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2화 조사
범한은 매우 침착했다. 이는 두 세계를 살면서 쌓은 경험 때문이기도 했지만, 오히려 비개와 오죽으로부터 받은 가르침이 더 많이 작용했다. 범한은 이 순간 오죽 아저씨가 왜 도와주지 않는지 생각조차 할 여유가 없었다. 다만 경도에 온 이래로 가장 큰 시련에 직면했음은 알고 있었다. 만약 이 시련도 극복할 수 없다면 이는 범한 자신에게는 이 세계에서 새로운 삶을 살 필요가 없음을 증명하는 것밖에 되지 않았다.
거인과 네 장(丈) 정도 떨어진 거리. 범한은 눈 깜짝할 사이에 왼손으로 환약 하나를 입에 넣고 동시에 숨이 넘어가기 직전의 등자경 앞으로 다가가 오른손을 들어 공중에서 거인의 손을 가로막았다.
턱, 하는 소리가 폭발하듯 골목 안에 울려 퍼졌고, 소리의 여파로 주변 오동나무가 떨더니 나뭇잎이 무력하게 떨어지기 시작했다.
골수까지 통증이 밀려들었다. 지금껏 단 한 번도 겪어 보지 못했던 거대한 힘이 거인의 손바닥을 통해 전해져 온 것이다. 하지만 범한의 손은 그의 손을 막아 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끄응, 소리와 함께 그의 입가에서 피가 흘렀다. 그렇지만 범한은 전혀 당황하지 않았다. 그의 왼손이 이미 그것의 방아쇠를 잡고 상대에게 치명상을 줄 준비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때 매우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골목 입구부터 불어온 바람이 범한의 몸을 부드럽게 감쌌다. 기이한 힘이 바람을 타고 와 범한의 몸과 계속해서 힘겨루기를 하는 것만 같았다. 비록 강한 힘은 아니었지만 다음 동작을 하지 못하도록 힘으로 막고 있어서 범한으로서는 매우 거슬렸다.
거인은 입을 벌리고 웃으며 범한의 눈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 거인의 모습은 야만적인 힘으로 가득 찬 야수 같았다. 그리고 그의 두 눈은 보기만 해도 무서울 정도로 피비린내 나는 시뻘건 붉은색이었다.
범한의 시선이 거인의 크고 넓은 몸 너머 골목 입구 쪽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사람처럼 보이는 형상이 아른거리고 있었다. 그것은 삿갓을 쓰고 있었다.
"내가 네 머리통을 산산조각 낼까 두렵구나!"
범한이 속수무책임을 알아차리기라도 한 듯 거인이 미친 사람같이 웃으며 손바닥에 더 많은 힘을 실었다.
범한은 상대를 멸시한다는 듯 흥! 하고 소리를 냈다. 하지만 환생한 이래로 가장 큰 곤경에 처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순간, 그의 오른손은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속으로는 계속해서 ‘엿이나 먹어라!’라고 욕하고 있었다.
범한은 생사의 갈림길에 서 있었다. 그의 몸에서 줄곧 잔잔한 호수처럼 안정적이었던 정기는 마치 무언가로부터 도발이라도 받은 듯 계속해서 불안한 상태를 벗어나지 못했다. 잠시 후, 어마어마한 정기가 그의 허리 뒤 설산 혈에서 힘차게 뿜어져 나오더니 곧장 체내의 순환 경로를 따라 맹렬하게 그의 오른팔로 직행했다.
그 순간 범한은 자신의 오른팔이 무쇠 팔이 된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강한 정기는 이내 크기 차이가 큰 두 손바닥을 순간 약 일 촌 정도 떨어뜨려 놓았다. 그러고는 곧장 다시 두 손을 매섭게 충돌시켰다.
펑! 어마어마하게 큰 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는 무수한 날카로운 울부짖음이기도 했다. 두 사람 주변으로 무수히 많은 그리고 파편화된 날카로운 정기가 솟아오르더니 흩날리는 오동 잎까지 모두 갈가리 찢어 놓는 소리였다.
"죽어!"
범한이 포효했다. 하지만 그는 이내 매우 무서운 통제력으로 주먹을 거둬들였다가 다시 거인의 복부로 직선으로 내질렀다. 거인의 얼굴에 매우 기괴한 표정이 떠오르더니 범한의 얼굴을 향한 그의 입에서 곧 선혈이 뿜어져 나왔다. 그리고 이 순간 그의 명치 부분은 움푹 패어 있었다!
한데 거인의 생명력은 너무나도 끈질겼다. 그는 이리 거센 공격을 받고도 여전히 제자리에 꼼짝하지 않고 서 있었다. 그는 오히려 그 큼지막한 손을 부채처럼 펴 들어 범한의 오른 어깨를 잔인하게 내리치기까지 했다. 범한의 오른 어깨는 별안간 흑곰이 훑어 놓은 두부처럼 엉망진창이 되어 피가 흐르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 순간, 범한이 지금껏 지니고 있던 강력한 힘이 드디어 폭발하기 시작했다. 범한은 그리 큰 상처를 입고도 짧은 신음 소리만 내고는 온 힘을 다해 거인의 가슴팍으로 달려들었다. 그리고 그 순간 왼손에 지니고 있던 가늘고 긴 비수로 거인의 목을 인정사정없이 찔렀다.
