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9화 예비부부의 밤 대화
범건이 범한의 두 눈을 바라보며 차갑게 말했다.
"네 나이가 아직 어리니 열네 해 전 경국에서 발생한 일은 거의 기억하지 못할 게다."
"기억합니다."
범한이 이맛살을 찌푸리며 말을 이어 나갔다.
"열네 해 전, 누군가 황제 폐하를 용상에서 끌어내려 하늘을 바꾸려 했습니다. 그 때문에 결국에는 많은 일이 벌어졌고요. 경도에서는 꼬박 한 달 동안 살육이 이어졌습니다. 연루된 귀족들을 거의 다 죽였을 무렵, 곳곳에 피비린내가 진동했습니다. 또한 귀족들의 머리가 성벽 위에 걸렸는데 무려 일 리(里)에 이르렀습니다. 이를 두고 경도에서 유혈이 낭자했던 달이라 하여 ‘경도 피의 달’이라 부르게 되었다죠. 제가 직접 겪지는 않았지만 비개 스승님으로부터 여러 차례 들었습니다."
"그렇다."
범한이 서늘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 나갔다.
"그때 대청소를 할 때였단다. 섭가를 모함하는 데 동참했던 사람들이 우리에게 몰살되었지."
범한은 아버지가 말한 ‘우리’라는 단어가 마음에 걸려 조심스럽게 물었다.
"우리가 누구입니까?"
"당연히 나와 진평평이니라."
범건이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계속 말을 이어 나갔다.
"우리가 폐하를 따른 지 20여 년 만에 가장 성공한 작전이었단다."
"범씨 가문 역시 그 일을 계기로 일어섰고. 또한 감찰원은 그 사건 이후로 두려운 존재로 거듭났고 관리들을 향한 영향력이 굳건해졌어."
범한이 감탄했다.
"이제 보니 아버님과 진평평 원장께서 어머니의 원수를 갚기 위해 시작하신 일이었군요. 나중에는 어찌 되었습니까?"
범한은 섭가에 대해 물었다.
"이미 말했듯이, 섭가 상단의 재산을 황실에서 거두어 간 건 조정을 안정시키는 최상의 방법이었단다. 어떤 문무백관도 그보다 나은 해결책을 내놓지 못했으니까."
범건이 계속 설명을 이어 나갔다.
"문제는 대행수들이었어. 모두 네 어머니가 일일이 가르친 사람들이었거든. 물론 그들도 네 어머니의 타고난 지혜를 따라오지는 못했어. 하지만 섭가 대행수들을 관리하지 않고 방치했을 때 또 다른 섭가가 나오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었단다. 이에 폐하께서 그들을 모두 경도로 불러들이셨다. 그리고 그들에게 다른 사람들을 교육하게 하셨지. 교육받은 자들에게 섭가가 하던 장사를 도맡아 하도록 하셨어. 하지만 섭 대행수들이 직접 가게를 차려 장사하는 건 못하도록 하셨다. 그렇게 해서 생겨난 게 오늘날 경도에서도 유명한 경여당이란다."
"너희가 장사를 할 생각에 그들을 찾아간 거라면 참으로 잘한 선택이다."
범한은 우울해했다.
"대행수들이 고작 그런 이유로 경도에 10여 년 동안 갇혀 있었다니, 참으로 처참합니다. 아버님, 그렇다면 저들 대행수들을 데려다가 쓴다면 조정으로부터 주목받지 않을까요?"
범건이 머리를 내저었다.
"각 왕부에서도 사업을 할 때 경여당 대행수를 데려다 쓰고 있단다. 게다가 조정에서도 그 점에 대해서는 관여하지 않고 있지. 하지만 경여당의 열일곱 명 대행수들을 모두 데려다 쓰고자 한다면 굳이 그럴 필요는 없어 보이는구나."
"조정에서는 또 다른 섭가가 나오는 걸 꺼리는데도 왜 애초에 그들을 몰살하지 않은 것입니까?"
