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경여년-79화 (79/1,108)

079화 담박서국

"얼른 돌아가요. 아직 상처가 다 아물지 않았잖아요."

임완아는 범한의 얼굴을 볼 수 없어 자신의 얼굴을 이불 속에 묻은 채로 말을 건넸다.

범한의 시선은 절로 아래쪽으로 미끄러져 내려갔고 그는 비굴해진 자신을 바라보았다.

"내일 다시 보러 올게요."

임완아가 이불을 살짝 아래로 내렸다. 그리고 꽤 불쌍해 보이는 얼굴을 빼꼼히 드러내고는 미안한 사람처럼 말했다.

"내일 중요한 일이 있지 않나요?"

"아, 그렇군요. 내일모레가 서점을 여는 날이었지요."

범한은 경도에서 아무런 움직임도 없는 걸로 보아 감찰원 사람이 아직 경도로 돌아오지 않은 사실이 떠올랐다. 그렇다면 이렇게 된 이상 해야 할 일부터 처리하기로 마음먹었다. 장작을 많이 패려면 사전에 도끼부터 잘 갈아 둬야 하는 것처럼 말이다. 이런 점이야말로 범한이 지닌 우수한 기질이 아닐까.

계속 이곳에 남아 있어 봤자 이 소녀를 무시하는 꼴이 되니 범한은 이제 그만 나가기 위해 창문을 열었다. 그러자 창문을 통해 달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달빛은 침대 위를 그리고 그 옆에서 깊이 잠들어 있는 궁녀를 비추었다. 범한은 순간 피식 웃었다. 정말 자도 너무 잘 자는 궁녀를 보며 며칠 후면 살이 더 올라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 * *

하루가 지나고 서점이 문을 열었다. 동천로에 사람들이 빽빽하게 모여들고, 근처 태학에서는 평소에는 볼 수 없었던 결석생들이 속출했다. 길과 맞닿은 건물 벽 위에는 등이 화려하게 내걸렸다. 문 앞에는 좋은 재질의 목재로 만든 네모반듯한 장식물이 놓여 있었다. 이 목재는 푸르스름한 광채가 돌 만큼 반들반들하고 새카맣게 칠해져 있어, 이곳에 책이 들어차 있음을 단번에 알아볼 수 있도록 해주었다.

하지만 아쉽게도 사람들이 너무 많이 몰려든 탓에 이곳에서는 책 향기보다 사람들 몸에서 나는 땀내가 코를 찌르며 진동하고 있었다.

방문객 대부분은 범한을 보러 온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모두 경도로 온 지 이제 겨우 한 달여 지난 백작가 서자가 왜 유명 인사가 된 건지 궁금해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들을 더 궁금하게 한 건 이 문무에 능한 공자가 왜 서점을 열 생각을 했느냐였다. 이 세상에서 돈을 벌 수 있는 수많은 장사 가운데 왜 하필이면 책을 선택한 건지, 그들이 봤을 때는 아무리 생각해도 좋은 시작은 아닌 것 같았다.

자객 사건 이후, 범한은 삶을 대하는 태도가 많이 바뀌었다. 그래서 뒤에 숨은 채 다른 사람을 내세워 서점을 운영하려던 생각은 접고 직접 나서기로 마음먹었다. 그래서 개점 당일에는 ‘자신과 자기 가족이 이 서점의 주인이요!’라는 듯 서점 문 앞에 당당히 서 있었다.

범한은 서점 이름도 직접 지었다. 그리고 이홍성에게 부탁해 그의 부친인 정왕의 친필이 들어간 현판을 제작하기도 했다. 이에 정왕의 친필로 된 ‘담박서국(澹泊書局)’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현판이 서점 문 위에 걸리게 되었다.

