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4화 왕계년의 인생 (上)
"성함이 어찌 되십니까?"
범한이 질문을 하는 사이 감찰원 관리에게 여종이 차를 따르고 있었다. 범한은 실눈을 뜨고 상대방을 바라보고 있었다. 범한으로서는 지난번 감찰원에 ‘용감하게 쳐들어간’ 이후 처음으로 다른 장소에서 감찰원 관원과 마주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런데 감찰원 관리들에게서는 전부 시체 썩는 내가 나는 것만 같았다. 그리고 이 느낌은 범한에게 빌어먹을 비개 스승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하관은 목철입니다."
거뭇거뭇한 피부에 마치 얇은 철판 같은 입술을 가진 관원이 아무 표정 없이 말했다.
"그동안 공자님의 상처가 깊어 몇 가지 질문하지 못한 게 있었습니다. 오늘은 황명을 받고 질문을 하러 왔으니 공자님께서는 협조해 주시기 바랍니다."
범한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이 관원은 백작가와 감찰원의 은밀한 관계를 모르는 것 같았다. 그러니 이런 말을 할 수밖에. 범한이 담담하게 대답했다.
"너무 피곤합니다. 그러니 다음에 다시 오세요."
범한이 손을 내저으며 이상하다는 듯 말했다.
"그런데 감찰원과 형부의 연명 상소가 이미 전달됐다는데 또 무엇을 묻겠다는 건가요?"
"아직 확인 못 한 일이 있습니다."
목철이라는 관리가 범한의 두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그러자 범한은 심장이 살짝 떨려 왔다. 감찰원에서도 암살 사건의 궁수들과 관련해 자신을 의심하고 있다는 게 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범한은 그 일을 자신에게 물어 무슨 소용이냐고 생각했다. 자신이 경도에서 잘못을 저지른 사람이 있다면 곽보곤뿐인데 말이다. 그리고 겨우 문신의 아들인 주제에 어떻게 감히 북제와 결탁을 하며 또 황태자와 관련해서는······ 자신이 언급할 수조차 없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이에 범한은 베개 밑에서 비개가 준 요패를 꺼내 집어 던졌다.
"우리 둘 다 한 식구 같으니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숨기지 말고 하세요!"
목철은 자기 옆에 놓인 차를 마실 생각도 않고 패를 들어 두어 번 살폈다. 목철의 낯빛이 돌변하더니 이내 앉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똑바로 섰다. 그러고는 범한 앞으로 다가가 한쪽 무릎을 꿇어앉더니 주먹 쥔 손을 다른 한 손으로 감싸 쥔 채 인사를 올렸다.
"대인께 인사 올립니다."
범한은 깜짝 놀라 자기 앞에 무릎을 꿇고 앉은 목철을 바라보았다. 이 패가 이 정도의 위력을 지니고 있었다니. 범한은 비개가 준 요패가 제사(提司)의 패란 걸 전혀 모르고 있었다. 제사는 감찰원 8대처로부터 독립한 초월적인 존재였다. 감찰원에서 제사에게 직접 명령을 내릴 수 있는 사람은 진평평 원장뿐이었고, 8대처 수장과 동등한 위치에 있었다. 그러니 이 목철이란 자가 범한이 내민 패를 보고는 기겁해 무릎을 꿇고 문안 인사까지 올리게 된 건 너무나 당연한 반응이었다.
범한은 우선 목철을 일어나도록 한 후 눈살을 찌푸린 채 물었다.
"비개 대인께서는 언제 경도로 돌아오나요?"
범한의 최대 관심사였다. 비개가 돌아오기만을 바라는 이유는 첫째, 임완아의 상태 때문이었다. 점차 좋아지고 있기는 하지만 병의 근본적인 원인을 아직 치료하지 못하고 있던 터였다. 이에 범한은 대체 얼마나 더 시간과 공을 들여야 할지 스승 비개에게 물어보려던 참이었다.
둘째, 요즘 경도의 판세가 너무 복잡하게 돌아가는데 마음 기댈 곳이 없어서였다. 오죽 아저씨는 계속 귀신처럼 모습을 숨기고만 있고, 아버지는 다정하게 대해 주는 것 같아도 여전히 숨기는 구석이 있었다. 그래서 범한은 생각만 해도 듬직한 스승 비개가 절실히 필요한 상태였다.
이 아름다운 공자의 입에서 비개 대인의 이름이 거론되자 목철은 상대방이 감찰원에서 꽁꽁 숨겨둔 대인임을 확신했다. 감찰원이라는 특무 기관에서는 으레 경도 각 부와 고위 인사들 속에서 비밀리에 사람을 심어 놓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목철은 자기 앞에 있는 백작가의 도련님도 그중 한 사람임이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더군다나 직위도 상당히 높은 부류일 것이라고 보았다. 따라서 목철은 매우 공손한 태도로 대답했다.
"분명 며칠 더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감찰원에서는 아무것도 밝혀내지 못한 건가요?"
범한이 그의 두 눈을 응시한 채 물었다.
