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0화 과연 개미가 나무 위로 올라갈 수 있을까
한동안 밤마다 만나다 보니 이 두 정혼자는 이미 서로에 대해 많은 걸 알게 되었다. 그리고 이유는 모르겠지만 이 둘은 경묘에서 서로 첫눈에 반한 후 상대방이 자신과 대단히 닮은 구석이 많다는 걸 느끼고 있었다. 어쩌면 외모 때문일 수도 있고, 어쩌면 몸에서 풍기는 기질 때문일 수도 있으며, 또 어쩌면 사물을 보는 관점 때문일 수도 있었다. 이처럼 딱 맞아떨어지는 것 같은 느낌은 첫사랑에 빠진 범한에게, 또 첫사랑에 빠진 임완아에게 서로 손을 맞잡고 있다는 미묘한 기분을 느끼게 했다. 생판 남이었던 남녀가 눈빛 하나, 손짓 하나만으로도 상대가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알 수 있게 되기까지 이 둘에게는 사실 그리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임완아가 살짝 근심 어린 얼굴로 범한을 바라보며 물었다.
"매일 그 향으로 호위병들을 잠들게 하던데 시간이 지나면 문제가 되지 않을까요?"
범한이 임완아를 안심시켰다.
"이곳에 온 첫날 말했잖아요. 이 향은 사람의 몸에 좋은 작용만 한다고요."
임완아는 순간 범한이 창문으로 들어온 첫날이 생각나 저도 모르게 웃었다.
"그날 공자님을 여인을 범하러 온 도적으로 알고 죽였으면 어쩔 뻔했습니까?"
범한이 쓴웃음을 지으며 그녀의 손을 잡아끌었다.
"의신, 아마도 당신에게는 꼭 말을 해야만 할 것 같습니다."
범한이 자신을 아이 때 불리던 이름으로 부르자 임완아는 살짝 부끄러워하며 대꾸했다.
"무엇을 말입니까?"
"음······ 당신이 날 죽이려 한다면 아마 매우 어려울 거예요."
범한이 생글생글 웃으며 말을 이어 나갔다.
"나는 어려서부터 엄청난 사람에게서 무공을 배웠어요. 그래서 내 본모습은 시를 쓰는 문인이기보다는 아주 거칠고 경솔한 사내에 가깝답니다."
임완아가 탄식했다.
"알겠습니다. 거칠고 경솔한 사내가 맞는다면, 어찌 길거리에서 사람들이 다 보는 앞에서 곽 상서의 아들을 때려 놓고 지금까지도 경도에 있는 겁니까?"
그러고 보니 곽보곤을 때린 사건은 아직 결판이 나지 않은 채 양쪽이 팽팽히 맞서 싸우는 중이었다. 이는 경도의 관할 관아에서 일찌감치 백기를 든 사건이었다. 다시 말해, 관할 관아에서는 이 안건을 형부로 이송할 때 ‘안건이 복잡하여 결정할 수 없다’라는 명목을 내걸어, 어느 쪽과도 싸울 의사가 없음을 명확히 했던 것이다.
사실 이 안건은 복잡하기는 했다. 만약 관아에서 정말로 조사를 하고자 했다면, 현재 범한과 함께 경도를 거닐고 있는 호위도 잡아들이고 그들에게 고문도 가했어야 한다. 그런데 고문 후 진상이 밝혀지면 그때부터 진짜 골치 아픈 일이 벌어지게 되어 있었다. 즉 사건 당사자인 두 가문이 꽤 힘이 있는 집안이라 범한의 폭행 사건은 자연히 복잡해질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관아 입장에서는 꼼수를 부린 것이겠지만 또한 정정당당한 방법을 사용한 것이기도 했다. 안건이 형부로 이송되자, 이 사건을 떠맡은 형부도 마찬가지로 골치가 아팠다. 그래서 지금 형부에서는 황궁에서 감찰원에게 이 안건을 해결하도록 명령을 내리게 하는 방법을 찾는 중이었다.
비록 이 사건은 감찰원 관할은 아니었지만 양측의 부모가 모두 관리이니 감찰원의 관리 감독 권한을 이용하려는 것이었다. 이는 모두 경도의 문무백관들이 감찰원의 원장 대인은 관원이든 귀족이든 그리고 그들의 친인척들이든, 모두 눈 아래 두고 가만두지 않는다는 점을 잘 알고 있기에 내놓을 수 있었던 생각이다.
