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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여년-64화 (64/1,108)

064화 방문

이때 밖에서 세 사람을 막았던 늙은 궁녀가 허리를 짚으며 들어왔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기운이 없어 보였다.

"어떻게 들어온 겁니까?"

궁녀가 웃으며 설명했다.

"이분은 섭씨 아가씨가 모셔 온 의원이신데 아가씨의 허락을 받고 들인 것입니다."

늙은 궁녀가 마뜩잖은 표정으로 말했다.

"어의가 이틀에 한 번씩 진찰하는데 바깥 의원이 뭐 잘난 게 있다고 병을 진찰합니까."

그러자 궁녀가 웃었다.

"그래도 실력은 있으십니다. 이미 아가씨의 병세를 정확히 파악하셨는걸요. 그리고 저희보고 아가씨가 매일 산해진미를 드실 수 있도록 준비하라 했습니다."

그러자 늙은 궁녀가 절대 안 된다며 고개를 저었다. 만일이라도 아가씨의 병세가 나빠진다면 그 일을 어떻게 할까. 다시 뭐라 말하려던 늙은 궁녀의 안색이 굳어지더니 급히 밖으로 뛰쳐나갔다. 범한이 슬며시 웃다가 옆에 있는 궁녀에게 말했다.

"제가 말한 방법대로 하면 분명 좋아지실 겁니다."

하지만 궁녀는 콧방귀를 뀌며 말을 들지 않았다. 화가 난 범한은 혼인하면 저 궁녀를 가만두지 않겠다고 이를 갈았다. 그러고는 어떻게서든 설득하기 위해 다시 말했다.

"제가 만든 환약이 효과가 있으면 제 말을 믿으시겠습니까?"

"그렇다 하더라도 고기류는 드시게 할 수 없어요."

궁녀가 단호하게 말했다.

범한이 화가 나 이를 부드득 갈았지만 방법이 없었다.

* * *

그가 각혈할 때 그녀도 각혈했고, 그가 애를 태우며 이를 갈 때 그녀도 애를 태우며 이를 갈았다. 장막 뒤에서 힘없이 침대에 누워 있는 수려한 아가씨는 의원의 목소리를 듣고는 마음이 조급해졌다. 귀에 익은 목소리를 들으면서도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어떻게 그가 비개 대인의 제자가 되어 자신의 집에 왔는지는 모르겠지만 분명 경묘에서 만났던 공자의 목소리였다.

임씨 아가씨가 비단 이불을 꽉 잡고는 하얀 이로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의 아름다운 두 볼이 붉게 상기되었다. 어떻게 해야 좋을까. 꿈에 그리던 사람이 장막 밖에 있는 것을 알면서도 만날 방법이 없자 속이 타서 죽을 지경이었다.

대화가 점차 결말에 다다르면서 떠나겠다는 목소리가 들리자 참지 못한 임씨 아가씨는 몸을 일으켰다. 침대 머리에 몸을 기대고는 온 힘을 쥐어짜 겨우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를 토해 냈다.

"기다려요!"

장막 뒤에서 목소리가 들리자 밖에 있던 네 사람은 서로 완전히 다른 반응을 보였다. 궁녀는 재빨리 아가씨 옆으로 다가가 무슨 일인지 물었고, 섭령아는 걱정하는 표정으로 궁녀의 뒤를 따라갔다. 범약약은 애써 변장해서 이곳까지 왔는데도 임씨 아가씨의 얼굴을 보지 못한 범한의 기분을 살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범한은 귀신을 본 것 같은 표정으로 멍하니 서 있었다.

기다리라는 말을 들은 범한은 그 자리에서 굳어 버렸다. 온몸에 닭살이 돋은 그가 멍한 표정으로 침대를 바라봤다. 마치 장막 뒤에 있는 여자가 또렷이 보이는 것 같았다. 임씨 아가씨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그는 경묘에서 본 여인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는 경묘에서 들었던 목소리를 잊을 수 없었다.

장막 뒤에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알게 된 범한은 당장이라도 뛰어가 장막을 걷어 버리고 싶었다. 그가 흔들리는 마음을 애써 붙잡으며 태연한 표정을 지었다.