그러자 목철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감찰원에서도 소식이 너무 늦다는 걸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궁수의 시신도 이미 전소되고 난 후 알았던 것입니다. 그래도 최종적으로 순성사까지 추적을 했지만 그곳에서 단서가 끊겼습니다."
"순성사요? 그곳을 관장하는 이는 누구인가요?"
"초자항입니다."
"누구요?"
목철은 상대방이 초자항이란 인물을 모르는 게 신기해 고개를 들어 범한을 한번 쳐다보고는 대답했다.
"분명 황태자의 사람은 아닙니다."
범한이 목철에게 던져 준 패는 절대 복제가 불가능한 것이었다. 그래서 목철은 범한의 신분을 단정하고 숨김없이 모든 걸 말해 준 것이었다. 이처럼 확실한 위계에 의해 움직이는 것, 이것이 바로 감찰원의 품격이었으며 동시에 감찰원 내부에서만 통하는 행위였다.
"이번 안건을 책임지고 있습니까?"
범한이 궁금하다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며 다시 질문을 던졌다.
"몇 품 관원인가요?"
"소인은 7품 첨사(僉事)입니다."
목철은 범한에게 미소를 지어 보이며 다시 대답을 이어 갔다.
"직접 발로 뛰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사리리는 언제 경도로 들어옵니까?"
범한이 갑자기 유일한 증인을 떠올리고는 눈살을 찌푸렸다.
"지금은 잡아들였지만 그들이 재빨리 도망친 바람에 며칠 걸려야 경도로 들어올 것 같습니다."
목철은 범한을 바라보았다. 이 아름다운 공자님을 대체 누가 북제와 결탁까지 해가며 살해하려 했는지 궁금했는데, 이제 보니 감찰원에서 중점적으로 키우는 인물이었다. 그러자 순간 심장이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범한이 마치 자신에게 출세의 길을 열어 줄 사람으로 보였다. 이에 목철은 대담하게 제안을 해보았다.
"대인, 대인께서 경도에서 구체적으로 어떤 일을 맡고 계신지는 모르겠으나 경도에 오신 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 제가 힘써 드릴 것이 있다면 언제든 분부만 내려 주십시오."
범한이 이상하다는 듯 물었다.
"그렇다면 지금 처리 중인 일은 어떻게 되나요?"
목철이 천진난만하게 웃었다.
"다른 사람에게 넘겨도 됩니다. 감찰원 임무는 계급에 따라 등급이 매겨지거든요. 대인의 신분 정도라면 제게 도움을 청하는 것 정도는 쉬이 하실 수 있습니다."
범한은 상대가 대체 왜 이렇게 나오는 건지 금세 알아차리고는 쓴웃음을 지었다.
"없었던 일로 하시죠. 내가 무슨 일을 해야 하는지도 모르는걸요. 나를 따르시면 멀쩡한 목숨만 잃을 터인데 뭐 좋은 일이라고요!"
순간 범한은 얼마 전 외양간 거리에서 죽은 세 명의 호위병이 생각나 마음이 무거워졌다. 모두 자신이 경도로 들어온 후 줄곧 함께한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아직 이름도 모두 알기 전에 죽다니.
범한은 여종에게 창문을 열라고 했다. 상쾌한 바람이 오랫동안 어두침침했던 방 안으로 불어 들어왔다. 범한은 심호흡을 하고는 정신을 가다듬고는 무언가 해야겠다며 결심을 내렸다. 그래서 심장이 뜨거운 감찰원 관리에게 물었다.
"감찰원에 왕계년이란 사람이 있습니까?"
왕계년은 호떡 가판대를 보고 있었다. 그러다 코를 톡 쏘는 매운 향에 하마터면 눈물이 날 뻔했다. 최근 그의 삶은 실로 고단함 그 자체였다. 감찰원에서 제명된 것도 모자라 이제는 녹봉도 받지 못하게 되었다. 걱정 없을 줄 알았던 노년의 삶도 보장받을 수 없게 된 처지였다.
그런데 그에게 닥친 진짜 문제는 따로 있었다. 바로 그의 경력에 감찰원에서 일했다는 기록이 문제였다. 다른 어떤 관아에 들어가도 그 기록을 보고는 왕계년에게 정중히 떠나라고 하며 쫓아내기만 할 뿐이었다. 왕계년은 지금까지 형(刑) 집행 도구만 다루어 보았으며 할 줄 아는 건 사건 조사밖에 없었다. 그러니 평범한 가게에서 주판도 튕길 줄 모르고 장사도 할 줄 모르는 자신에게 일자리를 주지는 않을 거라 비관하고 있었다.
왕계년은 처음 감찰원에 들어갔을 때를 떠올렸다. 사건을 조사하고 범인을 체포하고 죄를 저지른 관원들이 자기 앞에서 죄상을 토로하고, 참으로 의기양양했던 시절이다. 그런데 자신의 처지가 하룻밤 사이에 상갓집 개로 전락할 줄이야. 이제는 나이도 많이 먹었고 집에는 부양해야 할 처자식들이 있으니 그는 한숨밖에 나오지 않았다.