이에 곽보곤의 집안에서는 감찰원이 조사를 시작하는 날만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곽보곤 측은 범한도 그날만을 기다리고 있다는 걸 전혀 모르고 있었다. 게다가 범한은 비개가 전해 준 패를 쥐고 있었으므로 감찰원이라는 괴물이 전혀 무섭지 않았다.
밤은 편안하고 조용했다. 범한은 살짝 정신이 멍해진 상태였지만 이내 임완아를 다독이기 시작했다.
"그 일은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며칠 지나면 곧장 사그라질 것입니다."
범한은 문득 이 어린 여인의 어머니가 떠올랐다. 그리고 그녀의 어머니가 4년 전 자신을 암살하려 했다는 사실이 떠오르자 이마가 절로 찡그려졌다.
임완아는 침착하고 총명한 아가씨였다. 그래서 범한의 표정을 보고는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최근에 무슨 곤란한 일이라도 있었나요?"
범한이 임완아의 그려 놓은 듯 아름다운 눈매를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만약에 나중에 말입니다, 나와 장 공주마마 사이에 무슨 문제라도 생긴다면 그대가 어찌 처리할 것이며, 그것 때문에 그대가 얼마나 상심할지 무척 걱정됩니다."
임완아가 미소를 지었다.
"왜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두고 미리 걱정입니까? 나는 어려서부터 병약하여 죽는 날만 꼽으며 살았습니다. 언제든지 이 속세를 떠날 생각으로 말입니다. 그래서 나는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두고 두려워하는 걸 좋아하지 않습니다."
범한이 한숨을 내쉬며 애석한 마음에 임완아를 자신의 품 안으로 끌어안았다. 그리고 그녀의 머리카락에서 나는 향을 맡으며 속으로 계속 무언가를 말하고 있었다.
‘당신의 그 마음 나도 다 알아요. 나도 전생에 당신과 같은 경험을 했거든요.’
범한이 임완아의 입에 입을 맞추었다. 입술이 향긋했다.
"음······ 완아, 그대의 몸은 참으로 부드럽네요."
"저······ 공자님이 만지고 있는 것은 며칠 전 직접 가져온 베개입니다."
범한은 밤늦게 여인의 방으로 숨어드는 느낌이 너무나 좋았다. 몰래 사랑을 나누는 기분이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심리적인 부담감이나 죄책감 같은 것은 전혀 없었다. 범한은 가능하다면 이런 날이 더 오랫동안 지속되기를 바랐다. 이 모든 변화가 담주를 떠나올 때까지는 전혀 생각지도 못한 일이긴 하지만, 적어도 혼례 전날까지는 경도에서 이렇게 행복하게 지내며 자신을 괴롭히는 일들이 일어나지 않기만을 바랐다.
그런데 세상일은 자신의 바람과 반대로 간다고 하더니. 평화롭고 안정된 생활은 언젠가는 끝나기 마련이고.
이날 오후가 되자 정왕 세자가 마차를 타고 백작가로 찾아왔다. 그러자 유씨 부인이 서둘러 마중을 나가 정왕 세자에게 공손히 예를 올리며 맞이했다. 그런 후 그녀는 세자를 아름답게 꾸며진 응접실로 모시고 가 차를 대접했다.
참으로 오랜 시간이 흘렀다. 그리고 그제서야 세자 이홍성은 자신이 만나려는 사람이 아직도 감감무소식임을 알아차리고 자조 섞인 웃음을 지었다. 조정에서도 자신을 기다리게 할 수 있는 이는 문무백관 중에서도 몇 되지 않거늘, 범한 공자란 이의 허세가 참으로 대단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그동안 범한 공자 때문에 경도에서 벌어진 일들이 별안간 떠올라 내심 감탄하고 말았다.
이홍성이 보기에 범한 공자란 자는 경도로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사람들에게 꽤 많은 충격을 안겨 준 인물이었다. 겨우 시 몇 수로 문단에 작은 충격을 주었고, 한밤중에 사람을 때려 관청을 소란스럽게 해 중간 정도의 충격을 주었다. 재상의 사생아 딸과 혼약을 맺어 그 속사정을 알 만한 이들에게 심리적인 대형 충격을 안겨 주었다.
세자가 이러한 생각들을 하고 있을 때 먼 곳에서 범한이 나타났다. 범한은 큰 소리로 예를 차려 인사를 올리며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다.
범한은 세자를 일부러 기다리도록 만든 게 아니었다. 단지 경여당 대행수와 서점과 관련한 몇 가지 일을 상의하느라 시간이 지체되었던 것뿐이다. 두 청년은 살짝 떨어져 앉아 차를 몇 모금 마시고는 곧장 본론으로 들어갔다.