방문객들은 서점 이름에 어떤 뜻이 담겨 있는지 물었다. 그러자 범한은 ‘담담하게 자신의 덕을 드러낸다’라고 해석되지만, 실은 ‘아무 걱정 없이 계속 담담하게 살고 싶다’는 뜻이라고 설명했다. 그러고는 다시 전생의 제갈량이 한 말 중 ‘담백하게 고상한 뜻을 펼칠 수 없다면 안정적으로 멀리 갈 수 없다’는 구절을 이야기해, 주변 사람들을 잠시 술렁이게 만들었다.

세자는 범한의 설명을 듣고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왜냐하면 백작가의 이 어린 녀석이 서점 이름을 가지고 온 조정에 ‘자신은 그 어떤 일에도 끼고 싶지 않다’는 뜻을 공개적으로 드러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이홍성은 범한이 약한 척하면서 자신의 안위를 도모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사실 범한을 가장 잘 이해하고 있는 이는 범약약이었다. 그녀는 ‘담박’이란 글자가 지닌 뜻을 잘 알고 있었다. 바로 과거 ‘담’주(澹州)에서 정‘박’(停泊)했다는 뜻이다.

사람이 점점 더 많이 몰려들자 범한은 이마에서 식은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이에 옆에 있는 섭 대행수에게 속삭였다.

"사람들에게 미리 홍보를 해두었더니 효과가 너무 좋아 탈이군요. 그러니 열자마자 이렇게나 많은 사람들이 몰려오죠."

섭 대행수는 ‘홍보’라는 두 글자가 전혀 낯설지 않았다. 그래서 허허 웃으며 말했다.

"주인어른께서 조 선생이라는 분의 원고를 지니고 계시다 들었습니다. 68회 이후부터는 우리 서점에서 독점적으로 발행하게 됐고요. 《석두기》의 명성만 가지고도 이리 많은 사람이 몰려든 것이랍니다."

그러고는 잠시 머뭇거리다 다시 허허 웃으며 말을 이어 나갔다.

"그리고 이들은 모두 주인어른을 뵈러 온 것입니다. 무공 실력이 8등급이나 되는 고수를 죽인 청년 시인이 어찌 생겼나 궁금해서요."

범한은 깜짝 놀라 잠시 할 말을 잃었다. 그러다 투덜댔다.

"내가 팔 척 거인도 아니고 뚱보도 아닌데 뭐 구경할 게 있답니까?"

범한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개점 축하 하객들은 계속해서 밀려들었다. 이는 어쩌면 모처럼 범한의 아버지 범건과 가까워질 수 있는 기회가 생겼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또 어쩌면 황제 폐하께서 이미 범한을 태상사 협률랑으로 책봉했다는 소식을 듣고 황실과의 혼례 날짜가 임박했음을 알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니 각부 관리들이 범한 부자의 체면을 살려 주기 위해 아랫사람을 보내 축하 인사를 전하고, 각 왕가와 공(公)의 가문에서도 사람을 시켜 선물을 보낸 것일 게다.

어쨌든 동천로로 계속해서 가마가 들어왔고 인사를 하는 소리가 사방에서 들려왔다. 일을 보는 방 안에는 선물이 가득 들어찼다.

거리에 몰려든 구경꾼들은 고작 서점 하나 열었을 뿐인데 이렇게나 시끌벅적해지다니, 이 문무를 겸비한 사남 백작가의 공자는 과연 비상한 인물이 맞는 것 같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왁자지껄해진 개업식 덕분에 얻게 된 이점도 있었다. 그중 최대 이점은 바로 지하 세계 사람들이 나중에 담박서국을 괴롭힐 우려가 사라졌고, 관청과 마찰이 발생할 가능성이 매우 줄어들었다는 점이었다.

범한은 모든 상황을 차분하게 지켜보면서 찾아오는 손님들에게 두 손을 가슴까지 들어 올려 예의 바르게 인사를 올렸다. 모두들 자신의 아버지 체면을 생각해서 찾아와 준 것이므로 범한은 최대한 예절을 지켰다.

