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경여년-80화 (80/1,108)

080화 참장의 자살

이에 이홍성이 갑자기 소리를 낮춰 말하기 시작했다.

"사리리가 경도로 압송될 것이라 하네. 어쩌면 북제와 결탁한 사람이 누구인지 알아낼 수도 있겠지."

범한은 상대가 눈 깜짝할 사이에 이렇게나 많은 걸 염두에 두고 말할 줄은 생각도 못 했다. 그래서 잠시 멍하니 있다가 쓴웃음을 지었다.

"저는 그냥 작은 개미에 불과합니다. 그러니 조정에 계신 귀한 분들께서 저에 대해 신경 쓰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이홍성은 그를 한번 쳐다보고는 상대가 순전히 거짓말을 하고 있음을 알아챘다. 하지만 그냥 미소를 지으며 넘어갔다.

"어쨌거나 곽보곤 구타 사건 때처럼 내가 도울 일이 있다면 언제든 부탁하게."

"당연히 그래야죠."

범한은 빈말로 대답했다. 그런데 돌연 머릿속에 떠오르는 일이 있어 그에게 물었다.

"경도 남쪽에 두부 점포를 차릴까 합니다. 저와 함께할 생각이 있으십니까?"

범한의 제안에 차를 마시고 있던 이홍성은 하마터면 찻잔을 삼킬 뻔했다. 쏟아진 차 때문에 옷이 엉망이 되었다. 이홍성은 옷에 묻은 차를 닦아 내며 성을 냈다.

"두부 가게 가지고 무슨 돈을 벌 수 있겠어. 서점에서도 기껏해야 책값 정도 버는 것인데 그것도 푼돈 아닌가."

범한이 하하하 웃었다. 그리고 새로운 방식으로 갈아 낸 콩물을 왕부로 가져갔을 때 그때 다시 이야기하자는 생각을 하며, 이홍성의 말을 무시했다.

담주에 있을 때 그는 두부를 꽤 많이 먹었다. 경도는 해변 마을과 식습관이 달라 콩물을 잘 먹지 않았다. 그래서 경도에 온 후로는 콩물을 몇 번 마시지 못했다. 그리고 경도에서 콩물을 마실 때마다 이곳에서 만든 것은 찌꺼기가 너무 많다고 생각했다. 만드는 공정에 문제가 있는 건지 아니면 다른 문제가 있는 건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범한은 경도에서 콩물 만드는 방식을 바꾸어 보기로 했다.

* * *

해 질 녘이 되자 드디어 수업을 마친 범사철이 뒷문으로 몰래 숨어들어 왔다. 이날 범사철은 지난번 범한에게서 배운 걸 다시 학당 아이들에게 써먹고 난 터라 매우 기분이 좋은 상태였다. 그 때문인지 학당에 가는 게 고되지 않았다.

하지만 서점 운영은 달랐다. 문을 열고 나니 위치 선정부터 종이 선택까지, 관리자를 뽑는 일부터 가격 책정까지 일일이 직접 챙겨야 할 것투성이였다. 이에 범사철은 절로 긴장이 되어 일찌감치 서점으로 건너가 보았다.

범사철은 서점에 들어서자마자 연거푸 한숨부터 내쉬었다. 낮처럼 왁자지껄한 광경은 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범사철은 고개를 갸우뚱한 채로 장부를 정리하는 방으로 들어갔다.

범한은 차를 마시며 범사철이 나오기만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잠시 후 범사철이 자신은 아무 잘못이 없다는 듯 잔뜩 곤란한 표정으로 장부를 정리하는 방에서 나왔다.

범사철은 무언가 할 말이 있는 것 같은데도 한동안 우물거리기만 했다. 그러다 드디어 범한을 질책하듯 말했다.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많아도 너무 많잖아!"

"뭐? 그래?"

범한은 원래 개점 첫날은 장사가 잘되는 편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범사철이 대체 뭘 믿고 저런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동생에게서 장부를 건네받았다. 그리고 물품 목록을 살펴보는데 심장이 떨려 오기 시작했다.