가장 먼저 운을 뗀 건 당연히 범한이었다. 범한은 그날 밤 일에 대해 감사의 인사부터 올렸다. 범한의 감사 인사를 받은 이홍성은 웃으며 따스한 어조로 말했다.
"그때는 우리 둘이 안면을 튼 지 겨우 며칠밖에 안 되었을 때라 공자가 왜 취선거를 통째로 빌려 나를 접대했는지 생각했었지. 그런데 공자가 애당초 그런 생각이었을 줄이야. 하지만 다 상관없네. 곽보곤 그 머저리는 황태자의 측근 중 하나이기는 해도 별 볼 일 없는 자니까. 그 집 노인네가 학식이 좀 있는 거지. 공자가 때리고 싶어 때렸으니 무슨 다른 말이 필요할까."
세자는 범한이 법정에서 한 행동을 말하고 있었다. 이를 안 범한은 자조했다.
"제가 경험이 없어서 그런 게 아닙니까! 경도에서 사람 때리는 게 그리 쉬운 일인 줄 알았다면 정왕부 정원에서 그냥 한 대 날려 버렸을 것입니다."
이홍성은 범한의 말에 깜짝 놀랐다. 그래서 들고 있던 작은 황금 비단부채를 들어 빠르게 부채질했다.
"그래도 그리해서는 안 될 터인데. 너무 상식을 벗어나는 행동을 하면 내가 나서서 공자를 감싸 줄 수 없다네."
범한은 웃으며 이홍성에게 다시 한번 감사하다고 인사를 올렸다. 그런 후 오늘 친히 왕림한 이유가 무엇이며 분부를 내릴 것이 있는지 물었다. 그러자 이홍성은 살짝 망설이다가 겨우 입을 열었다.
"이제 보니 공자를 속여서는 안 될 것 같군. 우리 두 사람의 정리를 봐서라도 진실을 말해 주겠네. 원래는 2 황자께서 공자를 속이고 만나 보라 하셨네. 공자가 반감을 일으킬까 염려하셔서 자연스러운 만남으로 가장하라 하셨어. 하지만 자연스럽게 만난다고 해도 역시 속이는 것이니 숨김없이 전부 털어놓겠네. 내일 2 황자께서 유정에서 연회를 여실 거야. 그런데 공자만 초대해 황자 옆에 배석시킬 생각이시라네."
범한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정말로 이해가 안 되는 것이 있습니다. 저 같은 단순한 수재가 어찌 2 황자님처럼 존귀한 분의 눈에 들었는지 말입니다."
"정말 모르는 건가 아니면 다 알면서도 모르는 척하는 건가?"
이홍성이 범한의 코를 가리키며 크게 웃었다.
"연기를 그 모양으로 하면 다 들통나게 되어 있어."
범한은 난처한 듯 살짝 웃고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홍성은 응접실 주변에 다른 사람이 없는 걸 확인하자 정색을 하고 말하기 시작했다.
"또 그 이야기인가. 공자를 처음 만났을 때부터 마음에 들었다네. 그래서 솔직하게 밝힌 거야. 그런데 이 같은 방법이 오히려 우리 둘 사이를 벌어지도록 만든 것 같군. 알다시피 지금의 황제 폐하께서는 태평성대를 구가하고 계시네. 하지만 장래를 생각하지 않으면 반드시 금세 우환이 닥친다고 하지 않던가. 그러니 조정 대신들의 이목이 항상 황자님들에게 쏠려 있을 수밖에 없는 것이고. 하나 큰 황자님께서는 타고난 무인이셔서 지금은 변방에서 군을 지휘하고 계시고, 황태자는 황후마마의 소생이기는 하나 품행이 단정치 않으시지. 우리 정왕부에서는 중립을 지키고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사실대로 말하자면, 내가 여러 황자님들 가운데 2 황자와 교분이 좀 있는 편이라네."
범한은 깜짝 놀랐다. 지금 세자의 모습과 행동은 자신이 알고 있던 것과 완전히 반대였기 때문이다.
전생의 작가 얼위에허(二月河)가 쓴 《옹정 황제》, 《강희 대제》 등 역사 소설을 보면, 황자들은 간단히 하고 넘어갈 말도 이리저리 돌려 복잡하게 말하고, 의복도 80여 차례 바꾸어 입으며 상대에게 약점을 잡히지 않으려 노력했다.
