은 황제가 계속해서 재상의 체면을 깎아내리는 중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 일련의 일들이 모두 황태자를 황위에 올리기 위한 황제의 포석이라고 생각했다.

아니나 다를까, 황태자가 재상과 거리를 두었다. 그리고 이에 오백안이 범한의 암살 계획을 세우게 된 것이었다. 그는 범한을 살해함으로써 잠시 황실 금고를 둘러싼 갈등을 가라앉히고, 황태자를 이상한 소문에 휩싸이게 만들어 그가 재상가와 다시 긴밀한 관계를 맺도록 압박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재상은 처음부터 이 계획을 극렬히 반대했다. 반면 둘째 공자는 아버지와 달리 매우 적극적이었다. 한 명의 공자와 한 명의 모사가 만나 어두운 곳에서 일을 꾸미기 시작한 것이었다. 이들은 재상의 명령인 것처럼 꾸며 오랫동안 군에 숨어 있던 방씨 형제를 움직였다.

하지만 오백안도 계산하지 못한 것이 있었으니, 바로 어마어마한 습격을 받고도 범한은 사지에서 벗어나 8등급의 고수를 처치해 지울 수 없는 흔적을 남겨 버린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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