"아가씨, 왜 그러세요?"

궁녀가 침대 옆에서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섭령아도 들어와서는 걱정하며 말했다.

"몸도 안 좋은데 일어나 앉으면 어떡해. 얼른 누워."

"저······ 저 의원이 한 말이······ 일리가 있는 것 같아."

장막 안의 임씨 아가씨가 상황에 맞게 말을 지어냈다.

"직접 대면해야겠어. 어쩌면······ 더 확실한 진찰을 해줄 수 있잖아."

규정상 그럴 수 없는 궁녀가 도와 달라는 눈빛으로 섭령아를 바라봤다. 이미 범한의 의술을 의심하고 있던 섭령아가 임씨 아가씨에게 그럴 필요가 없다고 타일렀지만 임씨 아가씨는 고집을 꺾지 않았다. 섭령아는 살날이 얼마 남지 않은 임씨 아가씨가 실낱같은 희망이라도 붙잡고 싶어서 그러는 것이라는 생각하며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다. 섭령아가 한숨을 쉬며 마지못해 장막에 손을 뻗었다.

바로 그 순간 다시 돌아온 늙은 궁녀가 상황을 보고는 기겁하며 다짜고짜 범한을 끌고 나갔다. 다 된 밥에 코를 빠뜨리자 화가 난 범한은 노기등등한 눈빛으로 늙은 궁녀를 노려봤다. 범한과 눈빛이 마주친 늙은 궁녀가 다시 배를 붙잡고 달려나갔다.

자신의 오라버니가 눈빛으로 사람을 해칠 수 없다는 걸 알고 있는 범약약은 설사약이 제대로 효과를 발휘한다는 생각에 자꾸만 입꼬리가 올라갔다. 늙은 궁녀가 떠나자 범한은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천천히 장막을 걷었다.

장막을 걷으니 비단 이불을 덮고 있는 하얀 피부에 생기발랄한 눈빛 그리고 불그스름한 볼을 가진 수려한 외모의 아가씨가 보였다. 두 사람은 마치 옆에 아무도 없는 듯 부드러운 눈빛으로 서로를 마주 봤다.

범한의 눈빛은 반가움과 기쁨이 가득했지만 임씨 아가씨는······ 놀라면서도 실망한 기색이었다. 그 모습을 본 범한이 순간 자신이 변장하는 바람에 상대방이 자신을 알아보지 못한다는 걸 깨닫고는 무안한 표정을 지었다.

궁녀의 부축을 받아 일어나 앉은 임씨 아가씨가 낯선 젊은 의원을 바라봤다. 실망한 표정을 짓던 임씨 아가씨의 눈썹이 점점 찌푸려지더니 무언가 기억난 표정을 지었다. 마치 젊은 의원의 눈빛에서 무언가를 읽은 것 같았다.

두 사람의 관계를 모르는 섭령아는 비개 대인의 제자의 눈빛이 징글맞다고 생각하며 물었다.

"멍청하게 서서 뭐 하는 거예요!"

범한이 옅은 미소를 지으며 앞으로 걸어가 그리워하던 아름다운 얼굴을 자세히 살펴봤다. 그러고는 병색이 완연한 얼굴에 마음 아파 하며 부드럽게 말했다.

"반드시 제가 방금 말한 방법대로 식사하고 약도 드셔야 합니다. 알았죠?"

임씨 아가씨는 완전히 다른 얼굴을 한 사람이 자신이 그리워하는 목소리로 말하자 미쳐 버릴 것만 같았다. 그녀가 팔로 몸을 지탱하며 나지막이 말했다.

"수고하셨어요."

임씨 아가씨가 젊은 의원과 백작가 아가씨에게 감사 인사를 했다. 그녀는 백작가 아가씨가 자신의 ‘시누이’가 될 사람이라는 걸 생각하자 뭐라 형언하기 힘든 감정이 들었다. 그녀가 다시 젊은 의원을 바라보았다.

‘목소리는 분명 그분인데 왜 얼굴이 다른 거지?’

