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3화 범한, 행동에 나서다
범한은 수년 안에 황실 사업의 관리권을 인수받을 수도 있었다. 이에 범한은 황태자와 2 황자가 노리는 대상이 된 상태였다. 한데 이 모든 사실을 북제의 첩자가 어떻게 알아냈는지에 대해서는 감찰원으로서도 알아낸 바가 없었다. 만약 첩자가 범한 살해에 성공했고 멀리 도망갔다면, 사람들은 살해 동기를 두 가지로 압축할 게 분명했다. 하나는 황태자가 자신의 돈줄을 잃고 싶지 않아 벌인 짓이란 거.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2 황자가 일부러 범한을 죽여 황태자를 모함하려 했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어느 쪽이든 경국 조정에 예측할 수 없는 파장과 결과를 불러올 게 뻔했다.
다시 말해, 범한은 비록 아직 별 볼 일 없는 인사지만 그가 살았느냐 죽었느냐는 매우 중요한 사항인 것이었다. 이 같은 내용은 모두 감찰원 2처 관리들이 일일이 분석해 내놓은 내용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북제의 첩자들이 이렇게나 멋진 계획을 생각해 냈다는 사실에 대단히 감탄하고 말았다. 단 북제의 이 작은 움직임 때문에 경국이 지금껏 은밀히 준비하고 있는 북벌 계획이 연기될 수도 있다는 점은 예외로 하고 말이다.
북벌 계획은 군사원의 참모실, 감찰원의 계획실, 황제 폐하의 머리 안에만 존재하는 사항이었다. 그리고 북벌을 시행으로 옮길지 말지는 전적으로 황제 폐하의 말 한마디에 달려 있었다. 그러므로 북제가 이처럼 은밀하게 그리고 지금 이 시점에 손을 쓴 것은 매우 총명한 처사였다. 물론 성공적으로 범한을 죽이고 아무런 단서도 남기지 않았다는 전제하에서 말이다.
그런데 북제도 놓친 게 있었다. 별 볼 일 없어 보이던 조연이 이리도 강력한 무공 실력자인 줄은 그들도 생각하지 못한 부분이었다. 범한 곁에 붙어 다니던 네 명의 호위병은 모두 사남 백작이 ‘몰래 심어 둔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이 호위병들이 독화살을 맞고도 궁수들을 깨끗이 처리할 수 있었던 건, 이들 모두가 5등급의 무공 실력자이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일행 중 정작 가장 무서운 실력을 지닌 자는 곱상한 얼굴의 서자였던 것이다. 그것도 독을 잘 쓰기로 유명한 여자 자객들에게 밀착 공격을 받는 와중에도 그들을 죽이고, 8등급 무공 고수인 거인 정거수마저 살해했을 정도로 말이다.
마지막으로 그 법사는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계륵일 뿐이었다.
* * *
"감찰원과 형부의 연명 상소는 벌써 다 작성되었다. 북제의 소행인 걸 확인했고 그 배후에 연계된 끄나풀까지 색출해 냈다고 하는구나. 유정강에서 2 황자님과 만날 예정이었다지? 네가 사리리라는 여인을 마음에 들어 해서 취선거를 만남의 장소로 정한 거라고 들었다. 그런데 취선거는 북제가 경도에 마련해 놓은 첩자의 소굴이었다. 그건 아무도 예상 못 한 사실이었고."
사방이 어두컴컴한 가운데 사남 백작이 아들의 침소에 찾아와 침대에 누워 있는 아들을 바라보며 침착하게 말을 이어 갔다.
"네가 화가 많이 났단 걸 나도 안다. 하지만 너도 이렇게 살아 있고 그 자객들은 네 손에 죽었으니 이제는 다 끝난 일이란다."
"다 끝난 일이라고요?"
살짝 기분이 상한 범한은 다시 물었다.
"사리리는 어떻게 됐나요?"