다행히 서점이 너무 비좁은 터라 유명 인사가 직접 찾아오기보다는 시간이 되는 사람들이 대신 찾아왔다. 다시 말해, 손님들은 어느 가문에서 왔다는 말만 전하고는 곧장 서점을 떠났다. 이들은 무언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디 하나 꿀릴 것이 없는 백작가 사람이 왜 장사를 하는 건지 그리고 체면이 서지 않는 상인의 일을 왜 알려 하는 건지 그들로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때 마침 이홍성이 드디어 범한을 찾아왔다. 거리에 몰려 있던 사람들 중 그의 신분을 아는 이들은 속속 예를 차려 절을 올렸다. 이홍성은 온화한 얼굴로 그들에게 화답했다. 그는 황제의 친인척 신분이라고 해서 오만하게 굴지 않았다. 봄바람과도 같은 따스한 얼굴로 시종일관 품위를 유지했다. 그런데 이홍성이 서점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고 거리에 서 있던 일부 구경꾼이 별난 것을 보았다는 듯 말했다

"이 담박서국은 체면 한번 제대로 섰구먼!"

"정왕부와 사남 백작가는 원래 사이가 좋은데, 모르고 있었나?"

이홍성이 방문한 걸 본 범한은 가슴이 살짝 떨려 왔다. 이 봄바람처럼 온화한 인물이 2 황자를 위해 직접 나서고 있다니, 대체 그 2 황자라는 사람은 어떤 인물인지 궁금해졌다.

범한은 웃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앞서 생각한 것들을 머릿속에서 떨쳐내기 위해서였다. 그러고는 서점 밖으로 나가 이홍성을 맞았다. 그리고 이는 이홍성과 단순히 친구 수준의 관계를 유지하기 위한 행동에 불과했다.

두 사람은 서점에서 가장 조용한 방으로 들어갔다. 이홍성이 주위 장식물들을 살펴보며 감탄사를 내뱉었다.

"이렇게 꾸미는 데 많은 은자가 들었을 것 같네."

"겨우 1,700냥 조금 더 넘게 들었을 뿐입니다."

범한이 이홍성에게 차를 따르며 말을 이어 나갔다.

"보잘것없는 장사라 세자께서 보시기엔 성에 차지 않을 것입니다."

이홍성이 찻잔을 들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대 범씨 가문 사람들이 돈 버는 데 뛰어난 재주가 있다는 건 조정에서 모두 아는 사실일세. 단지 사남 백작은 조정을 위해 돈을 불려 주고 계시고, 자네는 자신을 위해 돈을 벌고 있다는 게 차이라면 차이겠지."

범한이 씩 웃어 보이고는 말했다.

"은자를 많이 벌어들이면 그만큼 조정에 세금을 바치게 되지요. 그러니 돈을 조금 벌었다고 해서 그것을 수중에 쥔 채 녹슬게 해서는 안 됩니다. 그 돈을 꺼내 사용하면 이 또한 다른 사람의 장사를 돌봐주는 게 됩니다. 그런데 그 다른 사람의 장사가 잘 되면 조정의 세수는 그만큼 더 늘어나게 되어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니 어느 장사를 하든 돈을 벌게 된다면 그 돈은 결국에는 조정으로 들어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 돈은 최종적으로 백성들을 위해 쓰게 되는 것이고요."

이홍성은 범한이 한 말의 뜻을 잘 알아듣지 못했다. 하지만 조금은 알 것 같기도 해 손으로 무릎을 치며 감탄했다.

"몇 마디 말에 커다란 도가 담겨 있군그래. 조정에서는 줄곧 농사를 숭상하고 상업을 억제하고 있는데, 왜 자네가 장사를 시작했는지 이상했던 차였네. 그리고 설마 벼슬길에 오를 생각이 없는 건가 생각했었는데 다 깊은 뜻이 있어서였군."