범한은 힘을 주어 비수를 아래로 잡아당겼다.
거인의 명치가 움푹 들어가더니 곧이어 배가 갈라졌다. 그리고 그의 배 속에서 장기가 와르르 쏟아졌다. 피, 창자, 복막이 거인의 발 위로 흘러내린 것이었다.
그는 자신이 본 것을 믿을 수 없는지 고개를 들어 범한을 한번 바라보고는 이내 뒤로 넘어갔다. 그런데 이때, 마치 커다란 나무가 바닥에 부딪치기라도 한 듯 쿠궁, 하며 소리가 울렸다.
* * *
세상은 드디어 고요를 되찾았다. 범한은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겨우겨우 선 채로 골목 입구에서 보일 듯 말 듯 서 있는, 삿갓 쓴 자를 노려보고 있었다.
산들바람이 시원하게 불기 시작했지만 피비린내는 사라질 줄을 몰랐다. 범한은 골목 모퉁이에 있는 삿갓 쓴 자를 주시하고 있었다. 그러다 은연중에 상대가 무공 고수들 사이에서 계륵 취급이나 받는 법사이며, 오늘 우연히 저자 때문에 거인의 손에 죽을 뻔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사람의 형태를 한 것이 범한에게 공손히 인사를 하더니 자리를 떠나려고 했다.
범한과 삿갓 쓴 법사는 서로 네 장(丈) 정도 떨어져 있었다. 법사는 바람을 부리는 풍사여서 자신이 도망가는 데 도가 텄다고 자신하고 있었다. 게다가 4대 종사가 친히 자신을 상대하지 않는 이상은 이 세상에서 자신을 따라잡을 수 있는 사람은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니 중상을 입은 범한은 더더욱 자신을 따라올 수 없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계획이 실패로 돌아간 이상 곧장 몸을 돌려 깔끔하게 자리를 떴어야 했다.
범한은 여전히 폼을 잡고 있는 녀석을 주시하며 손에 쥐고 있던 가늘고 긴 비수를 집어 던졌다. 이때 범한은 왼쪽 팔을 들어 살살 돌리다가 이내 용수철처럼 쭉 뻗었다.
그러자 골목 입구에 있던 법사는 순간 손으로 목을 부여잡더니 바닥에 쓰러졌다. 그리고 외마디 고통스러운 비명과 함께 곧장 숨이 끊어졌다. 주검이 된 자의 손가락 사이에는 그의 영혼을 앗아 가버린 아주 가느다란 쇠뇌의 화살이 삐죽 삐져나와 있었다.
"멍청한 놈!"
* * *
범한은 등자경에게 환약부터 먹였다. 그러자 몸에 있던 독이 어느 정도 해독이 되고 등자경은 정신이 돌아왔다. 하지만 몸에 아직 남아 있는 독을 치료하기 위해서는 백작가로 돌아가 더 치료를 해야 했다. 범한의 고운 얼굴은 새하얗게 질린 채 거인이 뿜어낸 피로 얼룩져 있었다. 누가 봐도 끔찍한 몰골이었다. 범한이 정신을 차린 등자경에게 말했다.
"여기를 꽉 눌러요."
범한이 등자경의 허벅다리 위쪽에 위치한 어느 한 부분을 가리켰다. 바로 대동맥이 있는 곳이었다.
다리가 부러진 등자경은 고통으로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 있었으며 식은땀을 줄줄 흘리고 있었다. 그런데도 벌벌 떨면서도 손으로 대퇴부 상단을 꾹 눌렀다. 하지만 상처 부위에 손이 닿자 고통을 참지 못하고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하지만 등자경은 이내 진짜 사나이다운 면모를 제대로 보여 주었다. 범한이 천을 찢어 상처 부위를 지혈하고 타는 것처럼 아픈 부위에 지혈용 가루를 붓는데도 범한을 바라보며 소리 한 번 내지 않고 꾹 참아 낸 것이다.
이러한 상처는 일각 안에 손을 봐야만 한다. 전생에 살던 세계에서는 이를 두고 ‘골든 타임’이라고 불렀다. 범한은 등자경의 상처를 수습하는 동안 잔뜩 긴장한 상태였다. 그리고 상처가 등자경의 목숨에 지장을 주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한 후에야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데 동시에 온몸에서도 힘이 빠져서 그런지 범한은 하마터면 바닥으로 주저앉을 뻔했다.
등자경은 매우 난처해했다.
"도련님, 도련님의 상처가······."
범한은 그제야 자신도 상처를 입었다는 게 생각났다. 그러자 갑자기 오른쪽 어깨 부위가 견딜 수 없이 아파 왔고 절로 끄응, 하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범한은 상처 부위로 정기를 보내 보았다. 다행히 경맥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범한은 자신에게 무서운 일이 일어나지 않을 거란 걸 확신하자 등자경을 향해 말했다.