왕계년은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자리를 떠났다. 허리춤에 넣어 놓은 은자 몇 조각을 조몰락거리며 대체 자신이 누구에게 잘못을 저질렀기에 이 지경이 됐는지 생각해 보았다.
사실 왕계년은 자신이 제명된 이유를 정확히 알고 있었다. 원인이 매우 간단했기 때문이다. 듣기로는 지난번에 주인님의 주인님의 주인님이 남루한 차림으로 경묘로 기분 전환을 하러 가셨는데, 그때 이름도 모르는 웬 우악스러운 소년의 공격을 받았다고 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거리를 따라 배치되어 있던 황궁 호위병들도 몽땅 혼절해 있었다고 했다. 이 사건으로 황궁이 발칵 뒤집히고 잔뜩 화가 나 조사에 나섰는데, 이때 감찰원도 공조를 했었다.
사실 이 사건은 왕계년과 크게 상관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내무부가 거리 탐문 조사를 하다가 이 소년이 경묘로 들어가기 전 감찰원에 들렀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그러자 일이 생각지도 못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사건은 크게 부풀어졌고 감찰원 원장인 진평평도 부재중이라, 순간 아비 없는 아이 꼴이 된 감찰원에서는 고위 관리들이 만일 황궁에서 그 소년과 감찰원이 무슨 관계가 있다고 생각하면 어찌 해명을 해야 할까 고심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러던 중 최종 조사 결과 왕계년이란 인물이 범인으로 지목되었다. 많은 감찰원 관원들이 그 소년이 감찰원으로 들어온 후 왕계년과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고 진술했기 때문이다. 왕계년은 영문도 모른 채 조사에 응하게 되었고 자신과 소년이 나눈 대화 내용을 모두 불어 버렸다. 그 소년이 비개 대인의 제자라는 사실만은 숨긴 채 말이다.
내무부에서는 왕계년과 관련된 다른 문제를 밝혀내지 못한 상태에서 사건을 마무리 지었다. 결국 그들은 왕계년을 속죄양으로 삼았고, 내무부에서는 별것도 아닌 일을 트집 잡아 왕계년을 감찰원에서 내쫓았다.
이것이 왕계년이 감찰원에서 쫓겨나게 된 과정이었다. 하지만 그런 고초를 겪고도 왕계년은 소년의 신분에 대해 한마디도 발설하지 않았다. 이번 사건이 표면적으로 드러난 것보다 훨씬 복잡한 사안임을 은연중에 아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소년은 경험 부족으로 자신의 신분을 노출했지만, 왕계년 자신은 절대 그와 같은 허술함을 내보이지 않은 것이었다.
왕계년은 일자리를 잃는 게 두려웠다. 하지만 비개 대인의 눈 밖에 나는 일이 훨씬 더 겁나고 두려웠다. 그런데 이는 다른 감찰원 관원들도 마찬가지였다.
"비개 대인이 돌아오시면 내 몽땅 일러 주겠어!"
죽을상을 하고 양어깨를 축 늘어뜨린 왕계년이 저 멀리 사라져 갔다.
"왕 형."
1처의 관원이 활짝 웃는 얼굴로 길모퉁이에서 툭 튀어나와 그의 앞길을 가로막았다.
왕계년이 눈을 들어 보니 1처의 목철이란 자였다. 듣자 하니 목철은 지금 외양간 거리 조사조에서 일하는 중이라던데, 평소 자신과는 몇 마디 나눠 본 적 없는 사람이 어째서 이 시간에 사건 조사는 하지 않고 자신을 찾아온 것인지 의문이 들었다. 이에 왕계년은 의심으로 가득 찬 얼굴로 목철에게 인사를 건넸다.
"목철 대인 아니십니까. 무슨 용무이신지요?"
그러자 목철이 아첨꾼 같은 웃음을 보이며 부드럽게 대답했다.
"왕 형, 축하드리오. 대단히 축하드리오."
목철은 범한이 자신에게 내려온 동아줄인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자신의 생각과 달리 오히려 죽을 쒀서 개 주는 꼴이 펼쳐지고 말았다. 그렇다고 해도 목철은 긍정적으로 생각했다. 이번 일을 계기로 범 공자와 계속 연락을 할 구실이 생겼으니, 이후 다시 가까워질 계기가 하나 더 마련되었다고 말이다.
목철은 본래 자신이 맡은 공무에만 충실한 소박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점차 나이가 들자 이기적인 계산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던 중 범한이 가지고 있던 요패를 보게 되었고, 문득 과거에 자신이 사건을 처리할 때 저질렀던 실수가 떠오르면서 범한을 아주 튼튼한 동아줄이라고 단정해 버린 것이었다. 그러니 왕계년에게 이리 공손하게 행동한 이유도 모두 그가 범 공자의 측근일지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원래 소박하고 말주변도 없는 목철은 오늘 처음 아첨이란 걸 하고 있었다. 그래서 상대에게 잘 보이기 위해 미소를 짓고 있어도 어딘가 딱딱하니 영 부자연스럽기만 했다.
왕계년은 상대방의 굳은 미소를 보고는 ‘설마 나를 죽이고 입을 봉하려는 건 아닐까?’란 생각에 살짝 겁을 집어먹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