"북쪽으로 도망가다가 감찰원 4처 사람에게 붙잡혔단다. 지금은 경도로 압송되는 중이라고 하는구나."
"그녀를 죽게 해서는 안 됩니다."
범한의 목소리는 매우 차가웠다.
범건이 잠시 웃었다.
"감찰원에서 지켜보고 있는 한 쉽게 죽지 못한다."
"이게 그렇게 간단히 끝낼 일이라고 생각하시나요?"
범한이 돌연 얼굴에 미소를 띠고 아버지에게 물었다.
"뭐 다르게 생각하는 것이라도 있는 게냐?"
"궁수들 말인데요, 어떻게 경도로 숨어든 거죠? 궁수들은 바로 다음 날 불태워진 채로 발견됐다고 들었거든요. 그들에게서 무언가 발견될 걸 염려한 사람이 있었던 게 아닐까요?"
범한이 어디가 불편한지 몸을 이리저리 뒤척였다.
"아버지께서는 제가 그 일에 대해 모르기를 바라실 겁니다. 제가 욱해서 복수나 하지 않을까 걱정되시겠죠. 하지만 누가 제 목숨을 노렸는지 저에게는 알 권리가 있습니다."
범건이 차갑게 범한을 바라보았다.
"너도 분명 잘 알 것이다. 내가 황제 폐하를 대신해 암암리에 권력 한 부분을 쥐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물론 그 권력이 감찰원보다 강하지는 않을지라도 충분히 전문적인 일이란다. 하지만······ 내가 맡고 있는 직책으로는 북제와 내통하고 있는 자가 누구인지 조사할 권한이 없어. 의심 대상도 황태자와 2 황자만 있는 것도 아니고. 심지어 재상과 장 공주도 의심스러운 사람들이란 말이다."
"누가 진짜 적인지 밝혀낼 도리가 없다면······ 지나치게 크게 떠벌려서 곳곳에 적을 만들 필요는 없지 않겠니."
범건이 계속해서 말을 이어 갔다.
"네게 해주는 충고이니 너도 받아들였으면 좋겠구나."
범한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그 와중에 어깨에 난 상처를 건드려 잠시 이맛살을 찌푸렸다. 범한이 두어 번 숨을 내쉬고는 범건의 말에 대답했다.
"저는 어떻게 해서든 이번 일을 명명백백하게 밝혀낼 것입니다."
아버지가 방에서 나가자 범한의 두 눈에 갑자기 침울한 기운이 돌았다. 그러더니 어두컴컴한 방의 한쪽 구석을 바라보며 원망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왜 그날 직접 나서지 않으신 거죠?"
오죽이 어둠 속에서 걸어 나왔다. 그의 눈 위에는 여전히 검은 천이 둘려 있었다. 주름 하나 없는 천이었다. 마치 내내 무표정하기만 한 그의 얼굴처럼 말이다.
"왜 제가 나서야 하는 거죠?"
오죽이 이렇게 반문하는 건 매우 드문 경우였다. 그는 경도로 온 후로는 담주에 있을 때보다 훨씬 더 신비한 사람이 되어 단 한 번도 범한에게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었다.
오죽의 질문에 범한은 수렁에 빠진 기분이었다. 하지만 생각해 보니 오죽 아저씨의 말도 일리가 있었다. 상대방이 자신의 성장 과정을 지켜봐 주었다고 해서 그에게 무언가를 요구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게다가 오죽에게 도의적인 빚을 지고 있는 유일한 사람도 범한 자신이었다.
범한이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자 오죽은 몸을 살짝 앞으로 굽히고는 담담하게 말했다.
"전에도 한번 말씀드렸습니다. 제가 여러 해 동안 도련님을 교육해 왔고, 비개도 도련님을 교육했으니 이런 작은 일조차 처리하지 못하신다면 그건 도련님 자신의 문제인 거지, 우리들의 문제가 아니라고 말입니다."