범한이 궁금해 질문을 던졌다. 그러자 범건이 미소 띤 얼굴로 아들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네 어미가 변을 당했을 때 나는 서역에서 황제 폐하와 작전 중이었단다. 진평평은 조정과 북제가 담판을 하는 접경 지역에서 비밀 임무를 수행하던 중이었고. 일을 마치고 경도로 거의 반쯤 돌아갔을 때 경도에서 일이 생겼다는 걸 알게 되었지. 그래서 네 어머니도 변을 당했던 거고. 만약 우리들이 진즉에 경도로 돌아갔더라면 그리고 네 어미를 죽인 이들을 모조리 죽였다면, 너도 이 아비의 실력을 의심하고 저평가하는 일은 없었을 텐데 말이다."
두 번째 부인 유씨가 밖에서 문을 두드렸다. 그 소리에 부자는 대화를 멈추었다. 범건이 유씨를 서재로 들게 하자 그녀가 과일즙을 받쳐 들고 들어왔다. 범한은 그제야 밤이 깊었고 아버지가 침소에 드는 시간임을 알았다.
이에 범한은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를 하고 나가려 했다. 한데 사남 백작이 손을 내저으며 범한에게 남아 있으라는 신호를 보냈다. 그리고 유씨 부인에게는 서재에서 나가 먼저 쉬라고 일러두었다.
범한은 아버지의 유씨 부인이 서재에서 나가기 직전, 그녀를 곁눈질로 힐끔 살펴보았다. 그녀의 눈에 걱정하는 기색이 있는 것으로 보아 남편의 몸을 걱정하고 있는 건 확실해 보였다. 하지만 범한은 자기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리고 말았다. 이 여자가 남편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다고는 해도 과거에 자신을 죽이려 한 너무나도 악랄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범한은 아버지가 자신을 서재에 남게 한 걸 보니 분명 중요한 일일 것이라 생각했다. 이에 아버지 말씀을 귀를 쫑긋 세우고 듣기 시작했다.
"최근 조정 상황을 이야기해 주마."
범건이 미지근한 과일즙을 받쳐 들고 천천히 마셨다.
"네가 아직 원망에 차 있다는 건 잘 알고 있다. 4년 전 유씨가 널 독살하려던 일도 이미 알고 있고."
범한은 깜짝 놀랐다. 자신은 조정의 내부 상황과 유씨 부인이 어떤 관계에 있는지 잘 알지 못했다. 그런데 오히려 아버지가 자객 사건에 대해 먼저 대놓고 알려 주니 순간 할 말을 잃고 말았다.
"그 두 사건은 서로 관련이 있단다."
범건은 아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고 있었다. 그래서 범한에게 담담하게 설명을 해나갔다.
"4년 전, 유씨가 그런 행동을 한 건 모두 사철이 때문이었다. 사철이는 자라면서 바른 것과는 거리가 멀어지더구나. 그래서 나도 유씨를 정부인의 자리에 올려 주지 않고 있었지. 그 사람은 절망했고 잠시 정신이 어떻게 되어 결국 그런 결정까지 하고 말았단다.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원인은 따로 있었다. 그 당시 저 사람이 황궁에 한 차례 입궁했는데, 그때 누군가로부터 보증을 받았던 거야. 바로 네가 죽으면 사철이가 범씨 가문의 모든 것을 계승할 수 있도록 말이다."
"입궁이라고요? 누가 보증을 섰기에 할머님의 목숨마저 위태롭게 한 겁니까?"
범한이 싸늘하게 물었다.
범건이 이맛살을 잠깐 찌푸리더니 들고 있던 그릇을 내려놓았다. 그는 마치 끓는 물에 손이라도 덴 것처럼 행동했다.
"유씨의 잘못을 덮어 주려는 게 아니다. 다만 그때 저 사람 대신 손을 쓴 이가 겉으로는 그녀의 명령을 듣는 척해 놓고 실제로는 황궁 내 누군가의 명령을 받았다는 게 중요한 게지. 유씨는 그저 희생양에 불과했어."
범한이 눈살을 찌푸렸다.
"황궁에서 저를 죽이려 하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왜 저를 죽이려 하지요? 제가 섭가 상단 주인의 아들인 걸 그들이 처음부터 알았던 건 아닐까요?"
"그들로서는 당연히 알 수가 없어!"