세교판 《석두기》는 80여 질이 팔려 나간 데다 만송당 직인이 찍힌 경서, 역사서, 철학서, 시문집도 서점을 구경 온 독서인들에게 제법 많이 팔린 상태였다.

범한은 손가락으로 계산을 해보고는 장사란 것이······ ‘제법 성취감을 주는 일이구나!’라고 느꼈다.

"오늘 개업식이라 우리 집안과 교분이 있는 분들이 성원을 해주신 덕분에 많이 팔린 거야. 이후로는 이렇게까지 장사가 잘되지는 않을 거야."

범한이 두 눈을 똥그랗게 뜨고 있는 범사철을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주의를 주었다.

범사철은 침을 꿀꺽 삼키고는 부러운 눈빛으로 범한을 바라보았다.

"형님, 알았어요. 다만 형님은 매일 서점에 앉아 있는데 나는 숨어서 장사를 하는 처지니, 형이 부러울 따름이에요."

범한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생각에 웃음이 터져 버린 채로 범사철에게 물었다.

"너는 그렇게나 상인이 되고 싶니? 아버지의 백작 작위를 계승할 사람은 너야. 그러니 열심히 공부나 해. 나중에 조정의 모든 은전은 네가 관리해야 하니까."

"그건 호부 상서가 하는 일이고요."

범사철이 얼굴에 잔뜩 그늘이 드리운 채 말을 이어 갔다.

"아버지께서는 과거에서 탐화랑으로 합격하셨는데도 아직까지 시랑이란 직책에 계세요. 분명 그 늙은 호부 상서가 병상에 드러누운 지 몇 년이나 지났는데도 조정에서는 아버지를 호부 상서 자리에 앉히지 않고 있고요. 그러니 나 따위는······ 아무리 유명해져도 호부 상서까지는 못 오를 거 같아요."

범한이 의외라는 눈빛으로 범사철을 바라보았다. 비록 비열하고 완고한 구석이 있기는 해도 자기 앞가림 하나는 제대로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범한은 잠시 생각을 해보다가 입을 뗐다.

"장사가 하고 싶다면 해버려. 아버지께는 내가 말씀드릴게."

범사철이 매우 기뻐하며 범한을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별안간 이맛살을 찌푸리며 걱정했다.

"그런데 어머니께는 어찌 말씀을 드리죠?"

범한은 잠시 멈칫했다. 하마터면 유씨 부인을 빼놓고 생각할 뻔했다. 본가는 겉으로는 화목한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미묘하게 화목한 이 국면이 대체 얼마나 더 지속될지는 그 누구도 예측하지 못했다.

범한이 범사철을 이끌고 서점 밖으로 나가는 중이었다. 그러다 문득 어떤 일이 생각나 섭 대행수에게 무언가를 진지하게 일러두었다.

"전에 이야기했던 일은 대행수님이 좀 해주세요. 그리고 너무 많은 사람들이 알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섭 대행수는 왜 이 젊은 주인이 경여당에서 일하는 사람들에 대해 흥미를 보이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고개를 끄덕이며 그러겠노라 대답했다. 열일곱 명에 달하는 대행수들은 그동안 경도에서 살면서 이곳 생활에 꽤 익숙해져 있던 터였다. 비록 자신만의 장사는 할 수 없었지만 각 왕부의 일은 돌봐주면서 꽤 부유한 삶을 살고 있던 터였다.

범사철이 궁금해하며 물었다.

"형님, 무슨 일을 하라는 거예요?"

"경여당이 어떤 곳인지 너는 알고 있니?"

"당연히 알죠."

섭 대행수는 범사철이 큰돈을 주고 모셔온 사람이었다. 그러니 범사철은 경여당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이에 범사철은 무언가에 홀린 사람처럼 말하기 시작했다.

