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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여년-67화 (67/1,108)

067화 범씨 가문의 학당과 아이들

다음 날 아침, 임완아는 따뜻한 이불 안에서 몽롱한 상태로 깨어났다. 그런데 눈을 뜨고 자신의 몸을 만져 보던 임완아는 그날따라 유난히 정신이 맑은 것 같다고 생각했다. 궁녀 첨첨이 웃으며 임완아에게 문안 인사를 건네고는 침대에서 그녀를 부축해 일으켜 씻겼다. 그런 후 화장을 해줄 때였다. 그제야 어젯밤 일이 생각난 임완아가 느닷없이 큰 소리로 물었다.

"아! 그 사람은?"

궁녀가 이상하다는 듯 물었다.

"누구 말씀이십니까?"

임완아가 황급히 다시 물어보았다.

"어젯밤에 무슨 소리 못 들었니?"

"아가씨, 못 들었습니다."

궁녀가 진지하게 대답했다.

임완아는 창가로 다가가 창밖을 바라보았다. 어깨까지 곧게 뻗은 긴 머리카락, 몸에 걸친 흰옷, 한눈에 봐도 너무나 아름다운 자태였다. 하지만 이미 떠난 공자는 그림자조차 남겨 두지 않은 상태였다. 이에 임완아는 자신의 간절한 바람이 어젯밤 꿈으로 재현된 것이 아닌가 생각하며 자신을 의심했다.

그사이 궁녀가 기름종이에 싸인 무언가를 들고 그녀에게 다가왔다. 기름종이 포장은 이미 절반 정도 찢긴 상태였다. 궁녀가 임완아가 알아채지 못하게 슬쩍 웃으며 물었다.

"아가씨, 밤새 또 뭘 그리 몰래 드셨습니까. 보모에게 들키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 또 황제 폐하께 일러바칠지 모릅니다. 그리고 찬 바람 쐬시면 안 좋으니 창문도 얼른 닫겠습니다."

임완아는 기름종이로 포장된 것을 건네받았다. 살펴보니 그 안에 환약 몇 알이 들어 있었다. 순간 마음이 따스해진 임완아가 시선을 다시 창밖으로 향했다. 어느새 짙푸르게 변한 정원의 나무들이 그녀의 눈에 들어왔다. 창문이 닫혔다. 하지만 봄기운은 창문을 뚫고 방안으로 들어오고 있는 것만 같았다.

"우리 같은 일반 백성에게는 이런 게 제일이고말고! 아이고, 아이고 좋아라!"

화려하게 꾸며진 응접실, 범한은 그 어느 때보다 편한 마음으로 두유를 마시고 밀가루 튀김을 먹고 있었다.

범한은 자신이 운이 좋다고 생각했다. 분명 죽었는데 갑자기 이 세상에서 환생을 했으니 말이다. 물론 태어나자마자 어머니는 돌아가시고 아버지에게는 버림받은 불쌍한 처지이기는 하다. 게다가 나중에 알게 된 사실에 따르면 어머니를 죽인 원수들은 모두 제거되어 아들 된 입장에서 복수를 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아버지는 조금 문제가 있기는 했어도 적어도 자신이 참아 내지 못할 정도의 태도를 보여 준 적은 없었다.

이것 말고도 범한은 또 운이 좋은 게 있었다. 범한 자신은 분명 책이나 표절하고 베껴 쓰면서 돈을 벌어 조금이나마 세상을 편히 살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자신에게는 진즉에 그런 것 따위는 필요 없는 어마어마한 돈이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범한이 이 재산을 갖기 위해서는 거물급 인사들이 자신의 의사와 상관없이 짜 놓은 계획, 즉 일면식도 없는 여인과의 혼인을 받아들여야만 했다. 한데 이럴 수가! 그 여인은 바로 범한 자신이 마음에 두고 있던 사람이었다!

범한은 자신에게 닥친 운이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단순히 운 좋은 사람과 상시 운 좋은 사람은 있을지 몰라도 자기 같은 경우는 거의 일어날 가능성이 없었기 때문이다. 유씨 부인은 범한이 기분 좋은 상태란 걸 눈치채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아무런 티도 내지 않았다. 범한에게 흥미를 느낀 건 오히려 범사철 쪽이었다. 이에 범사철은 어머니가 응접실에서 나가자마자 소리를 죽인 채 범한에게 물어보았다.