젊은 의원이 떠나려 하자 임씨 아가씨는 조급해졌지만 붙잡을 수는 없었다. 군주인 신분에 의원에게 얼굴을 보인 것만 해도 엄청난 일이었다.

‘상대방에게 며칠 전 경묘에 가지 않았냐고, 흰색 옷을 입은 여인을 만나지 않았냐고, 닭 다리를 기억하냐고 물어봐야 할까. 아니야, 그분일 리가 없어. 목소리만 비슷할 뿐이야. 요 며칠 동안 너무 그리워했더니 헷갈린 거야.’

임씨 아가씨가 망설이다가 단념하고 있을 때 방을 나가던 범한이 갑자기 발걸음을 멈추고는 돌아섰다. 그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양젖하고 고기를 먹어도 배가 고프시거든 닭 다리도 몇 개 드시면 좋습니다."

임씨 아가씨가 눈을 반짝였다.

"요새 자꾸 입맛이 없고 구역질이 나요."

"별일 아닙니다. 그냥 토하는 것뿐인걸요. 습관이 되면 괜찮을 거예요."

범한은 미래 자신의 아내가 될 사람이 영리하다고 생각하며 말했다.

"낮에는 바람을 쐬어도 괜찮지만 밤에는······ 꼭 창문을 닫아 두셔야 합니다."

섭령아와 궁녀는 속으로 의원이 헛소리를 많이 한다고 생각하며 못마땅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 * *

백작가로 돌아가는 마차 안에는 은은한 미소를 짓고 있는 범한과 옆에서 입을 가리고 몰래 웃는 범약약이 타고 있었다. 범한이 끅끅대며 웃음을 억지로 참자 범약약이 말했다.

"웃고 싶으면 그냥 웃어요. 왜 그러고 있어요?"

이 말이 나오자마자 마차 안에서 엄청나게 큰 웃음소리가 들렸다. 갑작스럽게 큰 소리가 들려오자 행인들과 말을 타고 마차 앞을 호위하며 가던 등자경 모두 화들짝 놀랐다.

"이 세계는 정말 기묘한 것 같아."

범한의 말에 범약약이 함께 웃었다.

"오라버니가 경묘에서 만났던 그분이 임씨 아가씨일 줄은 몰랐어요."

"그러니까."

범한이 눈썹을 긁으며 말했다.

"앞으로는 임씨 아가씨 말고 새언니라고 불러."

범약약이 기가 막힌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혼인이 10월인데 벌써 새언니라고 부르라고요? 게다가 재상 대인과 장 공주는 오라버니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잖아요. 오라버니도 어제까지만 해도 혼인하기 싫어했으면서."

범한이 겸연쩍은 웃음을 지었다.

"그때와 지금은 상황이 다르지. 반드시 그 아가씨와 혼인하고 말 거야. 재상 대인이나 장 공주는 말할 것도 없고 감찰원 원장이 경도로 돌아온다고 해도 나를 막을 수 없을 거야."

범약약이 웃음을 참지 못하며 말했다.

"오늘 처음 임······ 아니 새언니를 만난 거잖아요. 비록 새언니가 아름다운 미모이긴 하지만 오라버니가 저번에 묘사했던 것처럼 천상의 선녀 모습은 아니었어요."

범한이 놀란 표정을 지으며 진지하게 물었다.

"천상의 선녀는 아니었다고?"

범약약이 냉정하게 말했다.

"네, 아니에요."

범한이 당황한 표정으로 한동안 생각하더니 말했다.

"사랑에 빠지면 서시로 보인다더니······ 콩깍지가 씐 건가?"

"대략 무슨 말인지는 알겠는데 서시는 어느 지방 미인이에요?"

서시가 누구인지 모르는 범약약이 호기심에 물었다. 하지만 범한은 임씨 아가씨를 생각하느라 누이의 말에 집중할 여력이 없었다. 그가 누이의 질문에 성실히 답해 주던 평소 모습과 다르게 멍한 표정으로 대충 대답했다.

"서시는 담주항에서 두부 장사하는 여인이야. 피부가 백옥같이 하얗고 아름다워."