범건은 자신의 감정이 왜 이렇게 격해지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이에 오른손으로 의자 팔걸이를 꽉 움켜쥐며 말을 이어 나갔다.
"이 일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 중에 너를 해치려는 사람은 없단다. 만약 누군가가 널 죽이려 한다면 네가 섭가 주인의 아들이어서가 아니다!"
"설마 경도 사람 중에 아버지와 어머니의 관계를 아는 이가 없었다는 말씀이세요? 그들이 아버지와 섭가와의 관계를 알았을 수도 있을 텐데, 어째서 저 같은 사생아가 섭가 주인의 아들일 수도 있다고 의심하지 않은 걸까요?"
범한은 이 일이 온통 의문투성이라고 생각하니 가슴 안으로 한기가 스며드는 것 같았다. 그리고 분명 그 뒤에 더 중요한 무언가가 숨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범한은 이러한 자신의 생각을 감히 입 밖으로 꺼내지는 못하고 그저 태도를 바꾸어 나직이 말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4년 전 저는 겨우 열두 살 아이였습니다. 게다가 저 멀리 떨어진 담주에서 지내며 경도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었는데 말입니다."
"4년 전은 폐하께서 재상가 임씨 가문의 딸을 양녀로 들인 해이자, 그녀를 군주로 봉하고 혼인을 허락하신 해다. 그때 폐하께서 훗날 황실 사업의 관리를 너에게 맡기기로 결정하셨지. 이로써 황궁에서 처음으로 네 이름이 등장했단다. 겨우 열두 살짜리 아이가 감당할 수도 없는 금덩어리를 끌어안게 되었다는 걸 모두 알게 되었지. 생각해 보거라. 황궁의 그 귀하신 몸들께서 과연 어떤 선택을 했을까?"
"아주 조용히 깔끔하게 저를 제거하려 들었겠죠."
"감찰원이 4년 동안 조사를 하면서 이 사건과 관련된 건 기본적으로 거의 다 밝혔단다. 하지만 증거를 찾지 못해 그들을 그냥 내버려 둘 수밖에 없었단다."
그러자 범한이 웃기 시작했다.
"증거가 있다 한들 그들에게 아무것도 못 하겠지요. 어쨌거나 감찰원은 신하이고 그들은 주인의 위치에 있으니까요."
범건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를 죽이려 했던 사람이 누구인가요?"
"황후, 장 공주."
범건이 미소를 지은 채 말을 이어 나갔다.
"하지만 네가 이미 무사히 잘 컸고 또 경도에 왔으니, 아무리 무서운 게 없는 분들일지라도 너를 건드려 폐하의 노여움을 사고 싶지는 않으시겠지."
범한이 비관적으로 말했다.
"아버지께서는 너무 낙관적이십니다. 폐하께는 자신의 아내와 누이동생인데, 그 두 분이 저를 살해하신들 폐하께서 어쩌시겠습니까?"
범건은 아무런 답도 않고 화제를 곧장 다른 데로 돌렸다.
"한동안 정왕 세자께서 너와 가까이 지내기 위해 애를 무척 애를 쓰실 게다. 게다가 너와 둘째 황자님과의 만남을 주선하기 위해 방법도 강구 중이실 게야. 그러니 매사 조심해서 처신하거라."
범한도 그러겠노라 대답했다. 범한은 경도의 모든 명문가들은 황위 계승과 관련해 적극적이든 소극적이든 입장을 밝혀야만 한다는 걸 이미 알고 있었다. 황위 계승권을 둘러싼 황자 간의 쟁탈전은 구태의연한 연출처럼 보여도 어느 세계에서든 그리고 이 세계에서도 영원불변한 레퍼토리이기 때문이다. 즉 겹겹이 둘러쳐진 장막이 서서히 걷히면, 장막 뒤에 숨어 있던 배우들이 속속 무대로 올라가 때로는 삼척의 검으로, 때로는 세 치 혀로 다른 이에게 보여 주기 식으로, 또는 자신을 위해 연기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니 한눈팔지 않고 황제만 바짝 따른 백작가의 경우 어쩌면 그사이 어마어마한 노력을 기울였을 것이다.