"형님, 왜 그리 기분이 좋아요? 장사할 위치는 봐뒀으니 언제든 같이 가서 봐요."

"장사할 사람을 데려온다고 하지 않았었니?"

기분 좋은 범한의 얼굴에는 봄바람이 살랑이고 있었다. 그래서 자신의 권한을 범사철에게 과감히 위임해 버렸다.

"이미 말했잖니. 이 일은 모두 네가 알아서 하렴. 하다가 이상한 부분이 있으면 그때 날 찾아와. 네가 너무 어려서 무시당할 것 같으면 집안에 식객이 많이 계시니 대충 두 분 정도 데리고 가고."

범사철이 순간 버럭 소리를 질렀다.

"형님이 큰 주인이잖아요! 책도 형 거고 돈도 형이 절반이나 냈으니 한번 가봐야 하는 거 아니에요?"

큰 주인이란 단어에 기분이 좋아진 범한이 대답했다.

"그러지, 뭐. 이틀 후에 가보마. 그런데 얼마 전에 아버지께 맞았으니 너, 학당에서 공부하는 거는 빼먹으면 안 돼!"

"형님이 날 데리러 오면 되잖아요. 그때 내가 형님을 데리고 들르면 되지, 뭐."

"됐다. 너랑 함께 나갔다가 또 죄인 될라. 날마다 죄를 묻는 자리에 불려 가고 싶지 않다."

범한은 말을 마치자마자 남은 두유를 한 번에 마셔 버렸다. 그리고 입 안에 콩 찌꺼기가 남았는지 혀로 핥으며 불만스러운 듯 말했다.

"지금 하는 서점 장사가 잘되면 너는 어른이 되었을 때 훨씬 더 많은 장사를 할 수 있게 될 거야."

범사철은 범한이 하는 말을 도통 이해하지 못했다. 이에 자리를 떠나면서 머리만 긁적일 뿐이었다. 범약약은 이 둘의 대화를 한쪽에서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그러다 동생이 나가자 그제야 웃으며 범한에게 말을 붙였다.

"이번 혼사를 받아들이기로 하셨어요?"

"부모님의 뜻이니 받아들일 수밖에 없지!"

범한은 어쩔 수 없다는 듯 탄식하며 말했다. 하지만 거짓말에는 영 소질이 없는 터라 이내 웃으며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혼인만은 꼭 하고 싶어. 하지만 혼수로 따라오는 것들이 좀 골칫덩이라 괜스레 많은 분들에게 죄를 짓게 생겼어. 게다가 그것들을 내가 제대로 쥐고 관리할 수 있을 것 같지도 않고. 아무리 생각해 봐도 수지가 맞지 않아."

범약약은 오라버니가 말한 혼수가 바로 황실의 사업이고, 이것 때문에 오라버니가 고민 중인 것도 잘 알고 있었다. 황실 사업은 장 공주가 오랜 세월 직접 관리해 온 터라 다른 사람들은 재상과 황태자 쪽 사람들이 황실 사업으로 제법 많은 이득을 얻었다는 사실은 모르고 있었다. 그러니 만약 이 사업을 정말로 넘겨받게 된다면 범한은 인수인계를 하는 과정에서 분명 장부 조사를 할 수밖에 없을 터. 그러면 황실 금고에서부터 황실 사업까지, 관련된 사람 여럿이 다칠 수도 있는 노릇이었다.

범약약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장부 조사를 하지 않으면 어떻게 되나요?"

"장부 조사는 하지 않아도 돼. 하지만 옛날 장부를 봉인한 채 없던 일로 치면, 그때 벌어졌던 더러운 일들이 나를 덮칠 수도 있겠지. 그렇게 되면 다 끝이야. 게다가 더 중요한 문제는 돈이 들어오는 경로가 차단된 이들은 분명 분노하게 될 거란 점이야."