"가만히 누워서 기다리고 있어요."
범한은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야만 했다. 이에 그는 그 무시무시한 거인이 뚫고 나온 벽을 따라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벽 뒤쪽에는 시체만 있었다. 대부분 용감한 세 명의 호위병에게 참수된 궁수들이었다. 잠시 후 온몸을 웅크리고 있는 세 구의 시체가 범한의 눈에 들어왔다. 그들의 머리는 이미 산산조각이 나 있는 상태였다.
몸을 웅크리고 있는 건 독 때문이었고, 머리가 산산조각 난 것은 저 무서운 거인의 짓일 게 뻔했다.
호위병 세 사람의 시체를 확인한 범한은 아무 말 없이 뒤로 물러나 등자경 곁에 앉았다. 그리고 다시 조용히 자신의 상처를 싸맸다. 그리고 또 조용히 친구든 적이든 누구든 나타나 주기만을 기다렸다.
* * *
외양간 거리에서 벌어진 범한 습격 사건은 이번 달 경도에서 발생한 일 중 가장 놀라운 소식으로 등극했다. 경도는 평화로운 날이 지속되고 있었고 수도인지라 경비가 삼엄해 살인 사건도 거의 일어나지 않는 곳이었다. 그러니 이런 곳에서 벌건 대낮에 그것도 호위까지 대동하고 나선 사남 백작가 큰 공자가 자객에게 공격당한 사건은 대단히 큰일일 수밖에 없었다.
비록 아직 범씨 가문의 족보에도 들어가지는 못한 백작가 큰 공자에게 일어난 일이긴 했지만, 어찌 되었든 이번 사건은 과거 범한이 일으킨 구타 사건과는 차원이 다른, 즉 자객이 사람을 죽였고 게다가 궁수까지 동원된 경우였다. 도읍인 경도에서 누군가가 궁수까지 동원해 살인을 저질렀다는 것은 곧 조정의 통치 세력을 향해 도발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이에 경국의 여러 기관들이 속속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 기관들은 사건의 ‘진상’을 밝혀 내는 데 그리 오랜 시간을 들이지 않았다. 그리고 이는 상당 부분 범한의 공이기도 했다. 범한이 자객에게 공격당하면서도 열심히 반격한 까닭에 그리고 상대방이 보낸 주요 궁사의 시체들을 외양간 거리에 남겨 둔 까닭에 이 사건은 경국 역사에서 가장 흉악하고 기이한 미제 사건으로 남지 않게 된 것이다.
특히 범한이 도살된 돼지처럼 배를 갈라 버린 그 거인은 무척이나 유명한 사람이었다. 그 바람에 사건의 진상을 파헤치는 데 드는 노력과 시간을 많이 줄일 수 있었다.
하지만 감찰원의 진평평 원장과 비개 대인이 급히 경도로 돌아오지 않는 걸 보니, 이번 사건은 그리 심각한 사건은 아닌 것 같았다.
거인의 이름은 정거수였으며, 북제에서도 명성이 자자한 흉악한 인물이었다. 칼과 창에 어지간해서는 몸이 뚫리지 않는 무공을 익혔으며, 가장 큰 특징은 누구와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엄청나게 무시무시한 힘을 지녔다는 것이었다. 그에게서는 정기가 흘러넘쳤으며 그는 천하에서 몇 안 되는 8등급 고수 중 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범한에게 목이 부러져 죽은 미녀 자객들은 작은 제후국의 살수들이었다. 그런데 같은 정보라도 감찰원이 암암리에 알아낸 사실들을 보면 훨씬 더 정확하고 세세했다. 감찰원이 알아낸 정보에 따르면, 이들은 언니와 동생으로 이루어진 살수였으며 원래는 북제의 명령을 받고 움직이는 자들이었다.
이로써 사건의 진상은 거의 다 밝혀진 것 같았다. 자객 살인 사건의 배후에 북제가 있는 것으로 밝혀졌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배후의 실체가 북제의 젊은 황제인지 아니면 덕망 높은 국사 고하인지는 정확히 밝혀진 것이 없었다.
그러자 경도 사람들은 저마다 자신이 생각한 것들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지금은 병든 호랑이에 불과한 것 같아도 아직 위세가 남아 있는 북제에서 무엇 때문에 범 공자를 죽이려 했는지에 대해 나름의 분석을 계속해서 내놓았다.
범한은 지금 경도에서 시인으로, 아름다운 외모로 그리고 흉포한 행동으로 유명세를 치렀다. 하지만 천하라는 틀에서 범한을 본다면 그는 여전히 미미한 존재에 불과했다. 그러니 왜 북제가 8등급의 고수까지 희생시켜 가면서 그리고 두 명의 제후국 자객을 대가로 치르면서까지 범한을 죽이려 한 것인지. 그것도 경도로 들어온 지 얼마 안 되는 사람을 말이다. 아무리 봐도 이해가 안 되는 일이었다.
하지만 경국에서 진짜 권력을 쥐고 있고 비밀 사항에도 접근할 수 있는 사람에게 북제는 숨겨 둔 비기이며 잔인한 무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