이미 한밤중이 되었다. 그런데도 범건은 여전히 홀로 팔걸이 의자에 앉아 있었다. 그는 차게 식어 버린 과일즙을 마시며 조금 전 범한이 했던 말을 곱씹고 있었다. 그 당시 자신이 치러야 했던 침통한 대가를 떠올리고 있었던 것이다.
범건은 입가를 쓱 닦고는 ‘경도 피의 달’에 벌어졌던 두려움과 피비린내 가득했던 장면을 떠올렸다. 아무도 알아볼 수 없는 어두컴컴한 밤, 황후의 아버지가 자신의 칼 아래에서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범건이 손수 그자의 목을 내려치자 머리가 땅바닥으로 떨어져 굴렀다. 그리고 그때 들었던 소리가 생생히 기억났는지 범건의 입가에 온화한 미소가 감돌았다.
* * *
이후 범한은 한동안 매우 편안한 삶을 누렸다. 우선 백작가 안에서는 날마다 제대로 된 큰 도련님 대우를 받았다. 그러다가 동천로로 가 서점 개업 준비가 얼마나 진척되어 있는지 살펴보았다. 그리고 성이 섭씨인 대행수들과도 점점 안면을 익혀 갔다. 모든 일은 순조롭게 돌아가고 있었다. 그러자 백작가 식객인 최 선생도 사남 백작 곁으로 돌아갔다.
이밖에도 범한은 저녁이 되면 이틀에 한 번꼴로 황실 별궁을 찾아갔다. 별궁 앞에 당도한 범한은 너무나도 능숙하게 담이며 문을 넘어 안으로 슬그머니 숨어들었다.
그런데 예전과 달라진 것이 있었다. 바로 닭 다리 낭자가 창문을 항상 열어 둔 채 묵묵히 범한이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점이다.
범한이 자주 황실 별궁으로 간 이유는 ‘운우지정’ 같은 것을 나누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임완아의 병세를 더 이상 지켜보기만 할 수 없어서였다. 황실 사람들은 임완아의 병세와 관련한 내용을 함구로 일관했다. 대신 다행히도 어의가 몇 다리를 거쳤을지 모르는 백작가 뇌물을 받은 후 임완아 군주가 유성이라고 불리는 기름진 식품을 소량 복용한 후 차도를 보였다고 털어놓았다.
그러니 범한이 황실 별궁에 자주 찾아간 이유는 임완아에게 먹을 것과 자신이 만든 약을 전해 주기 위해서였다. 범한은 직접 약을 조제할 때 어의가 만든 약과 충돌을 일으키지 않도록 무척이나 조심을 기했다. 그리고 그가 맛난 것을 싸 들고 간 이유는 자신의 정혼자에게 매일 먹을 주전부리를 챙겨 주기 위해서였다.
이렇게 여러 날이 흐르자 임완아의 몸도 눈에 띄게 좋아졌다. 얼굴에는 점점 발그레하게 활기가 돌았으며 얼굴색도 더 이상 예전처럼 몸이 아픈 사람에게서나 볼 수 있는 진분홍색이 아니었다. 그리고 몸에도 점점 살이 올라 얼굴도 제법 동글동글하게 변한 상태였다.
임완아는 살이 올랐다고 속상해했다. 하지만 범한은 오히려 너무 좋았다. 혼인을 올리고 난 후 어리고 예쁘고 통통한 아내를 날마다 품에 안고 만질 생각을 하니 기분이 좋았던 것이다.
별궁을 지키는 호위병들은 사실 조금 기강이 해이해진 상태였다. 더군다나 범한은 담주에 있을 때 오죽으로부터 벽을 타는 무공까지 익힌 터였다. 그러니 밤마다 임완아에게 약을 먹이러 숨어들면서도 단 한 번도 들키지 않을 수 있었다.
그런데 임완아의 병은 어떻게 해도 완전히 치료할 수 없었다. 범한은 비개가 돌아오면 그때 다시 방법을 알아보기로 생각하고 있었지만 실제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범한은 혼인을 올린 후 어떻게든 경도를 떠나 요양하는 데 최적지인 창산에 있는 백작가 별장으로 떠날 계획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