"그렇다면······ 재상가 아가씨와 혼인만 올릴 수 있으면 황실 사업은 필요 없다는 말씀이시군요. 이 혼인은 애당초 황제 폐하와 아버님께서 상의하신 내용입니다. 그러니 지금이라도 아버님께 부탁해 황실 사업을 물려받지 않도록 해달라고 한다면 폐하께서도 많이 노여워하지는 않으실 거예요."

하지만 범한은 동생의 말에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날 밤 아버지의 표정이 생각나서였다.

범한이 알고 있는 한 아버지는 어머니의 사업을 범한에게 돌려주는 데 광적으로 집착했다. 대체 왜 그렇게 집착하는지 이유는 알 수는 없지만 범한이 보기에 아버지는 절대 눈앞에 있는 기회를 포기할 분은 아니었다.

게다가 황실 사업은 범한 자신도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본래 어머니께서 한낱 아녀자의 몸으로 꾸리고 남겨 두신 것이니, 자신의 것과 진배없다고 범한은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니 무엇 때문에 황실 사람들이 자기 어머니가 남긴 사업으로 이득을 봐야 하는지 모르겠다는 주의였다.

황궁 안에서는 범한이 임완아와 혼례를 치르고 나서도 몇 년이 지나야 직접 황실 사업을 꾸릴 수 있다는 이야기가 돌고 있었다. 그래서 범한은 서점 일을 자신의 주된 사업으로 삼아 꾸리면서 한편으로는 이것으로 사업 방법을 익히고, 다른 한편으로는 사람들에게 자신이 장사에 재주가 있음을 증명할 셈이었다.

"만약······ 누군가가 비상 수단을 쓴다면요?"

범약약이 걱정이 되어 물었다.

그러자 범한은 잠시 생각을 해보더니 대답했다.

"장 공주를 뵌 적도, 황궁에 계신 지체 높은 분들을 만나뵌 적도 없어. 그리고 장 공주께서 어떤 성정을 지니신 분인지는 상관 안 해. 하지만 황실 금고를 10여 년 동안 관리하신 것만 봐도 분명 장 공주께서는 대단히 총명하신 분일 거야. 그러니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 혹시라도 내가 정말로 살해된다면, 설령 공주마마께서 저지른 일이 아니어도 그분께서 주목을 받게 되겠지. 어쩌면 황제 폐하께서는 내가 죽든 말든 상관 안 하실 거야. 하지만 누군가가 몰래 그분의 뜻을 거역한 데에 대해서는 그냥 넘어가지 않으실걸. 제왕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의 위엄을 지키는 것이잖니. 게다가 때마침 나는 재판 중인 몸이라 경도를 떠날 수도 없어. 그런데도 경도에서 나를 해하려는 자가 있다면······."

범한은 말하는 중간에 고개를 내저었다.

"그건 너무나 멍청한 짓이겠지."

그러자 범약약이 탄복한 표정으로 범한을 바라보았다.

"오라버니 분석이 너무 훌륭해요."

"그런 눈으로 보지 말아 다오."

범한이 약간 난감하다는 듯 누이동생을 바라보았다.

"너는 말이다, 어찌 가면 갈수록 내 말이면 전부 믿는 거냐. 나는 신이 아닌 평범한 사람이야. 그러니 내 아무리 잘 분석했다고 하더라도 분명 예상치 못한 변수가 발생할 수 있단 말이지."

범약약은 살짝 걱정이 일었다. 하지만 정작 그런 말을 한 범한은 아무렇지도 않았다. 왜냐하면 어둠 속에 숨어 있는 오죽 아저씨는 지금 여행 중인 섭류운이 경도로 돌아오지 않는 한 계속 제 곁을 지켜 줄 것이기 때문이었다.

정오가 되자 범한은 등자경을 포함한 호위들의 엄호를 받으며 범씨 가문의 글방으로 달려갔다. 모두 범사철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아예 안 봤으면 몰라도 글방 광경을 본 범한은 거의 까무러칠 뻔했다. 글방에 있는 범씨 일족의 아이들이 하나 같이 훈장은 아랑곳하지 않고 하하호호 웃으며 모두 장난을 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중 담이 좀 큰 녀석은 붓에 먹물을 잔뜩 묻혀 뿌리는 통에 벽이며 훈장의 옷이며 먹물이 튀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였다.