하지만 세자 이홍성은 범한이 알던 역사 소설 속 인물들과 달랐다. 오히려 곧장 사실대로 말해 버렸다. 더군다나 황위 계승 다툼과 관련한 말은 입만 뻥끗해도 머리가 날아가거늘, 어찌하여 세자는 앞뒤 재지 않고 몽땅 털어놓는 걸까. 범한은 참으로 이해할 수 없었다.
이홍성은 자신의 말 때문에 상대방이 놀랐다는 걸 알아챈 것 같았다. 이에 어색하게 잠시 웃고는 다시 말을 이어 갔다.
"너무 대놓고 말해서 내가 싫어진 건 아닌지 모르겠네. 솔직히 말해, 나도 이유는 모르겠네만 공자를 보니 짐짓 진실한 척 장난치고 싶은 생각이 싹 달아났다네. 그래, 나는 이번에 2 황자를 대신해 자네를 우리 편으로 끌어들이러 온 거야. 어쨌거나 이건 혼인이나 마찬가지니 서로가 원해야 맺어질 수 있는 일이겠지."
깜짝 놀란 범한은 세자의 맑은 눈동자를 응시했다. 마치 눈 안에서 숨겨져 있는 무언가를 보고 싶어 하는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범한은 상대방이 정말로 마음이 티 없이 맑은 군자인지 아니면 자신의 속을 다 보여 주는 척하며 상대방의 마음을 사로잡으려는 책략가인지 판단할 수 없었다.
그런데 어찌 되었든 세자는 자신이 어느 편인지 밝혔으며 모든 걸 다 밝혀도 상관없다는 입장이었다. 다만 아직 경도에서 세력도 키우지 못하고 도와주는 이가 없는 미약한 범한만 자신이 입고 있던 옷을 과감히 벗어 던지고 상대의 품 안으로 돌진하지 못하고 있을 뿐이었다. 이내 범한은 얼굴에 미소를 지은 채 세자에게 물었다.
"2 황자님께서 왜 저를 뵙고자 하시는지 그 이유를 정확히 알 수 있겠습니까?"
"시월에 있을 혼사 때문이네."
이홍성은 여전히 솔직하고 성실하게 답변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런 그가 미소 띤 얼굴로 범한을 바라보며 다가와 말했다.
"내년에 3년 만에 치러지는 큰 과거에서 공자가 자신의 능력을 증명한다면, 폐하께서는 그 사업들에 대한 관리권을 공자에게 넘기실 걸세. 그런데 그 일이 우리에게는 세상에 둘도 없는 중요한 호재란 말이지. 우선 그곳에 있는 은전이 입금되는 양이 약간 늘어날 걸세. 그러면 어떤 일들은 처리하기가 불편해질 테지. 또 다른 이유는 사남 백작이 경국의 호부를 관리하신 지 이미 여러 해, 그러니 이제는 분명 신구 교체기가 왔다고 볼 수 있겠지. 그렇다면 분명 이전 장부를 샅샅이 조사할 테고 그렇게 하다 보면 분명 의외의 기쁜 일이 있지 않을까."
범한은 이홍성의 말을 묵묵히 듣고만 있었다. 범한의 눈썹은 아래로 축 늘어져 있었다. 하지만 절대 낙담한 모양새는 아니었다. 오히려 상대방이 보기에는 오히려 안도감을 주는 느낌이었다. 범한이 작은 소리로 말했다.
"아직 이른 감이 있습니다. 혼사는 시월에나 하고요. 게다가 제가 황실 사업에 본격적으로 손을 대려면 내년이나 내후년까지 기다리셔야 합니다."
"그렇다네. 그래서 내일은 같이 밥이나 먹자고 만든 자리일세."
이홍성이 진지한 표정으로 범한을 바라보며 하던 말을 이어 나갔다.
"지난번 내가 해준 일에 대한 답례로 가는 건 어떤가? 알다시피 내가 오늘 이런 말을 하는 건 다 공자를 신뢰해서라네. 어쩌면 공자도 내일 2 황자를 뵙고 나면 생각이 바뀔 수도 있을 거야."
범한은 웃어 보였다. 속으로 2 황자와 황태자 간의 황위 쟁탈전은 10여 년이나 지난 후에야 본격적으로 개시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지금 자기처럼 별 볼 일 없는 녀석까지 끌어들이기 시작하는 이유를 약간 ‘반역을 준비하기 위해 일찌감치 단속하는 중’이라고 받아들였다.
범한은 그러겠노라 대답하고 백작가를 떠나는 세자를 배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