"섭가에 있던 대행수들이 꾸리던 곳이잖아요. 내가 장사를 시작했는데 저 정도로 유능한 사람이 수하로 있다면 정말 좋을 거예요!"

범한은 깜짝 놀랐다. 자신이 평소에 지나치게 조심한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보니 ‘섭가’라는 이 두 글자는 이미 오래된 기록에나 등장하는 옛날 이름이 되어 버렸고, 경도 사람들은 이제 그것을 금기어로 생각하지 않고 있는 모양이었다.

마차에 오르자 범약약이 범한을 기다리고 있었다. 누이동생을 발견한 범한이 자책했다.

"네가 온 줄 알았다면 나도 조금 더 일찍 나왔을 텐데."

범사철은 누나를 보더니 갑자기 이유 없이 무서워하며 핑계를 늘어놓았다.

"저는 그냥 구경 온 거예요. 이 장사는 저와 아무런 관계도 없으니 부디 아버지께는 말씀드리지 말아 주세요."

범사철의 말에 쌀쌀맞은 얼굴을 하고 있던 범약약이 살짝 웃음을 지어 보였다.

"우리는 한 가족인데 내 어찌 네가 아버지께 볼기짝이라도 맞기를 바라겠니?"

낮 동안 떠들썩했던 동천루는 언제 그랬냐는 듯 고요해졌다. 그리고 이 시각 백작가로 향하는 마차는 덜컹덜컹 소리를 내며 경도성으로 향하고 있었다. 마차 안에는 세 명의 가족이 타고 있었다. 서쪽으로 저물어 가는 석양에 길게 늘어진 마차의 그림자는 거리 위에 깔린 석판을 따라 앞으로 미끄러져 나갔다.

석판의 미세한 높낮이 차이 때문에 마차가 지나갈 때마다 들렸다 놓이기를 반복했다. 그림자는 마치 이 석판 위에서 필사적으로 빠져나가려는 것처럼 붉은 석양을 향해 열심히 나아가고 있었다.

* * *

또 같은 말을 반복해야겠다. 백작가에서 범한은 매우 행복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행복이란 놈은 몇 가닥을 잡고 있게 되면 조금 더 꽉 움켜쥐고 있어야만 한다. 암살 사건과 관련해 사남 백작 범건은 조정에서의 신분 때문에 진상 조사에 나설 수 없어 잠시 참고만 있는 중이었다. 반면 범한은 그 무엇도 거리낄 것 없이 매우 자유롭게 지내고 있었다.

범한은 환생 후 세 가지 목표를 세웠었다. 그런데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지금과 같이 마냥 불안한 환경에 있을 수만은 없었다. 전생에 있던 UN이란 국제기구에서도 사람은 공포에서 벗어날 자유가 있다고 말하지 않았나. 범한은 정치에 대해 아는 것은 없었지만 그래도 시공을 넘어왔어도 인권은 보호받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왕계년이 머리와 얼굴이 온통 회색이 된 채 탁자 옆에 앉아 있었다. 이 방은 경도에서 떠나기 전 범한 대인이 은표를 내고 임대를 해준 곳이다. 아무도 신경 쓰지 않을 것 같은 매우 볼품없는 방.

범한이 서둘러 찻잔부터 내밀며 말했다.

"고생하셨습니다."

범한이 자신에게 높임말을 쓰자 왕계년은 몸 둘 바를 몰랐다. 그는 이번에 수행한 임무를 서둘러 보고하기 시작했다.

"대인께서 짐작하신 대로 사리리 일행을 경도로 데려오는 도중 누군가가 그들을 막아섰습니다. 하지만 감찰원에서는 이미 방비를 하고 있어서 단번에 그들을 물리쳤습니다. 저는 대인의 분부에 따라 창주성에서 나온 후에는 줄곧 사리리를 압송하는 감찰원 관원들을 따라갔습니다. 압송 수레를 막은 사람들은 마적으로 보이기는 했지만 공격을 하고 빠지는 모습으로 보아 분명 군대였습니다."

