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6화 시간이 엇갈린 연애
임완아의 눈이 점점 더 밝게 빛났다.
"당신, 당신······ 정말 당신이라고요?"
범한은 미쳐 버릴 것만 같았다. 이에 결국 울고 싶은 사람처럼 볼멘소리로 대답했다.
"오늘 누이동생과 함께 왔었어요. 만약 내가 범한이 아니라면 누이가 어찌 낯선 남자를 도와 미래의 새언니를 만나도록 해주겠어요?"
임완아가 보기에도 일리 있는 말이었다. 임완아는 입을 가리고 웃기 시작했다. 그런데 불쑥 다른 일이 생각났는지 화를 냈다.
"그렇다면 지난번 경묘에서 봤을 때도 공자님은 나를 만나러 온 것이었습니까?"
임완아는 이 청년 때문에 어리둥절하기만 했던 일이 기억나 매우 화난 상태였다. 그리고 이 못된 녀석 때문에 마음이 싱숭생숭하고 전전긍긍했던 것하며, 예법에 어긋나는 일들이 발생했던 것을 생각하니, 이 청년을······ 한 대 때려 주고 싶었다.
임완아는 범한이 보기에도 곧장 그 마음을 알 수 있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에 범한이 서둘러 해명에 나섰다.
"하늘에 맹세해요. 경묘에서 아가씨를 처음 만났을 때는 정말로 우연이었어요. 그리고 그때를 포함해 오늘 낮에 만나기 전까지 나는 아가씨가 누구인지 모르고 있었어요."
말을 마친 범한은 청초하게 아름다운 임완아의 얼굴을 바라보며 활짝 웃었다. 그러고는 다시 작은 소리로 말을 덧붙였다.
"모든 게 인연이었어요."
임완아는 부끄러움에 고개를 숙인 채 자신의 팔을 범한의 손에서 뺐다. 그리고 작은 소리로 물었다.
"그렇다면 왜 오늘은 누이동생과 함께 나를 보러 온 것이죠?"
범한은 깜짝 놀랐다. 과연 임완아의 병을 모두 치료해 준 후 홀가분하게 도망가려 했다는 사실을 자기 입으로 말해야 하는 건가, 하고 생각했다. 하지만 맞아 죽는다고 해도 절대 해서는 안 되는 말이었다. 이에 범한은 부드러운 음성으로 말하기 시작했다.
"재상 댁 아가씨가 건강이 나쁘다는 이야기는 들었어요. 하지만 치료를 해주고 싶어도 직접 만날 길이 없기에 이리 몰래 오게 되었답니다. 그런데 경묘에서 만난 닭 다리 낭자인 줄 나인들 어찌 알았겠어요!"
임완아가 작게 으흠, 하고 소리를 냈다. 저를 닭 다리 낭자라 부른 게 너무 듣기 거북해서였다.
그런데도 범한은 한쪽 구석에 놓인 닭 다리를 가리키며 웃다가 다음과 같이 물었다.
"이 야심한 시각에 저것도 먹으려 여기 둔 건가요?"
임완아도 참지 못하고 입을 막은 채 웃다가 범한의 물음에 대답했다.
"그쪽이 드세요. 나는 그리 식탐이 강한 사람은 아니니까요."
범한 갑자기 귀를 쫑긋 세웠다. 아래층에서 누군가가 침대에서 일어나 위층으로 올라오는 것 같았다.. 이에 범한은 이맛살을 찌푸렸다.
"누군가가 옵니다."
임완아는 마음이 급해졌다. 아무리 범한이 장래 남편이 될 사람이라도 이 상황을 누군가에게 들킨다면 다시는 낯을 들고 살 수 없으리라 생각했다. 이에 범한을 밀었다.
"얼른 나가요!"
범한은 한밤중에 여기까지 힘들게 숨어들었는데 이리 갈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이에 음흉하게 웃으며 이불 속으로 쏙 들어갔다. 침대은 넓고 이불도 크고 방 안은 어두컴컴해 잘 안 보이니, 밖에서 누군가 들어온다 해도 이상한 낌새를 느끼지 못하리란 생각에서였다.