"일이 끝나고 난 후에야 그 거인이 8등급의 고수인 걸 알았습니다. 전에 아저씨께서 말해 주셨던 것처럼 ‘정기’는 7등급이고 ‘통제 능력’은 3등급인 제가 어떻게 그 거인의 적수가 되겠습니까."
범한이 쓴웃음을 지으며 계속 말을 이어 나갔다.
"아저씨께서 모든 게 제 문제라고 하셨는데요, 설마 제가 다른 사람 손에 죽어도 상관없으신 건가요?"
"그래서 돌아가셨습니까?"
오죽이 답이 너무 명확해 재차 확인할 필요도 없는 질문을 던졌다.
범한이 오죽의 얼굴 위에 있는 검은 천을 주시하면서 찬 공기를 들이마셨다.
"그때 제 곁에 계시지 않았나요?"
"그렇습니다만."
"그렇다면 왜 도와주지 않으신 거죠?"
범한은 목소리는 낮추었지만 계속 분노를 쏟아 냈다.
"호위병 세 명이 모두 죽었습니다! 등자경도 많이 다쳤고요!"
"저는 도련님 이외의 사람들은 죽든 살든 관심이 없습니다."
참으로 냉정하고 무정한 대답이었다.
"도련님 주변 사람들은 모두 도련님 때문에 모여들었습니다. 만약 도련님께서 그들의 인생을 좌지우지하고 싶다면 그들의 인생도 책임져 주셔야 합니다. 그러니 그들 호위병의 삶과 죽음은 모두 도련님께서 책임지셔야 할 일이지 제가 책임질 일이 아니지요."
범한은 다시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오죽 아저씨의 말이 구구절절 옳았기 때문이다.
"저는 도련님을 많이 도와드릴 수 없습니다."
오죽이 냉랭하게 말을 이어 나갔다.
"담주 절벽에서 이미 말씀드렸습니다. 경도에서는 제가 도련님 곁에 있으면 오히려 문제가 될 거라고요. 그리고 그 문제는 도련님께서 절대 마주하고 싶지 않은 것이라고요."
범한이 쓴웃음을 지으며 열두 살 때 나누었던 말들을 떠올려 보았다. 그때 범한은 웃으면서 다음과 같은 반응을 보였었다.
―그럼 제가 지켜 드릴게요.
그런데 결국에는 농지거리에 불과했다니.
"그러니 기억해 두세요. 경도에 있는 한 저는 햇빛 아래서는 도련님 곁에 없을 겁니다. 도련님이 죽을 위협에 처했거나 아니면······ 도련님께서 죽지 않는 한은 말이죠."
오죽은 여전히 무표정한 채로 말했다.
범한은 오죽 아저씨와 같은 절대 고수가 대체 무엇이 두려워 저러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너무나 단정적이고 더 이상 이론의 여지가 없는 말을 듣고 나니 조금 암담한 기분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누가 왔습니다."
오죽이 서둘러 말하고는 다시 어둠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손님이었다. 그것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별로 만나고 싶지 않은 손님이 온 것이다. 잠시 후 세자 이홍성이 한껏 음침한 얼굴을 하고는 걸어 들어왔다. 그러고는 전혀 거리낌 없이 범한의 침대에 깊숙이 들어와 앉아 목소리를 깔고 으르렁 거리듯 말했다.
"오늘 소식을 들었겠지? 북제의 사신이 자신들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았다더군. 흥분한 태학 학생들이 하마터면 홍려사를 때려 부술 뻔했다네."
홍려사는 경국의 외교 기관으로 주로 북제, 제후국인 소국들, 동이 사이에서 문서와 금전 왕래에 관한 일 그리고 그와 관련된 일들을 전문적으로 처리하고 있었다. 홍려사가 공격을 당했다는 말에 범한은 쓴웃음을 지었다.