범한이 깜짝 놀라 잠시 할 말을 잃었다. 그리고 어떻게 군대까지 끌어들일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 왕계년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주부군(州府軍) 같은 거였나요?"

"거기까지는 저도 정확히는 모르겠습니다."

왕계년이 잠시 생각을 해보다가 말을 이어 갔다.

"대인의 명령대로 그들의 뒤를 밟아 보았습니다. 그리고 마적을 이끌던 대장이 최종적으로 오주로 도망가는 걸 보았습니다."

"오주요?"

"그렇습니다. 밤이 되자 그 대장이란 자가 오주에 있는 참군과 만나는 걸 봤습니다."

왕계년이 무언가 반드시 알려야 할 것이 있는 것처럼 서둘러 말을 이어 나갔다.

"사실 저 말고 다른 추적자가 한 명 더 있었습니다."

"누구지요?"

"종추입니다."

범한은 무언가 생각나는 것이 있는 것 같았다.

"예전에 말했던, 함께 실력을 다투었던 종추라는 자 말이군요. 그 사람은 줄곧 진평평 원장 곁에 있었다고 하지 않았나요?"

범한은 무언가 알 것만 같았다. 이제 보니 감찰원에서도 사리리를 통해 배후 인물을 캐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습니다. 그날 먼발치에서 진평평 원장의 마차를 보았습니다. 흑기도 그곳에 있었습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마적으로 변장한 기마병들을 막아 낼 수 없었을 겁니다."

왕계년이 살짝 난처한 질문을 던졌다.

"대인, 감찰원에서도 벌써 조사에 착수했는데 우리가 이 일을 계속해야 할까요?"

"해야죠. 일단 그 문제는 접어 둡시다. 오주에 있는 그 참군은 조정에 있는 인물 중 누구의 사람입니까?"

"조정 쪽 인물은 매우 조심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참군은 성은 방씨이고 이름은 휴인 것 말고는 다른 배경이 알려진 게 없었습니다. 순성사의 방 장군과 먼 친척지간이라는 사실은 빼고요."

범한이 이맛살을 찌푸린 채 깊은 생각에 잠겼다. 이번 사건에서 순성사가 악역을 맡은 게 분명했다. 범한은 어떻게 해야 뒤를 파볼 수 있으며 자신이 정말로 뒷조사를 해봐야 하는 건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만약 거물급이 너무 많이 연루되어 있다면 이번 사건은 분명 종결조차 되지 않을 거라 염려했다. 또한 조정에서 용감한 사나이로 정평이 난 자신이 어쩌면 억지로라도 예전과 달리 행동해야 할 수도 있을 거라 생각했다.

범한의 입술은 살짝 하얗게 질려 있었다. 이에 그는 깊이 숨을 들이마시고는 작은 소리로 물었다.

"사리리는 경도에 언제 도착하나요?"

"내일입니다."

왕계년이 범한을 한번 쓱 쳐다보고는 갑자기 무언가를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원장 대인도 내일 경도로 돌아오십니다. 대인, 먼저 원장 대인의 지시 사항부터 보신 후 그분의 명에 따라 사리리를 처단해야 하지 않을까요?"

"비개 대인은요?"

"안 오실 것 같습니다."

비개가 경도로 돌아온다는 소식이 없자 범한은 실망했다. 하지만 진평평이 곧 경도로 돌아온다고 하니 정신이 번쩍 드는 기분이었다. 감찰원은 자신의 어머니와 함께 일을 도모한 이들이었다.

세월이 많이 흐르면 사람의 마음은 변하기 마련이라고 했다. 하지만 범한은 자신이 환생 후 삶의 첫 막을 올린 그 순간, 그리고 나중에 비개 스승님이 자신을 세심하게 지도해 준 일을 떠올리며 감찰원은 자신의 적이 아님을 확신했다. 물론 감찰원은 친구도 아니었다. 하지만 범한이 보기에 자기편인 것만은 확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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