하지만 임완아는 범한의 행동에 아연실색하고 말았다. 게다가 이미 자신의 이불 속으로 들어가 버렸으니 이제 막을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벌써 누군가가 어둠을 뚫고 위층에 올라와 있었다. 낮에 계속 설사를 하던 늙은 보모였다. 임완아는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자신도 서둘러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침대 바깥쪽으로 몸을 향하게 한 채 깊이 잠든 척했다.
방 안으로 들어온 늙은 보모는 이리저리 둘러보다가 이상한 점을 발견하지 못하자 작은 소리로 잠시 혼잣말을 했다. 그러고는 마치 잠이라도 밀려든 것처럼 비몽사몽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임완아가 팔꿈치로 뒤쪽을 쿡 찔렀다. 그러고는 소리를 죽여 부끄러운 기색으로 꾸짖었다.
"들어왔던 사람이 나갔으니 어서 나가요."
범한은 지금 처음으로 늙은 보모가 고마웠다. 이런 식으로라도 임완아의 체취를 맡게 되었으니 말이다. 이에 이불 밖으로 나가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었던 범한은 외려 뻔뻔하게 나왔다.
"피곤합니다. 조금만 더 있다가 나갈게요."
임완아로서는 장래 자신의 남편 될 자가 뼛속까지 무뢰한인 걸 알게 된 순간이었다. 결국 임완아는 범한에게 벌컥 화를 내고야 말았다.
"어······ 어찌 이와 같은 짓을 할 수 있죠!"
그런데 범한은 오히려 웃으며 곁으로 가까이 다가왔다. 그리고 코끝으로 그녀에게서 나는 은은한 체취를 맡았다. 기분이 황홀해진 범한이 물었다.
"왜 안 된단 말이죠?"
"이······ 이······ 일이 소문이라도 나면 나는 어쩌라구요!"
임완아는 부끄러움에 고개를 이불 속으로 파묻었다. 그런데 몸 뒤쪽에서 후끈후끈한 열기가 느껴졌다. 임완아는 다시 침대 가장자리로 몸을 움직여 피했다.
범한은 그제야 임완아가 걱정되기 시작했다. 이러다가 침대 밖으로 굴러떨어지는 건 아닐까 걱정이 되어 한숨을 쉬며 이제 그만 나가야겠다고 생각했다. 결국 범한은 잔뜩 욕구 불만인 상태로 이불 밖으로 기어 나왔다. 그러고는 침대 가장자리에 앉아 임완아의 작고 귀여운 찬 손을 잡아끌었다. 임완아는 범한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려 노력했다. 하지만 결국 실패하자 그가 하는 대로 그냥 두었다. 그저 자신의 침대에 다시 눕지 않는 것만으로도 천만다행이라 생각하기로 했다.
범한이 임완아를 마주 본 채 두 눈을 살며시 감더니 작은 소리로 말했다.
"내 이번 생의 운이 참으로 좋다는 걸 이제야 알았어요."
"네?"
임완아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범한의 맑은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한 아가씨를 좋아하게 되었죠. 그런데 그 아가씨는 내가 좋아하기도 전에 벌써 나의 처가 되기로 결정되어 있던 사람이었어요. 이런 우연이 일어났는데 어찌 운이 좋다 말하지 않을 수 있겠어요?"
범한은 말하는 내내 웃었다. 그의 순수하고 맑은 얼굴에는 기쁨이 가득 들어차 있었다.
이때 궁금한 것이 있던 임완아가 입을 열었다.
"만약······만약에 말이에요."
"만약에 무엇이 말이죠?"
"됐습니다. 별일 아니에요."
임완아가 아랫입술을 살며시 깨물며 궁금증을 억눌렀다.
"아가씨께 해줄 말이 있어요."
범한이 임완아의 이마 선 아래 송골송골 땀이 맺힌 것을 보며 가슴이 아파 말했다.
"낮에 했던 말은 사실이에요. 아가씨의 몸은 요양이 필요해요. 멀건 죽같이 먹기 편한 음식은 위장을 편하게 해줄지는 모르지만, 폐병을 치료하는 데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아요."