"거짓말."

넋이 나간 범한을 바라보며 범약약이 불만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자 범한이 달래며 말했다.

"내가 언제 거짓말을 했다고? 너도 담주에 있을 때 나랑 같이 몰래 나가 채소 시장을 돌아다녀 봤잖아. 너무 어릴 때라 기억을 잘 못 하겠지만 거기 두부 파는 미인이 있었다니까."

범약약이 반신반의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런 범약약을 무시한 채 범한은 오늘 일을 돌아보며 감격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연애 소설에서도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어."

* * *

임씨 아가씨의 이름은 임완아였고 아명은 의신이었다. 하지만 주변 사람들은 그녀를 주로 신아라고 불렀다. 그녀는 평범하지 않은 신분으로 태어난 데다가 어려서부터 황궁에서 성장해 친구가 많지 않았다.

자신의 아버지가 재상 대인인 걸 알면서도 볼 기회가 없었던 그녀는 오히려 외삼촌인 황제 폐하와 더 가깝게 지냈다. 더욱이 4년 전 황제가 혼사를 결정하면서 어머니와 그녀를 떼어 놓음으로써 오히려 더 편안한 생활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래도 외롭기는 마찬가지였다. 가끔 섭령아가 정주로 데려가 주었지만 그래도 항상 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는 상대가 되어 주지 못했다.

그녀는 연초에 황제가 아버지와 자신의 관계를 밝힌 이유를 몰랐다. 다만 아버지를 난처하게 만들어 자리에서 물러나게 하려 한다고 짐작할 뿐이었다. 하지만 일은 예상과는 완전히 다르게 흘러갔고 4년 전 보류해 두었던 혼사가 다시 거론되기 시작했다.

‘담주에 있는 범한 공자는 호부 시랑 범건 대인의 서자라고 그랬지?’

임완아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친모의 얼굴을 모르는 상대방도 불운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다만 왜 자신이 그와 혼인을 해야 하는 건지는 이해할 수 없었다.

‘내 출신이 떳떳하지 못해서 그에게 시집을 가야 하는 건가.’

더구나 그녀는 범한의 얼굴이 어떻게 생겼는지도 몰랐다.

임완아는 낮에 봤던 의원이 생각나서 자신도 모르게 웃었다. 생각할수록 재미있는 사람이었다. 잠입할 생각을 했다는 것도 놀라웠고 경비가 삼엄한 황실 별궁에 무슨 방법을 동원해 들어왔는지도 의문이었다.

비개 대인의 제자로 위장한 건가. 정말이지 겁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러던 중 임완아는 그가 백작가 아가씨와 같이 왔다는 걸 떠올리고는 백작가와 관계있는 사람이 아닐까 생각했다.

‘그렇다면 분명 내가 백작가 공자와 혼인한다는 사실도 알고 있을 텐데. 설마 그 사실을 알면서도 나를 보러 온 건가.’

붉게 상기된 그녀의 양 볼은 노을에 물든 구름처럼 아름다웠다. 옆에서 잠자리를 살피던 궁녀가 침대 머리맡에 기대앉은 군주를 보고는 웃으며 말했다.

"아가씨, 무슨 즐거운 일 있으세요? 요즘따라 아무 이유 없이 웃으시는 일이 많네요."

임완아가 난처한 표정으로 말했다.

"웃는 것도 안 돼?"

궁녀가 혀를 빼꼼 내밀고는 창문을 닫으려 창가로 걸어갔다. 순간 임완아는 낮에 의원이 했던 마지막 말을 떠올리고는 나지막이 말했다.

"가서 향을 좀 가져와."

궁녀는 속으로 충분한데, 하고 생각을 하면서 아무 말 없이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임완아가 창가로 걸어가 가는 손가락을 창틀에 내려놓고는 생각했다.

‘닫아야 하는 거야, 말아야 하는 거야?’

임완아는 불치병에 걸린 데다가 낯모를 남자와 혼인해야 하는 사실을 떠올렸다. 미련을 가져 봤자 어차피 이뤄질 수도 없는 사이란 생각에 창문을 굳게 닫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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