"참으로 피가 뜨거운 젊은이들이군요. 그런데······ 북제야 당연히 시인하지 않겠지요. 만약 그들이 잘못을 시인한다면 그건 적국이 경도로 살수를 보내 마음대로 살인을 저지르고 다녔다는 걸 경국 백성들에게 인정하는 꼴이니까요. 그렇다면 두 나라 사이에는 시끌시끌한 일이 끊이지 않을 것입니다."
이홍성이 씁쓸하게 웃었다.
"이미 소란스러워졌다네. 폐하께서 이미 황명을 내리시어 연경에 머물고 있는 북제의 사절단을 성 밖으로 쫓아내라고 하셨어. 심지어 그들의 짐까지 모두 내다 버리라고 하셨다더군."
범한이 비웃었다.
"외부 사람에게는 의외로 꽤 빠르게 대응하시는군요."
범한의 말에서 숨은 가시를 알아챈 이홍성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요 며칠 계속 자네를 찾아왔었어. 그런데 자네 상태가 아직 나쁜 것 같으니 어떤 일들은 말해 주기가 그렇군."
범한이 한숨을 내쉬고는 말했다.
"대체 어떤 놈에게 빚을 지고 접대를 받으셨기에 암살자가 나타난 것입니까. 제가 경도로 들어온 후 사귄 사람은 세자, 한 분뿐입니다. 그런데 언제나 행동이 당당하시고 말도 시원시원하게 하시던 분이 어찌 오늘은 주저주저하며 제대로 말씀을 못 하시는 겁니까."
이홍성이 자책하기 시작했다.
"전부 내 불찰이라네. 취선거가 북제가 보낸 첩자들의 소굴일 줄 내 어찌 알았겠어?"
이홍성은 잠시 숙고해 보고는 말했다.
"오늘 내 이곳에 온 이유는, 우선 2 황자를 대신해 유감을 표명하기 위해서라네. 원래는 그분께서 친히 자네 병문안을 오시려 했어. 하지만 자네도 알다시피, 최근 경도에서 발생한 살인 사건 때문에 물이 잔뜩 흐려진 상태가 아닌가. 그래서 이곳까지 행차하는 건 경솔한 행동이란 판단을 내리신 거지."
이홍성이 쓴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어 갔다.
"많은 이가 나와 2 황자가 배후 세력이고, 자네를 죽여 황태자에게 죄를 뒤집어씌우려 했다고 추측하더군."
이홍성이 말하는 동안 범한은 웃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한, 애매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홍성은 말하다 말고 갑자기 웃음이 튀어나오고 말았다.
"그리 심오한 표정으로 날 보고 있는 건, 설마 이번 일의 주모자가 나였다는 걸 인정하란 의미인가?"
범한도 웃기 시작했다. 이번 일은 이홍성이 꾸민 짓은 아니라고 믿고 있었다. 왜냐하면 아직 조정의 힘 있는 조력자를 두지 못한 2 황자가 백작가의 지지를 잃는다면 이는 가장 막대한 손실이 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2 황자 입장에서는 황태자에게 죄를 뒤집어씌워 모함했을 때보다 훨씬 더 큰 손실을 입는 것이었다.
범한이 침대에서 겨우겨우 몸을 일으켰다. 그러자 여종이 범한을 부축한 채로 물을 먹였다. 범한은 방문 앞에 사람이 와 있는 것을 보고는 욱해서 욕하고 저주를 퍼붓고 있었다. 이렇게 심하게 다친 사람을 만나기 위해 계속 병문안을 오면, 이건 상처 치료에 도움을 주기는커녕 오히려 고문이라고 생각했다.
더군다나 이번에 온 이는 알지도 못하는 사람이었다. 그가 자기소개를 했다. 원래는 감찰원 제1처 관원인데, 황명으로 원무를 처리하다가 지금은 외양간 거리의 자객 사건을 조사 중이라고 했다. 그는 또 이번 사건에 조정 관원이 연루되어 있고 배후에 복잡한 사정이 있다는 풍문이 있어서, 모든 관련 안건이 감찰원에 넘겨진 상태라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