훈장은 화가 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했다. 하지만 아이들의 집안 배경 때문에 차마 화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부모들이 아이들에게 주의를 주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스승을 공경해야 한다고 재차 타일렀지만 아이들은 일단 글방에만 오면 금세 딴 사람으로 변해 버렸다. 더군다나 집에서 데려온 덩치가 좋은 어린 종을 믿고 마음대로 행동하기 일쑤였다. 이에 아이들은 이 글방에서뿐만 아니라 거리에서도 자주 무례한 행동을 일삼았다.

범한은 글방 안으로 얼굴을 빼꼼 집어넣은 채 내부에서 일어나는 상황들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범한이 보기에 범사철은 그런대로 착실한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범사철은 한쪽 구석에 있는 책상 앞에 앉아 무언가를 열심히 쓰고 있었고, 함께 따라간 어린 종은 옆에 꿇어앉아 차 시중을 드는 중이었다. 범한이 보기에 범사철은 훈장님의 수업 내용을 진지하게 듣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다행히 예의에 어긋나는 행동은 하지 않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 범한은 동생을 과대평가하는 중이었다. 만약 지금 범사철이 어떤 일에 정신이 팔려 있지만 않았다면, 그는 지금 글방 안에서 장난치며 놀고 있는 다른 어떤 아이보다도 더욱 오만방자한 태도로 놀고 있을 게 뻔했기 때문이다.

범사철을 밖으로 불러낸 범한이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여기는 공부하는 곳이잖아!"

범사철은 범한이 왜 언짢은 상태인지 이해할 수 없어 벌컥 화를 냈다.

"알겠는데 여긴 왜 왔어요?"

"네가 여기에서 대장 아니었니?"

범한은 범사철이 대장으로서 자질이 있다고 믿고 있었다. 더군다나 전체 범씨 종친들 가운데 아버지 사남 백작의 지위가 가장 높기 때문에 범사철도 분명 이 아이들 속에서 가장 특별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범한의 질문에 범사철이 머리를 긁적이며 반문했다.

"내 말을 과연 저 애들이 들을까요?"

"그러면 이렇게 해보자."

범한이 말을 이어 나갔다.

"들어가서 저 변변찮은 녀석들이 훈장님 말씀을 경청하도록 나 대신 혼 좀 내주고 와."

"네?"

범사철은 여전히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파악하지 못한 것 같았다.

"훈장님께 불경한 짓 못 하게 하라고!"

범한의 이맛살이 찌푸려지기 시작했다. 이 순간 범한은 자신이 담주에 있었을 때 스승에게 어떻게 했는지를 떠올렸다. 첫 번째 스승인 서석 스승님뿐만 아니라 비개 스승님까지, 범한 자신은 매우 공손한 제자였다. 그러니 학당 안이 갈수록 시끄럽고 야단법석으로 변해 가자 범한은 화가 머리끝까지 날 수밖에 없었고 결국에는 호통을 치고 말았다.

"저 애들처럼 굴기만 해봐. 그러면 내가 너의 뺨을 갈기게 될지 두고 봐야 할걸!"

범사철은 최근 들어 자신에게 꽤 다정했던 범한이 왜 느닷없이 자신의 화를 돋우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이에 범사철은 범한을 노려보며 소리 질렀다.

"형님이 대체 뭔데 내 뺨을 때려요!"

그러자 범사철 옆에 있던 종들이 범사철을 에워싸더니 범한을 무섭게 노려보기 시작했다. 그중에서도 어린 종은 범사철 도련님의 위세만 믿고 입에 담을 수 없는 욕을 내뱉기 시작했다. 물론 이들은 이 큰 도련님인 범한과 이미 잘 알고 있는 사이였다. 하지만 큰 도련님이 자신의 주인을 때리려 한다는 말을 듣자 혼신을 다해 주인을 보호하려 나선 것이었다.

종들의 행동에 범한은 이맛살을 찌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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