임완아는 오늘 범한 때문에 여러 번 놀라고 기뻐했다. 그래서인지 쉬이 깨지는 수정처럼 여린 그녀는 그 여러 차례 닥친 떨림 때문에 지칠 대로 지친 상태였다. 이에 임완아는 ‘폐병’이란 단어에 갑자기 몸 상태가 저조해지고 기분도 요동을 치기 시작했다. 마음의 안정을 잃은 임완아가 살짝 암담한 낯빛으로 괴로워하며 말했다.
"얼마 전 어의가 이 병은 고치기 힘들다고 했어요. 이 병이 남에게 옮는 건 아니라지만 그래도······ 나중에 공자님과 함께 있다가 혹시라도 공자님에게 옮길까 무서워요."
그러자 범한이 갑자기 정색하며 임완아를 바라보았다.
"양젖, 닭 다리, 모두 내가 처방한 것들이에요. 그리고 얼마 후면 환약도 가져다줄 겁니다. 내 말에 따라 천천히 복용하면 분명 몸이 많이 좋아질 거예요."
말을 마친 범한은 잠시 웃어 보이고는 다시 말을 이어 나갔다.
"나의 의술은 당연히 어의만 못하죠. 그리고 스승님이 경도에 계시다고 해도 스승님의 방법은 정식으로 사용되는 방법도 아니니, 아가씨처럼 황궁에 기거하는 존귀한 신분에게는 감히 사용하지 못하겠죠. 하지만 내가 말한 음식 종류는 어의도 생각해 낼 수 없는 것들입니다. 게다가 제대로 요양만 한다면, 지금 북쪽 변방으로 간 비개 스승님이 경도로 돌아올 때 분명 진귀한 약재도 가져오실 터이니, 그때 병을 완치할 방법을 찾게 될지도 모릅니다. 진료를 받고 병을 치료하는 것과 약을 복용하는 것은 각각 따로 보고 진행하는 것이지요. 황궁에 진기한 약재가 수없이 많다 해도 어쩌면 비개 스승님이 가진 약재가 아가씨에게 더 맞을 수도 있으니까요."
진심과 간절함이 드러나는 범한의 말에 임완아는 감동을 받아 작은 소리로 받아쳤다.
"그러면 범 공자님께 수고를 끼치겠습니다."
임완아가 말을 마치자 범한은 그녀의 말투가 너무 의외라 깜짝 놀라고 말았다. 분명 여자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해서 그랬을 것이다. 일단 눈앞에 있는 남자가 자신의 정혼자란 것을 확인하게 되자 임완아는 말 한마디도 조심스럽게 한 것인데 말이다. 그리고 이렇게 행동하는 게 바로 여인들의 특성인데 말이다. 어찌 되었든 범한은 조금 의외라고 생각하며 웃었다.
"나를 계속 범 공자라 부를 건가요?"
임완아가 의외라는 듯 되물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불러야 하는데요?"
임완아는 그제야 범한의 말뜻을 이해하고는 부끄러움에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얼른 등부터 돌린 임완아는 범한의 시선을 피한 채 다시 모기만 한 소리로 대답했다.
"그렇다면 혼례를 올린 후 호칭을 바꾸도록 하겠습니다."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은, 나를 범 형이라고 불러도 된다는 뜻이에요."
범한은 새어 나오려는 웃음을 꾹 참았다.
임완아는 그제야 자신이 당했다는 걸 알아차리고는 부끄럽고 분해 범한을 한 대 때리려 했다. 하지만 그녀에게 범한은 이제 겨우 두세 번 만난 사람으로, 낯선 이나 마찬가지여서 결국 쭈뼛쭈뼛 손을 거두고 말았다.
범한이 임완아의 비쩍 마른 어깨를 보고 말했다.
"혼인을 올린 후 같이 창산으로 가요. 해발 고도가 조금 높기는 하지만 온천도 있으니 요양하기에 딱 좋은 곳이에요."