범한은 전생에서 발병하기 전까지는 학교에 다녔었다. 그리고 학교에서 정치와 경제 성적은 거의 꼴찌에 가까웠었다. 그런데 잡담 몇 마디 한 것이 갑자기 커다란 도로 변해 버리자, 참으로 난감해 황급히 화제를 바꾸었다.

"아이고, 됐습니다. 벼슬길은 또 뭡니까. 그냥 서투른 시 두 수를 지었을 뿐입니다. 그리고 내년 과거 때는 도망을 갈 작정입니다."

범한의 기개에 한참 동안 진땀을 뺀 이홍성이 또다시 얼굴에 부채질을 하기 시작했다. 그는 계속해서 목 부위에 부채질을 해대며 우습다는 듯이 말했다.

"만약 자네 시가 그냥 서툴게 쓴 거에 불과하다면 태학에서 공부하고 있는 저들은 다 죽으란 말인가? 밖에 범한이라는 대시인을 알현하러 온 학생이 얼마나 많은지 좀 보게. 만약 자네 집 종들이 막아서지 않았다면 지금 이곳은 아마 난장판이 되었을걸."

범한이 근심 어린 얼굴로 말했다.

"태학의 학생들 중 일부는 제게는 할아버지뻘입니다. 그러니 계속 학생이라 칭하시면 조금 듣기 그렇습니다."

이홍성이 하하하 큰 소리로 웃기 시작했다. 그리고 부채로 범한을 가리켰다.

"이리도 걱정 어린 얼굴을 하고서는 그런 농이나 하다니. 자네는 말이지, 자네는 말이야 정말 재미있는 사람일세!"

범한은 눈을 홉뜨며 자신이 대체 무슨 재밌는 말을 했다고 저러는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화제를 돌려 이홍성에게 질문을 던졌다.

"이번에 정왕께서 친히 현판의 글자를 써주셨는데, 언제 왕부로 가서 감사의 인사를 드려야 할까요?"

이홍성은 잠시 멍하니 있었다. 그러다 잠시 후 자기 앞에 있는 이 청년이 부왕과 이미 만났는데도 아직 모르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그는 한번 씨익 웃기만 했다. 그리고 나중에 이 범씨 청년을 골려 줄 작정을 하고는 그 사실을 말해 주지 않았다.

"자네가 찾아뵙고 싶을 때 찾아가게. 굳이 내게 물어볼 필요까지는 없다네."

이홍성은 자기가 보고 있는 이 범한이 열여섯이라는 나이보다 훨씬 성숙한 것 같다고 생각했다. 어떤 상황이 닥쳐도 놀라기는커녕 이상하리만큼 차분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홍성은 계속 범한의 차분함을 깨보고 싶었던 차였다.

이홍성이 느닷없이 손바닥을 치며 말했다.

"그렇군. 범 공자께 축하 인사를 해주는 걸 잊었군."

범한은 깜짝 놀랐다. 대체 자신에게 축하할 일이 뭐가 있는지 몰라 어리둥절하기만 했다.

이홍성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태상사 협률랑에 책봉된 걸 축하합니다. 경사가 있었으니 부디 축하주도 많이 들기를 바랍니다."

범한이 웃기 시작했다.

"그 일 때문이었군요. 진작부터 알고 계시지 않았습니까."

"전에는 황궁에서 떠도는 소문에 불과했지. 실제로 이행될 기미가 보이지 않으니 그냥 듣고 넘겼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지만 이홍성이 갑작스레 이맛살을 찌푸렸다.

이 순간 이홍성은 어떤 사실 하나를 떠올리고 있었다. 지금까지 2 황자와 자신은 백작가가 자신들 편에 서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황태자 쪽으로 붙지는 않을 거라 여겼다. 하지만 자신들이 매우 중요한 문제를 간과했다는 걸 그제서야 깨달은 것이었다.

범한이 혼인을 올리고 나면 재상의 사생아가 부인이 되니 어쩌면······ 어쩌면 점점 상대 쪽으로 기울지도 모른다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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