임완아는 ‘혼인’이라는 말에 살짝 부끄러움이 밀려왔다. 하지만 ‘해발’이란 말뜻을 이해하지 못했는데도 범한의 말에 고개는 끄덕여 주었다. 그러다 다른 질문거리가 생각나 작은 소리로 물었다.
"비개 대인이 공자님의 스승인가요?"
"그렇습니다."
범한이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어 나갔다.
"비개 스승님이 감찰원에서 일하셔서 별로 유명하지 않은 분인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경도에서 매우 유명한 분이시더라고요."
임완아가 웃었다.
"북쪽과 서쪽 지역을 정벌할 때 공을 세운 공신이니 유명할 수밖에요. 하지만 세상 사람들은 그분이 독을 쓴다며 무서워하며 피해 다닌답니다."
아름다운 범한의 얼굴을 보고 있던 임완아가 또 이상하다는 생각에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 어떻게 비개 대인이 공자님의 스승인 겁니까?"
그러자 범한이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임 낭자, 나 역시 그 이유를 모르는 걸로 보아 뒤에 숨은 사정이 복잡한 것 같네요. 그러니 낭자가 나중에 내게 시집온다면 귀찮은 일이 많을 것 같으니, 마음 단단히 먹는 게 좋을 것 같군요."
그러나 임완아는 미소를 지은 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녀도 이번 혼인에 얼마나 많은 이익의 교환과 재분배가 숨어 있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혼인 이야기가 나왔을 즈음부터는 병세가 더욱 심해졌다. 그런데 오늘 사남 백작가의 공자가······ 지금 자기 앞에 있는 공자가 자신의 낭군이라 생각하니, 하늘이 저를 돕고 계시다는 생각에 진심으로 하늘에 고마워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러니 임완아 입장에서는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었다.
이런 임완아에게 다시 범한과 관련한 궁금증이 떠올랐다. 그것은 바로 최근에 경도를 떠들썩하게 한 사건이었다.
"범 공자님, 아무리 생각해도 모르겠는 게 있어요. 공자님은 사남 백작의 아들이고, 비개 대인의 제자예요. 그런데 또 시문에 정통하기까지 하신데······ 그러니까 ‘만 리 쓸쓸한 가을에는 언제나 나그네가 되어라’는 구절을 정말로 공자님이 지으신 것 맞습니까?"
범한은 임완아의 얼굴에 드러난 궁금증은 보지 못했다. 그래서 단지 단순한 질문이라고 생각해 되물었다.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그러자 임완아의 얼굴이 분노에 차올랐다.
"황태후께서 공자님이 지으신 이 구절을 대단히 좋아하십니다. 그런데 황궁에서 최근 도는 이야기로는, 이 시구가 이전 시인의 글귀를 베낀 거라고 합니다."
임완아가 이렇게까지 화를 내는 이유는 자기 앞에 있는 범한을 굳게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범한은 그제야 시 모임에서 있었던 일의 여파가 아직도 사라지지 않았음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이와 같은 논란이 또 발생한 것으로 보아 자신과 곽보곤과의 싸움도 아직 진행 중임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범한 입장에서 이 시구는 전생, 송나라 때 유명 시인 두보의 것을 베낀 것이었으므로 전혀 화가 나지 않았다. 오히려 정혼자의 표정을 보니 조금 피곤해 보여 가슴이 아파 왔을 뿐이었다. 이에 범한은 그런 말은 이제 그만하자는 뜻으로 임완아의 손등을 가볍게 토닥였다.
"자주 보러 올게요."
"그러다 들키기라도 하면 어쩌려고요?"
"그렇군요. 내가 발각되면 그 성격 괴팍한 아저씨가 저들을 모조리 죽여 버리겠군요. 그건 정말로 걱정이 되는데······. 정말 문제이기도 하고요. 언제 한번 그분을 만나 뵈어야겠습니다."
범한은 온몸에 있는 털들이 쭈뼛 서는 것만 같았다. 정말로 무서웠던 것이다.
임완아는 범한의 얼굴만 바라보며 눈을 감지 않으려 애쓰고 있었다. 하지만 결국에는 밀려오는 졸음을 참지 못하고 이내 잠들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